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어릴 적에는 잘 숨겼지만 점점 기포처럼 올라오는 의문들을 풀 방법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므로 커지는 방울을 차마 터뜨리지도 못한 채 제 영역을 넓히는 꼴만 지켜볼 까닭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빵집에 간 것은 희대의 성취였다. 초승달을 닮은 빵을 달라고 아까 그 소년을 닮은 여인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넸다. 여인의 손목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파리한 안색을 제외하고는 소년을 닮은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울 듯 말 듯한 얼굴에 미소라 마리타는 이 사람도 퍽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제레미가 짓는 얼굴과 닮았던 것이다.
“딱 우리 아들 또래네. 엄마가 만들었다 그러면 이 빵을 제일 좋아하거든.”
여운이 남는다고 제레미는 이 집의 빵을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 빵의 주인조차 여운이 남는 사람인지 그 미소가 유달리 인상에 남아 마리타도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초콜릿이 잔뜩 덮인 떡갈나무 색 초승달과 노오란 초승달을 가방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딱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정도였다. 마리타는 이제 좀 더 빨리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거리를 지나 맑은 호수로 나아갈 적에 이미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멀건 뺨에 저마다의 묘한 미소를 지은채로 걷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마리타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로 빠르게 ‘하필’ 저지른 작은 실수들이 떠올랐다. 병원에 오래있던 탓에 현실감각이 떨어져 하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밖에 나와 있었다. 또는 고양이를 봐버린 어릴 적의 어떤 날도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소녀는 또다시 익숙한 자세로 허리를 굽힌 채 걸었다. 이미 머리속은 어린 날의 하루로 돌아가 있었다.
가장 오랫동안 궁금했다. 어느 순간부터 잘못됐을 지. 다리를 절던 병원의 고양이가 다음날 네 다리로 복도를 거닐던 날에 기쁜 마음에 먼저 손을 댔다.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던 생명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듯 베버의 언성이 높아지고 제레미가 그녀를 떨리는 손으로 자꾸만 다독여주던 날이었다. 보이게 된 건, 훨씬 이전이었다고도 아직 말하지 못했다. 떨며 그를 안고 있는 그의 등 뒤로 ‘그것’이 자신에게도 보인다고 어찌 말할까.
‘아가, 안녕?’
다리가 없는 망자들은 새로운 먹이가 반가운지 마냥 즐거운 얼굴이었다. 희끄무레하게 공기에도 질감을 불어넣는 그들, 존재하고 있으나 무어라 말하기 힘든 유령의 소굴이 그때 열렸다.
“와...”
아무래도 병원에 오래있던 탓에 현실감각이 떨어져 그런가보다고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속에 약을 쳐보려 했다. 그래도 여전히 떨리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망자의 수가 병원에서는 비교도 안되기 때문이다. 호수를 둘러싼 연무인줄 알았던 것이 실은 망자의 수였다. 빵집을 오는 동안 보았던 사람들이 산 자일지 죽은 자일지, 마리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바닥만을 보고 걸었다. 그들이 제 몸을 통과하는 순간에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귀도 눈도 감각이 없는 것처럼 다리로 땅을 꾹꾹 누르듯이 신중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거의 호수의 반을 돌았을 무렵이다. 뒤도 돌지 않은 채 이대로 저쪽 사거리만 넘어가면 수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뿌연 연기처럼 너울대는 그들의 몸이 사방팔방으로 마리타의 주위를 에워쌌다. 스치거나 눈이 마주치면 끝이다. 빛이 통과해 서늘한 연기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마리타만을 바라봤다. 이제껏 몇 차례의 ‘그들’을 접했지만 이런 모양은 처음이었다. 소녀는 가방을 한 손에 쥐고 사거리 횡당보도만을 바라보았다. 차도 지나지 않는 도로에 하얗게 빛나는 보도 선만을 골라 밟으며 박자를 셌다. 그녀가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무거운 비구름처럼 몰려다니는 둥글고 투명한 수백의 원이 따라왔다.
연보랏빛 하늘도 완전히 까만 땅거미에 먹힌 밤, 그래도 사거리 건너에는 인영이 있었다. 마리타는 흐린 눈을 비비고 앞을 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상대는 낮의 소년이다. 어느새 방금 빵집에서 본 여인이, 그러니까 소년의 엄마가 곁을 지켰다. 그녀는 제법 싱그러운 미소로 마리타를 맞았다. 소년, 노엘은 제법 뾰로통한 표정으로 마리타의 앞에 섰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시선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여인의 파리한 안색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퀭한 눈과 입술, 아마도 방금 눈을 감은 장소였을 그 빵집을 벗어나서야 보이는 여인의 몰골은 정확히 경계에 있었다. 얼마든지 끈을 놓을 수도 있을 가는 선으로 숨을 겨우 잇고 있는 듯 했다. 마리타는 여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목 안쪽에는 아까보다 반창고가 늘어난 채였다. 본인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녀의 곁에 선 이 소년이 문득 안되었다.
