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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악녀라고 소개하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12:01:25

악녀 수칙: 무서운 얼굴 앞에서도 할 말은 한다.

나는 벗어 둔 장갑을 쥐었다.

손가락이 천 안에서 굳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진주 단추가 떨어질 것 같아서 힘을 조금 풀었다.

레녹스 발트하임은 문에서 비껴 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은회색 머리. 회색 눈. 왼쪽 귀에 달린 작은 은 귀걸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리 망토에 눈이 묻어 있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서 손을 뗐다.

물러날 필요는 없었다. 아직 이 사람 앞에서 죄인도 아니었고, 여기는 광장이 아니라 왕궁 발코니였다.

그렇다고 반갑다는 인사를 할 생각도 없었다.

반갑지는 않았으니까.

“대공 전하.”

고개를 숙이는 동안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치맛단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도망치다가 밟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에버린 영애.”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레녹스는 내 얼굴을 보다가 장갑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장갑을 쥔 손을 치맛자락 옆으로 내렸다.

“방금 파혼한 게 너인가.”

“네.”

대답하고 나니 조금 고칠 필요가 있었다.

“파혼하자고 한 사람이 저예요. 절차는 아직 남았어요.”

왕실과 아버지가 어떻게든 붙들 생각이라면 오늘 밤에 끝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내가 마음을 바꿀 일은 없었다.

레녹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서 들었다.”

“벌써요?”

“문까지 들리더군.”

나는 열린 발코니 문을 보았다.

안쪽에서는 악단이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이 있어도 남의 파혼 이야기는 잘 들리는 모양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겠네.

“저 악녀예요.”

레녹스의 눈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알아.”

빠른 대답이었다.

나는 장갑 끝을 접었다.

“아신다고요?”

“그렇게 부르더군.”

문 안쪽으로 잔을 든 사람들이 지나갔다. 나를 발견한 영애 하나가 곁에 선 사람에게 입을 가까이 댔다.

입 모양까지 읽을 수는 없었다. 굳이 읽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시선을 거뒀다.

“왕자님이 내민 손을 안 잡았으니 그럴 만하죠.”

“손을 잡기 싫었던 건가.”

“춤도 싫고 결혼도 싫었어요.”

“그래서 거절했고.”

“네.”

레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좀 더 오래 봤다.

눈매를 살피는 건지, 내 얼굴에 크림이라도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려다가 멈췄다.

아까 냅킨으로 잘 닦았다.

적어도 케이크 때문에 저렇게 볼 일은 없었다.

“더 물으실 게 있나요?”

“없다.”

그런데 시선은 그대로였다.

물어볼 게 없으면 안 보면 될 텐데.

나는 턱을 조금 들었다.

“그럼 저도 하나 물을게요.”

레녹스가 기다렸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너무 오래 보셔서요.”

그제야 레녹스의 시선이 옆으로 비켰다.

딱 난간 기둥 하나만큼이었다.

나는 조금 덜 불편해졌다.

시선을 거둬 달라고 하면 거둬 주는 사람이었다. 그건 기억해 둘 만했다.

◐

“대공 전하, 여기 계셨군요.”

문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잘 차려입은 귀족이 다가왔다. 옆에는 왕궁 시종이 잔을 받쳐 들고 있었다.

나는 난간 가까이 붙었다. 인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낄 생각은 없었다.

귀족은 나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레녹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도에 머무시는 동안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없소.”

“다행입니다. 북부에 관한 이야기는 늘 관심 있게 듣고 있습니다. 언젠가 꼭 방문하고 싶군요.”

레녹스의 손이 올라갔다.

왼쪽 귀에 달린 은 귀걸이를 엄지로 눌렀다. 귀족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손끝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나는 장갑을 다시 펴 보았다.

북부 대공에게 말을 걸러 와서 날씨 이야기도, 거리 이야기도 못 꺼내고 있었다. 상대가 짧게 대답하니 다음 말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건 조금 이해했다.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준비해 온 인사말도 까먹을 것 같았다.

귀족은 북부의 겨울이 궁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레녹스는 짧게 대답했다.

“춥소.”

더 짧아지기도 하는구나.

나는 입술 안쪽을 살짝 물었다.

귀족은 잔을 들어 보이고 물러났다. 시종이 뒤를 따르다가 내 쪽으로 쟁반을 기울였다.

“영애께서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안에서 마셨어요.”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레녹스의 손이 내려갔다.

