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현명의 명을 받고 집무실을 나온 고위 관료 뱀파이어인 남자는 500년의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만큼 세월의 흔적들이 그의 온 몸에 남아있었다.
평범한 인간들이 보면 무서움에 길을 비켜갈 정도로 풍체가 컸으며 인상도 꽤 사나운 편이었다.
지금은 관료복을 입고 왕 이현명의 곁에서 꼬장꼬장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는 본래부터 그런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노장은 조용히, 그리고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다시 ‘심판자’로서의 본능을 깨우고 있었다.
관료로서 살아온 시간보다, 전장을 누벼온 시간이 훨씬 더 길고 깊었다.
그는 자신의 바람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누군가가 오래된 무기를 다시 꺼낸 것처럼 은밀하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행정 문서에 도장을 찍던 손이었지만— 실은 언제든지 칼을 쥘 준비가 되어 있는 손이었다.
그는 다시, 과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도,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그의 능력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었다. 심판자의 본능은 뱀파이어가 가진 감각 중에서도 가장 예민하고,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오래된 기술이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숨 속에 섞인 ‘피의 파동’을 구분할 수 있었고, 신생 뱀파이어 특유의 불안정한 호흡 형태까지 징후로 감지할 수 있었다.
특히 적의 ‘냄새’— 전장에서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 피의 잔향은 오백 년이 지나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궁을 빠져나와 반란 세력들이 근거지로 하고 있다는 건물로 향하기 위해 궁 한쪽에 자리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의 아내와 딸 다음으로 사랑하는 고급 세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급 세단에 올라탄 그는 서서히 차를 움직여 서울 외곽에 자리한 폐건물들이 모여 있는 흔히 말해 재개발 구역으로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그는 주위를 둘러본 후 한 낡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있었지만 이미 색이 바래져 있어 어떤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낡은 건물의 옥상 끝에 서서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움직이고 있군.”
신생 군단의 우두머리, 그 존재는 이미 도시의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전쟁의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인간과의 융합, 평화 조약,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된 조용한 균형.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왕과 관료, 헌터, 심판자들이 힘을 모아왔는데— 이런 변종이 나타난다면 뱀파이어 세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바람 속에 실려 들어오는 냄새와 파장을 하나하나 분리하듯 느끼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피 냄새. 변질된 혈류의 잔향. 억누른 듯 흔들리는 기척. 심판자였던 그의 감각은 평범한 뱀파이어들의 후각이나 청각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저 ‘냄새’가 아닌— 기운의 방향, 농도, 세기까지 모두 좌표처럼 읽혀 들어왔다.
“...여기로 스며들었군.”
바람이 도시에 스미는 흐름 속에서 하나의 기척이 선명하게 분리되었다.
재개발로 사람은 모두 떠난 구역. 완전히 비어버린 폐건물들 사이— 특히 한 건물 안으로, 그 ‘우두머리급’ 뱀파이어가 기척을 바싹 죽인 채 숨어드는게 느껴졌다. 숨도 없이, 그림자처럼.
“그렇지... 거기로 숨었구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낡은 건물의 최상층 창문을 바라보았다.
빛도 들지 않고, 기척 하나 느낄 수 없을 것처럼 고요한 공간.
인간들은 귀신이 나올 것 같다고 표현할 만큼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곳.
하지만 그의 감각에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이 모조리 생생하게 들려왔다.
벽을 타고 올라가는 손끝의 마찰,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로 흘러 들어가는 바람의 잔향, 오래된 먼지 속에 스며든 진득한 피의 흔적.
그는 마치 오래된 짐승처럼 조용히, 아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 기척을 숨겼다면,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지.”
폐건물은 적에게도 은신처였고, 본래 심판자에게는 사냥터나 다름없었다.
그는 건물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바로 ‘그 뱀파이어가 숨은 층과 방의 위치’를 짚어냈다.
“마지막으로 숨을 곳이 거기라니...... 운도 없지.”
노장은 미소도 짓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반란 세력 뱀파이어들의 우두머리라지만, 사실 그 뱀파이어도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고참급 존재였다.
그러나 노장이 바라보는 기준에서는— 그조차 **“어린놈”**이었다.
수백 년 넘게 전장을 누벼온 그에게 저런 변질된 고위 뱀파이어 하나쯤은 결코 난적이 아니었다.
“한참 어린놈이 설치고 다니는군...”
그는 벽을 따라 조용히 건물 내부로 들어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린놈이라 해서 방심할 순 없었다.
저 우두머리는 미등록 뱀파이어.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본능을 억누르는 훈련을 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 힘은 넘치지만 완전히 통제되지 않은 폭주형이었다.
그런 상대는 기술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더 위험하다.
“마구잡이로 덤비면... 되레 내가 다칠 수도 있지.”
