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범준은 박지연이 해성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GS그룹의 대표인 곽승재와 아는 사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곽 대표님, 우린 그 누구도 모욕할 의도가 없었어요. 그저 집안일을 처리하는 것뿐인데 갑작스레 찾아와서 우리가 며느리를 괴롭힌다고 몰아붙이는 게 예의에 맞다고 생각하시나요?”“피해자인 것처럼 말을 바꾸지 마세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괴롭혔는지 안 괴롭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거든요.”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우리가 언제 쟤를 괴롭혔다고 그래? 지금 그쪽한테 괴롭힘당하는 건 우리야. 레스토랑에서 만난 남자로 모자라서 또 두 명이나 불러와?”조수연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어머니, 그만 하세요.”온승준이 미간을 어루만지며 조수연을 말렸다. 그리고 이내 뒤돌아 곽승재와 민시후에게 말했다.“두 분도 이만 가보시죠.”“지연아, 너도 은서 씨랑 먼저 돌아가 봐.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지금 이 상황에 말을 더 해봤자 조수연과 온범준 귀에는 변명으로 들릴 것이다. 박지연도 더는 자신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는지라 고은서와 함께 라이트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자.”곽승재와 민시후가 먼저 나가고 박지연과 고은서가 두 사람 뒤를 따라 나가려고 했는데 뒤에서 조수연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자기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그때 당시 승준이가 혜린이 새 남자친구를 보고 자극받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너랑 왜 결혼했겠어.”박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녀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분쟁을 그치고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려고 노력한 이유가 온승준한테 그나마 미련이 남아서였다.그녀는 온승준과 결혼하게 된 게 하늘이 준 계시라고 생각하면서 그와 남남이 되기 싫었다.그러나 조수연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환상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나랑 결혼한 게 내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고 하늘이 준 계시도 아니었어. 그저 새 남자가 생긴 첫사랑을 약 올리기 위함이었어.’“지연아.”박지연과 함께 걷고 있던 고
“흥, 꼬락서니 하고는.”온승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조수연이 먼저 말했다.“정리하려거든 너부터 설명해. 오늘 너랑 같이 저녁 먹던 남자 누구야? 전에 비싼 외제차로 널 데려다준 사람도 그 남자지?”박지연은 헛웃음을 치면서 답했다.“맞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이젠 하다 하다 제가 누구랑 밥 먹고 누구 차에 오는 것까지 관여할 생각이세요? 제가 이 집에 몸이라도 팔았어요?”“너너너! 승준아, 쟤 지금 무슨 태도인지 너도 봤지? 암만 봐도 오래전부터 이미 너랑 헤어지려고 결심한 게 분명해.”조수연은 화난 나머지 박지연의 진면목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온승준을 향해 소리쳤다.온승준은 오늘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어머니, 그만 좀 하세요.”온승준을 한숨을 내쉬며 조수연을 달래고는 이내 뒤돌아 박지연에게 말했다.“지연아, 나 하루종일 일해서 피곤해. 우리 내일 다시 얘기하는 거로 하자.”“그럴 필요 없어. 난 통보하러 온 것뿐이니까. 내일 구청 출근 시간이 되자마자 이혼 수속 밟으러 가자.”박지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지연아...”“누가 이혼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온승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수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이혼해. 대신 집이랑 차, 그리고 주식 다 승준이가 결혼하기 전에 혼자 산 거니까 넌 한 푼도 가질 생각하지 마.”박지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답했다.“걱정 마세요. 처음부터 온승준 재산 가질 생각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 년 동안 저를 하인 취급하면서 온갖 궂은일을 다 시키고 또 선물도 시도 때도 없이 사드렸는데 어떻게 갚으실 건가요?”“박지연, 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르게 해야지. 우리가 언제 널 하인 취급했어? 우리가 널 학대한 것처럼 말하지 마!”조수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매달마다 생활비도 꼬박꼬박 주고 얼마 전에 금목걸이도 줬잖아. 벌써 잊은 거야?”“그럴 리가요. 그것도 다 포함해서 계산해드릴게요.”