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악녀 수칙: 싫으면 싫다고 한다.
“그럼 첫 춤은 안 추시는 거예요?”
거울 속 한나가 장갑을 든 채 물었다.
“전하께 할 말부터 하고.”
나는 화장대에 내려놓았던 장갑을 다시 집었다. 손가락 끝에 남는 천을 당기자 손바닥까지 주름이 생겼다.
한나가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이건 전에 맞추셨던 거예요. 조금 더 작아요.”
새 장갑을 벗고 상자 안의 것을 꼈다. 오른손을 쥐었다 펴니 이번에는 손끝이 맞았다.
“이걸로 할게.”
“머리는 정말 이대로 두세요?”
한나는 내 어깨 아래로 내려온 머리를 보았다. 옆머리만 뒤로 모아 진주 핀을 꽂아 둔 상태였다. 아침부터 준비한 것치고는 간단했다.
“흘러내리면 네가 다시 꽂아 줘야 하잖아.”
“무도회장 안에는 제가 못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대로.”
한나가 핀을 한 번 더 눌러 확인했다.
문밖에서 마차가 준비됐다는 말이 들렸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치맛단을 내려다보았다. 숨을 들이마셔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우선 그건 합격이었다.
◐
아버지는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깐깐하게 다듬은 콧수염 아래로 입술이 얇아졌다. 내 귀걸이부터 목까지 훑는 시선이었다.
“목걸이는?”
“무거워서 안 했어요.”
“오늘은 네 성인식이다.”
“알아요.”
아버지는 뒤에 선 한나를 보았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제가 골랐어요. 머리도 제가 이렇게 하라고 했고요.”
한나가 손을 모았다. 아버지의 눈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왕궁에 가는 차림이다. 네 마음에 든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드레스도 입었고 장갑도 꼈어요. 귀걸이도 했고요.”
나는 귓불 아래의 진주를 가리켰다.
“뭘 더 해야 하죠?”
아버지는 대답 대신 마차 쪽으로 턱을 돌렸다.
“시간이 늦는다. 타거라.”
나는 뒤를 돌아 한나에게 말했다.
“저녁 챙겨 먹어.”
한나가 입술을 조금 벌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안에는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바퀴가 움직이자 치맛자락이 좌석 아래로 밀렸다. 나는 천을 끌어 올려 무릎 위에 정리했다.
“전하께서 손을 내미시면 바로 받아라.”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첫 춤은 중요한 자리다. 네가 먼저 나서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어.”
나는 장갑의 손목 단추를 만졌다.
“할 말이 있으면요?”
“무슨 말이냐에 달렸겠지.”
“약혼에 관한 말이에요.”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집안 어른들이 알아서 한다. 너는 전하께 예의를 갖추면 된다.”
알아서 했다는 결과를 나는 알고 있었다.
필립의 마음이 바뀌었을 때도, 내 이름이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됐을 때도 집안 어른들은 기다리라고 했다. 왕실에서 정리할 때까지 얌전히 있으라고.
아버지는 지팡이 손잡이를 무릎 위에 올렸다.
“오늘은 실수하지 마라.”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왕궁으로 향하는 마차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앞선 마차의 바퀴가 돌 틈을 밟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장갑 단추를 잠갔다.
◐
왕궁 무도회장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했다.
천장에 매달린 등불 아래로 보석과 잔이 반짝였다. 문을 지나자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너무 많은 꽃을 놓아둔 탓에 코끝이 간지러웠다.
나는 재채기를 참으려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내 등을 가볍게 짚었다.
“표정.”
“꽃 때문에 코가 간지러워요.”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말과 불필요한 말을 골라내는 데 아버지는 늘 자신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두 번째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코끝을 눌렀다.
이름이 불리자 가까운 사람들이 돌아봤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내 드레스부터 보고,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다시 내 얼굴을 살폈다.
“성인식을 축하해요, 에버린 영애.”
“감사해요.”
“오늘은 유난히 얌전한 차림이네요.”
