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고?’예원 별장이 정말로 고은서의 집인 것처럼 말했다.곽승재의 이런 아무 의미 없는 질문에 고은서는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바로 떠났다.주방에서 나온 이미숙은 급급히 고은서를 불렀다.“사모님, 어디 가십니까? 아직 아침도 안 드셨습니다.”“제가 시간이 빠듯해서 아침을 못 먹을 거 같아요.”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문을 나섰다.고은서는 어깨가 채 낫지 않은 데다가 손바닥까지 다쳐서 직접 운전을 하기에는 무리였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콜택시를 부르려고 한순간, 곽승재가 집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외할아버지댁까지 데려다줄게.”“아니...”“외할아버지의 얼굴도 볼 겸, 드릴 물건도 있어서 그래.”고은서가 거절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곽승재는 그녀에게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제기했다.이때 주민기는 비싼 보양식 선물 박스를 몇 개 들고나왔으며 이미숙은 그녀에게 줄 도시락을 두 통 들고 나왔다.“사모님, 아무리 시간이 급하다고 해도 아침을 안 먹으시면 안 되십니다. 이 안에 디저트들을 준비해 놨습니다. 차 안에서 배 좀 채우시기를 바랍니다.”기사님은 차를 그들의 앞에 세웠다.고은서는 재차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민기가 선물 박스와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는 것을 지켜보고는 이미숙이 주는 도시락을 건네받고 뒷좌석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예원 별장을 나섰다.차 안에서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으며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기사님은 운전에 집중하느라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주민기는 이런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그는 심지어 후회되었다. 곽승재는 그더러 사물함에서 선물 박스를 조금 챙기라고 했지, 반드시 꼭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주민기는 물건만 놔두고 핑계를 대서 몸을 빼기 조금 난처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덩그러니 바보처럼 차 안에서 이 정적을 즐기게 되었다.또 한창 지났을 때, 주민기는 고은서가 주동적으로 입을 열기는 불가능하다는
곽승재가 물었다.“왜 운호 산장에 돌아가지 않은 건데?”고은서는 대답하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그러자 곽승재의 표정이 굳어지며 불쾌한 기색이 감돌았다.“약을 바꿔치기 한 일이 너랑 관련이 있는지는 일단 내버려두고, 네가 아저씨를 차서 허리를 다치게 했으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가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니야?”그 말을 들은 주민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큰일 났다.곽 대표가 이렇게 말하면 둘 사이가 더 어색해질 텐데.아니나 다를까 고은서는 그 말에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내가 뭘 잘못했는데? 네가 병원에 오라 해서 왔건만. 꼬치꼬치 캐묻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돌아도 못 가게 하는 거야? 아주 그 자리에서 나한테 죄명을 씌워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나봐? 아저씨랑 백유미한테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주민기는 이 상황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어 운전기사에게 급히 신호를 보냈다.어서 칸막이를 내려야만 이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을 테다.칸막이가 내려가자 곽승재도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더는 참지 못했다.“고은서, 지금 이 상황에서도 네가 억울하다는 거야?”“약봉지에 네 지문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어? 아니면 약국에 가기 전에 백유미가 나타난 데에 화가 난 적도 없다고 말하는 거야?”역시 곽승재는 이미 지문 검사를 했던 것이다.“백유미는 GS그룹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야. 이사 자리에 있는 것도 그만한 실력이 있어서고. 본사에 와서 원하는 자리를 고르라고 기회를 줬는데 네가 거절했잖아. 그런데 지금 와서 또 백유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설치고. 대체 원하는 게 뭐야?”곽승재가 물었다.“그쪽이랑 거리 두는 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아는데?”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서류에 도장 찍는 걸 미루면서 애매하게 구니까 백유미가 계속해서 이런 자극적인 행동을 하는 거잖아!”“자기 몸과 생명을 걸고 장난칠 사람이 어디 있어?”“있잖아. 백
곽승재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는 고은서의 귀에 비웃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고은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떻게 된 거라뇨? 자갈이나 깨진 유리가 살 속으로 박힌 것 같은데 짚이는 군데 없어요?”의사가 고은서 대신 대답했다.곽승재는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혹시 쓰레기통 위에 있던 방화용 자갈에?”고은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그녀를 타이르듯 말했다.“아가씨, 손을 이렇게 다쳤으면 조심했어야죠.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찢어져서 얼마나 아프겠어요. 괜히 고생을 두 번 하잖아요.”“아내가 다친 줄 몰랐습니다. 내가 너무 세게 잡았어요.곽승재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의사는 고개를 들며 곽승재를 쳐다보았다.“아내라면서 다친 것도 모르셨어요?”평소 자신감 넘치던 곽 대표도 그 순간 의사의 한 마디에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는 헛기침하며 변명하듯 말했다.“당시 상황이 좀 급해서요.”“그럼 현장에 있었다는 얘기네요? 그런데도 아내가 다친 걸 몰랐어요?”의사는 더 놀란 듯 물었다.“아내가 다친 것보다 더 급한 일이 뭐가 있길래요?”곽승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고은서는 그런 그를 보며 속이 시원했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곽승재 대신 해명해 주었겠지만, 지금은?잘 됐다. 이렇게 당해도 싸지.“혹시 강제로 결혼하신 건 아니죠? 평소에도 저렇게 무관심한가요?”의사는 조심스레 고은서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런 셈이죠.”비록 맞선으로 만난 건 아니지만 곽승재가 그녀와 결혼한 건 할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지금 진료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험담하는 겁니까?”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사에게 말했다.“환자 진료나 제대로 보시죠.”의사는 다시 한번 곽승재를 훑어보았다. 그의 큰 키와 기품 있는 외모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아가씨, 남편 고를 때 이렇게 겉만 멀쩡한 사람 말고 진짜로 잘
