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 제009화. 엄마 아니에요

Share

제009화. 엄마 아니에요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0:06:22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

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

“오늘 장은 누가 봐요?”

“내가 봐야지.”

“봄이는요?”

“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

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 이모랑 갈래.”

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

“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

“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

“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

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

“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

“공동으로 먹는 것만요.”

“알았어.”

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

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

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

“우리 집 거.”

“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

“그럼 이제 이모 거야?”

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

“응. 이모가 쓰는 거지.”

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록을 읽어 줬다.

“우유 다음에 뭐지?”

“계란.”

“계란 다음에는?”

“딸기.”

“딸기는 목록에 없었는데.”

“내가 말했잖아.”

서연은 웃음이 나려는 입을 눌렀다. 딸기 한 팩을 카트에 넣자 봄이가 가장 빨간 것을 손가락으로 골랐다.

계산대 앞에서 아이는 과자를 품에 안고 기다렸다. 직원이 서연과 봄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딸이 엄마랑 많이 닮았네.”

서연이 대답할 틈도 없었다.

“엄마 아니에요.”

봄이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앞줄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 엄마는 죽었고 이모예요.”

계산하던 직원의 손이 멈췄다. 서연은 봄이의 어깨를 당기지 않았다. 대신 카트 옆으로 몸을 조금 붙였다.

“이모랑 장 보러 왔어요.”

그녀가 말을 보태자 직원은 미안하다며 급히 상품을 찍었다. 비닐봉지가 필요하냐는 질문까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마트 밖으로 나와서도 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장바구니가 무거워 서연이 손을 바꾸자 아이가 작은 봉투를 들겠다고 했다. 과자와 김만 담아 건넸다.

“봄아.”

“응.”

“다른 사람이 엄마라고 잘못 말하면, 그냥 이모라고만 해도 돼.”

“엄마 죽은 거 모르잖아.”

“모르는 사람한테 전부 알려 줄 필요는 없어.”

봄이는 작은 봉투를 흔들며 걸었다.

“왜?”

“봄이 얘기니까.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해도 돼.”

“선생님은 알아.”

“선생님은 봄이를 같이 돌보니까 아는 게 좋고. 마트 사람은 다시 안 볼 수도 있잖아.”

아이는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신호등 앞에서 서연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손 전체를 잡으면 봉투를 들기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집에 돌아오자 태주가 현관까지 나와 장바구니를 받았다. 봄이는 과자를 보여 주고 방으로 뛰어갔다. 서연은 영수증을 식탁에 펴 공동 물건과 자기 물건을 나눠 표시했다.

“무슨 일 있었어?”

태주가 딸기 통을 냉장고에 넣다 물었다.

“계산하시는 분이 봄이를 제 딸로 봤어요.”

그의 손이 냉장고 문에 머물렀다.

“봄이가 엄마는 죽었다고 바로 말했고요.”

“내가 같이 갔어야 했나.”

“형부가 같이 갔으면…….”

서연은 말을 멈췄다.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갔으면?”

“아빠도 엄마도 같이 왔다고 했겠죠.”

처음 입 밖으로 꺼내는 조합이었다. 태주는 냉장고 문을 놓쳤다가 닫히기 전에 다시 잡았다.

“그땐 내가 바로 말했을 거야. 처제라고.”

“알아요.”

그 두 글자가 식탁 위에 떨어졌다. 서연은 영수증 뒷면을 뒤집었다. 글씨가 보이지 않게.

“낯선 사람한테는 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어요. 괜찮죠?”

“응. 잘했어.”

태주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봄이를 부르거나 다시 묻지 않았다. 아이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듯했다.

오후에는 태주가 봄이와 놀이터에 내려갔다. 서연은 원룸에서 가져온 가방을 작은방에 두고 자기 세제만 욕실 아래칸에 넣었다. 언니가 쓰던 병은 위칸에 그대로 있었다.

현관이 다시 열리기 전, 태주만 먼저 올라왔다. 봄이가 아래층 친구와 한 바퀴 더 돌고 온다고 했다. 오 분이면 된대서 명자 대신 또래 엄마가 보고 있기로 했다는 말이 덧붙었다.

오 분이었다.

태주가 작은방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까지 내렸다. 서연의 등이 문과 그의 가슴 사이에 끼었다.

“남이 엄마라고 한 게 싫었어, 내가 처제라고 한 게 싫었어.”

질문이 아니었다. 둘 다라는 투였다. 서연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자기 속옷 안으로 가져갔다. 가져온 손이 이미 알고 있는 자리로 미끄러졌다.

바지를 완전히 벗지 않았다. 서서, 한 다리를 그의 허리에 걸었다. 태주가 콘돔을 찾는 동안 서연은 창문을 확인했다. 닫혀 있었다. 커튼은 반만 쳐져 있었다.

들어가는 각도가 깊었다. 수요일 요 위보다 급했다. 서연이 그의 어깨에 이를 박고 숨을 잘랐다. 태주의 허리가 짧게 세 번 움직였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났다.

둘은 빠졌다. 끝나기 전에 옷을 내렸다. 서연의 속옷이 한쪽으로 젖어 주름이 남았다. 태주가 벨트를 채우는 손이 한 칸을 건너뛰었다.

현관 비밀번호가 눌렸다.

“아빠, 나 돌 가져왔어.”

봄이의 목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서연은 작은방 문을 열고 나와 영수증을 다시 집는 척했다. 집힌 종이 모서리가 구겨졌다.