“편하게 입었어요.”
상대의 부채가 잠깐 멈췄다.
나는 그 뒤에 올 말을 기다리지 않고 옆으로 비켰다. 전에는 이런 자리에서 칭찬인지 아닌지 한참 고민했다. 이제는 그냥 옷 이야기로 들을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귀족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곁에 서서 홀 안쪽을 보았다.
디저트 탁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얀 크림을 올린 케이크와 견과를 얹은 과자가 있었다. 작은 접시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저것도 그대로네.
전에는 저 탁자 앞을 지나가면서도 손을 뻗지 않았다. 허리가 두꺼워 보일까 봐, 입가에 크림이 묻을까 봐, 필립이 부를 때 음식을 먹고 있을까 봐.
마지막 걱정은 특히 쓸모가 없었다.
필립은 나를 자주 부르지 않았다.
“비올레타.”
이번에는 불렀다.
아버지가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주변 사람들도 조금씩 자리를 비켰다.
금발을 단정히 넘긴 필립이 다가왔다. 예복에는 구김 하나 없었다. 입가의 웃음도 딱 알맞았다.
누가 봐도 보기 좋은 왕자였다.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준비하느라 힘들었겠구나.”
“드레스 단추가 잘 안 맞았어요.”
필립은 잠깐 나를 보았다.
정해진 인사말 다음에 정해진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잘 어울린다.”
“감사해요.”
악단의 연주가 느려졌다. 사람들이 홀 가운데를 비우기 시작했다.
필립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첫 춤을 추겠나.”
손끝은 내 쪽을 향했지만 눈은 악단 쪽에 가 있었다. 곧 음악이 시작되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전에는 저 손을 놓칠까 봐 서둘러 잡았다.
오늘은 손 대신 얼굴을 보았다.
나는 웃었다. 거울 앞에서 연습한 웃음이 아니라, 이제야 할 말을 하게 됐을 때 나오는 웃음이었다.
“전하, 파혼해요.”
필립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뭐?”
“전하도 저 안 좋아하시잖아요.”
가까운 곳에서 부채를 접는 소리가 났다.
필립은 내 얼굴을 보다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비올레타.”
낮은 경고가 들렸다.
나는 필립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나?”
“네. 약혼을 끝내고 싶다는 말이에요.”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잖아.”
“춤을 청하셨으니까, 추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필립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주변에는 아직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선 사람들은 잔도 들지 않았다.
필립이 목소리를 낮췄다.
“누가 무슨 말을 했나?”
“제가 생각했어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싫어진 건 아니에요.”
나는 장갑 낀 손을 허리 앞에 모았다. 오른손 손가락이 왼손 손등을 눌렀다.
“전하도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고요.”
“그건 사실이지만.”
필립이 말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요.”
아버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옆에 있던 귀족이 시선을 내렸다. 못 들은 척하기에는 필립의 목소리가 너무 또렷했다.
필립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약혼이란 게 마음만으로 정해지는 건 아니야.”
“알아요. 그래서 전하께 말씀드리는 거예요. 혼자 끝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왕실과 에버린 가문의 일이야.”
“저도 에버린이고요.”
아버지가 내 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몸을 돌려 아버지를 똑바로 보았다.
“아버지, 전하께 말씀드리는 중이에요.”
손이 내 팔에 닿기 전에 멈췄다.
필립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이제 다들 듣지 않는 척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런 식으로 내 체면을……”
“전하께서 저를 싫어하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했죠. 전하도 맞다고 하셨고요.”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저도 마음 없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필립은 내 얼굴을 오래 봤다.
“내가 너를 모욕한 적은 없잖아.”
아직은 그랬다.
나는 대답을 골랐다.
“그렇다고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필립의 턱이 조금 굳었다. 아버지는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저 대답을 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모욕하지 않았으니 감사해야 한다. 손을 내밀었으니 받아야 한다. 약혼을 유지해 주니 웃어야 한다.
나는 필립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춤은 안 출게요.”
