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현명의 명을 받고 집무실을 나온 고위 관료 뱀파이어인 남자는 500년의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만큼 세월의 흔적들이 그의 온 몸에 남아있었다.
평범한 인간들이 보면 무서움에 길을 비켜갈 정도로 풍체가 컸으며 인상도 꽤 사나운 편이었다.
지금은 관료복을 입고 왕 이현명의 곁에서 꼬장꼬장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는 본래부터 그런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노장은 조용히, 그리고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다시 ‘심판자’로서의 본능을 깨우고 있었다.
관료로서 살아온 시간보다, 전장을 누벼온 시간이 훨씬 더 길고 깊었다.
그는 자신의 바람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누군가가 오래된 무기를 다시 꺼낸 것처럼 은밀하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행정 문서에 도장을 찍던 손이었지만— 실은 언제든지 칼을 쥘 준비가 되어 있는 손이었다.
그는 다시, 과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도,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그의 능력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었다. 심판자의 본능은 뱀파이어가 가진 감각 중에서도 가장 예민하고,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오래된 기술이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숨 속에 섞인 ‘피의 파동’을 구분할 수 있었고, 신생 뱀파이어 특유의 불안정한 호흡 형태까지 징후로 감지할 수 있었다.
특히 적의 ‘냄새’— 전장에서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 피의 잔향은 오백 년이 지나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궁을 빠져나와 반란 세력들이 근거지로 하고 있다는 건물로 향하기 위해 궁 한쪽에 자리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의 아내와 딸 다음으로 사랑하는 고급 세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급 세단에 올라탄 그는 서서히 차를 움직여 서울 외곽에 자리한 폐건물들이 모여 있는 흔히 말해 재개발 구역으로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그는 주위를 둘러본 후 한 낡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있었지만 이미 색이 바래져 있어 어떤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낡은 건물의 옥상 끝에 서서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움직이고 있군.”
신생 군단의 우두머리, 그 존재는 이미 도시의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전쟁의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인간과의 융합, 평화 조약,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된 조용한 균형.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왕과 관료, 헌터, 심판자들이 힘을 모아왔는데— 이런 변종이 나타난다면 뱀파이어 세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바람 속에 실려 들어오는 냄새와 파장을 하나하나 분리하듯 느끼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피 냄새. 변질된 혈류의 잔향. 억누른 듯 흔들리는 기척. 심판자였던 그의 감각은 평범한 뱀파이어들의 후각이나 청각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저 ‘냄새’가 아닌— 기운의 방향, 농도, 세기까지 모두 좌표처럼 읽혀 들어왔다.
“...여기로 스며들었군.”
바람이 도시에 스미는 흐름 속에서 하나의 기척이 선명하게 분리되었다.
재개발로 사람은 모두 떠난 구역. 완전히 비어버린 폐건물들 사이— 특히 한 건물 안으로, 그 ‘우두머리급’ 뱀파이어가 기척을 바싹 죽인 채 숨어드는게 느껴졌다. 숨도 없이, 그림자처럼.
“그렇지... 거기로 숨었구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낡은 건물의 최상층 창문을 바라보았다.
빛도 들지 않고, 기척 하나 느낄 수 없을 것처럼 고요한 공간.
인간들은 귀신이 나올 것 같다고 표현할 만큼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곳.
하지만 그의 감각에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이 모조리 생생하게 들려왔다.
벽을 타고 올라가는 손끝의 마찰,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로 흘러 들어가는 바람의 잔향, 오래된 먼지 속에 스며든 진득한 피의 흔적.
그는 마치 오래된 짐승처럼 조용히, 아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 기척을 숨겼다면,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지.”
폐건물은 적에게도 은신처였고, 본래 심판자에게는 사냥터나 다름없었다.
그는 건물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바로 ‘그 뱀파이어가 숨은 층과 방의 위치’를 짚어냈다.
“마지막으로 숨을 곳이 거기라니...... 운도 없지.”
노장은 미소도 짓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반란 세력 뱀파이어들의 우두머리라지만, 사실 그 뱀파이어도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고참급 존재였다.
그러나 노장이 바라보는 기준에서는— 그조차 **“어린놈”**이었다.