“기다렸어요. 모르고 보냈지 뭐에요. 신은 나뭇잎에서도 지켜본다더니, 정말이네요.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요?”
죽어가는 여인, 레사의 눈에 마리의 등 뒤로는 밝은 빛이 보였다. 아들의 등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빛이니, 저 아이가 레사 몫의 신이 아닐까, 신실하고 또 순박한 레사가 멋대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마 대강 사실과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졌으므로 마리타는 여인의 말에도 대꾸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익숙한 금발, 눈에 새긴 사람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링거는 이제 다 정리했을까 걱정됐다. 이번 일이 그저 그에게 큰 위험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소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언정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노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년은 꼬마가 저지르는 돌발행동이 당황스러웠으나 유난히 말간 눈이 슬쩍 저를 쳐다보자 별 말도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작정한 듯 꾹 다문 입술은 이미 무어라 설명해줄 수순이 아닌 것을 문득 알았다.
“뭐야, 손 놔. 우리 엄마 기다리는 중이란 말이야.”
노엘은 마리타에게서 손을 빼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저보다 한 뼘은 크다고 해도 고작 여자애 힘이 이렇게 세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이제는 화가 나 버럭 소리를 지르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 검은 꼬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머리와 피부, 눈동자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눈처럼 하얀 사람만이 서 있었다. 옷은 소녀가 낮에 입은 차림새 그대로라 추측으로나마 조심스레 저 아이가 동일인일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는 있었다. 하얀 이는 노엘의 손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그의 손이 닿았을 때는 아침에도 봤던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엄마는 고맙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어 말없이 노엘의 손등을 슬쩍 매만졌다. 다정하고도 애잔한 손길이었다.
노엘은 그제야 엄마의 선택을 알았다. 결국 그렇게 하고 만 것이다. 저를 두고 기어이 다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빵집에 하루 종일 죽치고 있을 것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분명 언제고 이렇게 될 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저 어려운 미소를 짓게 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미안하고 슬픈 그런 것을. 순간 서늘하다 싶은 촉감이 사라져 고개를 드니 이미 그 자리에는 엄마도 하얀 이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센 호수의 연무와 아직도 제 손목을 붙잡은 이 작은 소녀뿐이었다.
“누구를 생각하시는지요, 미네르바.”율리아,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소년을 보기 좋게 꺾었던 여인이 다가왔다. 휠체어를 조용히 이끌어 어느새 옆에 자리 잡은 그녀가 미네르바와 시선을 같이했다. 마리가 있던 덩굴 담장을 바라봤다.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는 이미 모든 걸 알고서도 침묵해주는 것일까. 마리는 이런 사람과 매일 어떻게 놀 수 있다는 건지. 그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속을 털어놔야 함을 알았다. 어설프게 속이느니 열어버리는 것이 나을 상대였다. 그럼에도, 그래도. 이제와 모든 걸 포기하고 왔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미네르바는 마냥 소녀를 생경한 작품 보듯이 바라봤다.“봄 풍경이 어여쁘다 하여 들렀습니다.”“가을이 더 볼만하지요 이 곳은. 마리도 단풍을 더 좋아하고요.”화제를 마리로 바꿔버린 율리아가 슬쩍 미네르바에게 말꼬리를 돌렸다. 그는 굳은 표정을 겨우 풀고서 손 안에 있는 바구니를 들어보였다.“그래도 모처럼이라 곁들일 간식도 가져왔습니다.”그 애가 좋아한다던 간식의 종류도 다 눈앞의 사람에게 들어서 안 것이었다. 율리아는 미네르바가 가져온 간식을 보고 마리가 참 좋아하겠다며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테오 선생이나 헤게 선생, 제레미를 포함해도 역시 렘즈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이 노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율리아의 부름에 마리는 금세 돌아왔다. 그녀의 옆에 누가 있건 전혀 개의치않는 것처럼 굴었다.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고갯짓으로 살짝 목례만 해오는 것이 더 그랬다.미네르바는 퍽 섭섭한 마음이 들어 자기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몰래 숨기려 했다. 그러다가 마리가 재빨리 바구니를 잡았고 둘이서 말없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둘이 만났으니 됐다는 듯 금세 스카프를 마리에 목에 둘러주고는 낮잠을 자러 간다며 등을 돌렸다.“율,율리아!”마리가 그녀를 붙잡으려 남은 한손을 급하게 뻗었고, 한 손도 흔들리자 바구니는 균형이 깨져서 크게 흔들렸다. 미네르바는 천천히 쿠키와 티백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느
