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어릴 적에는 잘 숨겼지만 점점 기포처럼 올라오는 의문들을 풀 방법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므로 커지는 방울을 차마 터뜨리지도 못한 채 제 영역을 넓히는 꼴만 지켜볼 까닭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빵집에 간 것은 희대의 성취였다. 초승달을 닮은 빵을 달라고 아까 그 소년을 닮은 여인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넸다. 여인의 손목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파리한 안색을 제외하고는 소년을 닮은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울 듯 말 듯한 얼굴에 미소라 마리타는 이 사람도 퍽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제레미가 짓는 얼굴과 닮았던 것이다.
“딱 우리 아들 또래네. 엄마가 만들었다 그러면 이 빵을 제일 좋아하거든.”
여운이 남는다고 제레미는 이 집의 빵을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 빵의 주인조차 여운이 남는 사람인지 그 미소가 유달리 인상에 남아 마리타도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초콜릿이 잔뜩 덮인 떡갈나무 색 초승달과 노오란 초승달을 가방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딱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정도였다. 마리타는 이제 좀 더 빨리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거리를 지나 맑은 호수로 나아갈 적에 이미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멀건 뺨에 저마다의 묘한 미소를 지은채로 걷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마리타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로 빠르게 ‘하필’ 저지른 작은 실수들이 떠올랐다. 병원에 오래있던 탓에 현실감각이 떨어져 하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밖에 나와 있었다. 또는 고양이를 봐버린 어릴 적의 어떤 날도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소녀는 또다시 익숙한 자세로 허리를 굽힌 채 걸었다. 이미 머리속은 어린 날의 하루로 돌아가 있었다.
가장 오랫동안 궁금했다. 어느 순간부터 잘못됐을 지. 다리를 절던 병원의 고양이가 다음날 네 다리로 복도를 거닐던 날에 기쁜 마음에 먼저 손을 댔다.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던 생명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듯 베버의 언성이 높아지고 제레미가 그녀를 떨리는 손으로 자꾸만 다독여주던 날이었다. 보이게 된 건, 훨씬 이전이었다고도 아직 말하지 못했다. 떨며 그를 안고 있는 그의 등 뒤로 ‘그것’이 자신에게도 보인다고 어찌 말할까.
‘아가, 안녕?’
다리가 없는 망자들은 새로운 먹이가 반가운지 마냥 즐거운 얼굴이었다. 희끄무레하게 공기에도 질감을 불어넣는 그들, 존재하고 있으나 무어라 말하기 힘든 유령의 소굴이 그때 열렸다.
“와...”
아무래도 병원에 오래있던 탓에 현실감각이 떨어져 그런가보다고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속에 약을 쳐보려 했다. 그래도 여전히 떨리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망자의 수가 병원에서는 비교도 안되기 때문이다. 호수를 둘러싼 연무인줄 알았던 것이 실은 망자의 수였다. 빵집을 오는 동안 보았던 사람들이 산 자일지 죽은 자일지, 마리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바닥만을 보고 걸었다. 그들이 제 몸을 통과하는 순간에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귀도 눈도 감각이 없는 것처럼 다리로 땅을 꾹꾹 누르듯이 신중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거의 호수의 반을 돌았을 무렵이다. 뒤도 돌지 않은 채 이대로 저쪽 사거리만 넘어가면 수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뿌연 연기처럼 너울대는 그들의 몸이 사방팔방으로 마리타의 주위를 에워쌌다. 스치거나 눈이 마주치면 끝이다. 빛이 통과해 서늘한 연기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마리타만을 바라봤다. 이제껏 몇 차례의 ‘그들’을 접했지만 이런 모양은 처음이었다. 소녀는 가방을 한 손에 쥐고 사거리 횡당보도만을 바라보았다. 차도 지나지 않는 도로에 하얗게 빛나는 보도 선만을 골라 밟으며 박자를 셌다. 그녀가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무거운 비구름처럼 몰려다니는 둥글고 투명한 수백의 원이 따라왔다.