나는 귀걸이에 남아 있던 손끝의 자국을 보다가 난간 밖으로 눈을 돌렸다.

정원에는 바람이 불었다. 낮은 등불 아래 나뭇잎이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있을 것이다. 여기 있으면 레녹스가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적어도 이쪽은 아직 나를 혼내지 않았다.

“추운가.”

레녹스가 물었다.

“아니요. 안이 더웠어요.”

“장갑을 벗었군.”

“손바닥에 땀이 나서요.”

나는 오른손을 펴 보였다.

왕궁에서 하기에는 썩 품위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도 장갑을 벗은 이유를 달리 만들 수는 없었다.

레녹스가 내 손을 보았다.

손바닥에는 오래전에 고삐를 잡으며 생긴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한동안 말을 타지 않았다고 손까지 깨끗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손을 내렸다.

“장갑도 다시 끼라고 하실 건가요?”

“왜.”

“안에서는 다들 그러시거든요.”

레녹스는 내 손에서 시선을 거뒀다.

“네 손이지.”

나는 접어 놓았던 장갑을 조금 폈다.

그걸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게 낯설었다.

저녁 내내 목걸이부터 첫 춤까지 설명하느라 입이 바빴는데.

“맞아요. 제 손이에요.”

레녹스는 이번에도 나를 봤다.

귀걸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

나는 난간을 따라 옆으로 걸었다.

문 가까이 서 있으면 인사를 하러 나오는 사람마다 마주칠 것 같았다. 기둥 뒤쪽은 실내에서 덜 보였다.

발소리가 하나 더 났다.

내가 멈추자 레녹스도 멈췄다.

나는 옆을 돌아봤다.

“대공 전하도 이쪽에 서실 거예요?”

“그러려고.”

“문가가 더 편하지 않나요? 인사받으시기에는.”

“충분히 받았다.”

방금 인사하러 왔던 귀족에게는 들려주지 않는 편이 좋을 대답이었다.

나는 기둥 옆에 섰다. 레녹스는 난간의 다른 기둥 앞에 자리를 잡았다.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길을 막지는 않았다.

내가 문 쪽을 보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잠깐 말없이 서 있었다.

음악이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 발코니 문 안쪽으로 치맛자락들이 오갔다.

레녹스는 말을 걸지 않았다.

조용히 있을 생각이면 굳이 나를 따라 움직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나는 먼저 물었다.

“파혼 이야기가 궁금해서 나오셨어요?”

“밖에 나오니 네가 있었다.”

“그럼 제가 먼저 있었네요.”

“그렇지.”

누가 먼저 발코니에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왕자님께서 화내셨다는 이야기도 들으셨어요?”

“직접 봤다.”

“잘 보이는 곳에 계셨나 봐요.”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려서.”

내가 오늘 왕궁에서 만든 소란이 제법 컸다는 뜻이었다.

나는 장갑 단추에 붙은 실밥을 눌렀다.

필립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던 순간, 사람들은 잔을 들지도 못했다.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숨길 수도 없었다.

“후회하나.”

레녹스가 물었다.

“아니요.”

대답은 바로 나왔다.

“첫 춤을 안 추면 이렇게 발코니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몰랐어요.”

“춤을 좋아하지 않는군.”

“말 타는 게 더 좋아요.”

그 말을 하고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만둔 지 꽤 됐다.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데도 허락이 필요한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쓸데없는 수고였다.

“넘어질 수도 있지.”

레녹스가 말했다.

“춤추다가도 넘어져요. 아까 안에서 치맛단 밟은 분 봤어요.”

“맞는 말이다.”

“말은 적어도 제가 왜 넘어졌는지 알게 해 줘요.”

고삐를 잘못 잡았든, 발을 잘못 디뎠든.

사람들은 자기 발로 내 치맛단을 밟고도 왜 나를 탓하는지 알 수 없었다.

레녹스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

웃었다고 하기에는 짧았다.

나는 그쪽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굳이 확인해 달라고 할 일은 아니었다.

◐

“전하.”

발코니 문가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났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접힌 종이가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문이 닫히지 않게 붙들고 있었다.

레녹스가 고개를 돌렸다.

“오웬.”

“여기 계셨습니까.”

남자는 나를 보더니 자세를 바로잡았다.

“실례했습니다, 에버린 영애. 전하의 부관 오웬입니다.”

“비올레타 에버린이에요.”