“됐어.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을 끊었다.“네가 의사라도 돼? 알면 뭐 어쩔 건데. 상처가 저절로 낫는 것도 아니고.”곽승재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고은서는 마치 온몸에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지금 상대로는 제대로 대화할 수조차 없었다.결국 곽승재는 이 주제를 접고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이거 받아.”고은서는 웃음을 터뜨렸다.“뭐야,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거야?”이전에 고은서가 그에게 ‘10만 원 한 달 패키지’ 라 조롱했던 일이 있었기에 곽승재는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곽승재는 차분하게 말했다.“너희 외할아버지와 같이 지방에 동행할 시간이 없으니까 여행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할게.”고은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필요 없어. 우리 집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돈은 필요 없어.”고승아가 ‘우리 집’이라 콕 집어 말하자 곽승재는 그 사이에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속에서 불쾌함이 밀려왔지만 곽승재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면 되겠네?”그 말을 듣자마자 고은서는 잽싸게 카드를 낚아챘다.지금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혹시라도 진짜 화가 나서 따라오겠다고 하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니까.어차피 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었다.곽승재는 그녀의 속내를 읽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몇십 분 후, 차는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왼손에 외투를 걸친 채 작은 가방을 들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고준석은 이미 마당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은서는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할아버지!”“은서야, 네가 할아버지랑 같이 해찬시에 가고 싶다고 할 줄이야. 예전에는 기후가 너무 건조하다고 싫다고 하더니.”고준석은 놀란 듯 물었다.고은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충분히 수분 보충할 스프레이랑 마스크팩도 챙겨왔다고요. 그냥 외할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어서요.”두 사람은 손을 잡고 웃으며 얘기 나누고 있었다. 그때 곽승재가 보따리를
곽승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곧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운전기사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바쁘시면 점심은 함께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짐을 챙겨야 할 것들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셨어요.”이 말은 그야말로 ‘그만 가라’는 뜻이었다. 곽승재는 잠시 서 있다가 이내 걸음을 돌려 차 쪽으로 향했다.운전기사가 재빨리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지만 곽승재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그리고 곧 결심한 듯 다시 돌아서서 집 안으로 걸어갔다.그때 고은서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거실 테이블에 앉아 태블릿으로 해찬시의 관광지들을 보고 있었다. 고은서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보는 애교 섞인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할아버지.”곽승재가 낮은 소리로 불렀다.고준석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승재야, 아직 안 갔나?”“가보려던 참이었는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곽승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은서의 손이 제 부주의로 다쳤습니다. 이 일에 대해 사과드리려고요.”고준석은 그제야 외손녀가 손을 옷 안에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어디 다친 거야? 손 좀 보자!”고준석이 다급하게 말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째려보며 귀찮다는 듯 손에 감긴 붕대를 내보였다.“어제 실수로 작은 돌멩이에 찍혔어요.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할아버지.”고준석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넌 원래 아픈 걸 못 참잖니. 평소엔 가시 하나만 뽑아도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이렇게 붕대를 감을 정도면 얼마나 아팠겠어. 소독도 해야 하고 약도 발라야 할 텐데, 어떻게 참았대.”예전의 고은서는 사소한 상처에도 엄살을 부리곤 했다.작은 상처만 있어도 외할아버지와 도우미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야 겨우 진정했었다.곽승재는 한때 할머니에게 등 떠밀려 고은서의 집에 와서 아팠던 고은서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그때 외할아버지는 고은서에게 용감한 아이라고 칭찬하며 약을 먹이려 했지만, 고은서는 약 한 모금을 마시자마자 쓴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뱉어냈었
