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얼어 죽을 첫사랑 / 4화. 임시 저장

Share

4화. 임시 저장

Author: 공자영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9 15:15:43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여림은 눈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8년 만에 만난 첫사랑을 우리 집까지 데리고 와서 씻겨 줬건만. 이젠 자고 가겠단다.

대체 차윤호에게는 8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달라진 걸까.

여림은 자신이 알던 사람과 같으면서도 묘하게 달라진 느낌에 적응이 안 됐다.

“왜 그렇게 봐?”

당황한 여림에 윤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냐니. 그럼 어떻게 봐야 되는데. 

그래, 좋아! 할 수도 없고.

아, 근데 왜 대답이 안 나오지. 무조건 아니라고 하는 게 정답인 걸 알면서도 왜 망설이는 거야. 

말을 고르고 고르다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혹시…… 집이 없는 건 아니지?”

실없는 대답을 뱉었다. 이건 농담도 아니고, 진심도 아니고. 자신이 생각해도 왜 말했지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윤호의 표정은 더 읽기 어려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음……”

대답을 고민하는 듯 입술을 매만지는 표정을 가만 바라봤다.

있다, 없다 대답만 해주면 되는 걸 뭘 그리 말을 고르는지. 

하지만 여림은 더 묻지 않고 윤호를 그저 보기만 했다.

8년 전엔 한 살 오빠가 되게 어른 같아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되게 어렸던 거 같다. 지금보다 훨씬 얼굴 선이 굵어진 윤호를 보며 생각했다. 

한때 열렬하게 좋아했던 이목구비는 그대로인데 희한하게 선만 굵어지고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로.

“… 아무래도 안 되겠지?”

저런 말을 하다니.

“뭐?!”

여림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더 어처구니 없는 대답으로 맞대응을 당했다.

“아, 아니… 오빠, 그. 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설마, 진짜 없는 건 아니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

“만약에 진짜 없는 거면 하룻밤이라도…….”

진짜 이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여림은 말끝을 흐렸다.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정말 혹시나 싶어서. ‘혹시’ 라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

“…… 아.”

여림의 대답에 윤호는 한동안 다시 대답이 없더니 이내 작은 탄식을 뱉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왜 웃어……. 나 진짜 걱정,”

“아냐. 좋아서.”

“뭐?”

“내가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덕분에 웃었어.”

윤호는 고개를 옆으로 꺾고 웃으며 여림을 바라보았다. 

첫사랑이 나 덕분에 웃었다고 한다.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여림은 머릿속에 떠오른 문제에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 겪는 상황이기에.

그때.

“어, 비 그쳤다.”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 그쳤으니까 이제 가봐야겠다.”

윤호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바란 건 아니었지만, 좀 전까진 자고 가면 안 되냐는 사람이 비가 그치자마자 곧장 일어나다니.

괜히 묘한 섭섭함이 들었다.

“집… 여기서 멀어?”

“아니. 가까울 걸.”

여림은 화장실에 있던 윤호의 젖은 옷을 비닐 봉지에 넣어주었다.

“이거 그냥 들고 가면 다 젖겠다.”

“고마워.”

윤호는 봉투를 받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 다신 비 맞고 돌아다니지 마. 애도 아니고.”

“알겠어.”

“옷은 다음에 줘. 내 옷이 아니라서 받긴 해야 하니까.”

말을 마친 여림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괜히 민망했다. 자신의 입으로 다음을 기약하고 있는 게.

“… 그 예전에 쓰던 그 번호 아직 써?”

신발끈을 묶던 윤호는 여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여림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윤호의 번호를 차단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지만 여태까지 풀지 않았으니 자의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나. 윤호는 여전히 자신의 번호가 남아 있는 걸까.

“아… 그럼 연락해도 돼……?”

윤호는 숙였던 허리를 펴 일어나며 말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

“아, 나 번호 바꿨거든.”

대답이 없는 여림에 윤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번호를 바꿨다는 말에 여림은 휙 고개를 들어 반응했다. 

“그럼 번호 알려줘.”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 대답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의문이다. 

“번호를 알아야 연락을 하던가 말던가 할 거 아냐.”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윤호는 잠시 여림을 바라보다가 여림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지이잉ㅡ

그리고 여림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 11자리가 크게 떴다.

“내 번호야.”

“아….”

“연락할게.”

울리던 전화가 뚝 끊겼다.

“그럼 갈게. 오늘 고마웠어.”

“아, 응. 잘 가….”

현관물을 나서는 윤호에 여림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철컥. 문이 닫히고.