박지연은 폰을 꺼내 지출 내역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네. 그쪽 아드님이 우수해서 좋으시겠어요. 주제넘게 그쪽 아드님이랑 결혼한 제가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 하인 취급 받는 기회를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겠다잖아요. 다른 여자 보고 이 기회를 맘껏 누리라고 하세요!”박지연이 갑자기 조수연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왜 소리치고 난리야!”조수연도 따라 언성을 높였다.“내가 널 결혼하라고 강요했어? 네가 승준이랑 결혼하지 못해 안달이나 했잖아. 너만 아니었으면 승준이는 더 좋은 여자랑 결혼했을 거야! 너처럼 얼굴 빼고 볼 곳 하나 없는 여자랑 결혼할 리가 없었을 거라고!”“제가 차마 볼 곳이 없어서 저를 하인 취급하셨어요?”박지연이 눈시울을 붉히며 조수연을 바라보았다.“조수연 씨, 이 년 동안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편찮으시다고 할 때 곁에 간호해준 사람이 누군데. 당신 세수시켜주고 발 씻겨주고 몸 닦아준 사람이 누군데! 저녁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을 때 안마해준 사람이 누군데! 평소에 체조하겠다면 옆에서 같이 체조해주고 영화 보겠다면 같이 영화 봐주고 그리고 친척 만나러 갈 때마다 공들여서 꾸미고 같이 가준 사람이 나에요.“어디서나 당신 체면을 위해 당신 말이라면 거역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들었다고! 내가 이렇게 많이 노력했는데 내가 얼굴 빼고 볼 곳이 없다고?”조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박지연을 쏘아봤다.“지연아, 그만해...”옆에서 듣고 있던 온승준은 마음이 아파오면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이혼은 하지 말자. 이후에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돼. 내가 약속할게.”“아니. 이혼할 거야. 너도 지금 내가 불쌍하니?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박지연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온승준, 사실 제일 나쁜 건 너야.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나한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잖아. 네 부모님이 날 싫어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 내가 하인 취급 받으면서 매일 분주하게 보내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고?”온승준은 가슴이
온승준은 어릴 적부터 좌절이란 걸 느껴보지 못하며 자랐다. 뭇사람이 계속 말하는 다른 집 안의 우수한 아이였다.취업해서도 많은 사람의 부러움과 아첨을 받고 다니는 상대였고 지금까지 칭찬만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이런 비난을 받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비난하는 상대가 자신이 직접 선택한 아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결연한 표정으로 화를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빨간 눈시울을 한 채 자신을 쏘아보는 박지연을 보면서 온승준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그는 이혼하기 싫었다. 그는 자신과 박지연이 이혼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박지연의 태도를 보아서는 이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는 그의 말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온승준은 순간 무기력해졌다.그러나 그와 달리 박지연은 자신의 이 년간의 지출을 계산하기 시작했다.“해성 물가로 따지면 집안 도우미 월급이 이백만 원 정도가 되는데 난 이 집에서 이십오 개월 동안 도우미 일을 했으니까 오천만 원 주면 돼. 그리고 네 엄마가 편찮다고 드러누웠을 때 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호해줬잖아. 간호해준 인건비랑 식사비를 합하면 총 천만 원이야. 이외에 설날, 네 생일, 네 부모님 생일 선물, 그리고 친척들 만날 때마다 내가 준비한 선물값에 널 위해 사준 옷과 양말, 신발값을 합하면 육천만 원 정도야. 이것도 내가 적당하게 할인해서 계산한 금액이야. 못 믿겠으면 나중에 리스트 하나 짜줄게.”박지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온승준의 마음에 못을 박았다.“아까 말한 금액을 다 합하면 총 일억 오천만이야. 지금 당장 계좌 이체해. 그리고 내일 이혼 수속 하자마자 우리 사이는 끝이야.”머리가 아파온 온승준은 미간을 어루만지며 박지연을 달래려고 했다.“지연아, 이러지 마. 우리 다시 잘 얘기해보자.”“난 이미 할 얘기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더 끌어봤자 시간 낭비야. 설마 돈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박지연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날 지금까지