기사는 뒤에서 들려오는 곽승재의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대표님, 저한테 물으신 건가요?”곽승재는 대답하지 않았다.기사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저희 집은 모든 일을 아내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도 제가 나설 필요가 없죠.”그가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았지만 곽승재는 더 이상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의사도 현장 상황을 모른 채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고은서가 백유미와 관련된 일로 화를 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무조건 그녀의 편을 들어줬다면 오히려 더 제멋대로 굴었을 거였다.게다가 고은서가 다친 것도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떠난 뒤에야 뒤늦게 알게 되어 연락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연락이 닿지 않았었다.따라서 이번 일은 자신이 잘못 처리한 게 아니라고 곽승재는 생각했다.고은서가 이번 일로 화가 나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외국으로 간다 해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곽승재는 스스로 이성적으로 정당화하려 했다.하지만 고은서의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편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고은서는 외할아버지와 오춘식과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여자였기에 외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쓸 수 없었고, 전생에서 외할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알 수 없었기에 더 안전하게 오춘식까지 동행하도록 했다.탑승 수속을 마친 후 세 사람은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오춘식과 외할아버지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 화면을 확인하니 전미자였다.이 시간에 왜 전화를 했을까?고은서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할머니, 무슨 일이세요?”전미자가 다정하게 물었다.“은서야, 오늘이 승재 아빠가 귀국하는 날이잖니.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밥 먹자고 약속했었잖아.”고은서는 순간 머리를 탁 쳤다. 이 중요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침에도 곽승재는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물론,
전미자와의 통화를 마친 고은서는 탑승 시간이 다 되어 외할아버지와 오춘식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약 두 시간 후, 세 사람은 해찬시에 도착했다.시간이 늦은 터라 그들은 먼저 호텔에 묵기로 하고 다음 날 아침 외할아버지의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병원에 가기로 했다.그 후, 고은서는 외할아버지와 오춘식을 모시고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호텔로 돌아온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발견했다.식사할 때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전화뿐만 아니라 ‘도착했어?’ 라는 짧은 메시지도 와 있었다.이미 한 시간도 더 지난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굳이 답장할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들고 욕실로 향했다....예원별장.곽승재는 할머니 댁에서 돌아와 거실로 들어섰다.이미숙이 다가와 물었다.“차 드릴까요, 대표님?”곽승재는 고개를 저었다.평소 집에 돌아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왠지 집 안이 허전하게 느껴졌다.“어제 차에서 가져오신 그 떡은 냉장고에 넣어놨습니다. 누구 드릴 건가요? 아니면 사모님에게 드릴까요?”이미숙이 물었다.곽승재는 떡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원래는 고은서가 외할아버지와 전미자를 위해 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일들이 꼬이면서 결국 누구에게도 주지 못한 채 잊혀졌다.고은서는 항상 섬세한 마음으로 어딜 가든 가족을 생각하며 작은 선물을 준비하곤 했다.그녀는 예전에도 그와 함께 새로운 음식점을 탐방하고 싶어 했지만 곽승재는 시간 낭비라며 매몰차게 거절하곤 했다.그래서 고은서는 늘 직접 음식을 사 와 곽승재가 집에 돌아오면 함께 나누려 했지만, 곽승재는 항상 바쁜 척하며 그녀 곁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고은서의 기대에 찬 눈빛이 점점 실망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 힘들었지만, 다음 날이면 고은서는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다시 그의 곁을 맴돌았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떡 어떻게 할까?’몇 초간 기다렸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이 진동하며 알림이 왔다. 화면을 보니 육현석이 보낸 메시지였다.메시지에는 고은서의 SNS 캡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형, 형수님 어디 가신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운호산장에서 잘 보내고 계셨잖아?’곽승재는 그에게 답장하지 않고 보내온 사진을 확대했다.사진 속에는 고은서가 찍은 맛집 음식 사진과 그녀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셀카가 있었다.그리고 사진이 올라온 시간은 겨우 5분 전.그러니까 고은서는 자신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못 본 척하고 답장하지 않았던 것이다!바로 그때, 주민기가 호텔 프런트와 고은서의 객실 번호를 보내왔다.곽승재는 주저하지 않고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고은서는 일회용 장갑을 끼고 샤워를 마친 뒤, 어깨에 약을 뿌리고 나서 침대에 편안하게 누웠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 앨범을 열고 SNS에 올릴 사진을 골라 보정을 하기 시작했다.그 사이 곽승재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지만 이제는 아예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사진을 신중하게 골라 게시물로 올리고는 다른 예쁜 사진들도 천천히 구경하려던 찰나 방 안의 전화기가 울렸다.호텔 프런트에서 걸려 온 전화겠거니 생각하며 고은서는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해맑은 여성의 목소리에 곽승재는 잠시 멍해졌다.가득 차오르던 짜증도 순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여보세요? 무슨 일인가요”고은서가 다시 불렀다.그제야 곽승재는 입을 열었다.“왜 내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는 거야?”“...”고은서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가 호텔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은서, 내가 지금 묻고 있잖아.”곽승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고은서는 귀를 살짝 막으며 차갑게 말했다.“무슨 일인데?”그녀의 싸늘해진 목소리에 곽승재는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내 메시지 못 봤어? SNS에 글 올릴 시간은 있으면서 왜 내 메시지엔 답이 없어?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닌 데 없는 사람 취급하겠다는 거야?”헛웃음이 새어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