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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딸의 뒤늦은 후회

아내와 딸의 뒤늦은 후회

By:  소담죽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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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연휴를 맞아 나는 한 달 전부터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출발할 날이 다가오자 모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폭우가 쏟아지는 길거리에 홀로 서서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딸의 차갑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지금 아저씨랑 밥 먹고 있어요. 우리는 여행 안 갈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고, 나는 곧바로 차단당했다. 모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부러 집 문까지 잠가 나를 밖에 세워 뒀다. 나는 추위에 떨며 꼬박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전날 밤 폭우까지 흠뻑 맞은 탓에 나는 그날 밤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모녀는 심우진과 함께 여행을 떠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결혼 생활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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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눈을 뜨자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밀려왔다.

온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머릿속은 멍했고,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고서야 어젯밤 집 앞에서 쓰러진 나를 이웃이 병원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문득 딸아이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우진 아저씨.’

심우진. 아내 송서연의 첫사랑이었다.

한낮의 병실에서는 다른 환자와 가족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하지만 내 침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송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SNS를 열어 보니 송서연이 얼마 전 올린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광복절을 축하하며.]

사진 속 송서연과 심우진은 딸아이를 양쪽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셋 다 손에 작은 태극기를 든 채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세 식구였다.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음이 쓰리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일이 워낙 잦다 보니 이제는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나는 그 게시물에 좋아요까지 누른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뒤로도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내내 송서연은 딸을 데리고 심우진과 놀러 다녔다. 퇴원하는 날까지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나는 혼자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안에서 송서연과 강하은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곁에는 포장부터 고급스러운 값비싼 선물 상자들이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차갑고 거만한 눈빛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말을 걸어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송서연이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

“강도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며칠 동안 연락 한 통 없다가 이제야 들어와? 아빠라는 사람이 그게 할 짓이야?”

기가 막혔다.

송서연은 딸과 심우진이랑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내가 수십 통이나 전화를 건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잘못은 늘 송서연이 해 놓고, 끝에 가서는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겼다.

더는 따질 마음도 없었다.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송서연은 또 내가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듯했다.

송서연은 경멸하듯 나를 흘겨보더니 새로 한 네일아트를 살펴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강도윤,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인데? 나랑 하은이가 당신이랑 여행 안 갔다고 이러는 거야? 그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냐고? 그래, 그럴 일이었다.

“그날 우진이가 마침 나랑 하은이한테 밥을 사 준다고 해서 비행기를 놓친 거잖아. 우진이는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어. 내가 좀 같이 있어 주면 어때? 남자가 왜 그렇게 쪼잔해?”

심우진에게 아는 사람이 없다고? 그럼 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야말로 의지할 가족 하나 없이 혼자였다.

나는 오랫동안 사랑했던 여자를 바라봤지만 이제는 낯설기만 했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쏟아부은 정성이 너무나 아까웠다.

딸 강하은까지 엄마 편을 들었다. 나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빠는 왜 그렇게 속이 좁아요? 아저씨처럼 잘해 주지도 못하잖아요. 이것 보세요. 이거 다 아저씨가 사 준 선물이에요. 아빠는 맨날 엄마 기분만 상하게 하잖아요.”

“나 이제 아빠가 싫어요. 차라리 우진 아저씨가 내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내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내 딸이었다.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웠지만 정작 하은이에게는 친아빠인 내가 남보다 못한 존재였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사람 마음이라고 아프지 않을 리 없다. 상처가 거듭되면 결국 마음도 식어 버리는 법이다.

모녀가 그렇게 나를 싫어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그만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송서연 앞에 내려놓았다.

“이혼하자.”