제레미가 무심하게 말을 남기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이 곳에서 살라는 뜻이었고 마리가 가진 능력을 실감하지 않았느냐 하는 비웃음이었다. 마리는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서 엘리의 옷자락만 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엘리는 아이를 두고 간다는 선택지가 이미 결정된 상황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다.그러나 제레미가 저렇게 완고하게 정한 일을 바꿀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레미를 거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마음처럼 따르기만 하지 않았나. 그리고 수사관의 양심이 외쳤다.직접 눈으로 본 저 애의 능력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면, 누구도 안전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머무른 지가 벌써, 오 년이다. 아이는 최근에서야 자기 뒤를 따르던 꼬리표를 벗었다.아이가 크는 속도는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않다.꽃잎이 구름처럼 몰려서 가지에 달려있었다. 텔레비전은 다른 지역에서 봄을 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침대 이불보를 대충 둘러메고 밖으로 나왔던 소녀는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텔레비전 바로 앞에 달라붙었다.바람에 흩날리는 꽃들이 이불같기도 했고 점점이 내리는 건 눈을 닮기도 했다. 마리가 사는 섬에는 저런 꽃이 없었고, 안타깝게도 렘즈에도 벚나무는 없었다.제레미가 싫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예전이었다면 몰랐겠지만 지금이라면 알만했다.마리는 제레미가 잠든 방문을 잠시 바라봤다가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테오는 마리가 재판을 다녀온 후에 태도가 달라졌다.마냥 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이유를 묻거나 대화를 먼저 시작하려 했다. 희한한 일이었다.마리는 그의 변화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그의 태도 덕에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제법 만족스러웠다. 가장 최근에 들은 이야기는 제레미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였다.처음 등산을 함께했을 때 들려준 이야기보다 조금 먼저 생긴 일이라는데 생각보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마리는 자기만의 일기에 작은 연표를 그려놓았다.연표는 굵직하게 마리, 제레
끝에 갈수록 말소리가 작아졌다. 마리도 그게 충분히 위험한 줄을 알아서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그래, 들킬 것같지는 않더라, 내가 못느꼈으니까, 아무도 의심못했을거야. 그러면 결국 자이온에게 맡기고 기다리면 된다는 거야 지금은?”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제레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보다 더한 표정이다. 마리는 그에게 또 변명을 해야하나 하다가 그가 그냥 털썩 체어에 누워버리자 당황스러웠다.“쉬자 그럼. 일은 걔네가 하고, 우리는 쉬는거야.”“그래도 돼?”“응, 잘했어. 우리는 별도 보고, 하늘도 보고 그러자. 방에 창문도 없었다며.”사실은 그래서 불렀어. 오랜만에 좀 보라고. 덧붙인 말에 마리는 금세 걱정을 잊어버리고 같이 별을 구경했다.“대신 다음부터는 다칠 수도 있는 상황으로 너를 내몰지는 말자. 마리타. 다들 걱정하느라 잠도 잘 못자고 그랬어.”“미안해, 그래도 이젠 괜찮을 거야.”마리는 정말 이제는 괜찮을 것을 알았다.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도 어쩌면 훗날 알았을 때 생각보다 괜찮을 것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루가 그녀의 엄마라거나, 마리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별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곁에 있었고, 하늘에도 충분히 많았다. 섬에서 봤던 거리보다는 훨씬 가깝고, 따뜻하게. 앞으로는 몰라도 당장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제레미는 천천히 그녀를 처음만난 날을 생각했다. 모포를 뒤집어쓴 아이가 엘리의 손에 이끌려 겨우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계단 턱을 넘을 때마다 한 번씩 머리나 몸이 기우뚱했다. 