연보랏빛 하늘도 완전히 까만 땅거미에 먹힌 밤, 그래도 사거리 건너에는 인영이 있었다. 마리타는 흐린 눈을 비비고 앞을 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상대는 낮의 소년이다. 어느새 방금 빵집에서 본 여인이, 그러니까 소년의 엄마가 곁을 지켰다. 그녀는 제법 싱그러운 미소로 마리타를 맞았다. 소년, 노엘은 제법 뾰로통한 표정으로 마리타의 앞에 섰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시선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여인의 파리한 안색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퀭한 눈과 입술, 아마도 방금 눈을 감은 장소였을 그 빵집을 벗어나서야 보이는 여인의 몰골은 정확히 경계에 있었다. 얼마든지 끈을 놓을 수도 있을 가는 선으로 숨을 겨우 잇고 있는 듯 했다. 마리타는 여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목 안쪽에는 아까보다 반창고가 늘어난 채였다. 본인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녀의 곁에 선 이 소년이 문득 안되었다.
“기다렸어요. 모르고 보냈지 뭐에요. 신은 나뭇잎에서도 지켜본다더니, 정말이네요.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요?”
죽어가는 여인, 레사의 눈에 마리의 등 뒤로는 밝은 빛이 보였다. 아들의 등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빛이니, 저 아이가 레사 몫의 신이 아닐까, 신실하고 또 순박한 레사가 멋대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마 대강 사실과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졌으므로 마리타는 여인의 말에도 대꾸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익숙한 금발, 눈에 새긴 사람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링거는 이제 다 정리했을까 걱정됐다. 이번 일이 그저 그에게 큰 위험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소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언정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노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년은 꼬마가 저지르는 돌발행동이 당황스러웠으나 유난히 말간 눈이 슬쩍 저를 쳐다보자 별 말도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작정한 듯 꾹 다문 입술은 이미 무어라 설명해줄 수순이 아닌 것을 문득 알았다.
“뭐야, 손 놔. 우리 엄마 기다리는 중이란 말이야.”
노엘은 마리타에게서 손을 빼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저보다 한 뼘은 크다고 해도 고작 여자애 힘이 이렇게 세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이제는 화가 나 버럭 소리를 지르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 검은 꼬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머리와 피부, 눈동자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눈처럼 하얀 사람만이 서 있었다. 옷은 소녀가 낮에 입은 차림새 그대로라 추측으로나마 조심스레 저 아이가 동일인일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는 있었다. 하얀 이는 노엘의 손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그의 손이 닿았을 때는 아침에도 봤던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엄마는 고맙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어 말없이 노엘의 손등을 슬쩍 매만졌다. 다정하고도 애잔한 손길이었다.
노엘은 그제야 엄마의 선택을 알았다. 결국 그렇게 하고 만 것이다. 저를 두고 기어이 다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빵집에 하루 종일 죽치고 있을 것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분명 언제고 이렇게 될 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저 어려운 미소를 짓게 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미안하고 슬픈 그런 것을. 순간 서늘하다 싶은 촉감이 사라져 고개를 드니 이미 그 자리에는 엄마도 하얀 이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센 호수의 연무와 아직도 제 손목을 붙잡은 이 작은 소녀뿐이었다.
