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
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
“왜 같이 안 해?”
“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
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
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
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
“오늘부터 이건 내 거.”
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
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
“이 영수증은요?”
“버려도 돼.”
“이 충전선은?”
“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
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
“내가 춤추는 거 볼래?”
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
“빨래 널고 보자.”
“지금 조금만.”
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
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면 속 봄이가 음악도 없이 팔을 흔들었다. 촬영하던 서희가 웃으며 박자를 세었다.
“하나, 둘. 야, 봄아. 거기서 돌면 넘어져.”
“안 넘어져!”
“엄마가 어제 네 양말 신고 미끄러졌거든?”
“그건 당신이 뛰었으니까 그렇지.”
화면 밖에서 태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서연은 옆에 있는 사람을 볼 뻔했다. 그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가 아내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집에서 뛰지 말랬잖아.”
“누가 애 자는데 귤 먹자고 불렀어?”
“귤 먹으러 오는 게 왜 뛰는 거야.”
서희가 웃자 화면이 흔들렸다. 영상 속 봄이는 춤을 멈추고 카메라 앞으로 달려왔다.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영상이 끝났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 욕실에서 일정하게 났다.
봄이가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엄마가 말했어.”
“응.”
태주는 소파 끝에 앉았다. 두 손을 무릎에 놓은 채 화면을 봤다. 두 번째 재생에서도 서희는 똑같이 웃었고, 똑같은 대목에서 태주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아빠, 엄마 웃는 데만 또 해 줘.”
태주가 재생 막대를 조금 뒤로 밀었다. 웃음이 같은 자리에서 끊겼다. 봄이가 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한 번만 더.”
태주는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서연은 영상 속 언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어서 손과 웃음소리만 남았다. 그게 더 언니 같았다. 사진을 찍을 때도 자기는 늘 프레임 밖에 서고, 나중에 왜 자기 사진이 없느냐고 투덜거렸다.
영상이 끝난 뒤 봄이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다음 것도 봐.”
이번에는 식탁 앞이었다. 봄이가 작은 케이크의 초를 끄고, 태주가 뒤에서 박수를 쳤다. 서희가 촬영하다가 카메라를 옆 사람에게 넘겼다. 잠시 뒤 언니가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대충 묶고 집에서 입는 회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봄이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 자기가 먹었다. 태주가 옆에서 휴지를 내밀자 서희가 말했다.
“진작 주지.”
“당신이 먹을 줄 몰랐지.”
“아까워서 그래.”
영상 속 태주가 웃었다. 휴지를 건네는 손이 아내의 손을 잠깐 감쌌다. 서희는 익숙하게 휴지만 빼 가 크림 묻은 입가를 닦았다.
서연의 손에서 건전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굴러간 건전지가 소파 다리에 부딪쳤다. 영상 속 박수 소리가 멎었다.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모 울어?”
서연은 손등으로 눈 밑을 닦았다.
“응. 엄마 목소리 들으니까 보고 싶어서.”
“아빠도?”
태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에는 영상이 멈춘 마지막 장면이 남아 있었다. 서희가 휴지를 접으며 태주를 보던 순간이었다.
“아빠도 보고 싶어.”
봄이는 태블릿을 가슴에 안았다. 태주는 아이 손에서 빼앗지 않았다. 대신 소파 가까이 앉아 금이 간 모서리를 손으로 감쌌다.
“여기 있는 건 없어지지 않게 해 둘게.”
“어디에?”
“아빠 컴퓨터에도 옮겨 놓을 거야.”
서연은 충전선을 밟지 않게 소파 뒤로 정리했다. 태주는 동영상 파일을 옮기는 동안 하나씩 날짜를 확인했다. 서연에게도 보내 줄지 물었지만, 그녀는 당장은 괜찮다고 했다.
“나중에 제가 골라서 받을게요.”
“응.”
세탁기 종료음이 났다. 봄이는 노란 집게 바구니를 들고 베란다로 갔다. 태주가 젖은 이불을 들어 올리고 서연이 끝을 받쳤다. 봄이는 손이 닿는 낮은 곳에 양말을 집었다.
바람이 차서 문을 오래 열어 두지 않았다. 빨래를 다 넌 뒤 태블릿은 충전선에 연결한 채 거실 탁자에 놓았다. 누구도 영상을 지우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태주는 봄이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동화책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서연은 작은방 문을 닫기 전 거실을 한 번 봤다. 검은 화면에 창문만 비쳤다.
서연은 작은방으로 들어와 마른 옷을 무릎에 놓았다. 문을 잠갔다.
어제는 처제라고 너무 빨리 말한 태주가 서운했다. 조금 전에는 그가 언니에게 웃어 주는 얼굴을 보고 손에서 건전지를 놓쳤다.
보고 싶던 언니가 웃고 있는데, 자신은 그 옆의 남자를 보고 있었다.
바지를 내리고 손가락을 넣었다. 영상 속 ‘당신’ 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손가락이 그 소리의 박자를 따라 움직였다. 안이 이미 열려 있어 쉽게 들어갔다. 수요일과 금요일과 어제의 오 분이 한꺼번에 손끝에 몰렸다.
절정 직전, 옷을 얼굴에 덮을 자리가 됐다. 덮기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언니.”
그 말이 몸을 접었다. 허리가 앞으로 굽고, 손가락 위에서 끝이 왔다. 오고 나서야 그 호칭이 어디로 갔는지 알았다. 죽은 언니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 언니의 남편을 몸 안에서 부르며 쓴 말이었다.
노크가 났다.
“빨래 걷자.”
