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광복절 연휴를 맞아 나는 한 달 전부터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출발할 날이 다가오자 모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폭우가 쏟아지는 길거리에 홀로 서서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딸의 차갑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지금 아저씨랑 밥 먹고 있어요. 우리는 여행 안 갈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고, 나는 곧바로 차단당했다. 모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부러 집 문까지 잠가 나를 밖에 세워 뒀다. 나는 추위에 떨며 꼬박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전날 밤 폭우까지 흠뻑 맞은 탓에 나는 그날 밤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모녀는 심우진과 함께 여행을 떠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결혼 생활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View More송서연은 머리를 젖힌 채 서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손가락 사이에는 가느다란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담배 연기가 얼굴을 가렸지만 미간에 깊이 서린 근심만큼은 가리지 못했다.한동안 보지 못한 모녀는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았다.나는 못 본 척하고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도윤아, 드디어 돌아왔구나.”송서연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목소리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서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처량하고 서글픈 미소였다.“우리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거야?”나는 먼 곳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송서연, 우린 진작 끝났어. 다시 시작할 일은 없어.”눈앞의 여자는 내가 10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호수 면처럼 고요할 뿐이었다.송서연을 사랑했던 시절이 마치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송서연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너한테 정말 못 할 짓을 많이 했어. 나도 이제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 알아.”“하지만 세상에 당신만큼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나 정말 당신 없이는 못 살겠어.”“도윤아, 제발 부탁이야. 우리 헤어지지 말자. 응?”예전 같았으면 송서연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차마 보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가엾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을 뿐이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그럴 필요 없어. 사랑하지 않는 데 억지로 마음을 돌릴 수는 없잖아.”“이쯤에서 끝내자. 좋게 헤어지자고.”나는 시선을 돌려 강하은을 바라봤다. 이번 기회에 모든 관계를 확실히 정리하고 싶었다.“이혼하고 나면 우리도 정말 남남이 되는 거야. 나중에 내가 늙어도 널 보
심우진이 다급하게 달려와 송서연를 자기 뒤로 감싸더니 험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강도윤 씨, 내가 있는 한 당신은 서연이를 괴롭힐 수 없어요.”“당신은 여자 등골이나 빼먹는 신세이니 이혼하지 않으려고 서연한테 매달리는 거잖아요. 나도 남자예요. 당신의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아요?”나는 심우진이 또다시 이간질하며 잘난 척하려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짜증이 치밀어 오른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닥쳐. 네 헛소리 들어 줄 시간 없어.”나는 가려 했지만 심우진은 끝까지 달려들어 나를 붙잡으려 했다.나는 몸을 돌리며 심우진의 배에 주먹을 세게 내리꽂았다. 심우진은 바닥에 나뒹굴었다.“더 맞고 싶으면 계속 덤벼.”심우진은 창피했던지 벌떡 일어나 반격하려 했다.바로 그 순간, 찰싹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송서연이 심우진의 뺨을 때린 것이다.송서연은 얼이 빠진 심우진을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당장 꺼져. 네가 뭔데 도윤이를 건드려? 손끝 하나라도 대면 이 바닥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할 거야.”심우진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서연아, 지금 저 사람 때문에 나를 때린 거야?”송서연의 눈에는 예전의 다정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분노와 원망만 가득했다.“때리면 어쩔 건데? 너만 아니었으면 도윤이가 나한테 화낼 일도, 우리 가정이 깨질 일도 없었어. 전부 너 때문이야. 이 나쁜 자식아!”심우진은 넋 나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네가 그랬잖아. 우리야말로 가족이라고. 하은이도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그러자 강하은은 곧장 부인하며 얼굴을 굳혔는데 그 모습은 예전에 나를 대할 때와 똑같았다.“나 아저씨 안 좋아해요. 아저씨 때문에 아빠가 없어졌어요. 난 아저씨 싫어요.”“우리랑 아저씨는 가족이 아니에요.”송서연도 차가운 얼굴로 당장 꺼지라고 호통쳤다.결국 심우진은 씁쓸하게 웃었다.“그래, 그래. 내가 바보짓 했네.”그는 그렇게 혼자 달아났다. 도망치는 모습이 처량
그동안 열심히 연구에 매진한 보람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새로운 연구논문을 발표했다.그날 교수님이 축하 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동료들은 나를 위해 축하 현수막까지 걸어 주었다. 분위기는 무척 떠들썩했다.나는 주현우와 주아린이 선물한 꽃다발을 안고 진심으로 웃었다.아마 지난 몇 년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 것이다.행사가 끝난 뒤 나는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호텔 밖으로 나왔다.그런데 문을 나서자 꽃다발을 든 송서연과 강하은이 보였다.나를 발견한 송서연이 서둘러 다가왔다. 어쩐지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강도윤, 축하해.”강하은도 웬일로 얌전하게 인사했다.“아빠, 정말 대단해요.”마치 우리가 여전히 한 가족인 것처럼, 나에게 줬던 상처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투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송서연은 한 걸음 다가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부드럽게 물었다.“도윤아, 오늘 저녁에 우리 셋이 같이 밥 먹으면 안 될까?”강하은도 고개를 숙이고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빠, 하은이 진짜 아빠 보고 싶었어요. 우리랑 집에 가요.”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줄래?”노골적인 내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송서연은 그제야 자존심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도윤아, 나랑 하은이가 네 마음에 큰 상처를 줬다는 거 알아. 지금 우리 얼굴조차 보기 싫겠지.”“그래도 우리 10년이나 함께 살았잖아. 그동안의 정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아. 그리고 꼭 풀어야 할 오해도 있어.”진작 이런 말을 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나는 반걸음 물러서며 손을 내저었다.“송서연, 난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아. 혼자 착각하지 마. 우리 사이에 오해 같은 것도 없어.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
강하은이 서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아빠, 나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배가 너무 아파요.”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빠, 갈비탕이랑 돼지고기 조림 해 주면 안 돼요?”나는 그대로 강하은을 지나쳐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안 돼.”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강하은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내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아빠, 아빠는 하은이를 제일 예뻐했잖아요. 나 모른 척하면 안 돼요.”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왜? 내가 왜 널 챙겨야 하는데? 강하은, 난 진작 네 아빠 아니라고 했어. 양육권은 송서연한테 있고, 엄마랑 살겠다고 한 것도, 나더러 너희 집에서 나가라고 한 것도 너야.”강하은은 당황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팔을 붙잡으려 했다.“아빠, 엄마랑 이혼해도 난 아빠의 친딸이에요. 우리 몸에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요.”그렇다. 친딸이었기에 지난 10년 동안 나는 강하은을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내가 가진 사랑을 전부 쏟아부었다.하지만 강하은은 내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강하은은 내 옆에 선 주아린을 바라보더니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쟤는 왜 여기서 살아도 되죠?”나는 담담하게 강하은의 시선을 마주했다.“넌 아린이랑 달라. 강하은, 마지막으로 말할게.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야. 앞으로 우린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니까 다시는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나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강하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때 송서연이 나타나 하은이를 품에 안고 나지막이 말했다.“도윤아, 우리 모녀한테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어?”나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내 사랑을 믿고 마음껏 나를 상처 준 건 두 사람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다니.나는 대답 대신 문을 쾅 닫아 버렸다.하지만 모녀는 포기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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