LOGIN“나뭇가지로는 안될텐데에?”
마리가 테오가 주는 돈을 주머니에 꽂아넣으며 빙그레 웃고는 그가 낮에 한말을 따라했다.
“따라하지 마라. 연습한 거지 너?”
“아닌데, 아닌데.”
얄미운 인물에게 방금 당직으로 번 야근 수당을 전부 내주고 베버는 신입과 함께 당직실로 향했다. 현금을 양손으로 주물거리는 소녀에게서 눈을 못떼고 그가 어떻게든 떨어뜨려놓으려는 신입, 헤게는 대체 저게 뭐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으쓱한 베버가 입을 다물 것처럼 굴자 금세 불만을 토해냈다.
“방어 시스템이 마비됐나요? 어떻게 운석이 병원 상공에 들어올 수 있죠?이건 엄연한 정의규정의 위반 아닙니까! 어서 연맹에 항의해야 합니다.”
“아, 그쪽이 먼저? 거참, 어...그렇지 위반이지, 근데 그럴 수도 있죠. 뭐...”
“선생님! 이렇게 가볍게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방금은 요행입니다. 운석이 그냥 없어진 것이지 자칫하면 병원이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던 상황이에요.”
베버는 그것보다야 똑같은 반응에 매번 똑같은 사실을 설명하는 그의 일이야말로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보안서 조항 1번부터 3번 기억합니까, 헤게 선생.”
“하나, 환자를 우선하여 지킬 것. 하나, 병원 내 일어나는 모든 일은 외부에 유출될 수 없는 기밀로 간주한다. 하나, 이를 유출할 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함에 성실하게 임해야 합니다.”
”총명하군요. 오늘 다들 저녁을 먹고 일찍이 잠들었어요. 헤게 선생이랑 나는 같이 카드 게임을 하느라 바깥일은 몰랐어요.”
“저에게도 설명을 해주셔야 합니다.”
“차트, 받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능력자 폐기 병원, 최장수 환자는 제레미 렘. 최연소 환자는 마리타 렘. 끝. 여기서 뭐가 더 필요하죠?”
기록은 편협하고 기억은 광활하다. 수치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어 믿어야 할 것은 오로지 제 직감일 것이다. 능력 상실과 잦은 사고라는 두 변명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이 함축되어 있나. 그제야 헤게는 이 곳이 바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누군가는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하지만 과거가 현재보다 힘이 센 삶도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게 이곳의 누군가는 아니라거나 혹은 자기가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해가 맑게 개었고 어제의 운석이 깨진 조각은 다음날 로봇들이 수거해갔다. 미지의 운석 조각이라고 대충 설명이 올라간 보고서를 보며 헤게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출처 불명이라고. 하늘에서 떨어졌고, 연맹이 제공하는 최고의 방어 시스템은 무력했고 소녀가 그걸 부수었는데 다들 당연하다는 듯 그걸 없던 일로 만들었다.
헤게는 단단히 잘못된 매듭의 어디를 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오래 굳어진 듯한 관행은 베버로부터 시작됐을지 아니면 더 위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어제부터 새롭게 그녀의 방이 된 공간에도 낯설기만한 책들로 가득했고, 침대마저도 새로웠다. 그나마 이 공간에서 익숙한 것이라면 가죽으로 엮은 책 정도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책조차 겉표지가 다른 것이 있어 그녀가 알던 저자의 책이 맞는지 확인해봐야 했다. 어제 봤던 책등을 가만히 훑으며 헤게는 블라우스 단추를 잠갔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시계가 다시 출근 시간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이다. 헤게는 풀었던 머리를 꽉 조여 묶고 가장 먼저 만날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반가워요, 마리타.”
마리타는 여자의 친화력이 낯설지만 제법 기분은 좋았다. 그녀가 운석을 깨는 걸 보고도 먼저 인사하러 온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적어도 담력에서는 합격인 셈이다. 이제껏 겁에 질려 하룻밤에 짐싸고 다음날 나타나지 않은 사람만 서넛이 넘었다.
“안녕하세요, 헤게 선생님.”
베버에게도 하지 않는 존대를 하는 모습을 그가 봤다면 아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폈을 것이다.
“네, 어젯밤은 편하게 잘 잤어요? 날이 너무 덥지 않아요?”
“조금 더웠지만 좋았어요. 아픈 곳도 없이 잘 잤고, 꿈도 안 꿨어요. 선생님은요?”
