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
“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
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
“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
“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
“이모도 보호자야.”
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
“보호자가 뭐야?”
“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
“그럼 이모도 보호자네?”
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아빠는?”
“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
“엄마는?”
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
“엄마도 그랬지.”
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
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
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
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
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전에 받아 읽었다.
“숲 간대.”
“그래? 언제?”
“수요일. 내가 이름 쓸 거야.”
“손부터 씻고 같이 쓰자.”
태주는 아이를 먼저 욕실로 보냈다. 서연은 식탁에 저녁을 덜어 놓고 봉투를 펼쳤다. 산책 시간과 준비물, 비가 올 경우의 일정이 적혀 있었다. 맨 아래에는 보호자 확인란이 있었다.
태주가 밥을 먹는 동안 봄이는 옆에서 연필을 들고 기다렸다. 그는 국을 반쯤 먹고 서류를 읽었다.
“아빠가 확인란 쓰고, 봄이는 이름 옆에 써 볼래?”
“응.”
태주가 아이 이름을 먼저 또박또박 적었다. 봄이는 그 옆 빈칸에 작은 글씨를 따라 썼다. 강 자가 이번에도 비뚤어졌지만, 태주는 고치지 않았다.
비상 연락 카드에는 순서가 있었다. 태주가 자기 번호를 첫 번째 칸에 적고 두 번째 칸에서 펜을 멈췄다.
“엄마 번호가 아직 여기 등록돼 있네.”
서연은 카드 위에 적힌 숫자를 보지 않으려고 반찬 접시를 당겼다. 태주는 선을 그어 지우지 못하고 한동안 펜만 들고 있었다.
봄이가 자기 의자를 밀어 그 옆으로 붙였다.
“엄마 전화 없어.”
“응.”
태주가 짧게 대답했다.
봄이가 카드 끝을 잡았다.
“그런데 번호도 지워?”
“선생님이 전화할 수 있는 번호를 써야 해서.”
“엄마 거는 뒤에 쓰면 안 돼?”
태주는 카드를 뒤집었다. 뒷면에 서희의 번호를 적고 아이에게 보여 줬다. 봄이가 마지막 숫자를 짚은 뒤에야 카드를 다시 돌려놓았다.
지우개를 가져와 연필로 적힌 번호를 천천히 지웠다. 종이가 얇아져 글씨 자국은 남았다.
서연이 그 옆에서 허리를 숙여 가루를 보았다. 숙인 허리가 태주의 팔에 닿았다. 서류 때문에 붙은 거리였다. 수요일 밤 이후라 둘의 호흡이 먼저 변했다. 봄이는 지워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느라 그 호흡을 듣지 못했다.
“두 번째는 할머니로 할까?”
“이모.”
봄이가 바로 말했다. 태주는 서연을 봤다.
“네 번호 적어도 돼?”
“당분간은요. 어머니 번호도 그다음에 적고요.”
태주가 서연에게 번호를 다시 불러 달라고 했다. 서연은 앞자리에서 잠깐 말을 멈췄다. 지우개 가루 사이로 언니 번호의 마지막 숫자가 남아 있었다.
“잠깐만요.”
그녀는 휴지로 가루를 걷어 냈다. 태주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기다렸다.
“써도 돼?”
“네. 관계 칸에는 이모라고 써 주세요.”
태주는 그 두 글자를 먼저 쓴 다음 서연이 불러 주는 번호를 옮겼다. 세 번째 칸에는 명자의 번호가 들어갔다.
“이건 유치원에서 급할 때 전화하는 순서야.”
태주가 봄이에게 말했다.
“아빠가 못 받으면 이모, 이모가 못 받으면 할머니.”
“셋 다 못 받으면?”
“그러지 않게 아빠가 전화 잘 볼게.”
서연은 자기 차례에도 전화를 놓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회사 고객 전화를 받는 중에는 바로 받지 못할 수 있다고 태주에게 따로 말했다.
“그때는 문자 남기라고 선생님께 말할게.”
“형부도 현장에서 못 받을 때 있잖아요. 서로 확인하면 돼요.”
태주는 카드 여백에 문자 연락도 부탁한다는 메모를 남겼다.