“비올레타.”
“파혼에 필요한 절차는 따를게요. 하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필립이 내 뒤쪽을 보았다. 멀리서 왕궁 시종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홀 가운데에는 다른 성인식 주인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여기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필립은 옷소매를 바로잡았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네. 다만 제 뜻은 지금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나는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필립은 더 손을 내밀지 않았다.
◐
아버지는 홀 가장자리에서 나를 세웠다.
“너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게냐?”
“파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사람들이 다 들었다.”
“전하께서 대답도 하셨고요.”
아버지의 콧수염이 작게 움직였다.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자리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버린의 딸이 왕자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 거다.”
“왕자님도 에버린의 딸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하셨어요.”
“말대꾸하지 마라.”
나는 장갑의 손목을 당겼다. 단추가 살에 눌린 자리가 조금 따끔했다.
“좋아하는 척하고 결혼할 수는 없어요.”
“좋아하는 척하라는 게 아니다. 네 자리에 맞게 행동하라는 거지.”
“그 자리가 싫어요.”
아버지의 눈썹이 올라갔다.
나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전하께 첫 춤을 청받는 건 영광이라고들 하죠. 저는 기다리는 동안 배만 고팠어요.”
“지금 음식 이야기를 하는 거냐?”
“네. 아침도 조금 먹었거든요.”
아버지는 내 뒤를 살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가 서둘러 다른 곳을 봤다.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알겠어요.”
“그때까지 더는 소란 피우지 마라.”
“먹고 있을게요.”
아버지는 내 얼굴을 잠깐 보다가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왕실 쪽에 설명할 말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는지까지 묻지는 않았다.
나는 디저트 탁자로 향했다.
가는 길에 빨간 곱슬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사벨 크로였다.
부채를 코 아래까지 올리고 있었는데 눈꼬리가 자꾸 접혔다. 옆에 선 영애가 작은 목소리로 뭔가 묻자 이사벨은 부채를 더 높이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사벨의 어깨가 멈췄다.
나는 그냥 지나갔다.
웃고 싶겠지. 나라도 구경하는 쪽이었다면 조금 웃었을 것이다.
왕자가 춤추자고 손을 내밀었더니 약혼녀가 파혼하자고 하는 광경은 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 부채 뒤의 웃음을 내 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내가 재미있었다. 그걸로 됐다.
◐
디저트 탁자 앞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다들 첫 춤을 보느라 바빴다. 나는 깨끗한 접시를 들고 케이크 앞에 섰다.
담당 시종이 집게를 들었다.
“어느 것으로 드릴까요?”
“크림 올라간 걸로요.”
시종이 가장 작은 조각 쪽으로 집게를 옮겼다.
“그 옆에 있는 거요.”
조금 더 큰 조각이었다.
시종은 내 얼굴을 확인한 뒤 접시에 옮겼다. 크림 끝에 올려진 붉은 열매가 흔들렸다.
나는 포크를 받아 탁자 옆으로 비켰다.
첫 입은 생각보다 달았다.
드레스 허리는 멀쩡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왕궁 천장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진주 귀걸이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두 번째로 포크를 들었다.
멀리서 필립이 다른 성인식 참석자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의 바르게 손을 잡고, 정해진 만큼 웃고 있었다.
잘 추네.
굳이 나일 필요는 없었구나.
내가 첫 조각을 다 먹을 즈음, 이사벨이 탁자 가까이 왔다. 부채는 조금 내려가 있었다.
“정말 파혼할 생각이에요?”
“네.”
“화나서 한 말이 아니라요?”
“화나서 케이크 먹는 건 아니에요.”
이사벨이 부채 뒤에서 웃었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과자를 골랐다.
“왕자님이 그렇게 대답하실 줄은 몰랐어요.”
“저도 그 말씀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좋아하지 않는 건 알았다. 남들 앞에서 인정할 줄은 몰랐다.
이사벨은 나를 살피더니 부채를 펼쳤다.