“저도 그랬어요.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헤게는 마리타가 평소 병원에서는 나눌 수 없는 상식적이고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어젯밤에 누굴 죽이지는 않았느냐 같은 질문을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 얼마나 평화로운가. 마리타는 이 사람이야말로 병원에 몇 없는 교양있고 상식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게다가 그녀는 테로 시작하는 능구렁이보다야 훨씬 솔직하고 상냥했다.
“어제, 마리타가 운석을, 해결했잖아요?”
나름 고심한 해결이라는 단어는 마리타에게 새로운 접근이었다. 맞아, 내가 문제를 해결했어.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에 성취감도 차올랐다. 조심스럽게 그녀가 덧붙였다. 바깥에서는 볼 수 없던 방식이라서 그러는데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소녀는 친절한 사람에게 유독 약했고 특히나 예쁜 것에 유난히 약했다. 헤게는 충분히 범주에 들었다.
“어려운 거 아니에요. 저게 없어져야 된대하고 생각하면 돼요.”
“나뭇가지로요? 그러면 다른 일도 가능할까요?”
그제야 마리타는 말이 왜 맴도는지를 알고 다시 설명했다. 헤게의 눈이 커졌다가 뺨이 창백해졌다가 하는걸 보면서는 반응이 참 재밌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한편 베버는 오후에 잡힌 마리타의 회진을 미리 돌았다는 헤게의 보고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마리타는 마리타대로 솔직하게 설명했기에 사달이 났다. 헤게는 헤게대로 집요하게 베버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어제 잠을 설치느라 까칠해진 눈가는 아마 오늘 밤에 더 심해지리란 예감이 확실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마리타 양은 절대 렘즈에 있을 수 없는 유형입니다. 저런 능력에 저런 구상력에 폐기 처분이요?”
폐기라는 말은 말을 할 때마다 어딘가 오싹한 구석이 있었다. 마리타가 설명한 것들은 그녀가 배운 대부분의 이론에서 정반대에 위치해있고 그녀의 능력체계 역시 전혀 다를 것이었다.
“네. 렘즈에서도 최초고 연맹에서도 최초고 아마 이 도시랑 세계에서도 최초일 겁니다. 저런 녀석은요.”
베버는 일부러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대놓고 눈가를 비비는 그의 행동에 헤게는 잠시 움찔하다가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정당하지 않아요. 소수의 능력이라서 미래를 가질 수 없다니요. 그것도 고작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한테 과분한 처사에요.”
“서류에서 뭐라고 합니까, 저 애에 대해."
“누구를 생각하시는지요, 미네르바.”율리아,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소년을 보기 좋게 꺾었던 여인이 다가왔다. 휠체어를 조용히 이끌어 어느새 옆에 자리 잡은 그녀가 미네르바와 시선을 같이했다. 마리가 있던 덩굴 담장을 바라봤다.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는 이미 모든 걸 알고서도 침묵해주는 것일까. 마리는 이런 사람과 매일 어떻게 놀 수 있다는 건지. 그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속을 털어놔야 함을 알았다. 어설프게 속이느니 열어버리는 것이 나을 상대였다. 그럼에도, 그래도. 이제와 모든 걸 포기하고 왔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미네르바는 마냥 소녀를 생경한 작품 보듯이 바라봤다.“봄 풍경이 어여쁘다 하여 들렀습니다.”“가을이 더 볼만하지요 이 곳은. 마리도 단풍을 더 좋아하고요.”화제를 마리로 바꿔버린 율리아가 슬쩍 미네르바에게 말꼬리를 돌렸다. 그는 굳은 표정을 겨우 풀고서 손 안에 있는 바구니를 들어보였다.“그래도 모처럼이라 곁들일 간식도 가져왔습니다.”그 애가 좋아한다던 간식의 종류도 다 눈앞의 사람에게 들어서 안 것이었다. 율리아는 미네르바가 가져온 간식을 보고 마리가 참 좋아하겠다며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테오 선생이나 헤게 선생, 제레미를 포함해도 역시 렘즈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이 노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율리아의 부름에 마리는 금세 돌아왔다. 그녀의 옆에 누가 있건 전혀 개의치않는 것처럼 굴었다.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고갯짓으로 살짝 목례만 해오는 것이 더 그랬다.미네르바는 퍽 섭섭한 마음이 들어 자기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몰래 숨기려 했다. 그러다가 마리가 재빨리 바구니를 잡았고 둘이서 말없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둘이 만났으니 됐다는 듯 금세 스카프를 마리에 목에 둘러주고는 낮잠을 자러 간다며 등을 돌렸다.“율,율리아!”마리가 그녀를 붙잡으려 남은 한손을 급하게 뻗었고, 한 손도 흔들리자 바구니는 균형이 깨져서 크게 흔들렸다. 미네르바는 천천히 쿠키와 티백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느