8시가 되자 서연은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일을 마치고 나왔을 때 태주는 작성한 동의서를 냉장고에 잠깐 붙여 두고 봄이의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봄이는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손에는 이름 연습한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서연은 아이 손에서 종이를 빼 탁자에 폈다. 태주가 봄이를 안아 방으로 옮겼다. 아이 머리가 그의 어깨에 기울었다.
방을 나오고 문을 거의 닫았을 때 태주가 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은 손에 아직 지우개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작은방.”
서연은 주간표가 붙은 냉장고를 한 번 보고 따라갔다. 작은방 문을 닫고, 이번에는 잠금장치까지 내렸다. 아이가 잠든 뒤의 일이었다.
태주가 서연을 접이식 책상 앞 의자에 앉혔다. 무릎을 꺾었다. 작업복 바지의 무릎이 요 커버에 닿았다.
“보호자 칸에 이모라고 쓴 입으로 이러면 안 돼요.”
서연이 낮게 말했다.
태주는 그 입을 막지 않았다. 치마를 걷고 속옷을 내렸다. 혀가 먼저 닿았다. 서연은 그의 머리를 밀쳐야 하는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소리 때문에였다. 막은 손 사이로 숨이 새었다.
혀가 안쪽을 올리자 서연의 발뒤꿈치가 바닥에서 떴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태주가 허리를 붙잡아 의자를 멈췄다. 멈추는 힘과 벌리는 힘이 같은 손에 있었다.
“형부, 거기…….”
말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서연의 허벅지가 그의 귀를 조였다. 태주는 조임을 풀라고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가 혀 옆을 도와 들어갔다. 수요일 밤보다 각도가 달랐다. 보는 얼굴이 아래에 있었다.
절정이 오자 서연은 막았던 손을 더 세게 입 위에 올렸다. 손이 부족해 다른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집었다. 수납함 뚜껑이 살짝 흔들렸다. 투명한 상자 안에 수건이 보였다.
태주가 입을 떼고 허벅지 바깥을 손등으로 닦았다. 지우는 손길이 아니었다. 수요일과 같은 손길이었다.
서연은 속옷을 올리다가 그의 벨트 안으로 손을 넣었다. 넣자마자 너무 뜨거워 멈췄다. 태주가 그 손목을 잡고 빼냈다.
“오늘은 여기까지.”
“형부는요.”
“너는 보호자 칸에 들어갔어. 그 다음까지 한 밤에 하지 말자.”
잔인한 선이었다. 그러나 그 선이 이 집을 조금 더 집처럼 보이게 했다. 서연은 손을 거두고 치마를 내렸다.
냉장고의 주간표 옆에 비상 연락 순서를 작은 메모로 적었다. 아빠, 이모, 할머니. 그 위에는 보호자 확인란을 태주가 쓴 동의서가 잠깐 붙어 있었다.
그녀는 동의서를 떼어 봄이의 가방 안쪽 지퍼에 넣었다. 태주가 아이 방에서 나와 그 가방을 받았다.
“고마워. 내일 안 잊게 앞에 둘게.”
“월요일에 내는 거예요.”
“아, 그렇지.”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제 이마를 문질렀다. 서연은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눌렀다.
“웃어?”
“내일 아침에 유치원 문 앞까지 가실까 봐요.”
“그 정도는 아니야.”
“정말요?”
“아까까지는 자신 있었는데.”
서연은 결국 웃었다. 태주도 따라 웃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서연은 그의 눈가에 남은 웃음을 조금 더 보았다. 돌아서도 될 때를 놓친 것처럼, 둘 다 식탁 옆에 서 있었다.
“형부도 그렇게 웃을 줄 아네요.”
말하고 나서야 그를 얼마나 오래 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태주는 웃음을 다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너도 지금 웃잖아.”
서연은 입술을 다물었지만 웃음이 남았다. 태주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먼저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아 서연도 그대로 바라봤다.
“먼저 잘게요.”
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 메모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빠, 이모, 할머니. 오늘 그가 자기 번호를 다시 묻던 목소리까지 떠올랐다.
“그래. 잘 자.”
태주가 가방을 걸고 부부방으로 들어간 뒤, 서연은 메모 앞에 조금 더 서 있었다. 언니 번호가 지워질 때는 그 칸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조금 전에는 그의 웃음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서연은 펜을 들어 이모라는 두 글자 아래에 선을 그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위로 한 번 더 그었다.