말랐고 생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데 용케 눈을 뜨고 걸어 다닌다 싶었다. 아이는 엘 리가 쥐어주는 차를 꼭 쥐고서 마실 생각도 없이 인형처럼 앉아만 있었다. 인형, 정말로 인형 같았다. 어린 아이크기인 도자기인형처럼, 작고 표정도 없이 어린 아이라기보다는 모양만 본뜬 것같은. 그가 처음으로 아이에게서 받은 인상은 고작 그런 것이었다. 테오는 누이가 데려온 아이를 내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당분간 식물은 괜찮다는 말에 마리도 그러냐고 웃었다. 둘만이 아는 일이었다. 둘은 꿈을 떠올리다가 그저 웃고 말았다. 오늘 배달한 빵의 대부분이 오래된 밀가루로 빚었는데 괜찮냐는 물음에 마리도 싱긋 웃었다.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둘 다 맑은 웃음이었다. 마침내 마리타는 제레미에게 불려갔다. 저녁을 먹고 테라스에서 보자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제레미는 예의 그 천장이 보이는 테라스에 먼저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 마시는 잔이 아침에 먹었던 것까지 합해 몇 잔인지 마리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위험했어, 마리, 알지?”제레미는 슬쩍 자신의 계획을 짚고 넘어갔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시점에서 이미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잔소리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레사한테는 조만간 사례할 생각이야.”‘그래.’하고 대답한 제레미는 마리의 사고에 아무런 문제를 못느끼는 것같았지만, 헤게였다면 물질로 누군가에게 보답하는 일이 여러 번 있어서는 안된다고 짚어줬을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감각이 없는 제레미였기에 둘은 또 다른 이야기만 했다.“힘을 크게 쓴 거 아니면.”“멋대로 미네르바에게 간 것부터 재판이랑 그 이후까지 전부.”“...”“그렇게 너를 함부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었어도 렘즈에 있는 식구들이 해결할 수 있었을 거야. 굳이 책을 헤게의 손으로 미네르바에게 넘길 필요도 없었어.”마리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계획했는지 제레미도 대충 간파하고는 있었다. 자기가 모르는 아버지와 그 ‘사람’의 관계를 알려면 그녀보다는 전문적인 조직이 움직이는 게 나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평범한 삶에서 멀어질 수 없으니, 과거는 그들에게 맡겨서 진실만 알아낼 셈이다.“욕심도 많지, 어리면서.”마리타가 밉지 않게 제레미를 노려봤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당해준 건 제레미도 마찬가지 아닌가.“미네르바가 적임자였어. 제법 많이 알고 있기도 했고, 나보다 돈도 많잖아 걔는.”“어린 부자가 최고다?”“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레사는, 마리를 꽤 좋아했다. 별로 사교적이지도 않지만 그녀가 만든 크로아상 말고 다른 걸 못 먹는 점이 귀엽기도 했고 어찌됐든 그녀와 아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도와준 건 마리였다. 죽을 뻔했던 사람을 되살리는 것도, 사람의 영역에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능력자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일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리가 레사가 생각하는 신과는 가장 맞닿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꿈에 나왔던 건 그 유명한 포르베 사건의 재판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 마리가 평범하지는 않으니 레사도 당황하지는 않았다.“왔어?”단조로운 반응에 소녀가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무언가 할말이 있는 건 분명했는데 애꿎은 발만 움직이고 시선을 바닥에만 두다가 말했다. 결심이 서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노엘은 아직 어리고, 또 그 애한테 비밀을 얹고 싶지는 않았어.”마리는 자기 정체가 알려진 순간부터 단둘일 때는 서로 말을 놨다.“응, 고마워. 네 그런 점에 감사해.”갑작스러운 인사에 마리가 그런 건 칭찬이 아니라고 했다. 레사는 물론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신은 나뭇잎에서도 지켜본댔지, 레사.”레사가 일전에 헤어지면서 했던 말이었다. 자기를 구해줘서 고맙다며, 신이 있긴 한 모양이라던 말간 웃음이 생각났다. 아들의 손을 잡은 엄마의 미소는 편안하고 행복해보였다. 마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렘즈에서도 이 미소를 대신할 무엇을 얻을 뿐, 영영 가질 수 없을 것을 알았다. 마리의 신은 그런 걸 지켜보고 싶었나보다 나뭇잎에서. 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가 어깨 아래로 내려간다. 마리는 애써 시선을 떼고 자기 할 말에 집중했다.“근데 내 신은 나뭇잎이 아니라 광장에 있어줘야 해. 그러니까 레사가 했던 말이 틀린 거니까 책임 져.”어리광같았으나 저가 어린 애가 아니면 뭔가 싶어 마리는 일부러 어깨를 세우고 당당하게 굴려고 했다. 물론 어려워서 금세 포기했지만. 레사는 그걸 보는 것도 재밌어서 일부러 시간을
