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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우두머리 심판

Author: 초록 개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7 00:02:08

해일과 은재는 폐건물의 어둠 속으로 흩어져 신생 뱀파이어 사냥을 시작했다.

폐허의 복도는 이미 피비린내가 진하게 퍼졌고, 금속이 긁히는 소리, 짧은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특히 은재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거칠고 날카로웠다.

그는 상대를 반드시 한 번에 끝내는 방식이 아니라, 마치 ‘본능을 풀기 위해’ 상대를 조각내듯 사냥하고 있었다.

손톱 끝의 미세한 파동까지 날카롭고, 한 번 쓰러뜨린 적에게도 숨결이 남아 있으면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 끊어버렸다.

그의 눈은 이미 붉은기를 넘어 맹수의 색을 띠고 있었다.

“....은재야. 진정해.”

해일은 폐허의 한쪽 벽에 기대 은재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최대한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앞장서서 적을 제압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의 행동 하나가 은재를 더 자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해일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은재의 본능이 더 폭주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주 직전의 위험한 징후는 계속 보였다.

은재가 한 신생의 목을 꺾고 바닥에 내던진 다음,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훔쳐 입가에 바르듯 스쳐 지나갔다.

“은재야!.”

해일이 좀 더 낮고 매서운 목소리로 부르자 은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빛은 흔들렸고, 어딘가 취한 듯한 표정이었다.

“형....... 이 정도는 괜찮아. 정말이야.”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이미 이성을 거의 잃어가는 흔적이 담겨 있었다.

해일은 그 표정을 보자 짧게 욕을 머릿속에서 삼켰다.

‘젠장... 이러니까 내가 뒤에서 봐야 하는 거잖아.’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면서도 은재가 자극받지 않도록 기척을 최대한 끝까지 낮춰 유지했다.

남아 있는 신생 뱀파이어는 세 명 남짓. 은재는 이미 다섯 명을 처리한 상태였고, 지금 남은 이 두 명을 본능이 사냥감으로 인식하기 전 정리해야 했다. 해일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은재야. 이제 그만. 나머지는 형이 마무리할게. 너는 이제 뒤로 오자”

은재는 잠시 멍하니 해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형이 하게 놔둘까....”

은재는 무엇인가에 취한 듯한 목소리였지만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표정에 그대로 들어났다.

공격성을 잃은 듯 살짝은 비틀거리는 것이 불안정해 보였지만 은재의 눈은 짐승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동공은 축소되고, 잇몸은 조금 드러난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그 안쪽 어딘가에서 마지막 남은 이성이 간신히 밧줄을 잡아 매달려 있는 듯 흔들렸다.

해일은 천천히 손바닥을 보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 은재야.. 형이 정리할게. 너는 형 뒤로 와 있어. 응?”

목소리는 최대한 낮고 안정적이었다. 지금 은재에게 필요한 건 명령이 아니라 ‘안전한 소리’였다.

“오늘 마무리하고... 형이 맛있는 커피 타줄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은재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커피’라는 단어를 향해 본능이 재빨리 반응한 것이다.

번들거리던 눈동자가 조금씩 수그러들고, 익숙한 그 흐리멍텅하지만 동시에 칼날처럼 예리한 은재의 눈빛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내려가고, 한껏 곤두섰던 어깨도 힘이 빠졌다.

은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해일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해일은 점점 이성이 돌아오고 있는 은재를 보고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은재야.... 형이 마무리하는 동안 노래 들으면서 눈 감고 있어. 알았지?”

해일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은재의 귀에 무선 이어폰을 살짝 꽂아주었다.

은재가 평소에 좋아하던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하지만 분명하게 내려앉았다.

“가만히 있어. 형 금방 끝내고 올게.”

해일은 은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천천히 몸을 돌려 신생 뱀파이어들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공기가 달라졌다.

평소에 보이던 장난기 많은 동네 형이 아닌— 왕실 심판자 해일.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고,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해일의 손끝에서 얇은 붉은빛이 번쩍였다. 심판자에게만 허락된, 영혼의 잔재를 정화하는 기술.

“고생 많았다. 이제 쉬어라.”

그가 손을 내리긋는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신생 뱀파이어들의 몸은 조용하게,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비명도, 울음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무의미하게 태어난 생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일, 그것이 심판자로서 해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뒤편에서는 은재가 이어폰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그의 손끝은 아직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이 그의 날 선 감정을 천천히 덮어가고 있었다. 해일은 마지막 한 줌의 재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야, 은재 쪽으로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일과 은재가 신생 뱀파이어들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왕실 한가운데, 깊숙한 지하에 위치한 심판실에서는 또 다른 처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로 헌터들과 고위 심판자에게 끌려온 우두머리 뱀파이어.