오웬의 눈이 내 벗은 손과 장갑을 잠깐 스쳤다. 묻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 중에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웬은 곧 레녹스 쪽으로 돌아섰다.

“전하, 북부 사절 인사 아직 세 군데 남았습니다.”

레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아.”

“아시면 들어가셔야죠.”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대공에게 저렇게 말하는 부관이라면 평소에도 꽤 바쁜 모양이었다.

오웬이 접힌 종이를 폈다. 줄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다시 접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인사만 마치시면 나머지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레녹스는 난간에서 몸을 떼지 않았다.

오웬이 문 쪽으로 한 걸음 비켰다. 길을 내주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자 다시 돌아왔다.

“전하.”

“잠깐만.”

“그 잠깐을 안에서도 하셨습니다.”

나는 장갑으로 입가를 가렸다.

오웬이 나를 봤다.

나는 장갑을 내렸다. 웃음을 숨기려고 썼다고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제가 붙들고 있는 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영애.”

대답이 빠른 걸 보니 정말 알고 있는 듯했다.

오웬은 레녹스를 향해 낮게 말했다.

“이미 인사 나누셨으면 나머지는 다음에 하셔도 됩니다.”

“아직 안 끝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레녹스가 나를 봤다.

나도 레녹스를 봤다.

우리는 말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북부 사절을 기다리게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넘어지는 이야기요.”

내가 대답했다.

오웬의 손에서 종이가 조금 구겨졌다.

“어디서요?”

“말 위에서요. 춤추다가도 넘어지고요.”

오웬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나는 덧붙였다.

“아직 아무도 안 넘어졌어요.”

“다행입니다.”

오웬이 종이를 다시 폈다. 구겨진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이 사람도 내가 여기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레녹스에게 말했다.

“기다리는 분들께 가 보셔도 돼요.”

“내가 불편한가.”

질문이 예상과 달랐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문까지의 길을 봤다. 레녹스는 여전히 기둥 앞에 서 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요.”

오웬이 종이를 접던 손을 멈췄다.

레녹스는 곧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가겠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기분 나쁘다는 얼굴도, 무례하다는 말도 없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장갑의 진주 단추를 문질렀다.

전생의 얼굴이 자꾸 겹쳤다. 그렇다고 지금 이 사람이 하지 않은 일까지 꺼내서 따질 수는 없었다.

“서 계신 게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레녹스가 멈췄다.

내가 왜 굳이 그 말을 덧붙였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돌려보내 놓고 붙드는 것 같아서 조금 성가셨다. 입을 열었으니 끝은 내야 했다.

“얼굴이 무섭네요, 근데 잘생기긴 했어요.”

레녹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접힌 종이 끝을 들췄다. 오웬이 뒤늦게 엄지로 눌렀다.

나는 장갑을 다시 반듯하게 접었다.

“둘 다 사실이에요.”

레녹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혔다.

처음으로 대답할 말을 찾는 것 같았다.

아까 북부가 춥냐는 질문에는 바로 답하더니.

오웬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입을 다문 채 어깨를 한 번 움직였다.

웃는 거네.

내가 장갑으로 가렸을 때보다 덜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보이나.”

한참 뒤 레녹스가 물었다.

“네. 특히 말없이 보실 때요.”

“알겠다.”

이번에는 시선을 바로 거뒀다.

나는 장갑 끝을 맞추던 손을 멈췄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 말을 하면 또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서 두었다.

◐

오웬이 먼저 문 쪽으로 갔다.

이번에는 레녹스도 움직였다.

털망토 끝이 난간 기둥을 스치기 전에 레녹스가 손으로 천을 잡았다. 덩치가 큰 사람도 옷자락은 신경 쓰는구나.

나는 조금 옆으로 비켰다.

“인사 잘 받고 오세요, 대공 전하.”

레녹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나오기 전까지는 바람을 쐴 생각이었다.

“늦게까지 있지는 마라.”

“추워지면 들어갈게요.”

레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은 문 안쪽에서 기다렸다. 더 재촉했다가 다시 멈출까 봐 그러는 건지, 종이만 손바닥에 두드리고 있었다.

문가에 선 사람이 레녹스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레녹스의 왼손이 귀로 올라갔다.

짧은 인사였다. 상대는 웃었고, 레녹스는 귀걸이를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손잡이 가까이에 멈춘 손을 보았다.

귀걸이가 불편한가.