심판자로서 그는 수없이 많은 신생 변종들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다.
이런 부류는 패턴이 없고,
전술도 없고, 오직 ‘본능’만 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그들의 돌발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노장은 다 알고 있었다. 이런 놈들은 정면으로 상대하면 안 된다. 한 번에, 은밀하게, 심장과 척추를 동시에 끊어 아예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정답이다.
그는 폐건물의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기척 하나 없는 고요. 그렇지만 숨은 곳은 이미 파악했다.
“거기서 기척을 죽이고 있겠지..... 그래, 아주 잘 숨어봐라.”
노장은 허리에 두른 얇은 검집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한동안 쓰지 않던 심판자의 ‘본래 무기’. 그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칼날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울었다. — 은밀하게, 한 번에 끝낸다.
심판자가 다시 칼을 든 순간, 그 어둠 속엔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
혹여라도 자신이 싸우다 부상을 입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뒤에는 헌터들의 감시망, 그리고 해일과 은재가 그림자처럼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노장은 아주 작게 피식 웃었다.
“경미한 부상 정도면... 뭐, 괜찮지.”
수백 년의 경험으로 보나, 전투 감각으로 보나 이번 상대는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줄 존재가 아니었다. 설령 예측 불가한 움직임으로 덤벼들어 한두 군데 긁히고 스며들어도— 해일과 은재가 옆에서 지켜보는 이상 그 부상은 절대 치명적인 수준까지 번지지 못한다.
그리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는 이상 작은 상처는 금방 아물어 없어지기 때문에 그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늘 자신이 사냥을 오기 전 그 둘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부탁했을 때 투덜대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울렸다.
“또 우리 부려먹네—”
“심판자 할아버지는 휴식 몰라?”
“우린 쉴 틈이 없냐고요, 진짜.”
하지만 결국 그는 두 젊은 뱀파이어들의 입을 막기 위해 아주 효과적인 미끼를 걸었다.
혈청 커피 무제한. 이 한 마디에 해일은 짜증을 내는 척하면서도 이미 옷을 챙기고 있었고,
은재는 다크서클을 어루만지면서... ‘.....그래, 무제한이면 일단 따라가요. 대신, 신생 뱀파이어 사냥은 제꺼에요.’ 하고 움직였다. 정작 노장은 생각했다.
‘저놈들.... 말은 저렇게 해도 끝까지 다 지켜주지.’
이 작전은 겉으로 보기에 그냥 ‘노장 심판자 혼자 움직이는 제거 임무’처럼 보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며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자신의 후배들과 헌터들의 존재가 얼마나 든든한지.
자신이 앞에서 칼을 들고 움직이는 동안, 뒤에 있는 이들은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결코 눈을 떼지 않을 것이다.
노장은 칼을 움켜쥐며 어둠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갔다.
“좋다... 그럼 끝내볼까.”
우두머리는 이미 감지한 듯했다. 심판자의 기척이 자신에게 향해오자 폐건물 내부의 공기가 살짝 뒤틀릴 정도로 긴장이 번졌다.
“눈치 챘군.”
노장은 그 흐름을 읽었다. 숨결이 달라지고, 움직임의 파장이 흐트러지며 우두머리가 전투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러나 문제될 것 없었다. 그는 이미 이런 상대를 수백은 상대해봤다.
그리고— 놈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무너져가는 폐건물의 천장. 부서진 철골 한 줄기에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우두머리의 모습이 정확히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눈,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동공.
“....거기 있었군.”
두 존재의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노장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몸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공간을 가르며 천장으로 솟구쳤다.
바람이 찢기고, 그림자가 흔들리며 우두머리의 얼굴이 놀람으로 일그러지는 한 순간.
칼날이 어둠 속에서 은빛으로 번쩍였다.
—파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심판자의 검이 적의 척추를 정확히 가르는 감각이 손에 전해졌다.
우두머리는 기계가 고장난 듯 몸이 꺾이며 천장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떨어진 우두머리는 뱀파이어 닾게 눈동자를 돌려 고위 관료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고위 관료 뱀파이어는 슬며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숨막히는 공기를 뚫고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간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찰칵— 슥슥—
그들은 지체 없이 우두머리의 분리된 상체와 하체를 쇠사슬과 봉인끈으로 묶어 고정했다.
“심판자님... 하.... 진짜 감사합니다.”
가장 앞에 있던 헌터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 녀석은 심문이 필요해서...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데려가야 합니다. 가능하시다면... 심문실까지 저희와 동행하셔서 최종 심판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노장은 검을 털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지.”