수백 년 넘게 전장을 누벼온 그에게 저런 변질된 고위 뱀파이어 하나쯤은 결코 난적이 아니었다.
“한참 어린놈이 설치고 다니는군...”
그는 벽을 따라 조용히 건물 내부로 들어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린놈이라 해서 방심할 순 없었다.
저 우두머리는 미등록 뱀파이어.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본능을 억누르는 훈련을 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 힘은 넘치지만 완전히 통제되지 않은 폭주형이었다.
그런 상대는 기술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더 위험하다.
“마구잡이로 덤비면... 되레 내가 다칠 수도 있지.”
심판자로서 그는 수없이 많은 신생 변종들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다.
이런 부류는 패턴이 없고,
전술도 없고, 오직 ‘본능’만 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그들의 돌발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노장은 다 알고 있었다. 이런 놈들은 정면으로 상대하면 안 된다. 한 번에, 은밀하게, 심장과 척추를 동시에 끊어 아예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정답이다.
그는 폐건물의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기척 하나 없는 고요. 그렇지만 숨은 곳은 이미 파악했다.
“거기서 기척을 죽이고 있겠지..... 그래, 아주 잘 숨어봐라.”
노장은 허리에 두른 얇은 검집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한동안 쓰지 않던 심판자의 ‘본래 무기’. 그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칼날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울었다. — 은밀하게, 한 번에 끝낸다.
심판자가 다시 칼을 든 순간, 그 어둠 속엔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
혹여라도 자신이 싸우다 부상을 입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뒤에는 헌터들의 감시망, 그리고 해일과 은재가 그림자처럼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노장은 아주 작게 피식 웃었다.
“경미한 부상 정도면... 뭐, 괜찮지.”
수백 년의 경험으로 보나, 전투 감각으로 보나 이번 상대는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줄 존재가 아니었다. 설령 예측 불가한 움직임으로 덤벼들어 한두 군데 긁히고 스며들어도— 해일과 은재가 옆에서 지켜보는 이상 그 부상은 절대 치명적인 수준까지 번지지 못한다.
그리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는 이상 작은 상처는 금방 아물어 없어지기 때문에 그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늘 자신이 사냥을 오기 전 그 둘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부탁했을 때 투덜대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울렸다.
“또 우리 부려먹네—”
“심판자 할아버지는 휴식 몰라?”
“우린 쉴 틈이 없냐고요, 진짜.”
하지만 결국 그는 두 젊은 뱀파이어들의 입을 막기 위해 아주 효과적인 미끼를 걸었다.
혈청 커피 무제한. 이 한 마디에 해일은 짜증을 내는 척하면서도 이미 옷을 챙기고 있었고,
은재는 다크서클을 어루만지면서... ‘.....그래, 무제한이면 일단 따라가요. 대신, 신생 뱀파이어 사냥은 제꺼에요.’ 하고 움직였다. 정작 노장은 생각했다.
‘저놈들.... 말은 저렇게 해도 끝까지 다 지켜주지.’
이 작전은 겉으로 보기에 그냥 ‘노장 심판자 혼자 움직이는 제거 임무’처럼 보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며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자신의 후배들과 헌터들의 존재가 얼마나 든든한지.
자신이 앞에서 칼을 들고 움직이는 동안, 뒤에 있는 이들은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결코 눈을 떼지 않을 것이다.
노장은 칼을 움켜쥐며 어둠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갔다.
“좋다... 그럼 끝내볼까.”
우두머리는 이미 감지한 듯했다. 심판자의 기척이 자신에게 향해오자 폐건물 내부의 공기가 살짝 뒤틀릴 정도로 긴장이 번졌다.
“눈치 챘군.”
노장은 그 흐름을 읽었다. 숨결이 달라지고, 움직임의 파장이 흐트러지며 우두머리가 전투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러나 문제될 것 없었다. 그는 이미 이런 상대를 수백은 상대해봤다.
그리고— 놈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무너져가는 폐건물의 천장. 부서진 철골 한 줄기에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우두머리의 모습이 정확히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눈,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동공.
“....거기 있었군.”
두 존재의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노장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몸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공간을 가르며 천장으로 솟구쳤다.
바람이 찢기고, 그림자가 흔들리며 우두머리의 얼굴이 놀람으로 일그러지는 한 순간.