그런데 나와 이야기할 때는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

파혼 얘기를 할 때도, 말 타는 걸 좋아한다고 했을 때도. 얼굴이 무섭다고 했을 때조차 손은 가만히 있었다.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귀걸이까지 참견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오웬이 문 안으로 더 들어갔다.

레녹스는 문턱을 넘기 전에 다시 나를 봤다. 귀를 누르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나는 혹시 뒤에 누가 있나 싶어 난간 쪽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실내에서는 음악이 계속 흘렀다. 사람들이 웃는 소리도 들렸고, 정원에서는 나뭇잎이 바람에 스쳤다.

레녹스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조용하네.”

(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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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색을 입지 않는다.“데려갈 거예요.”내 대답에 베른이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그럼 꽃 장식에 익숙해지게 해 둬야겠습니다.”먹구름은 제 결혼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턱을 높이 들었다. 나는 검은 목을 두드렸다.“꽃은 먹는 게 아니야.”먹구름이 내 손바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레녹스 쪽으로 코를 돌렸다.“그쪽도 없대.”레녹스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먹구름은 기어이 주머니 끝까지 냄새를 맡았다.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철저했다.베른이 고삐를 당겨 검은 코를 떼어 놓았다.“옷을 물지 않는 연습도 해야겠네요.”“그건 꼭 해 주세요. 제 치마는 길어질 테니까.”레녹스가 나를 봤다.“정했나.”“아직요. 색부터 고르려고요.”“같이 가지.”“드레스 고르는 데도요?”“그래.”베른은 먹구름을 보고, 레녹스를 보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둘 다 아가씨가 가는 데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레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나는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3월 30일, 드레스 가게의 창에는 하얀 옷이 걸려 있었다.치마를 풍성하게 벌리고 소매에는 고운 자수를 놓았다. 허리에 묶인 띠도 하얬다. 흠잡을 곳 없이 예쁜 옷이었다.내가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나는 내 망토를 받아 들었고, 레녹스는 문을 닫고 곧장 따라 들어왔다.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서 멈췄다.“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고르시나요?”“구경만 해요.”내가 먼저 대답했다.레녹스는 내 옆에 섰다.“필요하면 돕겠다.”“단추 잠그는 건 한나가 해 줘요.”“그럼 기다리지.”주인은 창가의 넓은 의자를 권했다. 레녹스가 앉으려다 내 쪽을 봤다.나는 가게 안쪽의 거울을 가리켰다.“저는 저기 있을 거예요.”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옮겼다.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한나가 내 망토를 접다가 웃었다.“전하, 제가 옷을 가리면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7화. 악녀, 수도로 돌아가다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날은 내 것으로 삼는다.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레녹스가 내 장갑을 주워 들었다.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채 장갑을 끼우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 안쪽에 걸렸다.“빼고 낄까.”“싫어요. 방금 꼈는데.”레녹스는 장갑 입구를 넓혀 줬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반지가 천 아래로 가려졌다.괜히 손등을 한 번 쓸었다.“내려가면 벗으면 되지.”“알아요.”“계속 만지길래.”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이건 만져도 되잖아요.”“그래.”계단 아래에서 데릭이 우리를 올려다봤다.“차 식는다!”한나가 바로 데릭의 옆구리를 눌렀다. 오웬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리사는 접시 가운데에 과자를 더 쌓았다.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레녹스도 손을 잡은 채 따라 내려왔다. 빈 의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웬이 굳이 두 의자를 조금 더 붙였다.“너무 가까운데요.”내 말에 오웬이 의자를 도로 밀려 했다.나는 먼저 앉았다.“옮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오웬이 손을 거뒀다. 데릭은 차를 마시다 웃었고, 한나는 결국 손수건을 꺼냈다.레녹스가 내 앞에 과자 접시를 놓았다.나는 장갑을 벗고 은반지를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손에 붙었다.“차 식는다며.”데릭에게 말하자 그제야 다들 찻잔을 들었다.◐3월 28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북부보다 훨씬 질었다.바퀴가 물기 섞인 흙을 밟을 때마다 마차가 조금씩 기울었다. 나는 창밖의 길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편지를 다시 펼쳤다. 어제 묵은 곳까지 달려온 수도의 전령이 건넨 편지였다.왕의 허락은 짧았다.『레녹스 발트하임 대공과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혼인을 허락한다. 왕궁 정원을 예식 장소로 내주겠다.』끝에 찍힌 왕의 인장이 종이를 접어도 조금 튀어나왔다.그 밑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왕궁 정원을 쓸 수 있다는 말보다 그쪽이 더 뜻밖이었다.『4월 1일은 어떠냐. 준비는 해 두겠다. 네가 싫다면 다른 날로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6화. 악녀, 청혼을 받다