“내일은 다들 이 이야기만 하겠네요.”
“그럴 것 같아요.”
“괜찮겠어요?”
나는 접시 위에 남은 크림을 포크로 모았다.
“못 들은 척해도 파혼하고 싶은 건 그대로니까요.”
이사벨은 더 묻지 않았다. 다른 영애가 이름을 부르자 그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빈 접시를 내려놓았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차를 가져다드릴까요?”
“물 주세요. 그리고 케이크도 하나 더요.”
집게를 잡은 손이 잠깐 멈췄다.
나는 방금 먹은 케이크와 같은 것을 가리켰다.
“맛있어요.”
시종의 굳었던 입가가 조금 풀렸다.
두 번째 조각도 접시에 올라왔다.
이번에는 급히 먹지 않았다. 연주가 바뀌는 소리를 들으며 크림부터 조금 떼어 먹었다.
춤을 추느라 치맛단을 밟은 영애가 짧게 웃었다. 상대가 발을 멈추고 기다려 줬다. 아버지는 홀 건너편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물을 마셨다.
목까지 조이던 답답함이 조금 내려갔다.
탁자 끝으로 자리를 옮기자 어린 시종 하나가 냅킨을 들고 서 있었다. 내 접시를 보다가 급히 시선을 내렸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냅킨 하나 주세요.”
시종이 내민 냅킨은 끝이 살짝 접혀 있었다. 시종은 그걸 보고 얼른 새것을 꺼내려 했다.
나는 먼저 받아 들었다.
“이걸로 돼요.”
접힌 천으로도 크림은 잘 닦였다.
시종은 빈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지막 한 입을 먹었다.
접시에는 붉은 열매의 작은 씨만 남았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오늘 저녁에 참지 않은 건 춤만이 아니었다.
◐
홀 안은 점점 더워졌다.
나는 빈 접시를 맡기고 발코니 쪽으로 걸었다. 열린 문 너머로 바람이 들어왔다.
문턱을 넘을 때 치맛단이 모서리에 걸렸다.
나는 멈춰 서서 천을 빼냈다. 진주 단추도, 치맛단도, 사람의 약혼도 걸리는 곳은 참 많았다.
이것만큼은 손으로 금방 풀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뺨에 찬 공기가 닿았다. 정원 쪽은 어두웠고, 난간 아래에는 낮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장갑의 손목 단추를 풀었다.
더운데도 끼고 있었더니 손바닥이 축축했다. 오른쪽 장갑을 벗어 왼손에 쥐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코니 문이 조금 더 열렸다. 문가에 선 남자가 안쪽에서 말을 건네는 사람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인사를 받으러 나온 사람이겠거니 했다.
나는 난간을 따라 옆으로 걸었다. 문 바로 앞을 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도 같은 쪽으로 몇 걸음 움직였다.
넓은 어깨가 실내의 빛을 가렸다. 이 계절의 수도에서는 보기 드문 털망토가 보였다.
나는 발을 멈췄다.
남자도 멈췄다.
고개를 들자 은회색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회색 눈이 나를 향했다.
장갑 안에 넣어 두었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광장의 눈은 없었다. 재판관석도, 판결문도 없었다.
그런데 그 얼굴은 있었다.
내 앞에 북부 대공 레녹스 발트하임이 서 있었다.
전생에 나를 처형한 사람이었다.