조수연의 말을 듣자마자 온승준은 이혼하지 않고서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아니나 다를까, 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맞장구를 쳤다.“그래. 당신 집 조건으로 공주한테 장가가도 충분한데 얼른 돈이나 줘. 그리고 내일 당장 이혼 증명서 받으러 가게 얼른 이혼 서류에 사인이나 해.”“승준아,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애초에 박지연이랑 결혼할 때부터 우린 반대했어.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계속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야?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온범준이 입을 열었다.온승준 부모님과 박지연은 서로를 극도로 원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도도 엄청 결연했다. 온승준은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었다.박지연과 그의 결혼생활도 이젠 정말 끝을 맺게 되었다.온승준은 부득이하게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돈은 내 계좌로 이체해주면 돼. 내일 오전 아홉 시에 구청 앞에서 만나.”“온 교수님, 조수연 씨. 온승준이랑 이혼한 후 입 함부로 놀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바람피운다니 온승준한테 잘못했다니 하면서 저한테 같잖은 누명을 씌울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 년 동안 이 집 며느리로 살면서 겪은 수모를 하나도 빠짐없이 인터넷에 폭로해버릴 거예요. 온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다 까발려버릴 테니까 주의하세요.”“아무튼 저는 일개 간호사밖에 안 되는데 창피를 당해도 손해 볼 건 없어요. 이 일로 사람들 동정심이나 일으켜서 인플루언서로 살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그쪽은 교수인 데다가 아들은 또 병원에서 잘 나가는 의사지, 이런 스캔들이 폭로되면 손해가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헛소리한다고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세요. 방금전 다시 돌아설 때부터 당신들이 한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녹음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떻게 할지는 알아서들 결정하세요.”“너너!”박지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곧 실신할 것 같은 조수연과 얼굴이 일그러진 온범준을 뒤로 한 채 저벅저벅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고은서가 밖에
비록 박지연한테 하는 말이었지만 민시후의 시선은 고은서를 향했다.“저의 매력에 빠져 저를 좋아하게끔 말이에요.”고은서는 옆에서 민시후를 쏘아보았다. 반면 박지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알겠어요. 노력해볼게요.”“차는 내가 가져갈게. 내일 출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민시후는 고은서가 거절하기도 전에 쌩하고 가버렸다.“왠지 모르게 곽승재보다 더 끈질기게 널 따라다닐 것 같은데.”박지연이 웃으면서 말했다.“장난칠 기분이 있는 거 봐서는 괜찮나 봐?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거야?”고은서가 박지연을 끌어안으며 물었다.박지연은 이내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야? 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피곤하게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잖아. 버리면 되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그런 남자한테 목매면서 마음 아파해야 해?”진심인지는 몰라도 고은서는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전생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먼 곳으로 떠난 것보다 훨씬 나은 결과였다.“지연아, 꼭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야.”고은서가 진지하게 말했다.“이러지 마. 사람 오글거리게 왜 이래. 그 정도 위안까지 받을 정도 아니니까 그냥 평소처럼 해.”“...”고은서는 감성이 바사삭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이튿날.고은서는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났다.박지연도 이미 일어나 있었는데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오늘 할 일도 없고 한 데 구청까지 같이 가줄게. 얼마 전에 금방 갔다 와서 구청에 대해 좀 익숙하거든.”고은서가 일부러 장난치며 말했다.“그런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보지 않으면 아마 그 말을 믿었을 거야.”박지연은 그녀를 힐끗 보면서 답했다.“걱정하지마. 나 진짜 괜찮아. 온승준이랑 이미 다 얘기해 놓았으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 어제저녁에 나한테 2억 원 계좌 이체 해주면서 집 한 채랑 차 한 대 주겠다고 하는데 돈만 받고 집이랑 차는 사양했어. 내가 일부러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 온씨 집안 사람들이랑 더는 엮이고 싶