다만 문제는, 말투였다. 최근에 중세식 동화를 자주보고는, 거기 나오는 기사들의 말투를 흉내내는 데 꽂힌 것이다. 제레미를 치료할 때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소년의 주위를 에워쌌고 그가 연맹 측의 사람임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헤게는 소년과 소녀의 앞을 막아선 채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년의 경호원이 나서려는 것을 한쪽 손을 들어 그가 막았다. 그리고는 먼저 운을 뗐다.“연맹 내 이아고 마르샬라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직계 자녀인 마리타 마르샬라의 동행을 요구합니다.”마리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퍼뜩 올렸다. 아빠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따라붙는 단어가 낯설다. 시신. 동행 명령. 이아고. 세 단어가 뇌리를 어지럽혔다. 윙윙 귀를 울리는 바람에 머리가 세게 조여와 통증을 느꼈다.동행 명령에 놀란 헤게 역시 마리의 한쪽 손을 잡고, 강하게 나갔다.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는 듯 소년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헤게가 마리를 등 뒤로 숨기며 소년의 요구에 반박했다.“본 기관은 환자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이미 자료가 전산에 포함되어 있을텐데 굳이 미성년자인 유가족을 통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요.”“이아고 마르샬라의 경우 사건의 잔혹함을 고려해 정확한 수사를 원한다는 게 연맹의 의견입니다. 헤게 선생님.”“제가 그렇게 유명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미네르바.”“마르샬라 양, 수사와 공익을 위해서 같이 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마르샬라 양. 처음듣는 호칭에 마리타가 진저리를 쳤다. 뒤에서 보던 율리아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의 밭은 숨소리가 섞인 웃음소리로 복도가 울리자 모두가 뒤를 돌았다. 휠체어에 앉은 율리아가 손을 뻗자 마리타가 금세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주름진 손을 잡아주었다.“마리타는 사고 당시 무척 어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귀하도 그를 모르시지는 않을 터, 이제와 어린 아이에게 과거를 들여다보라는 건 자비로운 연맹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일
마리타는 사계절 중에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춥다는 핑계로 제레미의 곁에 온종일 앉아 책을 읽어도 그녀를 내쫓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올해는 예외였다.베버는 문 앞에서 어깨를 잔뜩 치켜세워 한숨을 쉬었다가 노크를 했다. 그는 자고 있고 곁에서 담요를 덮은 소녀가 책을 읽고 있었다.소나무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만큼 자라고, 혼자서 식사도 치료도 정리할 줄 알게된 아이는 지난 번 사건 이후 부쩍 어른스러워졌다.베버의 뒤를 따르는 무리들을 보고 이미 책을 덮고 있었다.의자 위에 대충 책을 놓아두고 마치 제레미를 위로하듯, 손을 몇 번 두드리고는 베버에게 눈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문을 열 때면 언제나 아이의 행복을 가져가는 도둑이 된 기분이라 베버는 이 순간을 가장 싫어했다.그가 눈을 질끈 감고 무리들에게 제레미의 상태를 설명하고, 느린 걸음은 뚜벅거리며 복도로 멀어졌다. 헤게는 베버가 제레미의 병실에 가는 걸 보고 서둘러 주머니 가득 사탕을 챙겨다 마리타의 방으로 향했다.“마리! 우리 간식 먹을까?”계절이 하나 흘러갈 동안 서로 애칭을 부르게까지 됐다.이제 베버는 종종 제레미에게서 마리타를 떼어놓고 나면 뒤처리를 그녀에게 맡겼다.문을 열어도 안에는 하얀 침대와 협탁 뿐이었다. 둥글게 솟은 이불 속 언덕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헤게는 마리가 어른스러워졌다는 베버를 볼 때마다 그가 얼마나 눈치가 없고 무심한지 생각했다.“오늘은 누가 우리 황제 폐하를 속상하게 했을꼬?”지난 번 사건, 마리를 데리러 병원 밖으로 제레미가 다녀온 일은 모두가 잘 숨긴 덕에 괜찮았지만 한 번 힘을 쓴 탓일까, 제레미가 그 뒤로 크게 앓아 보름 가까이 의식이 없었다.문 앞에 매번 쪼그려 앉은 아이가 자기 탓이라고 떨고 있는 모습을 헤게는 매일 아침 봐야했다.그 일 때문에 조금 아프게 성장한 마리가 안쓰러워 일부러 황제라고 장난스럽게 불렀다.“베버 씨인가? 아니면 노엘이 그랬을까? 아니면 마담 시몬?”빵을 주기적으로 주러, 또는 마리의 안정을