그리고 입을 삐죽 내민 하은이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러면 네가 원하던 새 아빠도 생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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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눈을 뜨자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밀려왔다.온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머릿속은 멍했고,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간호사에게 물어보고서야 어젯밤 집 앞에서 쓰러진 나를 이웃이 병원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때 문득 딸아이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우진 아저씨.’심우진. 아내 송서연의 첫사랑이었다.한낮의 병실에서는 다른 환자와 가족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하지만 내 침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송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SNS를 열어 보니 송서연이 얼마 전 올린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광복절을 축하하며.]사진 속 송서연과 심우진은 딸아이를 양쪽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셋 다 손에 작은 태극기를 든 채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누가 봐도 다정한 세 식구였다.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음이 쓰리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일이 워낙 잦다 보니 이제는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나는 그 게시물에 좋아요까지 누른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 뒤로도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내내 송서연은 딸을 데리고 심우진과 놀러 다녔다. 퇴원하는 날까지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나는 혼자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현관문을 열자 안에서 송서연과 강하은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모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곁에는 포장부터 고급스러운 값비싼 선물 상자들이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잔뜩 쌓여 있었다.내가 들어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차갑고 거만한 눈빛이었다.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말을 걸어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송서연이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강도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며칠 동안 연락 한 통 없다가 이제야 들어와? 아빠라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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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내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모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큰소리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강도윤,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원래 당신이 잘못했잖아. 밖에서 하룻밤 반성 좀 하라고 한 게 뭐가 잘못됐는데?”나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송서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이맘때 북쪽 지방은 벌써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나는 길거리에서 몇 시간이나 폭우를 맞으며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차가운 밖에서 밤새 추위에 떨다가 고열이 나고 폐렴까지 걸렸다.다행히 이웃이 병원에 데려다줬기에 망정이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나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더 할 말 없어. 서명해.”송서연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그동안 이혼을 입에 올린 건 늘 화가 난 송서연 쪽이었다. 예전에는 항상 그녀가 투덜거리며 이혼을 말했지, 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강도윤, 지금 무슨 짓 하는 건지 알아?”고열을 앓은 뒤라 아직 몸에 힘이 없었다. 나는 지친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알아. 이제는이 껍데기뿐인 결혼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늘 떠받들리며 보살핌을 받아왔던 송서연은 내가 물러서지 않자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좋아. 이혼하자고 하면 못 할 줄 알아?”송서연은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더니 내 얼굴에 거칠게 내던졌다.“강도윤, 잘 들어. 당신 같은 남자는 나랑 어울리지도 않아. 돈도 빽도 없는 주제에 나랑 이혼하고 어떻게 사는지 두고 보겠어.”“딸은 절대 못 데려가. 하은이 양육권은 무조건 내 거야. 당신 따라가서 가난하게 살게 둘 순 없으니까.”그때 강하은이 얼른 송서연 다리를 끌어안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엄마한테는 아저씨처럼 잘생기고 다정한 사람이 어울려요. 아저씨는 피아노도 치고 나한테 다이빙도 가르쳐 주는데, 아빠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요.”“이제 내 아빠 아니니까 우리 집에서 나가세요.”나를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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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나는 혼자 결혼 전에 사 두었던 아파트로 돌아가 짐을 풀었다.내 명의로 된 재산은 많지 않았다. 그 아파트가 그나마 유일하게 값이 나가는 재산이었다.원래는 이 아파트를 강하은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니까.그런데 심우진이 던진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달라졌다.“이렇게 낡고 허름한 집에서 하은이가 어떻게 살겠어? 송씨 가문 아가씨 신분에 어울리지도 않아.”부잣집 생활에 익숙한 강하은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며 아파트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나 저런 허름한 집에서 살기 싫단 말이에요. 