칼날이 어둠 속에서 은빛으로 번쩍였다.
—파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심판자의 검이 적의 척추를 정확히 가르는 감각이 손에 전해졌다.
우두머리는 기계가 고장난 듯 몸이 꺾이며 천장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떨어진 우두머리는 뱀파이어 닾게 눈동자를 돌려 고위 관료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고위 관료 뱀파이어는 슬며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숨막히는 공기를 뚫고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간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찰칵— 슥슥—
그들은 지체 없이 우두머리의 분리된 상체와 하체를 쇠사슬과 봉인끈으로 묶어 고정했다.
“심판자님... 하.... 진짜 감사합니다.”
가장 앞에 있던 헌터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 녀석은 심문이 필요해서...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데려가야 합니다. 가능하시다면... 심문실까지 저희와 동행하셔서 최종 심판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노장은 검을 털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지.”
일처럼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지금껏 수도 없이 반복해온 ‘사후 절차’를 완벽히 알고 있다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뒤돌아 폐허 속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해일과 은재는 여기 숨어 있는 신생 뱀파이어들 마무리 좀 부탁하지. 열 명 남짓이니 잘 처리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 명? 심판자님 걱정마세요. 꼬장한 우리 노장께서 노력해주셨는데 이정도 마무리는 저희가 해야죠.”
어둠 속에서 해일이 성큼 걸어나왔고, 그 뒤에서 은재가 도저히 피곤함을 숨기지 못한 눈으로
입을 삐죽 내밀며 등장했다.
“하... 진짜... 또 우리 시키네...”
그의 투덜거림은 익숙해질 정도였다. 노장은 비죽 웃었다.
“혈청 커피 무제한. 약속은 약속이다.”
은재의 표정이 0.1초 만에 바뀌었다.
“넵!! 명령 이행하겠습니다!!”
해일은 헌터들을 향해 손을 휙 흔들었다.
“여기부터는 우리가 한다. 심문이든 뭐든, 우두머리는 잘 부탁해요.”
헌터들은 고개를 숙이고, 우두머리의 봉인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노장은 짧게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우두머리는 해결이 되었지만, 반란 세력들이 커진 만큼 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안녕하세요.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을 연재하고 있는 초록 개미입니다.7월부터 지금까지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직장 생활과 집필을 병행하며 매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랜 고민 끝에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고 잠시 휴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이에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은 약 2개월간 휴재를 진행하려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그동안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돌아보려 합니다. 또한 앞으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마지막까지 어떻게 이어가야 작품을 더 좋은 모습으로 완성할 수 있을지 차분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이 작품은 제가 지난해부터 오랜 시간 고민하고, 한 장면 한 장면을 여러 번 수정하며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풀어온 만큼 제게도 무척이나 애정이 깊은 작품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품었던 마음과 앞으로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그래서 단순히 연재를 이어가기 위해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보다는, 잠시 멈춰 작품을 제대로 돌아보고 남은 이야기를 더 충실하게 풀어내고 싶습니다.약 2개월 동안 충분히 재충전하고 이야기를 정리한 뒤 반드시 연재를 재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부터 마음속에 그려왔던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야근 뱀파이어 : 밤의 연인, 낮의 비밀》을 꼭 완결하
회의 끝에 이지우의 처분이 결정되자 이현명은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이현명은 그렇게 말한 뒤 회의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선황이 떠난 후 현목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고, 그곳에는 비서와 백도진이 함께 자리했다.현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이지우, 그녀의 소멸은 결정되었으니 공식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좋겠군.”현목의 말에 비서와 백도진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모든 뱀파이어들에게도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백도진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며 현목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그렇습니다, 폐하.”비서 역시 곧바로 의견을 보탰다.“이번 판결 자리에는 뱀파이어 기자들과 방송국 관계자들도 함께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현목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음.... 맞는 말이야.”현목은 백도진과 비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그렇다면 백도진, 자네는 판결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게.”“네. 폐하.”현목은 이번에는 비서를 바라보았다.“자네는 기자들과 방송국 관계자들을 섭외하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게.”“알겠습니다, 폐하.”“그럼, 각자 자리로 돌아가게.”현목의 말이 떨어지자 비서와 백도진은 각자의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정중히