“잘 가….”

힘 없이 손을 흔들던 여림은 윤호가 가자마자 자리에 주저 않았다. 

“하아아…….”

힘이 풀렸다. 

한동안 현관을 바라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켰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의 부재중 이력이 떠 있었다. 여림은 잠시 망설이다가 연락처 저장 화면을 열었다. 

뭐라고 저장해야 되지? 예전에 뭐라고 저장을 했더라.

‘차윤호’ 로 저장하기엔 그래도 오빠인데 너무 예의가 없나 싶었고. 그렇다고 ‘윤호 오빠’ 로 저장하기엔 괜히 낯간지러웠다. 

이런 다정한 호칭을 저장할 사이는 아니니까.

한차믈 고민하던 여림은 결국 피식 웃으며 망설이 없이 무언가를 적었다. 

[길바닥]

나름 오늘의 재회가 인상은 깊었으니.

“임시야, 임시.”

여림은 저장된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얼어 죽을 뻔한 거 길바닥에서 데려왔으면 이 정도 저장은 양반 아닌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얼어 죽을 첫사랑   10화. 데려다줄게

    며칠 뒤.윤호는 요 근래 잠을 통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들었다 싶으면 깼고, 잠들었다 싶으면 깨는 일상이 반복됐다.“요새 잠을 잘 못 주무세요?”“네?”“아니, 요즘 유독 피곤해 하시길래.”연우는 윤호의 책상에 놓인 진한 커피를 보며 말했다. 컵 표면에는 ‘2샷 추가’ 라고 적혀 있었다.“요즘 좀 잠이 안 오네요.”“그래요? 무슨 고민 있어요?”고민이라.‘그럼 우리 이제 볼 일 없겠네.’그 순간, 여림의 말이 스쳤다. 그날은 맞는 말이 반박할 수 없었다. 더 인연을 이어 나가려면 한쪽이 노력해야 했다. ‘미안, 못 가.’하지만…. 어떻게, 어디서부터 다가가야 할 지 모르겠다. 이제 정말 못 만나는 걸까.한 번만, 한 번만 더 우연히 만나게 되면.“없어요, 고민. 그냥 설칠 때 있잖아요. 뭐, 그런 거죠.”“그래요? 그래도 커피 너무 독하게 먹지 마요. 몸 상할라.”연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 그리고. 이번에 오프비트 콘서트 모먼트로 바뀐 거 알고 있죠?”“맞다. 얘기 들었어요. 스케줄에 문제 생겼다고.”“거기 미팅이 얼마 안 남았어요. 제가 오늘 일정 정리해서 넘겨드릴게요.”두 사람은 사담도 잠시, 둘이 같이 하게 된 오프비트 단독 콘서트 건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대화를 마치고 연우는 텀블러를 가지고 자리르 떴다.연우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윤호는 눈가를 문질렀다. 설친 잠이 많아지자 눈이 뻐근했다.“…… 하.”그리고 작은 한숨이 터지듯 흘러나왔다.***한편.“아, 거기 있어요? 그럼 제가 오늘 퇴근하고 찾으러 갈게요!”여림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감사합니다!”그리고 밝은 표정으로 통화를 끊었다.“무슨 일 있어요?”그때, 현재가 양 손에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한 잔을 여림에게 건넸다.“감사합니다. 그게 그 현재 님이랑 밥 먹은 날, 제가 거기 목걸이가 떨어졌었나 봐요.”“목걸이요? 근데 그거 며칠 됐잖아요.”“제가 그날 술 마셔서 잘 기억이 안 나가지고. 집 안만 다 뒤지고