노엘이 눈을 감자 서늘한 바람이 다시금 불어왔다.그가 잡고 있는 소매 자락도 함께 차가워져 이미 하얀 이의 정체를 대충은 알 수 있었다.노엘은 실눈도 뜨지 않고 오직 소매만을 동앗줄처럼 잡았다. 어머니를 구하고 자기도 살기 위해서.마리타는 힘을 세밀하게 쓸 줄 몰랐다.이 호수의 넓이나 건너편 빵집에 있을 소년 어머니와의 거리를 계산해 그녀가 할 수 있을 만큼만끌어내는 방법은 몰랐다. 다만 당장으로는 도시라면 가능할 법하다.크지만 하나의 단위이니 괜찮을 성 싶어 소녀는 방향을 잡았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눈이 정통으로 연무를 바라보았다.그제야 웅성대는 비명들이 고음의 공명음을 내며 마리타와 노엘에게로 돌진해왔다.소녀는 박수를 치듯 양손을 모으고 그 다음 어떤 말을 중얼거렸는데 웅웅대는 비명 때문에 노엘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눈을 떴을 때 호수의 물 일부가 바람에 휘날리듯 거대한 덩어리로 공중에 떠 있고 연무가 마치 그들을 공격하는 벌레떼처럼 튀어나와 바로 코앞에 굳어져 있었다.그 속에서 바람도 없이 물방울이 떠 있는 허공 속에 소녀는 익숙하고 또 외로워 보였다.왜인지 그는 귓전을 울리고 기분 나쁜 이 공기가 소녀에게 익숙한 종류의 것이라면 몹시 슬플 것 같았다. 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이 마리타가 그에게 말했다.“시간을 벌 거야. 그대로 네...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마리타는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가 말을 건넸다. 꼭 자기는 여기서 끝일 것같은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여전히 찌푸린 채로 말이다.노엘은 그제야 헐레벌떡 어머니에게로 뛰어갔다. 얼마나 급한지 정작 마리타를 뒤돌아볼 생각도 못했다.그래서 휘청이는 다리와 약간의 피가 흐르기 시작한 팔꿈치와 완전히 풀린 동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마리타에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전기가 튀는 덕에 아파서 정신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병원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대충 알 듯했다.병원 안에서 보던 것들보다 훨씬 징그럽게들 생겨서 전부 불 속에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타고
저녁에는 병원 건물의 밖조차도 나서지 말며, 가장 안전한 구석과 자리만을 골라 지낼 것. 마리타와 그의 약속이었다. 마리타는 힘을 쓰고 싶어 했다. 소녀의 생각에 병원 밖에는 아픈 사람이 넘치고 자신의 힘으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많으리라는 것이다. 자꾸 숨기라는데도 어릴 적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마리타의 모습이 제레미의 불안을 부추겼다. 그의 계절은 줄어들지만 마리타가 홀로 남을 계절은 늘어만 가 언제라도 시작될 것만 같아서.치료하는 동안 오래된 꿈을 꿨다. 어린 마리타가 병원으로 오고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길고양이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이미 그것이 죽은 줄을 알았기에 보면서도 감흥이 없었지만 마리타가 멀쩡하게 쓰다듬는 장면은 모두에게 숨겨야할 일이었다. 어디서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어디서 끝나는 줄도 모르는 기원도 없는 능력이 하필 마리타에게 옮은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렇게 믿었다. 가장 많이 마음을 둔 덕에 그를 삼킨 ‘그것’이 새 먹이로 소녀를 고른 것이라고.“마리타, 어딨어.”그런 그가 깨어났을 때 하필 마리타가 없다는 것은 베버를 충분히 긴장하게 만들고 병원 내 모든 경비의 총구가 그를 겨눌 만한 정도의 일이다. 병원의 명분을 가진 감옥이 다른 작은 아이 하나 간수못했다는 점에서 이미 제레미는 그들에게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베버는 그의 생각을 눈치채고 그를 어떻게든 말려보려 했다.“지금 찾는 중이야. 멀리는 못 갔을 거야.”그가 깨어나기 전까지 마리타의 소재를 알아야한다고 보안팀을 재촉했으나 결국 내놓게 된 이 대답을 두고 베버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마저도 제레미의 귓바퀴 근처에도 닿지 못한 듯싶었다.“내가 순순히 죽어주니까, 그 애도 그럴 줄 알았어, 베버?”“실수야. 미안해 그래도 일단 멈춰. 네가 움직이면 어떤 일이든 마리타한테 안 좋은 결과로 돌아와.”“매번 안 된다고만 하는 너희보다는 낫겠지.”이미 그를 지나쳐 가운을 걸치고 있는 제레미는 곧 창을 넘어 탈출할 기세였다. 매번 안된다고만 한다는 말이 베버