밑줄을 긋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방금 그 손가락이 그의 벨트 안에 있었다.
봄이는 횡단보도를 건넌 뒤 이모에게 메시지를 보내고서야 다시 걸었다.태주는 아이의 화면 대신 안경점 봉투를 보고 있었다. 손잡이를 너무 오래 쥐어 손가락 마디가 붉어졌다.“내일 이모 집에 가도 돼?”“엄마한테 먼저 말해. 몇 시인데?”“두 시. 내가 지하철 탈 거야.”“역 바꿔 타는 데 알고?”“작년에도 갔잖아.”맞는 말이었다. 태주는 새 안경 때문에 어지럽지는 않은지만 물었다. 봄이는 괜찮다며 안경다리를 귀 뒤로 밀었다.“아빠는 이모 보면 아직 슬퍼?”태주가 걸음을 늦췄다. 봄이는 못 들은 척해 줄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가끔은.”“이모도 그럴까?”“그건 아빠가 대신 말할 수 없지.”“물어봐?”“아니. 아빠 대신 물을 필요 없어.”봄이는 잠깐 입술을 내밀었다. 질문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들렸을까 봐 태주가 말을 보탰다.“네가 궁금한 건 물어도 돼. 그런데 아빠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거나, 이모 대답을 아빠한테 가져오려고 하지는 마.”&ld
서연은 아파트 입구를 지나쳐 한 동을 더 걸었다.현관 번호를 누르려다 문 옆에 붙은 이름을 보고서야 잘못 왔다는 걸 알았다. 같은 모양의 출입문이었다. 장바구니를 고쳐 들고 돌아오는 동안 커피가 손등으로 조금 흘렀다.뜨겁지는 않았다. 뚜껑을 너무 세게 눌러 한쪽이 들려 있었다.자기 집에 들어와 고기부터 냉장고에 넣었다. 무와 대파는 식탁에 두고, 세제는 욕실로 가져갔다. 거울에 제 얼굴이 비쳤다. 조금 전 태주가 본 얼굴도 이랬을까.서연은 세제 봉지를 거꾸로 들었다가 바로 세웠다. 아직 뜯지도 않은 봉지였다.휴대전화가 울렸다.『이모, 아까 마트 앞에 있었지?』봄이였다. 뒤이어 새 안경을 쓴 사진이 왔다. 갈색 테가 아이 얼굴에 잘 어울렸다. 사진 뒤쪽에 아빠의 어깨가 걸려 있었지만 서연은 확대하지 않았다.『응. 봤어. 안경 예쁘다. 네가 골랐어?』『아빠는 잘 보이면 된대. 그게 대답이냐고.』서연은 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아빠가 잘 모르는 거지. 다음엔 네가 비교해서 보여 줘.』『했어. 그래도 몰라. 근데 왜 안 불렀어?』입력창에 손가락이 멈췄다.사람이 많았다고 하면 됐다. 신호가 바뀌었고, 장바구니가 무거웠고, 이제 서로 가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고. 그중 마지막 이유만은 봄이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너도 아빠랑 있었잖아.』
서연이 그 집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다.남색 가방의 손잡이는 그사이 두 번 더 꿰맸다. 이번에 단 실은 원래 것보다 조금 밝았다. 현관에서 실밥을 발견한 서연은 손톱으로 잡아당기지 않고 가위를 가져와 짧게 잘랐다.물건을 챙겨 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토요일이었다.마트 정육 코너 앞에는 점심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서연은 국거리 한 팩을 고르고 고기에 적힌 날짜를 확인했다. 작은 무와 대파도 담았다. 세제는 늘 쓰던 것이 할인 중이었다.계산을 마치고 봉투에 물건을 넣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아가 다음 주 금요일에 밥을 먹자고 했다. 이번에는 회사 사람들과도, 가족들과도 상관없는 약속이었다.‘좋아. 내가 식당 찾을게.’‘지난번처럼 줄 서는 데 말고. 배고프면 나 성질나.’‘원래 나잖아.’곧 욕 한 글자가 답으로 왔다. 서연은 계산대 옆으로 비켜서 소리 내 웃었다. 뒷사람이 지나가자 가방을 다시 어깨에 올렸다.일은 바빴고 가끔 지겨웠다. 수진과 의견이 달라 회의가 길어지는 날도 있었고, 어머니 전화를 일부러 저녁까지 미루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을 보내고도 주말이 오면 누군가와 밥을 약속할 수 있었다.태주에게 걸지 않은 전화만으로 5년을 세지는 않았다.마트 옆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샀다. 사장에게 뚜껑을 한 번 더 눌러 달라고 부탁하고, 장바구니에서 삐져나온 대파를 안쪽으로 밀었다. 집에 도착하면 고기부터 냉장고에 넣을 생각이었다.&nbs