  • 얼어 죽을 첫사랑   9화. 거짓말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따라가서 도대체 뭘 할 건데.하지만 복잡한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이미 결정을 한 듯 핸들을 꺾었다.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윤호가 사는 빌라였다. 주차를 마친 윤호는 뒷좌석에 있는 쇼핑백을 챙겨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시선이 자연스럽게 옆 빌라로 향했다. 그곳은 자신이 며칠 전, 신세를 졌던 여림의 집이었다.비가 쏟아지던 날, 여림에게 정신없이 끌려오다시피 따라왔을 대 알았다. 바로 옆 빌라였다는 것을.“하…….”불이 꺼진 여림의 방을 올려다 보았다.벌써 도착해서 이미 자고 있는 건가. 아님 아직 도착을 안 한 건가.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몰래 남의 방을 들여다 보며 괜한 추측만 하고 있고.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발만 굴리던 때, 골목 안으로 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왔다. 헤드라이트가 정면으로 쏟아졌다. 윤호는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빛을 가렸다.차가 부드럽게 정차했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천천히 내려요, 괜찮죠?”“으응…….”거기서 모습을 보인 사람은 여림이었다.여림은 현재의 팔을 잡고 간신히 차에서 내렸다.“길을 잘못 들어서 좀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괜찮아요, 감사합니다…….”여림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현재가 그런 여림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업힐래요?”“아니요! 저 진짜 잘 걸을 수 있다니까요….”현재가 웃으며 여림의 팔을 잡고 부축하며 걷기 시작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한 사람. “……”빌라 기둥에 기대어 보던 표정은 서서히 굳었고, 쇼핑백을 쥔 손에는 강한 힘이 들어갔다.하지만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슨 권한으로 저 사이를 갈라 놓을 수 있겠는가.아니, 그렇다고 해도 회사 동료끼리 저렇게 가까이 붙어 있어도 되나. 아무리 봐도 저 눈빛 수상한데.그렇게 온갖 생각이 엉켜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어?”여림과 눈이 탁 마주쳤다.여림은 손가락으로 윤호를 가

  • 얼어 죽을 첫사랑   8화.

    하필 오늘 같이 기분 좋은 날 그가 또 눈 앞에 나타났다.타이밍 한 번 참 거지 같았다.나 오늘은 회식이 잡혀서 안 될 거 같아내일 안 될까?그렇게 보내놓고 이렇게 마주치다니.게다가 회식이란 것 치곤 너무 단둘이 먹고 있는 그림이었다.“여림 님?”“아.”그제야 여림은 현재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아, 죄송해요.”급하게 손을 놓았다.현재가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붉어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죠,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현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림을 살폈다.여림은 슬쩍 다시 현재의 뒤를 보았다.“…!”그러자 또다시 윤호와 눈이 마주쳤다.“아무 것도 아니에요.”또다시 여림이 시선을 피하자 윤호는 아무 말도 않고, 자신의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하지만 여림의 시야에는 여전히 앉아 있는 윤호의 뒷모습이 걸렸다.보이는 걸 안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보이니 눈이 가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현재 님, 죄송한데.”“네?”“조금만 오른쪽으로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여림은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허공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오른쪽이요?”“네, 조금만.”현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의자를 끌어 옆으로 옮겼다.“딱 그 정도요.”여림은 한쪽 눈을 감고 현재와 자신의 시선을 번갈아 확인했다.드디어 윤호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지자 여림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왜 그러세요?”현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아무것도…….”현재에겐 미안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차윤호 얘기를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여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혹시 저, 한 병만 더 마셔도 될까요…….”현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 한 병을 더 시켜주었다.***[알겠어 내일 보자]무슨 월요일부터 그 회사는 회식을 하냐. 윤호는 운전대에 머리를 기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뒷좌석에 놓인 쇼핑백

  • 얼어 죽을 첫사랑   7화. 타이밍

    콘서트 기획 일정에 맞추려면 생각보다 기간이 빡빡했다. 전해 듣기론 이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모먼트에 왔던 게 아니라고 했다.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일정에 맞추려면 생각해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자, 우리 잘해봅시다!”정예 멤버를 꾸리는 것이었다.비록 멤버를 뽑은 것은 하영이었지만.“첫 PM이시죠 여림 님?”재훈이 웃으며 말했다.“네…. 부족한 게 많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아니에요. 우리가 한두 번 같이 일한 것도 아니고.”모먼트가 그렇게 큰 회사는 아니기 때문에 이미 얼굴을 다 익힌 사이였다.“아, 제가 첫 PM 맡은 기념 밥이라도 쏠까 싶은데!”“오늘이요?”“아, 오늘? 어… 전 가능한데, 다들 괜찮으세요?”오늘을 딱히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언젠가 첫 PM을 맡으면 꼭 밥을 쏴야지 생각했었다.“저는 오늘 와이프랑 저녁 먹기로 해서…….”공연장 세트 제작과 기술 업체 담당인 재훈이 곤란한 듯 이야기했다.“아, 신혼이시지…. 어쩔 수 없죠 뭐.”얼마 전, 결혼한 새신랑이었다. 여림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휙 재훈의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전 오늘 퇴근하고 친구 취업 축하 파티가…….”홍보 및 마케팅 담당 가은 역시 난감한 듯 말끝을 흐렸다.“취업도 어쩔 수 없죠. 과반수가 안 되면 그냥 다음에 쏠게요!”하긴,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당일 회식을 잡아. 나라도 없는 약속 만들어가면서 안 갔을 게 뻔한데.“그럼 일단 다음 기획안 미팅 때 봬요!”여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은과 재훈은 고개를 숙이고는 미팅실을 나갔다.그때, 책상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의 화면이 반짝였다.[길바닥]ㅡ 오늘 옷 돌려줄까?윤호로부터 온 연락이었다.저도 모르게 화면을 눌러 읽어버렸다. 너무 바로 본 탓에 쉽게 답장도 하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라고 답장하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여림은 시계를 바라봤다. 퇴근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준비되지 않은 마음. 왜 이렇게 심장이