비록 박지연이 뭐하려는 건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온승준은 별말 하지 않고 자신의 폰을 건네주었다.온승준이 비번을 설정하지 않은 덕분에 박지연은 하주 손쉽게 그의 폰에 있는 자신의 연락처들과 자신과 연관된 모든 기록을 삭제할 수 있었다.“다 됐어.”박지연이 폰을 온승준한테 돌려주며 말했다.“당신 연락처도 다 삭제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다신 보지 말자.”평소에도 그녀에게 연락하는 일이 별로 없었기에 연락처까지 삭제하고 나면 정말 남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지연아, 굳이 이럴 필요 없잖아.”온승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문제라도 있어? 온씨 집안 도우미 일은 오늘부로 사직인 거로 알고 있는데. 굳이 연락처를 남길 필요 없잖아.”박지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이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물건 어디에 놓았냐고 이거 어떻게 하냐고 나한테 묻지도 말고 연락하지도 마.”“지연아, 난 널 도우미로 생각한 적 없어. 우린 부부 사이였어.”온승준이 그녀의 말을 부인했다.“알겠어요, 전남편 씨. 오늘부터 우린 남남이에요. 그럼 이만 가볼게.”그러나 온승준이 또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연아...”“아, 네 커리어가 이번 일로 영향받을까 봐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직업상 서로가 너무 바쁜 탓에 만나는 시간이 적어서 평화적으로 이혼하기로 했다고 내가 사람들한테 말해 둘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랑 너희 집에 영향 끼치는 일은 없을 거야.”박지연이 장담했다.온승준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원래도 대화에 능하지 않은 성격이었는데 박지연의 날 선 듯한 말에 차마 무슨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러나 박지연은 그가 답하기도 전에 이미 택시에 올라 쌩하고 가버렸다.온승준은 한참 동안 선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이혼 증명서를 가방에 넣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고은서는 박지연이 이혼한 걸 축하하기 위해 저녁 파티를 마련했다.그중에는 도아름, 송민아와 육현석이 있
고은서는 해탈한 송민아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기뻐했다.그러나 고은서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민시후였다.육현석과 한창 술 배틀을 하고 있던 그는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는 송민아의 말을 듣자마자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진심이야?”송민아는 속상함을 숨기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 원래부터 널 죽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았어. 단지 두 집 부모님 때문에 그래야 마땅하다고 오해했을 뿐이야. 지금이라도 미래 없는 감정에서 이탈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비록 넌 새로운 감정에 빠지게 되었지만 말이야. 나보다 더 힘든 사랑을 하길 기원할게!”송민아는 말하면서 갑자기 고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은서, 이 일은 너한테 맡길게.”고은서는 재밌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반면 민시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게 뭐가 어때서. 고은서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어. 아무튼 인생도 이것저것 다 겪어봐야 완벽한 거니까.”“...”송민아와 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민시후, 너 설마 쫀 거야? 얼른 와서 술이나 계속 마셔.”육현석이 고은서 가까이 붙어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우리 형수님한테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니. 너 오늘 혼쭐 좀 나야겠는데? 정말 너무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거 아니야?”그 말을 들은 민시후는 헛웃음을 치면서 반박했다.“형수님은 개뿔. 여기 와서 고은서한테 형수님이라고 한 번 불러 봐. 어디 한 번 대답하나 보자.”육현석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는 고은서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얼른 와서 술이나 마셔. 오늘 승부 날 때까지 튈 생각 하지마.”바로 이때, 밖에서 전화하고 있던 곽승재가 통화를 마치고 룸으로 들어왔다.그러자 민시후가 그를 보면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장본인은 여기 있건만 네가 왜 더 난리야. 마셔도 장본인이 직접 마셔야지.”곽승재는 이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