(2화 끝)
악녀 수칙: 서약할 때는 손을 숨기지 않는다.덮어 둔 수첩 위로 햇빛이 들었다.나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표지를 만졌다. 어젯밤 끼워 둔 쪽지 끝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마지막 장도 아직 비어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아가씨, 일어나셨어요?”“응.”한나가 문을 열었다. 양팔에 연보라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어제보다 눈이 조금 부었지만, 빗을 쥔 손은 멀쩡했다.“오늘은 잘 빗을 수 있겠어?”“네. 안 울 거예요.”“그건 해 보고 말해.”한나는 웃으면서 드레스를 의자에 펼쳤다.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을 열었다. 저택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하인들이 마지막 상자를 실었고, 데릭은 현관 계단에서 장갑을 끼고 있었다. 턱이 말끔했다.잘 깎았네. 결혼식에 늦게 온 데다 수염까지 남아 있었으면 두고두고 말했을 것이다.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앉았다.한나가 머리를 빗어 올렸다. 핀을 꽂을 때마다 어디가 당기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접시에 놓인 브로치를 집었다.“이건 네가 달아 줘.”한나가 두 손으로 받았다.“식이 끝나면 바로 떼어 드릴게요.”“급하게 떼지는 말고. 옷에 구멍 난다.”드레스 가슴께에 브로치가 달렸다. 한나는 핀을 확인하고 손바닥으로 옷감을 가볍게 눌렀다.어머니의 면사포는 마지막이었다.상자에서 꺼냈을 때는 길어 보이더니 머리에 얹자 등 뒤로 고르게 떨어졌다. 한나가 끝을 펴 주는 동안 나는 왼손의 은반지를 만졌다.“장갑은요?”“서약할 때 벗을 거야.”“지금은 끼실 거죠?”“응. 고삐 잡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한나가 장갑을 내밀었다.오른손을 넣기 전에 손바닥을 한번 폈다. 굳은살 위로 아침빛이 닿았다. 새삼 문지르지는 않았다. 없어져야 할 것도 아니었다.화장대 위 수첩은 작은 가방에 넣었다.한나가 문을 열고,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계단을 내려갔다.아버지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내 옷을 보고는 콧수염 아래 입술을 다물었다. 한나가 뒤에서 면사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아
악녀 수칙: 우는 사람에게는 빗을 맡기지 않는다.한나는 빗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아직 아가씨 머리를 다 못 빗었는데요.”“네 눈부터 닦아.”“안 울었어요.”나는 한나를 봤다.한나도 나를 보다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조금만요.”“조금 울어도 울긴 운 거야.”빗을 들고 돌아올 때부터 코끝이 빨갰다. 면사포 상자를 닫다가 눈을 훔치는 것도 봤다. 내가 거울만 보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한나는 내 뒤로 와서 풀린 머리카락을 모았다.“정말 조금만 더 하면 돼요. 이쪽이 아직 엉켜서요.”“그럼 그것만 풀고 앉아.”나는 빗을 돌려줬다.한나는 머리 끝부터 조심스럽게 빗었다. 익숙한 손이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엉킨 곳을 억지로 내리지도 않았다.문제는 빗질이 자꾸 멈춘다는 데 있었다.거울 속 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아프세요?”“아니.”“그러면 조금 더…….”말끝이 작아졌다.한나의 손이 내 머리 뒤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뒤로 내밀었다.“빗.”한나는 이번에는 순순히 건넸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를 의자에 앉혔다. 한나가 벌떡 일어나려 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내가 앉으라고 했지, 벌 받으라고 했니?”“아가씨가 제 머리를 빗어 주시면 이상하잖아요.”“머리카락은 네 게 더 얌전해.”한나의 머리핀을 뺐다. 단단히 말아 올린 머리가 목 아래로 풀렸다. 한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덮고 거울을 쳐다봤다.“왜 우는데?”“내일 결혼하시니까요.”“그건 알아.”“좋아서요.”나는 빗을 머리 끝에 댔다.“그런데 왜 사람 장례 치르는 얼굴이야.”한나가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웃기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엔 소리가 축축했다.손수건을 건네자 한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아가씨가 북부로 가셔도 저를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는데, 자꾸 여기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어 드리는 것 같아서요.”“내일도 빗어 줘야지.”“네.”“모레도.”한나가 손수건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북부에서도. 거기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색을 입지 않는다.