어릴 적에는 잘 숨겼지만 점점 기포처럼 올라오는 의문들을 풀 방법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므로 커지는 방울을 차마 터뜨리지도 못한 채 제 영역을 넓히는 꼴만 지켜볼 까닭이었다.해가 지기 전에 빵집에 간 것은 희대의 성취였다. 초승달을 닮은 빵을 달라고 아까 그 소년을 닮은 여인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넸다. 여인의 손목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파리한 안색을 제외하고는 소년을 닮은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울 듯 말 듯한 얼굴에 미소라 마리타는 이 사람도 퍽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제레미가 짓는 얼굴과 닮았던 것이다.“딱 우리 아들 또래네. 엄마가 만들었다 그러면 이 빵을 제일 좋아하거든.”여운이 남는다고 제레미는 이 집의 빵을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 빵의 주인조차 여운이 남는 사람인지 그 미소가 유달리 인상에 남아 마리타도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초콜릿이 잔뜩 덮인 떡갈나무 색 초승달과 노오란 초승달을 가방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딱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정도였다. 마리타는 이제 좀 더 빨리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거리를 지나 맑은 호수로 나아갈 적에 이미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멀건 뺨에 저마다의 묘한 미소를 지은채로 걷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마리타는 고개를 숙였다.머리로 빠르게 ‘하필’ 저지른 작은 실수들이 떠올랐다. 병원에 오래있던 탓에 현실감각이 떨어져 하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밖에 나와 있었다. 또는 고양이를 봐버린 어릴 적의 어떤 날도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소녀는 또다시 익숙한 자세로 허리를 굽힌 채 걸었다. 이미 머리속은 어린 날의 하루로 돌아가 있었다.가장 오랫동안 궁금했다. 어느 순간부터 잘못됐을 지. 다리를 절던 병원의 고양이가 다음날 네 다리로 복도를 거닐던 날에 기쁜 마음에 먼저 손을 댔다.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던 생명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듯 베버의 언성이 높아지고 제레미가 그녀를 떨리는 손으로 자꾸만 다독
어릴 적에 탑에서 긴 머리카락을 내려 탈출했다는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마리타는 머리를 길렀다. 때로는 여러 작은 동물을 길러 금세 호박 마차를 기다렸다. 또 어떤 시절에는 지느러미는 없으나 힘을 못 쓰는 평범한 사람이 되면 왕자가 저를 데리러 와줄 줄 알았다.그런데 정작 그녀의 왕자는 저 침대에 앓아누워 매일 밀랍 인형같은 얼굴로 겨우 미소나 짓는 사람이었다.그 무렵에 이미 마리는 알았다. 드레스를 입은 공주로서는 이 곳의 담장을 넘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크게 벌린 입안으로 서늘한 가을 공기가 드나들었다. 잔디밭을 밟고 맡던 공기의 냄새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고 다만 조금 더 차갑고 시원했다. 담장을 충분히 넘고도 그녀는 더 멀리 날았다.처음 해보는 시도인 탓에 계산을 잘못한 건지 전에 생각한 지도하고는 영 딴판인 세상에 도착했다.차가 지나다니는 도로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당황한 마리타는 보자기를 가방에 서둘러 집어넣고 불안한 표정으로 가로수만 잡고 서 있었다.공중에 뜬 네모난 판은 처음 보는 화살표로 가득하고 도로에는 노랗고 하얀 선들로 낙서를 해놓았다.사람은 코빼기도 없어 그녀는 넋을 놓고 높다란 하늘만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소녀는 빵집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마리타의 뺨을 스치고 빵 내음이 거리에 가득했다.도로에 정차한 트럭의 짐칸에는 작은 여자 아이 하나가 들어가도 모를 만큼의 공간이 넘쳤고 마침 마리타가 그 작은 여자 아이였다.부드럽게 달리던 차가 덜덜거리며 돌길을 건널 적에 마리타가 슬그머니 천막을 열고 도로 내린 것이 방금의 전말이었다.이름도 알 수 없는 도시는 온갖 쇠로 된 벽과 사람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빌딩으로 가득 찼다. 그 아래에 몇 가지 기둥으로 받치고 가게가 줄지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은 어느 모로 봐도 예쁘다고 볼 수 없었다.그러나 새하얀 구름이 투명한 유리창에 비치자 하늘이 고스란히 반사되어 비춰졌는데 마리타는 오직 그 모습만은 참으로 자유로워 보였다. 그것이 겉으로 보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