제레미가 무심하게 말을 남기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이 곳에서 살라는 뜻이었고 마리가 가진 능력을 실감하지 않았느냐 하는 비웃음이었다. 마리는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서 엘리의 옷자락만 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엘리는 아이를 두고 간다는 선택지가 이미 결정된 상황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다.그러나 제레미가 저렇게 완고하게 정한 일을 바꿀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레미를 거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마음처럼 따르기만 하지 않았나. 그리고 수사관의 양심이 외쳤다.직접 눈으로 본 저 애의 능력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면, 누구도 안전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머무른 지가 벌써, 오 년이다. 아이는 최근에서야 자기 뒤를 따르던 꼬리표를 벗었다.아이가 크는 속도는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않다.꽃잎이 구름처럼 몰려서 가지에 달려있었다. 텔레비전은 다른 지역에서 봄을 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침대 이불보를 대충 둘러메고 밖으로 나왔던 소녀는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텔레비전 바로 앞에 달라붙었다.바람에 흩날리는 꽃들이 이불같기도 했고 점점이 내리는 건 눈을 닮기도 했다. 마리가 사는 섬에는 저런 꽃이 없었고, 안타깝게도 렘즈에도 벚나무는 없었다.제레미가 싫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예전이었다면 몰랐겠지만 지금이라면 알만했다.마리는 제레미가 잠든 방문을 잠시 바라봤다가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테오는 마리가 재판을 다녀온 후에 태도가 달라졌다.마냥 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이유를 묻거나 대화를 먼저 시작하려 했다. 희한한 일이었다.마리는 그의 변화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그의 태도 덕에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제법 만족스러웠다. 가장 최근에 들은 이야기는 제레미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였다.처음 등산을 함께했을 때 들려준 이야기보다 조금 먼저 생긴 일이라는데 생각보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마리는 자기만의 일기에 작은 연표를 그려놓았다.연표는 굵직하게 마리, 제레
끝에 갈수록 말소리가 작아졌다. 마리도 그게 충분히 위험한 줄을 알아서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그래, 들킬 것같지는 않더라, 내가 못느꼈으니까, 아무도 의심못했을거야. 그러면 결국 자이온에게 맡기고 기다리면 된다는 거야 지금은?”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제레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보다 더한 표정이다. 마리는 그에게 또 변명을 해야하나 하다가 그가 그냥 털썩 체어에 누워버리자 당황스러웠다.“쉬자 그럼. 일은 걔네가 하고, 우리는 쉬는거야.”“그래도 돼?”“응, 잘했어. 우리는 별도 보고, 하늘도 보고 그러자. 방에 창문도 없었다며.”사실은 그래서 불렀어. 오랜만에 좀 보라고. 덧붙인 말에 마리는 금세 걱정을 잊어버리고 같이 별을 구경했다.“대신 다음부터는 다칠 수도 있는 상황으로 너를 내몰지는 말자. 마리타. 다들 걱정하느라 잠도 잘 못자고 그랬어.”“미안해, 그래도 이젠 괜찮을 거야.”마리는 정말 이제는 괜찮을 것을 알았다.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도 어쩌면 훗날 알았을 때 생각보다 괜찮을 것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루가 그녀의 엄마라거나, 마리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별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곁에 있었고, 하늘에도 충분히 많았다. 섬에서 봤던 거리보다는 훨씬 가깝고, 따뜻하게. 앞으로는 몰라도 당장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제레미는 천천히 그녀를 처음만난 날을 생각했다. 모포를 뒤집어쓴 아이가 엘리의 손에 이끌려 겨우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계단 턱을 넘을 때마다 한 번씩 머리나 몸이 기우뚱했다. 말랐고 생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데 용케 눈을 뜨고 걸어 다닌다 싶었다. 아이는 엘 리가 쥐어주는 차를 꼭 쥐고서 마실 생각도 없이 인형처럼 앉아만 있었다. 인형, 정말로 인형 같았다. 어린 아이크기인 도자기인형처럼, 작고 표정도 없이 어린 아이라기보다는 모양만 본뜬 것같은. 그가 처음으로 아이에게서 받은 인상은 고작 그런 것이었다. 