서연은 손을 빼고 바지를 올렸다. 눈과 입술이 젖은 채로 문을 열었다. 태주가 그 얼굴을 봤다. 보는 데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개다 만 옷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태주가 서연을 그 위에 눕혔다. 콘돔을 찾는 손이 여행 가방 옆을 더듬었다. 수요일에 쓴 상자 자리에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들어가는 순간 태주가 얼굴을 보려고 했다. 서연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지금 형부 얼굴 보면, 방금 영상인 줄 알 것 같아서요.”
태주가 그 말에 허리를 멈출 뻔했다. 멈추지 못하고 더 깊게 갔다. 옷더미가 밀렸다. 서연의 무릎이 그의 옆구리를 조였다. 조이면서도 가린 손은 내리지 않았다.
움직임이 빨라졌다. 서연은 가린 손 사이로 천장만 봤다. 작은방 천장은 여전히 낮았다. 낮아서 그의 숨이 더 가까웠다. 영상 속 웃음과 겹치지 않게 하려고, 그녀는 그 숨을 세었다.
끝이 오기 전 서연이 접던 옷으로 자기 얼굴을 덮었다. 덮인 천 너머로 태주의 허리가 한 번 더 떨렸다. 서연의 안이 먼저 접히고, 그가 따라왔다.
옷을 내리자 눈가가 젖어 있었다. 울음인지 끝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태주가 빠져나와 콘돔을 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연의 손목만 한 번 쓸었다.
거실에서는 태블릿이 아직 검은 화면이었다. 창문이 그 유리에 비쳤다.
둘은 작은방에서 숨을 골랐다. 태주가 거의 들리지 않게 말했다.
“화면은 멈췄는데 나는 아직이야.”
서연은 그 말을 받지 못했다. 받으려면 언니 다음의 말을 해야 했다.
접던 옷으로 얼굴을 다시 덮었다. 빈소에서부터 한 번도 멎지 않았던 슬픔에, 오늘은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이 섞였다.
“언니.”
그다음 말은 하지 못했다.
화요일 4시, 서연은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습관처럼 정류장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방향을 바꿨다. 명자가 5시에 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는 3분 전에 왔다. 서연은 그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서연은 문자에 짧게 답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녁 드시고 천천히 계세요.명자는 밥은 해 놓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자신이 없어도 저 집의 저녁이 굴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뒤따라와서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서운함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정류장을 지나며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원룸까지는 회사에서 버스로 18분이었다. 며칠 비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티가 났다. 현관에 신문 두 장이 끼어 있었고, 싱크대 배수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우편물을 날짜순으로 나눴다. 관리비 고지서, 카드 명세서, 광고 전단. 언니가 준 반찬통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토요일에 가져간 작은 통만큼 빈 네모가 생겨 있었다.냉장고에는 달걀 두 개와 물, 오래된 고추장뿐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동네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원룸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대학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조민아에게 전화가 왔다.“너 오늘 어디야?”“내 집.”“내 집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요즘은 형부네 있는다며.”“화요일은 여기 오기로 했어.”서연은 떡볶이 봉투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 민아는 지금 근처라며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방 안의 빨래 더미를 떠올렸지만 오라고 했다.20분 뒤 민아는 편의점 캔맥주 대신 탄산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서연이 술을 마시고 다시 아이 있는 집에 갈까 봐 골랐다는 말에, 서연은 괜히 웃었다.두 사람은 낮은 상 앞에 앉아 떡볶이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5시가 지나자 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사진이 왔다. 민아는 장례식장에서 서연의 부모 곁을 지키다 먼저 돌아갔다. 그 뒤로는 길게 통화하지 못했다.“한 달만 있는 거 맞아?”“4월 14일까지.
월요일 오후 3시 52분, 고객문의 창에 빨간 표시가 떴다.선물로 보낸 반찬통 세트에 작은 뚜껑이 하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안에 다시 보내야 내일 출고가 가능했다.서연은 창고 재고를 확인하고 송장을 만들었다. 시계가 3시 57분을 가리켰다. 미경이 외투를 입는 서연 옆으로 왔다.“답변은 내가 보낼게. 파일만 열어 둬.”“송장까지 만들었어요. 주소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알았어. 뛰지 말고 가.”서연은 컴퓨터를 끄지 못한 채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에게 버스가 늦으면 5분쯤 늦을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선생님께 연락하겠다고 했다.문자를 넣고 화면을 내리는데, 지난주 작은방의 요 주름이 손가락에 남는 것 같았다. 뛰지 말라는 말은 아이 앞에서 나온 잔소리였는데, 지금은 자기 심장에도 해당됐다.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다.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니 4시 56분이었다. 겨우 4분 남았는데 심장은 늦은 사람처럼 뛰었다.봄이는 외투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왔다. 선생님은 아침에 태주가 산책 동의서를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서연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이모 뛰었어?”봄이가 서연의 붉어진 얼굴을 봤다.“조금 빨리 걸었어.”“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는데.”“그러게. 이모도 혼나야겠네.”봄이는 지퍼를 올려 달라며 턱을 들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면서 끝까지 채웠다. 아이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다른 숨과 겹치지 않게, 그녀는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집에 돌아온 뒤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출고는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3시 30분에 새 문의를 넘기라고 했다. 대신 사진이 필요한 오전 업무는 서연이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죄송해요.”“미안해할 거면 인수인계 꼼꼼히 해. 둘 다 뛰다 쓰러지면 그땐 진짜 곤란하니까.”서연은 메모장에 3시 30분을 크게 적었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산책 준비물을 펼쳤다. 노란 물병, 작은 손수건, 운동화. 수요일에 가져갈 것인데 이틀 전부터
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왜 같이 안 해?”“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오늘부터 이건 내 거.”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이 영수증은요?”“버려도 돼.”“이 충전선은?”“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내가 춤추는 거 볼래?”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빨래 널고 보자.”“지금 조금만.”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화면 속 봄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