저녁 전, 봄이가 놀이터에서 주운 작은 돌을 들고 태주에게 내밀며 아까 일을 먼저 꺼냈다.

“아빠. 마트 사람이 이모가 엄마래.”

“그래서 뭐라고 했어?”

봄이는 딸기 꼭지를 들여다봤다.

“다음에는 그냥 이모라고 할 거야.”

태주는 알았다고만 했다. 서연은 작은 통 뚜껑을 닫았다. 언니가 골라 준 통 안에 딸기가 꼭 한 층으로 들어갔다.

봄이가 돌을 씻으러 욕실에 들어간 뒤 태주가 말했다.

“아까 처제라고 하겠다는 말, 네가 불편할까 봐 한 거야.”

“불편한 게 맞잖아요.”

“그래. 맞지.”

그는 딸기 통을 냉장고에 넣었다. 서연은 작은방으로 가 놓아 둔 옷가방을 열었다.

문을 닫고 나서야 대답을 조금 고쳐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잘못 부른 게 불편했는지, 태주가 곧장 자신을 처제라고 부른 게 불편했는지.

서연은 옷을 개지 못하고 가방 속에 다시 밀어 넣었다. 어느 쪽이라고 말해도 스스로에게 변명해야 할 것 같았다.

가방 가장자리에 낮에 벗지 못한 속옷이 아직 젖어 있었다. 오 분의 끝이 그렇게 남아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제012화. 언니 없는 집에서

    화요일 4시, 서연은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습관처럼 정류장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방향을 바꿨다. 명자가 5시에 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는 3분 전에 왔다. 서연은 그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서연은 문자에 짧게 답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녁 드시고 천천히 계세요.명자는 밥은 해 놓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자신이 없어도 저 집의 저녁이 굴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뒤따라와서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서운함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정류장을 지나며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원룸까지는 회사에서 버스로 18분이었다. 며칠 비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티가 났다. 현관에 신문 두 장이 끼어 있었고, 싱크대 배수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우편물을 날짜순으로 나눴다. 관리비 고지서, 카드 명세서, 광고 전단. 언니가 준 반찬통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토요일에 가져간 작은 통만큼 빈 네모가 생겨 있었다.냉장고에는 달걀 두 개와 물, 오래된 고추장뿐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동네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원룸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대학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조민아에게 전화가 왔다.“너 오늘 어디야?”“내 집.”“내 집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요즘은 형부네 있는다며.”“화요일은 여기 오기로 했어.”서연은 떡볶이 봉투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 민아는 지금 근처라며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방 안의 빨래 더미를 떠올렸지만 오라고 했다.20분 뒤 민아는 편의점 캔맥주 대신 탄산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서연이 술을 마시고 다시 아이 있는 집에 갈까 봐 골랐다는 말에, 서연은 괜히 웃었다.두 사람은 낮은 상 앞에 앉아 떡볶이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5시가 지나자 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사진이 왔다. 민아는 장례식장에서 서연의 부모 곁을 지키다 먼저 돌아갔다. 그 뒤로는 길게 통화하지 못했다.“한 달만 있는 거 맞아?”“4월 14일까지.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제011화. 비워 둔 화요일

    월요일 오후 3시 52분, 고객문의 창에 빨간 표시가 떴다.선물로 보낸 반찬통 세트에 작은 뚜껑이 하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안에 다시 보내야 내일 출고가 가능했다.서연은 창고 재고를 확인하고 송장을 만들었다. 시계가 3시 57분을 가리켰다. 미경이 외투를 입는 서연 옆으로 왔다.“답변은 내가 보낼게. 파일만 열어 둬.”“송장까지 만들었어요. 주소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알았어. 뛰지 말고 가.”서연은 컴퓨터를 끄지 못한 채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에게 버스가 늦으면 5분쯤 늦을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선생님께 연락하겠다고 했다.문자를 넣고 화면을 내리는데, 지난주 작은방의 요 주름이 손가락에 남는 것 같았다. 뛰지 말라는 말은 아이 앞에서 나온 잔소리였는데, 지금은 자기 심장에도 해당됐다.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다.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니 4시 56분이었다. 겨우 4분 남았는데 심장은 늦은 사람처럼 뛰었다.봄이는 외투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왔다. 선생님은 아침에 태주가 산책 동의서를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서연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이모 뛰었어?”봄이가 서연의 붉어진 얼굴을 봤다.“조금 빨리 걸었어.”“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는데.”“그러게. 이모도 혼나야겠네.”봄이는 지퍼를 올려 달라며 턱을 들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면서 끝까지 채웠다. 아이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다른 숨과 겹치지 않게, 그녀는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집에 돌아온 뒤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출고는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3시 30분에 새 문의를 넘기라고 했다. 대신 사진이 필요한 오전 업무는 서연이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죄송해요.”“미안해할 거면 인수인계 꼼꼼히 해. 둘 다 뛰다 쓰러지면 그땐 진짜 곤란하니까.”서연은 메모장에 3시 30분을 크게 적었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산책 준비물을 펼쳤다. 노란 물병, 작은 손수건, 운동화. 수요일에 가져갈 것인데 이틀 전부터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제010화. 멈춘 화면

    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왜 같이 안 해?”“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오늘부터 이건 내 거.”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이 영수증은요?”“버려도 돼.”“이 충전선은?”“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내가 춤추는 거 볼래?”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빨래 널고 보자.”“지금 조금만.”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화면 속 봄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제009화. 엄마 아니에요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제008화. 보호자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제007화. 아침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