엄마네 별장에서 살 거예요.”아이가 떼쓰는 모습을 보자 나는 가슴이 싸늘해졌다.송서연은 얼른 강하은을 끌어안고 달랬다.“울지 마, 우리 딸. 엄마가 저런 집에 살게 할 리 없잖아.”그러고는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강도윤, 지금 무슨 생각이야? 내 딸더러 당신 그 허름한 집에서 살라고? 하은이도 당신처럼 평생 찌질하게 살게 만들고 싶어?”아빠로서의 내 진심이 어쩌다 두 사람에게 그토록 끔찍한 잘못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삼킨 채 명의를 옮기지 않겠다고 씁쓸하게 말했다.그때만 해도 아이가 철이 없어서 한 말이니 어른이 마음에 담아두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하지만 강하은이 정말 나를 사랑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짓밟을 수 있었을까?돌이켜 보면 일에는 시작이 있었지만 내가 너무 늦게 알아챘을 뿐이다.집안일에서 벗어나자 내게는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쓸 시간이 넉넉히 생겼다.우선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축구 경기를 시청했다.그 집에서는 누려 보지 못한 소소한 즐거움이었다.송서연은 매운 음식을 좋아했고 강하은은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었다.반대로 나는 매운 걸 못 먹었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었다.그동안 두 사람의 입맛을 맞추느라 정작 내가 뭘 먹고 싶은지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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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전화기 너머에서 송서연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말을 이었다.“시간 내서 이혼하러 가자.”나는 할 말을 끝낸 뒤 곧장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송서연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다.그날 밤 오랜만에 푹 잠들었지만, 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나는 18살 때로 돌아가 있었다.막 대학교에 합격했을 무렵, 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했다.성적이 좋았던 덕분에 지역에서 이름난 송씨 가문에 들어가 과외를 하게 됐다.가르칠 학생은 송씨 가문의 막내딸, 바로 송서연의 여동생이었다.나는 아직도 송서연을 처음 만났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소녀는 바이크 재킷 차림을 하고 밤색 머리카락이 햇살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그녀의 눈부시고 명랑한 모습에 나는 한눈에 반해버렸다.사람은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내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송서연은 저만치 걸어가 한 남학생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탔다.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그 남학생이 바로 심우진이었다. 송서연의 첫사랑이자,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잊지 못할 사람이었다.그러다 심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파산했고, 심우진은 어쩔 수 없이 외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 떠났다.두 사람의 연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끝났다.이후 송서연과 나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는 송서연이 심우진을 그리워하며 밤새 술을 마시는 모습도, 심우진 때문에 집안과 맞서는 모습도 모두 보았다.송서연이 힘들어하던 그 시절, 나는 말없이 곁을 지켰다.내 마음은 끝내 고백하지 못한 채 묻어 두었다. 송씨 가문에서 송서연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하기 전까지는.그날 밤 송서연은 또 술에 취했다.나는 송서연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송서연이 눈물 어린 눈으로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그날 우리는 하룻밤을 함께 보냈고, 이후 송서연이 먼저 결혼하자고 했다.나는 송서연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녀의 청혼을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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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집을 나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전화를 받자, 휴대전화 너머로 차갑고 무뚝뚝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안녕하세요. 강하은 학생 아버님 되시나요?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하은이 담임입니다. 오늘 학부모 모임이 있었는데 하은이 부모님만 참석하지 않으셨어요. 몇몇 아이들이 하은이를 놀렸고, 화가 난 하은이가 그 아이들과 말다툼했어요.”“이런 일이 아이에게 좋을 리 없어서요. 어머님은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아버님께 연락드렸습니다. 지금 학교에 와 주실 수 있을까요?”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휴대전화로 날짜를 확인하니 정말 하은이 학교에서 학부모 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참석할 준비를 해 두었었다.지금까지 학부모 모임은 늘 내가 참석했다.송서연은 일에 치이면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인데, 강하은까지 챙길 리 없었다.갑자기 피로감이 밀려왔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하은이 엄마와 이혼했어요. 양육권도 제게 없고요.”“그러니 하은이가 저지른 일을 제가 수습할 의무도, 학부모 모임에 참석할 의무도 없어요.”담임 선생님은 당황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나는 전화에서 강하은을 바꿔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직접 말했다.“강하은, 다른 아이와 싸우는 건 잘못이야. 너도 이제 충분히 컸으니까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학부모 모임에는 원래 엄마가 가야지.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아저씨한테 부탁하든가. 어쨌든 난 안 가. 나더러 아빠가 아니라고 한 건 너잖아?”“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말을 마치자 강하은이 무언가 대답하려는 기색이 느껴졌다.하지만 나는 선생님께 인사하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통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내 모든 것을 바쳐 10년 동안 사랑한 딸이었다. 