이현명과의 통화를 마친 현목은 자신의 앞에 긴장한 듯 서 있는 백도진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사위이자 뱀파이어 죄수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인 백도진이었다.“선황 폐하께서 내일 궁에 들리신다고 하셨다.”현목의 무뚝뚝한 말투는 백도진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뻣뻣하게 굳은 목을 겨우 움직인 백도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네. 알겠습니다, 폐하.”뱀파이어들의 황제이자 자신의 장인어른.두 가지 위치가 겹쳐지자 백도진은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현목은 그런 백도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자아가 사라진 이지우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백도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현목 역시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백도진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조금만 더 건드리면 정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현목은 그런 백도진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자네..... 내가 무서운가?”“.....”백도진은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 거리고 있었고 그 질문을 듣고 있던 뒤쪽의 비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었지만, 황제의 앞에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백도진과 비서는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 모른 척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살짝 시선을 내리깐 백도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곧 자신의 앞에 앉아 묵직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장인이자 황제인 현목을 바라보았다.결국 솔직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ldquo
화려한 궁이 아닌 새로운 보금자리로 거처를 옮긴 이현명은 생각보다 길어진 여행 탓에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제대로 둘러보게 되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기본적인 가구들만 배치되어 있는 탓인지 집 안은 넓은 만큼이나 공허한 느낌이 강했다.이현명은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집이 넓군.”자신의 집을 처음 본 소감치고는 지극히 심플한 한마디에 지율은 결국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기본적인 가구만 배치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지율은 빈 공간을 둘러보며 말했다.“앞으로 선황 폐하께서 취향에 맞게 하나씩 꾸미시면 됩니다.”“그런가?”이현명은 다시 한번 집 안을 둘러보았다.넓은 거실과 비어 있는 공간들은 궁과 비교하면 소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했다.“흠.....”이현명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그렇다면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가면 되겠군.”“네.”지율은 미소를 지었다.“선황 폐하께서 직접 꾸미신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집이 될 것 같습니다.”이현명은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그래.....”“그럼 저는 이만 루비 아워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지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몇 걸음 옮기던 지율이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신경 써줘서 고맙네.”
오랜 시간 이어진 회의 끝에 마침내 완벽한 프로포즈를 위한 준비가 모두 마무리되었다.그리고 기다리던 날.루비 아워에서 진행된 해일의 프로포즈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해일의 진심 어린 고백과 준비된 순간들을 마주한 이솔이....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낸 것이다.정작 프로포즈를 준비한 해일을 비롯해 지율과 하윤, 은재까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이솔 씨, 괜찮아요?”해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솔의 눈가를 살폈다.“너무 갑작스러웠나?”해일이 조심스럽게 이솔을 다독이자, 이솔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해일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해일 씨, 저..... 정말 감동했어요.”이솔은 다시 한번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언제 다 준비한 거예요?”해일은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몰래 준비하느라 꽤 오래 걸렸지.”“정말.....”이솔은 감동한 듯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해일은 그런 이솔의 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솔 씨.”“네.”“나랑.... 오래도록 함께해 줄래요?”이번에는 이솔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해일은 이솔의 허락을 듣는 순간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아주 오랜 시간을 돌아 마침내 이솔과 이어질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그토록 바
은재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하윤에게 조금씩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그동안 은재는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하윤에게 다가갔다.처음에는 그런 은재의 행동에 당황하던 하윤도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은재와 함께 있는 시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한편 해일은 이솔에게 완벽한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반지를 고르는 것부터 프로포즈 장소를 꾸미는 일까지 하나하나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지율과 하윤, 은재의 도움을 받았다.특히 은재는 해일의 프로포즈 준비를 돕기 위해 루비 아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하윤 역시 자연스럽게 그 곁에서 함께 준비를 도왔다.은재는 하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하윤은 좀처럼 자신의 곁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았다.'하... 어렵네......'은재는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분명 자신이 먼저 다가가면 하윤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자신이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하자 하윤은 오히려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은재는 점점 더 안달이 났다.“이유가 뭐지....?”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은재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일이 다가왔다.“무슨 고민이야?”“하윤씨가 자꾸 나를 피하고 있어서.”은재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하자 해일은 잠시 하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내가 경험자로서 조언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