    악녀 수칙: 좋은 일 앞에서는 괜히 도망가지 않는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받아 들고 성 꼭대기를 다시 봤다.“몇 시에요?”“저녁 먹고.”“거기까지 올라가서 또 경주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레녹스가 내 손에 감긴 고삐를 풀어 줬다. 먹구름이 갑자기 고개를 들면 손가락이 조일 만큼 감겨 있었다.“말은 두고 와라.”“그럼 제가 불리한데요.”“이길 필요 없다.”고삐가 손바닥에 느슨하게 놓였다. 레녹스는 마지막으로 내 손가락을 살피고 놓았다.나는 탑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따뜻하게 입고 가면 돼요?”“그래. 바람이 분다.”“알았어요.”먹구름이 내 소매를 물었다. 당근이 남았다는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나는 소매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당근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요.”“같이 가겠다.”“마구간 안까지요?”레녹스가 먹구름을 봤다.“싫어하나.”검은 주둥이가 레녹스의 빈손을 한 번 더 확인했다.“손님이 빈손으로 왔다고 좀 아쉬운가 봐요.”레녹스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오늘은 충분히 먹었어요.”손이 순순히 내려갔다.먹구름만 몹시 불만스러웠다.◐3월 23일, 나는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그렇다고 접시를 비우지도 않고 일어난 건 아니었다. 북부 요리사는 남은 음식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부터 물었다. 괜히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문제는 옆자리에 앉은 데릭이었다.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데릭도 얼른 내려놓았다.“다 먹었어?”“응.”“배부르냐?”“그걸 왜 물어?”“그냥.”데릭의 접시에는 감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접시를 가리켰다.“오빠는 더 먹어. 훈련하고 왔다며.”“나도 배부르다.”맞은편의 한나가 물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잔을 들지도 않고 입술만 꾹 누르고 있었다.오웬은 그 옆에서 빵을 뜯었다. 이미 다 먹은 빵을 다시 뜯을 수는 없어서, 손끝에는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다.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뭐 있어요?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5화. 악녀, 먹구름과 달리다

    악녀 수칙: 이겼으면 받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른다.나는 계단 앞에서 발을 멈췄다.오웬의 질문 뒤로 잠깐 조용해졌다.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조금 뒤에는 발소리도 들렸다.나는 손수건을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영애.”오웬이 복도 끝에서 나를 불렀다. 아까 들고 있던 서류는 없었다.“길을 물으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맞아요. 먹구름이 달릴 만한 곳이 있나 해서요.”오웬은 내 얼굴을 보고 집무실 쪽을 한번 돌아봤다.“남쪽 들판에 길이 있습니다. 눈을 걷어 둔 곳인데, 상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고마워요.”“전하께서도 같이 가실 겁니다.”“제가 같이 가자고 안 했는데요.”오웬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웃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 뒤에서 오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길을 물었더니 동행부터 정해지는 성이었다.◐3월 22일 아침, 먹구름은 내가 들고 온 안장보다 주머니를 먼저 봤다.주둥이가 망토 옆을 꾹 눌렀다.“당근은 이쪽 아니야.”먹구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빨랐다. 처음 샀을 때부터 사람 말도 이만큼 잘 들었으면 베른의 허리가 덜 아팠을 텐데.나는 잘라 온 당근을 손바닥에 올렸다. 먹구름이 입술로 조심스럽게 집어 갔다.“오늘은 좀 달릴 거야.”남은 당근을 달라는 듯 고개가 더 내려왔다.“알았어. 준비부터 하고.”마구간 문이 열렸다. 찬바람을 따라 레녹스가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 아래에 승마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오셨네요.”“네가 간다기에.”“오웬이 벌써 동행을 정해 줬어요.”레녹스는 내 옆에 멈춰 섰다.“싫으면 여기 있겠다.”먹구름이 내 어깨 너머로 코를 뻗었다. 레녹스는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검은 주둥이가 손바닥으로 향했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가볍게 쳤다.“넌 좋겠지.”“너는.”레녹스는 각설탕을 먹이는 동안에도 나를 봤다.“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럼 간다.”정하기 쉬웠다. 대공을 데리고 들판에 나가면서 결재할 종이도, 납득시킬 사람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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