이렇게 매몰차게 관계를 끊는 말을 내뱉고 나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강하은은 어릴 때만 해도 귀엽고 착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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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룸에 들어서자 어린 여자아이가 달려와 내 품에 부딪혔다. 동시에 주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아이고, 우리 공주님. 천천히 가.”나는 쪼그려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는 주현우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주현우가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반갑게 인사했다.“도윤아, 얼마 만이야. 내 딸 아린이야. 태어났을 때 네가 안아 보기도 했잖아. 네 딸이랑 동갑이고.”주현우의 말이 끝나자 주아린이 내 목을 끌어안으며 인사했다.“도윤 아저씨, 안녕하세요.”예의도 바르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식사 도중 주현우는 내가 그동안 힘들게 지냈고, 이혼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나 대신 분통을 터뜨렸다.“송서연은 애초에 널 남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거야. 네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는 여자라고!”“게다가 네 딸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아빠한테 그럴 수가 있어? 은혜도 모르네. 생각만 해도 정떨어진다. 그런 딸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아.”“내 생각엔 이혼하길 정말 잘했어!”대학 시절부터 주현우는 나와 송서연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애초에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송서연은 제멋대로인 부잣집 아가씨였다. 오만하고 거만해서 늘 남들을 깔보곤 했다.나는 그저 웃으며 술잔을 기울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현우의 말이 맞았다. 송서연과 이혼한 것은 나에게 최선의 결말이었다.그날 밤, 나와 주현우는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나눴다.옆에 앉은 주아린도 재잘재잘 떠들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몇 번이나 배를 잡고 웃었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주아린은 강하은과 동갑인데도 성격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나는 송서연과 더는 엮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송서연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나를 괴롭혔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다른 번호로 바꿔서 또 걸어 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한번은 가정부에게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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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내가 아무렇지 않게 떠나자 뒤에 남겨진 송서연이 분을 못 이겨 발을 굴렀다.마침내 주아린을 찾은 나는 직접 구운 쿠키를 꺼냈다. 아이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우와. 도윤 아저씨, 진짜 대단해요. 너무 맛있어요. 제가 먹어 본 쿠키 중에 제일 맛있어요.”주아린은 쿠키를 주변 친구들에게도 나눠 줬다. 친구들도 입을 모아 칭찬했다.“아린아, 너희 아저씨 진짜 좋으시다. 부러워.”“그럼. 아저씨는 요리도 잘하고, 약도 연구해. 사람들 목숨을 많이 구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야.”주아린이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강하은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한번은 선생님에게서 강하은이 학교에서 점심을 제대로 못 먹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걱정이 된 나는 정성껏 도시락과 주스를 만들어 학교로 달려갔다.그런데 강하은은 내 눈앞에서 도시락과 주스를 쓰레기통에 쏟아 버리더니 짜증을 냈다.“나 이런 거 안 먹어요. 아저씨가 데려가 준 그 레스토랑에서 먹을 거예요. 앞으로 학교에 이런 싸구려 음식 가져오지 마세요. 친구들이 보면 나 놀린단 말이에요.”내 친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중에야 강하은이 친구들 앞에서 나를 집안 운전기사라고 소개했다는 것도 알았다. 나를 창피하게 여겼던 것이다....운동회가 시작되려 하자 나는 관중석에 서서 주아린을 응원했다.이번 경기는 이어달리기였다. 상대 팀을 살펴보던 나는 첫 번째 주자로 서 있는 강하은을 단번에 발견했다.강하은은 팔다리를 풀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강하은은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해 무슨 일이든 꼭 1등을 하려고 했다.그게 걱정돼 나는 몇 번이고 차분하게 타일렀다.“하은아, 몇 등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즐거우면 그걸로 충분해.”그러자 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내 말에 반박했다.“난 아저씨처럼 꼭 1등 할 거예요. 아빠는 그러니까 능력도 없이 엄마한테 기대서 사는 거예요.”나를 경멸하듯 바라보던 그 표정은 송서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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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강하은은 입술을 깨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뜻밖에도 서운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이해할 수 없었다.사람들 앞에서 내가 챙겨 주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던 아이가 아닌가. 이제 와서 누구 보라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게다가 나는 이미 이 모녀와 아무 관계도 없었다.나는 두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러자 주아린이 내 앞을 막아서며 나를 지켰다.“나쁜 사람들. 우리 아저씨 괴롭히지 마세요.”강하은이는 아무래도 어린아이인지라 조금만 자극해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주아린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우리 아빠거든. 네 아저씨가 아니야.”강하은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아빠라고 인정한 건 처음이었다.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저 제 것이라고 여기던 사람을 남에게 빼앗기기 싫은 것뿐, 사랑이 아니었다.강하은이 주아린을 밀려고 다가오자 나는 얼른 막아섰다. 