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
시계는 6시 12분이었다.
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
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
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
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
“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
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
“거기.”
“뭐 묻었어요?”
“옷깃. 안으로 접혔어.”
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
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
“됐어.”
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람처럼 목덜미가 뜨거웠다.
그는 냉장고에서 된장국 냄비를 꺼냈다. 서연은 식탁 위 노란 물병을 집었다. 물은 채워져 있었지만 이름표가 없었다.
“유치원에서 이름 쓰라고 했는데.”
“펜으로 쓰면 지워질 것 같아서 안 썼어.”
“방수 스티커 사 올게요.”
“내가 오늘 사지.”
“형부는 등원시키고 바로 현장 가잖아요.”
둘의 말이 겹쳤다. 서연은 물병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메모장을 꺼냈다.
“제가 퇴근길에 수납함 사야 돼요. 그때 같이 살게요.”
“봄이 준비물 영수증 보내. 돈은 내가 낼게.”
“네. 제 수납함은 따로 계산할게요.”
태주는 우선 쓸 돈을 보내고, 영수증은 나중에 달라고 했다.
봄이 방에서 이불이 한 번 움직였다.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그 짧은 빈틈에 태주가 싱크대 쪽으로 서연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혀만 들어왔다.
손은 치마 바깥에 남아 있었다. 어제의 선이 아침에도 일부만 남았다. 서연은 싱크대 가장자리를 잡고 키스를 받았다. 된장의 냄새와 치약 냄새가 섞였다. 봄이 방 손잡이가 살짝 돌아가는 소리에 태주가 먼저 떨어졌다.
서연은 컵을 집는 척했다. 집힌 것은 물병이었다.
봄이는 6시 40분에 방에서 나왔다. 머리가 한쪽으로 눌린 채 토끼 인형을 끌고 있었다.
“이모 안 갔어?”
“여기서 잔다고 했잖아.”
서연이 팔을 벌리자 아이는 안기지 않고 작은방 문부터 확인했다. 열린 문 안에 이불이 깔려 있는 걸 보고서야 식탁으로 왔다. 요 커버의 주름이 어젯밤과 달랐다. 아이는 그 차이를 읽지 못했다.
태주는 국을 데웠고 서연은 김을 잘랐다. 봄이가 밥을 두 숟갈 먹는 동안 서연은 머리를 빗었다. 묶을 때는 검은 고무줄 대신 서랍에서 찾은 노란 머리끈을 썼다.
“이건 안 아파?”
“조금.”
“그럼 다시.”
한 번 풀고 낮게 묶었다. 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더니 그대로 먹었다.
서연이 먼저 일어나 가방을 들자 아이의 숟가락이 멈췄다.
“이모 어디 가?”
“회사. 어제 말했지? 5시에 유치원으로 갈게.”
“아빠는?”
“아빠가 데려다주고 일하러 가.”
태주가 자기 몫을 덧붙였다. 봄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마지막 김 조각을 밥 위에 얹었다.
“둘 다 와?”
“오늘 데리러 가는 사람은 이모.”
서연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봄이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서연 쪽으로 손바닥만 흔들었다. 어제와 다른 건 그것뿐이었다. 다른 것은 어른들만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오전 전화가 몰렸다. 반찬통 뚜껑이 헐겁다는 문의와 배송 주소를 바꿔 달라는 요청이 연달아 들어왔다. 서연은 점심 전에 물 한 잔을 겨우 마셨다.
미경이 책상 옆에 견과류 봉지를 놓았다.
“아침 일찍 나오는 건 괜찮아?”
“오늘은요.”
“오늘만 괜찮으면 안 돼. 다음 주에도 가능한지 봐.”
서연은 알겠다고 했다. 무리 없다는 대답을 먼저 하지 않았다. 미경은 그제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4시 퇴근 뒤 생활용품점에 들렀다. 작은방 책상 밑에 들어갈 투명 수납함 하나, 방수 이름표, 여벌 양말 두 켤레를 샀다. 계산대에서 영수증을 두 장으로 나눠 달라고 했다. 수납함은 자기 카드로, 아이 물건은 태주가 보낸 돈에서 썼다.
부피 큰 수납함을 들고 버스를 타자 손잡이가 손가락을 눌렀다. 유치원까지 5분 늦을까 봐 서연은 한 정거장 먼저 일어나 문 앞에 섰다. 도착 시각은 4시 51분이었다.
봄이는 새 이름표를 보자 자기 이름을 직접 쓰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식탁에 앉힌 뒤 서연이 빈 종이에 먼저 써 보게 했다.
강봄.
강 자의 세로획이 옆 칸까지 넘어갔다. 봄이가 다시 쓰려고 하자 서연은 첫 글씨를 오려 물병에 붙였다. 그 위에 투명 방수 스티커를 덮었다.
“삐뚤잖아.”
“그래도 봄이가 쓴 이름이잖아.”
“엄마는 똑바로 쓰는데.”
“엄마는 어른이니까 오래 썼지. 봄이도 쓰다 보면 돼.”
아이는 물병을 돌려 보다가 자기 가방 옆에 세워 놓았다.
태주는 6시가 조금 넘어 들어왔다. 아이 물건 영수증을 확인한 뒤 남은 돈을 작은 봉투에 넣고 앞에 봄이라고 적었다.
서연은 자기 카드로 산 수납함을 저녁 뒤 책상 아래에 밀어 넣었다. 화장품과 충전기, 속옷을 넣자 여행 가방 지퍼가 닫혔다. 뚜껑이 투명한 것을 고른 게 뒤늦게 신경 쓰여, 가장 안쪽에는 수건부터 한 장 둘렀다. 어젯밤 휴지를 아침의 아이가 볼 자리는 아니었다.