“데려갈 거예요.”내 대답에 베른이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그럼 꽃 장식에 익숙해지게 해 둬야겠습니다.”먹구름은 제 결혼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턱을 높이 들었다. 나는 검은 목을 두드렸다.“꽃은 먹는 게 아니야.”먹구름이 내 손바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레녹스 쪽으로 코를 돌렸다.“그쪽도 없대.”레녹스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먹구름은 기어이 주머니 끝까지 냄새를 맡았다.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철저했다.베른이 고삐를 당겨 검은 코를 떼어 놓았다.“옷을 물지 않는 연습도 해야겠네요.”“그건 꼭 해 주세요. 제 치마는 길어질 테니까.”레녹스가 나를 봤다.“정했나.”“아직요. 색부터 고르려고요.”“같이 가지.”“드레스 고르는 데도요?”“그래.”베른은 먹구름을 보고, 레녹스를 보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둘 다 아가씨가 가는 데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레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나는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3월 30일, 드레스 가게의 창에는 하얀 옷이 걸려 있었다.치마를 풍성하게 벌리고 소매에는 고운 자수를 놓았다. 허리에 묶인 띠도 하얬다. 흠잡을 곳 없이 예쁜 옷이었다.내가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나는 내 망토를 받아 들었고, 레녹스는 문을 닫고 곧장 따라 들어왔다.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서 멈췄다.“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고르시나요?”“구경만 해요.”내가 먼저 대답했다.레녹스는 내 옆에 섰다.“필요하면 돕겠다.”“단추 잠그는 건 한나가 해 줘요.”“그럼 기다리지.”주인은 창가의 넓은 의자를 권했다. 레녹스가 앉으려다 내 쪽을 봤다.나는 가게 안쪽의 거울을 가리켰다.“저는 저기 있을 거예요.”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옮겼다.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한나가 내 망토를 접다가 웃었다.“전하, 제가 옷을 가리면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날은 내 것으로 삼는다.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레녹스가 내 장갑을 주워 들었다.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채 장갑을 끼우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 안쪽에 걸렸다.“빼고 낄까.”“싫어요. 방금 꼈는데.”레녹스는 장갑 입구를 넓혀 줬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반지가 천 아래로 가려졌다.괜히 손등을 한 번 쓸었다.“내려가면 벗으면 되지.”“알아요.”“계속 만지길래.”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이건 만져도 되잖아요.”“그래.”계단 아래에서 데릭이 우리를 올려다봤다.“차 식는다!”한나가 바로 데릭의 옆구리를 눌렀다. 오웬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리사는 접시 가운데에 과자를 더 쌓았다.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레녹스도 손을 잡은 채 따라 내려왔다. 빈 의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웬이 굳이 두 의자를 조금 더 붙였다.“너무 가까운데요.”내 말에 오웬이 의자를 도로 밀려 했다.나는 먼저 앉았다.“옮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오웬이 손을 거뒀다. 데릭은 차를 마시다 웃었고, 한나는 결국 손수건을 꺼냈다.레녹스가 내 앞에 과자 접시를 놓았다.나는 장갑을 벗고 은반지를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손에 붙었다.“차 식는다며.”데릭에게 말하자 그제야 다들 찻잔을 들었다.◐3월 28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북부보다 훨씬 질었다.바퀴가 물기 섞인 흙을 밟을 때마다 마차가 조금씩 기울었다. 나는 창밖의 길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편지를 다시 펼쳤다. 어제 묵은 곳까지 달려온 수도의 전령이 건넨 편지였다.왕의 허락은 짧았다.『레녹스 발트하임 대공과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혼인을 허락한다. 왕궁 정원을 예식 장소로 내주겠다.』끝에 찍힌 왕의 인장이 종이를 접어도 조금 튀어나왔다.그 밑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왕궁 정원을 쓸 수 있다는 말보다 그쪽이 더 뜻밖이었다.『4월 1일은 어떠냐. 준비는 해 두겠다. 네가 싫다면 다른 날로