테오는 누이가 데려온 아이를 내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당분간 식물은 괜찮다는 말에 마리도 그러냐고 웃었다. 둘만이 아는 일이었다. 둘은 꿈을 떠올리다가 그저 웃고 말았다. 오늘 배달한 빵의 대부분이 오래된 밀가루로 빚었는데 괜찮냐는 물음에 마리도 싱긋 웃었다.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둘 다 맑은 웃음이었다. 마침내 마리타는 제레미에게 불려갔다. 저녁을 먹고 테라스에서 보자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제레미는 예의 그 천장이 보이는 테라스에 먼저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 마시는 잔이 아침에 먹었던 것까지 합해 몇 잔인지 마리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위험했어, 마리, 알지?”제레미는 슬쩍 자신의 계획을 짚고 넘어갔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시점에서 이미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잔소리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레사한테는 조만간 사례할 생각이야.”‘그래.’하고 대답한 제레미는 마리의 사고에 아무런 문제를 못느끼는 것같았지만, 헤게였다면 물질로 누군가에게 보답하는 일이 여러 번 있어서는 안된다고 짚어줬을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감각이 없는 제레미였기에 둘은 또 다른 이야기만 했다.“힘을 크게 쓴 거 아니면.”“멋대로 미네르바에게 간 것부터 재판이랑 그 이후까지 전부.”“...”“그렇게 너를 함부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었어도 렘즈에 있는 식구들이 해결할 수 있었을 거야. 굳이 책을 헤게의 손으로 미네르바에게 넘길 필요도 없었어.”마리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계획했는지 제레미도 대충 간파하고는 있었다. 자기가 모르는 아버지와 그 ‘사람’의 관계를 알려면 그녀보다는 전문적인 조직이 움직이는 게 나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평범한 삶에서 멀어질 수 없으니, 과거는 그들에게 맡겨서 진실만 알아낼 셈이다.“욕심도 많지, 어리면서.”마리타가 밉지 않게 제레미를 노려봤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당해준 건 제레미도 마찬가지 아닌가.“미네르바가 적임자였어. 제법 많이 알고 있기도 했고, 나보다 돈도 많잖아 걔는.”“어린 부자가 최고다?”“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레사는, 마리를 꽤 좋아했다. 별로 사교적이지도 않지만 그녀가 만든 크로아상 말고 다른 걸 못 먹는 점이 귀엽기도 했고 어찌됐든 그녀와 아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도와준 건 마리였다. 죽을 뻔했던 사람을 되살리는 것도, 사람의 영역에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능력자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일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리가 레사가 생각하는 신과는 가장 맞닿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꿈에 나왔던 건 그 유명한 포르베 사건의 재판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 마리가 평범하지는 않으니 레사도 당황하지는 않았다.“왔어?”단조로운 반응에 소녀가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무언가 할말이 있는 건 분명했는데 애꿎은 발만 움직이고 시선을 바닥에만 두다가 말했다. 결심이 서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노엘은 아직 어리고, 또 그 애한테 비밀을 얹고 싶지는 않았어.”마리는 자기 정체가 알려진 순간부터 단둘일 때는 서로 말을 놨다.“응, 고마워. 네 그런 점에 감사해.”갑작스러운 인사에 마리가 그런 건 칭찬이 아니라고 했다. 레사는 물론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신은 나뭇잎에서도 지켜본댔지, 레사.”레사가 일전에 헤어지면서 했던 말이었다. 자기를 구해줘서 고맙다며, 신이 있긴 한 모양이라던 말간 웃음이 생각났다. 아들의 손을 잡은 엄마의 미소는 편안하고 행복해보였다. 마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렘즈에서도 이 미소를 대신할 무엇을 얻을 뿐, 영영 가질 수 없을 것을 알았다. 마리의 신은 그런 걸 지켜보고 싶었나보다 나뭇잎에서. 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가 어깨 아래로 내려간다. 마리는 애써 시선을 떼고 자기 할 말에 집중했다.“근데 내 신은 나뭇잎이 아니라 광장에 있어줘야 해. 그러니까 레사가 했던 말이 틀린 거니까 책임 져.”어리광같았으나 저가 어린 애가 아니면 뭔가 싶어 마리는 일부러 어깨를 세우고 당당하게 굴려고 했다. 물론 어려워서 금세 포기했지만. 레사는 그걸 보는 것도 재밌어서 일부러 시간을