  • 얼어 죽을 첫사랑   6화. 약속

    ‘나 오늘 자고 가도 돼?’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 없이 집에 돌아와서 잠든 후 일어났을 땐 이미 꿈처럼 지나간 일이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이불킥 할 말은 왜 한 건지.‘그럼 번호 알려줘.’여림이 자신의 예전 번호를 차단했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림과 번호 교환을 한 것이 이상하게 마음이 묘했다. 여림은 옷을 돌려받기 위함일 뿐일 텐데.[여림]한동안 아무것도 없는 대화창에서 여림의 이름만 바라보았다. 만나지 않던 시간 동안 연락해볼까 망설이며 이름만 닳도록 쳐다보았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필 그날 널 다시 만난 건……윤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화면을 껐다. 꺼진 화면 속에는 씁쓸해 보이는 윤호의 표정이 남아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지 또 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공백이 너무 길었으니.8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드는 후회는 하나였다. ‘미안, 못 가.’그렇게 보내지 말 걸. 설명이라도 제대로 해줄 걸.그런 생각을 할 때 쯤.“야, 주말에 괜찮았냐? 비 엄청 쏟아졌잖아.”“아니.”이제 막 출근한 듯한 지언이 찾아왔다.“그래. 네가 괜찮았을 리가 없지. 안 그래도 부모님 기일에 비까지 쏟아졌으니.”성지언.윤호와 미국에서 만나 한국에 윤호를 데려와 준 친구였다. 지금 윤호가 살고 있는 집을 구해준 것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 들어올 수 있던 것도 지언이었다. 워낙 발이 넓고 친화력이 좋다. 하지만 윤호와 너무 붙어 다녀 한때는 윤호와 브로맨스 관계라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윤호가 있는 힘껏 부정한 덕분에 사그라들긴 했지만.“뭐, 그거 때문만은 아니긴 한데.”지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어제 또 뭔 일 있었냐?”무언가 냄새를 맡은 듯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별 거 아냐.”“별 거 아니라고 할 때, 대부분 별 거 아닌 건 없지.”윤호는 대답 대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지언은 윤호의 책상에 놓

  • 얼어 죽을 첫사랑   5화. 폭풍 후 폭풍 전야

    탁, 탁, 탁.사무실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우당탕탕 윤호가 휘젓고 간 주말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평일. 여림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손가락만 움직였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주말 내내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도 정신은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윤호가 집을 나갈 때, 정신도 같이 나간 듯 했다. 그렇게 오전 업무 시간이 끝나고, 간신히 숨을 돌리던 점심 시간. 도저히 입맛이 없어서 대충 가져온 바나나로 때우고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림 님, 무슨 일 있으세요?”그때 한숨 돌리던 여림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아, 현재 님…. ”여림의 직장 동료, 남현재였다.현재는 모먼트의 햇살 같은 존재였다.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잘 웃는지. 지금껏 현재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성격도 다정하고 사려 깊어서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묘한 힘이 있었다. 여림과는 입사가 일 년 정도 차이 나는 선후배 사이였다. 현재는 여림의 사수로서 가장 많이 붙어 있던 동료이기도 했다. “잠을 좀 설치셨어요? 오늘 영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길래.”현재는 자연스럽게 여림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아니에요, 저 정말 괜찮은데.”거짓말이었다.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다크서클은 턱 끝까지 내려와 있는 느낌이었고, 눈은 퀭한 게 귀신도 울고 갈 만할 정도였다. “그냥, 월요일이라 그런가 봐요.”여림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월요일은 무적이었다. 어떠한 일에도 요긴한 핑계 거리가 돼 주었다. “아, 그쵸. 월요일은 충분히 이해합니다.”현재도 그 말에 더는 걱정하지 않는 듯 공감을 했다. 여림은 들고 있던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컵 안에 커피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현재는 작게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럼 제가 여림 님 기분 좋아질 만한 소식 하나 알려드릴까요?”“무슨 소식이요?”여림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