일처럼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지금껏 수도 없이 반복해온 ‘사후 절차’를 완벽히 알고 있다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뒤돌아 폐허 속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해일과 은재는 여기 숨어 있는 신생 뱀파이어들 마무리 좀 부탁하지. 열 명 남짓이니 잘 처리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 명? 심판자님 걱정마세요. 꼬장한 우리 노장께서 노력해주셨는데 이정도 마무리는 저희가 해야죠.”
어둠 속에서 해일이 성큼 걸어나왔고, 그 뒤에서 은재가 도저히 피곤함을 숨기지 못한 눈으로
입을 삐죽 내밀며 등장했다.
“하... 진짜... 또 우리 시키네...”
그의 투덜거림은 익숙해질 정도였다. 노장은 비죽 웃었다.
“혈청 커피 무제한. 약속은 약속이다.”
은재의 표정이 0.1초 만에 바뀌었다.
“넵!! 명령 이행하겠습니다!!”
해일은 헌터들을 향해 손을 휙 흔들었다.
“여기부터는 우리가 한다. 심문이든 뭐든, 우두머리는 잘 부탁해요.”
헌터들은 고개를 숙이고, 우두머리의 봉인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노장은 짧게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우두머리는 해결이 되었지만, 반란 세력들이 커진 만큼 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지우는 순간 뒷걸음질을 했다.지율의 단호한 행동과 무서운 표정이 그녀를 더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무서움 때문이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 앉은 지우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서러움에 더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을 숙이는 그녀를 지율은 무표정하게 내려다 볼 뿐이었다.지율은 그동안 뱀파이어들의 정체가 인간 사회에 들어나지 않도록 노력 해왔고, 자칫 자신들의 정체가 들어나는 순간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모든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인간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며 살아왔다.루비 아워에서 마주하는 인간들 역시 직원들이거나,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극히 제한된 이들뿐이었다.그런데 지우가 그 깨져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선을 넘었다.지우가 자신의 정체를 몰랐다는 사실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상처받은 감정 하나에 휘둘려 익명 게시판에 지율의 이름을 언급했고, 그의 거절을 이유로 루비 아워의 이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율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지우씨.”지율은 낮게 숨을 고르며 그녀의 어깨에 시선을 떨구었다.“얼굴 들어서.... 날 봐요. 내가 진짜 인간처럼 보이나요?”그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지율의 눈동자가 천천히 변했다.평소에는 따뜻한 갈색을 띠던 눈빛이 피처럼 붉게 번져 올라갔고, 얇게 감춰져 있던 송곳니가 길고 뾰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지우는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던 것을 멈추고 지율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순간— 그녀의 다리가 풀리듯 힘이 빠지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은 파랗게 떨리고, 숨은 끊어질 듯 가쁘게 들이켜졌다.“하... 하아... 하.... 저...
지우는 방 밖에서 들리는 웅성 거림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 보았다.“엄마, 누구야?”등 뒤에서 들리는 딸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지우야! 방에 들어가 있어! 나오지말고 얌전히 기다려!”복도에서는 인터폰을 타고 들리는 모녀의 대화 소리에 요원들은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어머니!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저희 요구를 계속 거부하는 경우 문을 강제 개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지우는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엄마, 뭐야? 뭔데!!!”그 순간, 현관문 스마트키가 부서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아!!! 열게요!! 열게요!!”지우의 어머니는 공포에 휩싸여 손이 떨리며, 정신을 다잡으려 하다가 결국 현관문을 급히 열었다.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정부 요원들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검은 정장과 군복 차림의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배치되어, 지우의 앞을 가로막았다.“이지우 씨 되시죠?”“네... 그..런데요?”지우는 겁을 먹은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고 답을 하자 상대 남자는 날카로운 눈을 더 치켜 떴다.“저희는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저희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지우는 순간 얼어붙었다.자신 앞에 서서 신분증을 내밀며 ‘동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마주한 지우는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잠.... 잠깐요. 무슨... 무슨 일인데요?”