한때 저 사실이 기사로 빼곡하게 찼던 시절이 있었다. 헤게도 테오도 기억하리라. 배심원들도 아는 사실을 수사관은 한 번 더 읊었다. 그러나 판사는 제법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이때 변호사가 다시 일어났다. 발언권이 아직 오지 않았을 차례였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해야했으나, 그에게도 사실 할만한 것들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느린 속도로 누군가 등장했다. 분명 본인은 빨리 걸었지만 걸음이 느려 아직도 자기 자리의 절반도 가지 못한, 어린 소녀였다. 멜빵 치마를 입고 굽이 없는 구두를 신은 아이는 테오와 헤게가 이곳에서 무수히 찾던 얼굴이었다. 마리타 마르샬라로 자리에 선 소녀가 자리에 앉았다. 판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배심원들도 실제로 ‘소문의 마르샬라’를 보는 건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채였다. 최고위험군이고, 이미 폐기시설에서 지내는 아이. 자기를 감싼 수식에 비해 지나치게 가녀린 소녀가 그들을 바라봤다. 담담한 표정에서 어떤 결과도 감내할 듯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긴 침묵을 지속하던 마리가 입을 열었다.“마리타 마르샬라입니다. 변호사님 대신 말해도 될까요.”마리는 변호사와 대충 목례로 인사를 하고, 판사를 바라봤다. 차분한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봤고, 판사도 그러라고 했다.“저희 아버지는 이아고 마르샬라입니다. 고모는 나미엘 마르샬라고,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항상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차를 마실 때면 기분이 좋으셨지만 아닐 때가 많아 제 몸에 손을 대신 적이 많았고, 섬에는 마땅히 저를 받아줄 어른이 안계셨던 관계로 아버지는 고모로부터 저를 떼어내기 위해 감옥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간수인 아버지의 곁에 있으면 안전했으니까요.”마리는 고개를 다시 천천히 들며 말했다. 조곤조곤하게 그러나 또박또박 한 글자도 잘못 전달되어서는 안됐다.“마리타 양이 그런 상황이었다는 건 이미 증거로 입증됐습니다.”판사가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러나 마리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헤게는 서류라는 말에 이번에도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그놈의 원칙을 벌써 어제 오늘 두 번째로 내세우게 되는 베버로서도 이 순간이 극도로 혐오스러웠지만 다시 입 밖으로 낼 수밖에 없었다.“코드 0 특별 제한대상 분류. 후천 발현, 포르베 수용소 수감자 및 거주자 내 사망실종자비율 ...99%.”입술을 꽉 깨물고 무언가를 참는 듯한 헤게의 모습에 테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능력자 관련 분야에 종사한다면 누구라도 알고 있을 사건이다.“마저 읊을까요? 아버지인 이아고 마르살라가 딸의 능력을 이용해 범죄
“멍청아! 나무보다 돌이 더 단단하지.”어린 소녀의 머리를 쥐어박는 흰 가운 위로 면접 때 보았던 명찰이 보였다. 테오도르 베버.“아니라니까! 나무가 더 단단하다고!”곱슬 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긴 남자는 면접 때 보았던 차분한 인상과 거리가 멀었고, 무엇보다 환자복을 입은 어린 아이에게 손을 대고 있었다. 저런 모습을 의사에게서 보게될 줄은 몰랐던 헤게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을 소녀의 머리에서 치웠다.“뭐하시는 겁니까! 환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나름의 정색이 먹혀들었을까. 테오도르는 한마디를 더하려는 듯 입을
둘의 뒷모습을 보는 동안 테오의 기억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그녀의 퇴근이 늦어졌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왔는데 품에는 어린 아이를 안고서 왔다. 출혈이 심해 살아날지 죽을지 모르겠다고 답하자 누나가 꼭 살려야한다고 했고, 테오도 그렇게 했다. 참 안됐다 생각했는데 혐의가 있다고해서 놀랐고, 아이가 ‘그’ 사건의 생존자라 더 놀랐었다. 놀랄 일이 참 많기도 했다. 하얀 환자복을 입기에도 턱없이 마른 아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누나는 다음날 제출할 서류를 읽다가 아이 얼굴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처음에는 저 아이가 숨겨진
1화 잃어버린 사람.첫 기억은 감옥에서 시작했다. 눈을 뜨자 아빠가 손을 잡고 우리 보물, 이제 집에 가자고 했다. 다시 나를 품에 안으며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만 반복했다. 오두막으로 갔을 때도 펑펑 울고는 그날 일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아빠를 쫓아 일터에 가는 건 앞으로 자제해달라고만 해서, 작은 사고가 있었다고만 생각했다. -마리타 마르샬라. 사무소에는 현장사진이 몇 장 붙어있었다. 시신들이나 폭발한 건물의 사진 따위. 그중에서 한 사진은 유난히 이질적이었다. 오래되어 사진의 모서리가 뭉툭하게 닳아버렸지만,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