8시부터 1시간 동안 방문을 닫고 일했다. 문을 열었을 때 봄이는 태주와 여벌 양말에 이름을 쓰고 있었다. 태주는 유성펜으로 한 켤레씩, 봄이는 종이에 연습했다.
서연은 냉장고에 붙일 주간표를 그렸다. 아침 등원 칸에는 태주, 오후 하원 칸에는 서연, 8시부터 9시에는 이모 일이라고 썼다. 빈 주말 칸은 남겨 두었다.
봄이가 제 이름 아래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태주는 냉장고에서 자석 두 개를 떼어 왔다.
서연은 주간표 위에 3월 19일을 적었다. 태주가 종이 윗부분을 잡고 서연이 아래쪽 자석을 붙였다.
닫힌 냉장고 옆의 검은 창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나란히 비쳤다. 언니가 있을 때 이 부엌에서 보던 두 사람의 모습과 닮아, 서연은 손을 거뒀다.
거둔 손목 안쪽에 얕은 이빨 자국이 있었다. 주간표의 ‘작은방’ 글씨 옆을 그 손목이 스쳤다.
“삐뚤어졌어?”
“아뇨.”
태주는 주간표를 한번 보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연은 이미 물컵을 집고 있었다.
봄이가 방에서 양말을 더 가져왔다. 태주가 아이 이름을 쓰려고 식탁에 앉자 창에는 서연 혼자만 남았다.
그제야 컵에 물을 따랐다.
물은 어제 마시지 못한 그것과 같은 수돗물이었다. 오늘따라 더 찼다.
화요일 4시, 서연은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습관처럼 정류장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방향을 바꿨다. 명자가 5시에 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는 3분 전에 왔다. 서연은 그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서연은 문자에 짧게 답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녁 드시고 천천히 계세요.명자는 밥은 해 놓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자신이 없어도 저 집의 저녁이 굴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뒤따라와서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서운함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정류장을 지나며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원룸까지는 회사에서 버스로 18분이었다. 며칠 비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티가 났다. 현관에 신문 두 장이 끼어 있었고, 싱크대 배수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우편물을 날짜순으로 나눴다. 관리비 고지서, 카드 명세서, 광고 전단. 언니가 준 반찬통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토요일에 가져간 작은 통만큼 빈 네모가 생겨 있었다.냉장고에는 달걀 두 개와 물, 오래된 고추장뿐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동네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원룸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대학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조민아에게 전화가 왔다.“너 오늘 어디야?”“내 집.”“내 집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요즘은 형부네 있는다며.”“화요일은 여기 오기로 했어.”서연은 떡볶이 봉투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 민아는 지금 근처라며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방 안의 빨래 더미를 떠올렸지만 오라고 했다.20분 뒤 민아는 편의점 캔맥주 대신 탄산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서연이 술을 마시고 다시 아이 있는 집에 갈까 봐 골랐다는 말에, 서연은 괜히 웃었다.두 사람은 낮은 상 앞에 앉아 떡볶이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5시가 지나자 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사진이 왔다. 민아는 장례식장에서 서연의 부모 곁을 지키다 먼저 돌아갔다. 그 뒤로는 길게 통화하지 못했다.“한 달만 있는 거 맞아?”“4월 14일까지.
월요일 오후 3시 52분, 고객문의 창에 빨간 표시가 떴다.선물로 보낸 반찬통 세트에 작은 뚜껑이 하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안에 다시 보내야 내일 출고가 가능했다.서연은 창고 재고를 확인하고 송장을 만들었다. 시계가 3시 57분을 가리켰다. 미경이 외투를 입는 서연 옆으로 왔다.“답변은 내가 보낼게. 파일만 열어 둬.”“송장까지 만들었어요. 주소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알았어. 뛰지 말고 가.”서연은 컴퓨터를 끄지 못한 채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에게 버스가 늦으면 5분쯤 늦을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선생님께 연락하겠다고 했다.문자를 넣고 화면을 내리는데, 지난주 작은방의 요 주름이 손가락에 남는 것 같았다. 뛰지 말라는 말은 아이 앞에서 나온 잔소리였는데, 지금은 자기 심장에도 해당됐다.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다.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니 4시 56분이었다. 겨우 4분 남았는데 심장은 늦은 사람처럼 뛰었다.봄이는 외투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왔다. 선생님은 아침에 태주가 산책 동의서를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서연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이모 뛰었어?”봄이가 서연의 붉어진 얼굴을 봤다.“조금 빨리 걸었어.”“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는데.”“그러게. 이모도 혼나야겠네.”봄이는 지퍼를 올려 달라며 턱을 들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면서 끝까지 채웠다. 아이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다른 숨과 겹치지 않게, 그녀는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집에 돌아온 뒤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출고는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3시 30분에 새 문의를 넘기라고 했다. 대신 사진이 필요한 오전 업무는 서연이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죄송해요.”“미안해할 거면 인수인계 꼼꼼히 해. 둘 다 뛰다 쓰러지면 그땐 진짜 곤란하니까.”서연은 메모장에 3시 30분을 크게 적었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산책 준비물을 펼쳤다. 노란 물병, 작은 손수건, 운동화. 수요일에 가져갈 것인데 이틀 전부터
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왜 같이 안 해?”“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오늘부터 이건 내 거.”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이 영수증은요?”“버려도 돼.”“이 충전선은?”“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내가 춤추는 거 볼래?”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빨래 널고 보자.”“지금 조금만.”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화면 속 봄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