2034년 10월의 금요일 밤, 서연에게 봄이의 메시지가 왔다.‘이모, 엄마랑 싸웠어.’서연은 씻어 둔 물컵을 건조대에 엎다가 휴대전화를 들었다.‘왜?’‘말하기 싫어.’예전 같으면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었을 것이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은 말을 받아 줄 사람으로 불린 것 같았다.‘그럼 말하고 싶을 때 해.’그 뒤로 한동안 답이 없었다. 서연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내일은 남은 국거리를 더 사야 했다. 세제도 바닥나고 있었다.밤 10시가 가까워져서야 봄이가 다시 보냈다.‘엄마가 내 사진 맘대로 할머니한테 보냈어. 나 눈 감고 나왔는데.’서연은 휴대전화를 보며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보내지는 않았다. 아이에게는 웃을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엄마한테 지워 달라고 했어?’‘그게 뭐 어떠냐고 해서 싸웠어.’서연은 답을 쓰려다가 멈췄다. 언니가 무슨 마음으로 사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르는 동안 커 버린 딸이 아니라, 오늘 자기가 찍은 딸의 얼굴을 부모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봄이가 싫다는 말을 없앨 수는 없었다.‘이모가 엄마한테 대신 말할까?’‘아니. 그냥 말한 거야.
2033년 봄, 중학교에 들어간 봄이는 처음으로 이모와의 약속을 취소했다.아프거나 학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토요일에 같이 나가자고 했고, 봄이는 그쪽이 더 가고 싶었다.약속을 취소해도 되는지 엄마에게 먼저 물었다가 혼났다.“먼저 잡은 약속이 있잖아.”“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이모는 토요일을 너한테 비워 뒀을 텐데.”“엄마가 이모도 아니면서 왜 먼저 안 된대.”서희는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딸의 말투는 얄미웠지만 틀린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그럼 네가 직접 설명해. 엄마가 다른 핑계 대 주지는 않을 거야.”봄이는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서연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한참 걸렸다. 나중에 아프다고 하면 쉬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이모가 뭘 먹었는지, 병원은 갔는지 물을 것이었다.“이모, 토요일 있잖아.”서연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는지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응. 뭐 준비할 거 있어?”“나 친구들이랑 놀고 싶은데.”말을 꺼내 놓고 봄이는 이불 무늬만 봤다.“그래서 우리 약속을 바꾸고 싶어?”“응.”
2032년 가을, 수진이 교육실 문을 닫고 들어왔다.“팀장님, 내일 매장 사람 한 명이 못 나온대요.”서연은 새 진열 안내서에서 눈을 들었다.“언제 연락 왔어요?”“방금. 아이가 열이 난다고요.”“당장 빠지는 시간부터 확인해요. 내일 나올 수 있는 사람도 같이.”수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대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손님 앞에서 반품 기준을 잘못 말할까 봐 긴장하던 직원이었다. 지금은 수도권 매장의 교육을 함께 맡고 있었다.“제가 하루 종일 서면 되긴 해요.”“내일 수진 씨 다른 일정은요.”“오후에 교육 하나요.”“그럼 두 사람 일을 다 하는 거잖아요.”서연은 비어 있는 시간만 표에 표시했다. 오전 물류 작업은 본사에서 한 사람을 보낼 수 있었고, 저녁 마감은 점장이 시간을 바꾸기로 했다. 수진은 그 사이 세 시간만 지원하고 교육에 들어가기로 했다.결정한 내용을 아픈 아이를 돌보는 직원에게 보낸 뒤에도 서연은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붙이지 않았다. 오늘 그 직원이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아이의 상태였다.미경이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옛날 같으면 네가 가겠다고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