한때 저 사실이 기사로 빼곡하게 찼던 시절이 있었다. 헤게도 테오도 기억하리라. 배심원들도 아는 사실을 수사관은 한 번 더 읊었다. 그러나 판사는 제법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이때 변호사가 다시 일어났다. 발언권이 아직 오지 않았을 차례였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해야했으나, 그에게도 사실 할만한 것들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느린 속도로 누군가 등장했다. 분명 본인은 빨리 걸었지만 걸음이 느려 아직도 자기 자리의 절반도 가지 못한, 어린 소녀였다. 멜빵 치마를 입고 굽이 없는 구두를 신은 아이는 테오와 헤게가 이곳에서 무수히 찾던 얼굴이었다. 마리타 마르샬라로 자리에 선 소녀가 자리에 앉았다. 판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배심원들도 실제로 ‘소문의 마르샬라’를 보는 건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채였다. 최고위험군이고, 이미 폐기시설에서 지내는 아이. 자기를 감싼 수식에 비해 지나치게 가녀린 소녀가 그들을 바라봤다. 담담한 표정에서 어떤 결과도 감내할 듯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긴 침묵을 지속하던 마리가 입을 열었다.“마리타 마르샬라입니다. 변호사님 대신 말해도 될까요.”마리는 변호사와 대충 목례로 인사를 하고, 판사를 바라봤다. 차분한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봤고, 판사도 그러라고 했다.“저희 아버지는 이아고 마르샬라입니다. 고모는 나미엘 마르샬라고,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항상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차를 마실 때면 기분이 좋으셨지만 아닐 때가 많아 제 몸에 손을 대신 적이 많았고, 섬에는 마땅히 저를 받아줄 어른이 안계셨던 관계로 아버지는 고모로부터 저를 떼어내기 위해 감옥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간수인 아버지의 곁에 있으면 안전했으니까요.”마리는 고개를 다시 천천히 들며 말했다. 조곤조곤하게 그러나 또박또박 한 글자도 잘못 전달되어서는 안됐다.“마리타 양이 그런 상황이었다는 건 이미 증거로 입증됐습니다.”판사가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러나 마리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어릴 적에 탑에서 긴 머리카락을 내려 탈출했다는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마리타는 머리를 길렀다. 때로는 여러 작은 동물을 길러 금세 호박 마차를 기다렸다. 또 어떤 시절에는 지느러미는 없으나 힘을 못 쓰는 평범한 사람이 되면 왕자가 저를 데리러 와줄 줄 알았다.그런데 정작 그녀의 왕자는 저 침대에 앓아누워 매일 밀랍 인형같은 얼굴로 겨우 미소나 짓는 사람이었다.그 무렵에 이미 마리는 알았다. 드레스를 입은 공주로서는 이 곳의 담장을 넘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크게 벌린 입안으로 서늘한 가을 공기가 드나들었다. 잔디밭을 밟고 맡던
소녀는 자리에 오래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이 병원 안에서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몇 안될 이라는 사실이 언제나 아이를 일어나게 만들었다.제레미의 금발을 닮은 햇살이 창을 비추었다. 따스한 풍광에 마리타는 슬쩍 작은 발을 내밀었다안으로 당기며 햇빛과 술래잡기를 했다. 온종일 이어질 치료가 끝나면 밤일 것이고 또 달이 기울 새벽에나 그는 마리타를 알아볼 것이다. 요즈음이 줄곧 그랬다.어제와 그제와 저녁으로 카레가 나온 일주일 전에도 마찬가지였다.소녀는 고르게 난 눈썹을 찡그리고 햇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결
감옥의 풍경은 썩 아이에게 좋은 모습은 아니다. 뒤에서는 죽은 시신을 불태우느라 검은 연기가 타오르고 또 한 켠에서는 곧 태울 시신을 땅에 묻어두었다. 뒤로는 커다란 사원이자 오래된 유적이 있는데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남은 학자 몇몇이 그곳을 조사하고는 했다. 그렇다고 감옥의 소장이나 간부들이 작은 아이의 출입을 막을 만큼 깐깐한 것은 아니라 우고는 자유롭게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오히려 작은 발로 이리저리 삭막한 풍경을 돌아다니는 모습에 간수들은 도리어 고향에 두고온 아이들을 떠올리고 지레 위로받으며 사기를 충전하고는 했던 것이
헤게는 서류라는 말에 이번에도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그놈의 원칙을 벌써 어제 오늘 두 번째로 내세우게 되는 베버로서도 이 순간이 극도로 혐오스러웠지만 다시 입 밖으로 낼 수밖에 없었다.“코드 0 특별 제한대상 분류. 후천 발현, 포르베 수용소 수감자 및 거주자 내 사망실종자비율 ...99%.”입술을 꽉 깨물고 무언가를 참는 듯한 헤게의 모습에 테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능력자 관련 분야에 종사한다면 누구라도 알고 있을 사건이다.“마저 읊을까요? 아버지인 이아고 마르살라가 딸의 능력을 이용해 범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