그러다 강하은이 혼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넘어졌다.나는 일으켜 주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먼저 다른 아이를 괴롭히려 한 건 강하은이었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다.“아니. 우린 진작 부녀 관계를 끊었잖아. 난 네 아빠가 아니야.”나는 그 말을 끝으로 주아린을 데리고 돌아섰다.그 뒤 한 달 동안 나는 실험실에서 연구에 매달리거나, 일상을 충실히 보내며 지냈다.하지만 송서연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지난번 운동회에서 있었던 일을 따지겠다며 기어이 연구실 문 앞까지 찾아와 나를 가로막았다.“강도윤, 너 요즘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날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다른 집 아이 때문에 하은이를 밀치고 말도 심하게 했잖아. 하은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나는 별다른 감정 없이 차분하게 대꾸했다.“송서연, 네가 이렇게 귀찮은 사람인 줄은 예전엔 왜 몰랐을까?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우린 이제 아무 관계도 없어.”송서연은 이를 악물더니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강도윤, 정말 나랑 이혼하고 하은이가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게 할 거야?”그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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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강하은이 서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아빠, 나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배가 너무 아파요.”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빠, 갈비탕이랑 돼지고기 조림 해 주면 안 돼요?”나는 그대로 강하은을 지나쳐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안 돼.”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강하은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내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아빠, 아빠는 하은이를 제일 예뻐했잖아요. 나 모른 척하면 안 돼요.”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왜? 내가 왜 널 챙겨야 하는데? 강하은, 난 진작 네 아빠 아니라고 했어. 양육권은 송서연한테 있고, 엄마랑 살겠다고 한 것도, 나더러 너희 집에서 나가라고 한 것도 너야.”강하은은 당황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팔을 붙잡으려 했다.“아빠, 엄마랑 이혼해도 난 아빠의 친딸이에요. 우리 몸에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요.”그렇다. 친딸이었기에 지난 10년 동안 나는 강하은을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내가 가진 사랑을 전부 쏟아부었다.하지만 강하은은 내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강하은은 내 옆에 선 주아린을 바라보더니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쟤는 왜 여기서 살아도 되죠?”나는 담담하게 강하은의 시선을 마주했다.“넌 아린이랑 달라. 강하은, 마지막으로 말할게.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야. 앞으로 우린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니까 다시는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나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강하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때 송서연이 나타나 하은이를 품에 안고 나지막이 말했다.“도윤아, 우리 모녀한테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어?”나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내 사랑을 믿고 마음껏 나를 상처 준 건 두 사람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다니.나는 대답 대신 문을 쾅 닫아 버렸다.하지만 모녀는 포기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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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동안 열심히 연구에 매진한 보람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새로운 연구논문을 발표했다.그날 교수님이 축하 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동료들은 나를 위해 축하 현수막까지 걸어 주었다. 분위기는 무척 떠들썩했다.나는 주현우와 주아린이 선물한 꽃다발을 안고 진심으로 웃었다.아마 지난 몇 년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 것이다.행사가 끝난 뒤 나는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호텔 밖으로 나왔다.그런데 문을 나서자 꽃다발을 든 송서연과 강하은이 보였다.나를 발견한 송서연이 서둘러 다가왔다. 어쩐지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강도윤, 축하해.”강하은도 웬일로 얌전하게 인사했다.“아빠, 정말 대단해요.”마치 우리가 여전히 한 가족인 것처럼, 나에게 줬던 상처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투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송서연은 한 걸음 다가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부드럽게 물었다.“도윤아, 오늘 저녁에 우리 셋이 같이 밥 먹으면 안 될까?”강하은도 고개를 숙이고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빠, 하은이 진짜 아빠 보고 싶었어요. 우리랑 집에 가요.”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줄래?”노골적인 내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송서연은 그제야 자존심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도윤아, 나랑 하은이가 네 마음에 큰 상처를 줬다는 거 알아. 지금 우리 얼굴조차 보기 싫겠지.”“그래도 우리 10년이나 함께 살았잖아. 그동안의 정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아. 그리고 꼭 풀어야 할 오해도 있어.”진작 이런 말을 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나는 반걸음 물러서며 손을 내저었다.“송서연, 난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아. 혼자 착각하지 마. 우리 사이에 오해 같은 것도 없어.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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