악녀 수칙: 좋은 일 앞에서는 괜히 도망가지 않는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받아 들고 성 꼭대기를 다시 봤다.“몇 시에요?”“저녁 먹고.”“거기까지 올라가서 또 경주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레녹스가 내 손에 감긴 고삐를 풀어 줬다. 먹구름이 갑자기 고개를 들면 손가락이 조일 만큼 감겨 있었다.“말은 두고 와라.”“그럼 제가 불리한데요.”“이길 필요 없다.”고삐가 손바닥에 느슨하게 놓였다. 레녹스는 마지막으로 내 손가락을 살피고 놓았다.나는 탑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따뜻하게 입고 가면 돼요?”“그래. 바람이 분다.”“알았어요.”먹구름이 내 소매를 물었다. 당근이 남았다는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나는 소매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당근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요.”“같이 가겠다.”“마구간 안까지요?”레녹스가 먹구름을 봤다.“싫어하나.”검은 주둥이가 레녹스의 빈손을 한 번 더 확인했다.“손님이 빈손으로 왔다고 좀 아쉬운가 봐요.”레녹스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오늘은 충분히 먹었어요.”손이 순순히 내려갔다.먹구름만 몹시 불만스러웠다.◐3월 23일, 나는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그렇다고 접시를 비우지도 않고 일어난 건 아니었다. 북부 요리사는 남은 음식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부터 물었다. 괜히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문제는 옆자리에 앉은 데릭이었다.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데릭도 얼른 내려놓았다.“다 먹었어?”“응.”“배부르냐?”“그걸 왜 물어?”“그냥.”데릭의 접시에는 감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접시를 가리켰다.“오빠는 더 먹어. 훈련하고 왔다며.”“나도 배부르다.”맞은편의 한나가 물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잔을 들지도 않고 입술만 꾹 누르고 있었다.오웬은 그 옆에서 빵을 뜯었다. 이미 다 먹은 빵을 다시 뜯을 수는 없어서, 손끝에는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다.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뭐 있어요?
악녀 수칙: 이겼으면 받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른다.나는 계단 앞에서 발을 멈췄다.오웬의 질문 뒤로 잠깐 조용해졌다.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조금 뒤에는 발소리도 들렸다.나는 손수건을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영애.”오웬이 복도 끝에서 나를 불렀다. 아까 들고 있던 서류는 없었다.“길을 물으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맞아요. 먹구름이 달릴 만한 곳이 있나 해서요.”오웬은 내 얼굴을 보고 집무실 쪽을 한번 돌아봤다.“남쪽 들판에 길이 있습니다. 눈을 걷어 둔 곳인데, 상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고마워요.”“전하께서도 같이 가실 겁니다.”“제가 같이 가자고 안 했는데요.”오웬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웃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 뒤에서 오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길을 물었더니 동행부터 정해지는 성이었다.◐3월 22일 아침, 먹구름은 내가 들고 온 안장보다 주머니를 먼저 봤다.주둥이가 망토 옆을 꾹 눌렀다.“당근은 이쪽 아니야.”먹구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빨랐다. 처음 샀을 때부터 사람 말도 이만큼 잘 들었으면 베른의 허리가 덜 아팠을 텐데.나는 잘라 온 당근을 손바닥에 올렸다. 먹구름이 입술로 조심스럽게 집어 갔다.“오늘은 좀 달릴 거야.”남은 당근을 달라는 듯 고개가 더 내려왔다.“알았어. 준비부터 하고.”마구간 문이 열렸다. 찬바람을 따라 레녹스가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 아래에 승마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오셨네요.”“네가 간다기에.”“오웬이 벌써 동행을 정해 줬어요.”레녹스는 내 옆에 멈춰 섰다.“싫으면 여기 있겠다.”먹구름이 내 어깨 너머로 코를 뻗었다. 레녹스는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검은 주둥이가 손바닥으로 향했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가볍게 쳤다.“넌 좋겠지.”“너는.”레녹스는 각설탕을 먹이는 동안에도 나를 봤다.“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럼 간다.”정하기 쉬웠다. 대공을 데리고 들판에 나가면서 결재할 종이도, 납득시킬 사람도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