그는 원래부터 흉포한 힘을 가진 존재였지만, 지금은 살점이 너덜거리는 상체만으로 바닥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피가 아닌 검붉은 연기가 상처에서 새어 나왔다.

불완전하게 변형된 뱀파이어 특유의 흔적이었지만, 그는 꽤 오랜 시간을 살아 온 뱀파이어로 꽤나 정신력이 강했다.

“대상 확보. 심판실에 인계합니다.”

헌터들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리고, 심판실의 거대한 문이 ‘쿵’ 하고 닫혔다.

왕실 심판대의 위쪽에는 이현명 왕의 측근인 최고 심판관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 중심에는 묶인 우두머리가 그대로 내던져지듯 떨어졌다.

“크르르.. 인간 주제에... 감히...”

우두머리는 입안 가득 피와 연기를 토해내며 험악하게 웃었다.

고위 심판자 중 한 뱀파이어가 주문을 외우자 우두머리를 감싸고 있던 사슬이 풀렸다.

푸른 봉인의 사슬이 우두머리의 몸 위로 떨어지며 상체를 바닥에 완전히 고정했다.

근육이 뒤틀리고,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 기원, 변이 시점—모두 불명. 왕실의 허가 없이 인간 사냥을 지시한 죄, 그리고 미등록 뱀파이어 군세를 형성한 죄로...... 지금부터 심판을 진행한다.”

심판관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냉정했다.

인간 헌터들은 심판실의 분위기가 더 음산해지는 순간,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촬영 장비를 켰다.

손에 쥔 바디캠과 고성능 카메라, 그리고 어깨에 고정된 녹화 장치들. 빨간 녹화등이 심판실의 어둠 속에서 차갑게 깜박였다.

그들은 한 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우두머리 뱀파이어의 비틀린 표정, 몸을 고정한 봉인의 사슬, 심판관들이 사용하는 기술의 반응까지 전부 담아냈다.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한치의 거짓도 없이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뱀파이어 우두머리는 마지막 남은 기운으로 주위를 감지하려 애썼다.

상체만 남은 몸이지만, 그는 오랫동안 감각을 무기로 살아온 존재였다.

공기의 온도, 땅의 진동, 피 냄새— 그런 것들만으로도 상대의 위치와 의도를 판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달랐다.

심판실을 가득 채우는 이 정적은, 자신과 같은 야생식 변종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고요였다.

‘이건... 사냥꾼의 기척이 아니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된 훈련을 받은... 왕실의 심판자들.’

자신처럼 피로만 배운 짓누르기식 전투가 아니라, 세기를 거쳐 정제된 기술과 통제된 힘.

그 차이가 이토록 압도적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실감했다. 우두머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상체만 남아 고개만 돌려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난...”

잘린 갈비뼈 사이로 공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가 섞여,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난 지금의 이 세계의 시스템이 싫었다.”

심판관들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이 인간들과 평등하게? 같이 살고, 규정에 묶여 사냥도 못 하고... 그런 굴욕을 감수하며 존재해야 한다니—”

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찮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은 마지막 순간까지 오만했다. 그 오만함만은, 상체만 남은 지금도 부서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왕이 되고 싶었다.”

목소리에는 야망이 아니라, 믿어 의심치 않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뱀파이어가 인간들 위에 서고... 약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인간들을 지배하고... 사냥의 두려움을 그들의 피에 새겨 넣는 시대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심판실 공기가 차갑게 갈라졌다. 심판관들 중 몇 명은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위쪽 단상에서, 이현명 왕이 그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네가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믿었나?”

우두머리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고개를 들며 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웃음이 번졌다.

더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 자의, 기묘한 체념과 패배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랬다... 난 왕이 될 자신이 있었지....”

말끝은 여전히 오만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난...”

그는 끝내 말의 뒷부분을 잇지 못했다. 말을 잇기 전에 동공이 흔들리며 흐릿하게 풀려갔다.

상체만 남은 몸뚱이가 헐떡이며 비정상적으로 들썩거렸다.

핏줄이 목 아래에서 검게 부풀어 오르고, 폐 기능이 급격히 망가져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현명 왕의 표정은 연민도, 분노도, 경멸도 아닌— 단지 결과를 확인하는 자의 냉담한 침묵이었다.

곧 그는 고위 심판자들과 인간 헌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심판을 시작하도록.”

명령은 짧았지만, 그 한마디에 심판실 전체의 공기가 무너져 내렸다. 심판자들은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심판 대열을 갖추었다. 한 명의 심판자가 우두머리에게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단 하나의 감정도 배어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도구’로서, 왕의 명을 집행하기 위한 존재.

“질문하겠다.”

심판자의 목소리가 심판실 벽에 메아리쳤다.

“반란 세력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우두머리는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지만, 입술이 바들바들 떨릴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움켜쥐려 했으나, 그에게는 더 이상 팔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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