지우가 루비 아워를 그만둔 지 일주일이 지났다.아무리 머릿속을 뒤집어도 자신이 지율에게 들었던 이야기들과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 그 근본적인 이유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그리고, 이솔에게 느꼈던 질투심, 그리고 지율에게 자신의 마음이 거절당했다는 절망감이 한데 뒤엉켜 버린 탓이었다.그 감정들이 조금씩 부패하듯 마음속 깊이 스며들면서, 지우는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루비 아워를 떠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어디에도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속앓이만 계속하던 지우는, 결국 자신이 주로 눈팅만 하던 익명 게시판을 떠올렸다.그곳이라면, 얼굴도 이름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음속 깊이 쌓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익명이라는 그림자 뒤에 숨으면 누군가에게 위로 한마디쯤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결국 결심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익명으로 털어놓기로. 그러나 그 선택이, 지우에게 있어 최악의 한 수가 될지는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지우는 익명 게시판의 작성 칸을 열어놓고 잠시 손가락을 멈춘 채 숨을 골랐다.하지만 한 번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그는 **‘루비 아워’**라는 상호명과 지율의 실명을 적어 넣으며, 자신이 겪었다고 믿는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지율에게 느꼈던 그리움, 사랑 고백이 거절되던 순간의 절망감, 그리고 이솔에 대한 복잡한 질투까지.... 마치 누군가에게라도 꼭 알아주길 바라는 듯, 지우는 기억 속 감정들을 빠짐없이 글로 적었다.“내가 사장님만 바라보면서 루비 아워에 쏟은 정성이 얼만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지우는 이성적인 판단을 전혀 할 수 없
지우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지율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해일과 은재는 그를 위로하며 고생하고 있는 그 시간..... 이솔은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었다.이솔은 버스 창문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햇빛은 유리에 부딪혀 눈부신 반짝임을 만들고, 도심은 점점 멀어지며 산과 들이 펼쳐지고 있었다.“또 여행을 가도 되는 걸까....”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작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돌아가면 더 열심히 하면 되지.”지난 휴가 때 우연히 보았던 강릉의 바다는 아직도 선명했다.거센 파도 대신 잔잔하고, 바람도 부드러워 마음을 편하게 해주던 그 순간.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시 찾아갈 이유가 있었다.이번 여행을 다녀오면 해일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훨씬 선명해질 거라 믿으며, 이솔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환하게 웃었다.강릉 터미널에 도착한 이솔은 바로 택시를 타고 바로 바다로 향했다.그동안 고민으로 답답했던 마음은 바다를 보면 해결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이솔은 강릉의 바다를 보며 자신의 모든 고민들을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버린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마음 먹었다.루비 아워에서 근무를 시작 후 몇 년동안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여행을 해본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며 해일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다.루비 아워로 돌아가면 자신은 해일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예전의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보는 것이 가능할까.... 고민을 해보았다.해일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강릉으로 오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또렷하게 깨달았다.그가 보내온 작은 신호들, 가까워지려는 눈빛과 말투... 뒤늦게 떠올려보니 모두 의미가 있었다.그리고 이솔은
지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심장만이 요동쳤다.‘출근을 하지 말라니?’순간 머릿 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율을 바라보았다.“사장님....?” 목소리가 떨렸지만, 끝내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지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돌렸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 냉정함이 지우의 마음을 더 깊이 찔렀다.지우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지율을 보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말씀드린 대로 오늘 퇴근하세요. 그리고... 다시 출근할 일은 없을 겁니다.”지우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처를 껴안은 채, 단호하게 자신을 밀어내는 지율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사장님... 오늘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직원 휴게실로 들어가 자신의 사물함을 열어 가방을 챙겨 나왔다.지율에게는 목례만 한 채,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루비 아워를 나섰다.밖으로 나오자마자 지우는 코너를 돌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마음속 울분과 상실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눈물이 쏟아졌다. 발걸음도 채 가뿐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결국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지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비 아워 매니저 자리가 앞으로 2주 동안 비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마음속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지만, 일단 현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루비 아워 문이 열리고 인간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평소와 달리 김매니저가 아닌 지율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직원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지우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루비 아워 문을 밀었다.차가운 아침 공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매장 안에서,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지난 밤 정리해둔 생각들을 다시 떠올렸다. 어제 내내, 마음 한편이 뒤죽박죽이었다.짜증, 섭섭함,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조금의 질투까지.하지만 감정만을 앞세워 말을 꺼내면, 오히려 더 어린 티만 날 것 같았다.정확하게. 침착하게. 버벅거리지 말고. 지우는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뇌었다.지율 앞에 서면 늘 마음이 괜히 조급해지고 목소리도 이상하게 높아졌지만, 오늘만큼은 그러면 안 됐다.그는 사장이고, 자신은 직원이다. 그리고 자신의 불만과 감정은 분명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지우는 직원 휴게실 안 자신의 사물함 앞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좋아.... 오늘은 꼭 제대로 말하자.’루비 아워 매장 한켠에는 지율이 늘 그랬듯, 퇴근 전 매니저에게 꼼꼼히 인수인계를 정리해 둔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지우는 직원 휴게실 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살폈다.심장이 괜히 조금 빨리 뛰었다.오늘은 꼭 말해야 해. 흔들리지 말자. 문을 밀고 나간 순간, 지율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지우 씨,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이쪽으로 와요.”그 목소리는 따뜻했고, 말끝은 다정하게 내려앉았다.딱 그 한마디에 지우는 숨이 잠깐 멎은 것 같았다.가슴이 간질거리고, 눈길을 피하고 싶을 만큼 떨렸다.하지만—오늘만큼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됐다. 지우는 황홀함에 휘말릴 뻔한 자신을 다잡으며 머릿속의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그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