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별채 문밖에서 웅성웅성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재 앞에서 밤을 새워 육정을 만나고 온 지 사흘째 되던 아침.
본디 명주의 머릿결은 타고나기를 물기를 머금은 탄력 있는 까만 머릿결이었다.
제법 동경을 바라보며 스스로 머리를 빗어 내리는 그녀의 손이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명주가 문을 열자 찬 아침 빛이 확 밀려들었다.
마당에 손님이 와 있었다.
심가에서 온 애어멈이었다.
그녀가 어릴 적, 작고 여린 명주를 늘 업어 재워 주던 사람.
등에 업히면 마른 쑥 냄새가 나던 사람이었다.
그 등이 이제 굽어져 더는 아이를 업을 수 없겠다고 명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멈의 발이 온통 흙투성이에 한쪽 신끈이 끊어져 새끼줄로 묶여 있는 것은 명주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명주의 까맣고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보자 어멈은 가슴이 저렸다.
"아씨!"
어멈은 그만 무릎이 꺾여 흙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대인께서…."
"아버지가?"
명주가 버선발로 문지방을 넘어 어멈 앞에 서자 섬돌의 찬 기운이 발바닥에 쨍하게 올라왔다.
"대인께서 어제 새벽에 가셨습니다…. 흑… 끄윽…."
"어디로?"
어멈은 그 물음에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어디로 가셨느냐?"
끅끅 삼키다 터진 어멈의 울음이 이른 아침 별채를 지나 온 마당에 낮게 퍼져 나갔다.
행랑 쪽에서 문이 하나 열렸다가 이내 다시 닫혔다.
명주는 어멈이 왜 우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어멈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빗어 내리다 만 까만 머리카락이 아침 바람에 물결치며 흘러내렸다.
"나리께서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셨다."
명주가 밝은 얼굴로 어멈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약을… 누가 옥에 약을 넣어 드렸다 하옵니다."
어멈이 고개를 들어 명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명주는 고개를 머리칼이 흘러내린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약을?"
서리 내린 아침 빛 속에 선 아씨는 여전히 고왔고 여전히 맑았다.
아비가 죽었다는 말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이 곱고 맑음이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어멈은 알고 있었다.
어멈은 명주를 업어 주던 그때를 다시 곱씹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땅에 댔다.
그 뒤로 어멈은 명주의 얼굴을 더는 보지 않았다.
일어나 절을 하고, 뒷걸음으로 물러가고, 중문을 나갈 때까지.
명주는 별채로 돌아와 앉아서 그대로 창을 바라보았다.
어멈의 돌아가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제야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쪽창으로 보이는 담 끝에 까치 한 마리가 포르르 내려앉았다가 날아갔다.
명주는 까치가 앉았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녀가 들여놓고 간 밥상을 끌어왔다.
탕에서 모락모락 올라온 김이 창 쪽으로 가늘게 흐르다가 중간에서 스러졌다.
명주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들었다가 도로 밥상 위에 내려놓았다.
달그락, 그 소리가 빈방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가녀린 그녀의 어깨가 떨려 오기 시작했다.
"어제…."
그녀는 밥상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리께서 사람을 넣으신다 하셨는데…."
탕은 이미 차게 식었고 들어온 그대로 다시 물렸다.
저녁상은 들어오지 않았다.
명주는 그것을 밤이 깊고 나서야 알았다.
이튿날 점심이 다 되어서야 명주는 몸을 일으켰다.
안채로 가는 그녀의 걸음이 똑바르지 못했다.
약간 절름거리는 듯이 비틀비틀 걸어 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한층 더 처연하였으나 육가의 시종들은 마치 명주를 역병 환자라도 되는 양 벽 쪽으로 붙어 피했다.
아무도 명주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안채 문 안에서 맑게 웃는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명주가 문을 열자 서란이 환한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남쪽 창을 활짝 열어 놓아 볕이 방바닥 절반까지 그득 들어와 있었고 그 빛을 받아 서란의 곱디고운 머리 장식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흔들렸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 분홍빛 손톱, 매끈하고 통통한 입술과 사랑을 듬뿍 받는 듯한 응석이 섞인 웃음소리를 가진 서란이었다.
마치 애초부터 그곳의 주인이었던 양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명주를 바라보았다.
연둣빛 적삼. 소매 끝에 은실로 넝쿨을 수놓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서란의 소매가 손등을 반쯤 덮고 있었다.
"언니."
명주는 물끄러미 수놓아진 소매 끝을 바라보았다.
서란이 명주의 시선을 따라 제 소매를 내려다보고는 눈꼬리를 슬며시 접으며 말했다.
"나리께서 주셨어요."
명주가 방 안을 둘러봤다.
동경이 있었다. 명주가 십 년 동안 아침마다 그 앞에 앉던 것.
그 위에 향낭이 놓여 있었다.
향낭은 새 실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명주가 차던 것과 같은 비단인데 매듭만 달랐다.
명주가 가만히 그리로 가 향낭을 집어 코에 대 보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났다.
십 년 동안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언니."
서란이 뒤에서 말했다.
"그건 이제 제 것이에요."
이틀째 갇힌 방에서 빗장 소리에 잠이 깼다.잠이라 할 것도 없었다.벽에 기대앉은 채로 눈만 감고 있었고, 감은 동안에도 바깥 소리를 세고 있었다.순라가 네 번 지나갔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이가 길었다.문이 열렸다. 밖에 사람이 없었다.문을 연 자가 물러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열어 놓고 비켰다.한경이 일어섰다. 다리가 저려 한 번 휘청했고, 벽을 짚었다.마당으로 나왔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마당이었고, 달이 담 위에 걸려 있었다.담 밖 회랑에 등이 하나 켜져 있었다. 한경으로 걸었다.걷는 동안 발이 두 번 미끄러졌다.이틀을 앉아만 있던 다리라 무릎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고, 치맛단 안쪽이 무릎에 붙어 있었다.붙은 자리가 쓸려 걸을 때마다 따가웠다.머리는 이틀째 풀린 채였다.은비녀는 계단 아래로 굴러간 뒤로 없었고, 흰 끈도 어디선가 빠졌다.어깨에서 등으로 흘러내린 머리가 걸음마다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옷깃이 한쪽 어긋나 있었다.손으로 여미면서 걸었다.* * *회랑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등을 든 자도 없었고 따르는 자도 없었다.기둥 곁에 혼자 서 있었고, 곤복을 걸치지 않았다.검은 겉옷 하나였고 관을 쓰지 않았다.머리를 묶기만 했다.한경이 걸음을 멈췄다.침향이 왔다. 멈춘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숙인 시야 안에 회랑 널과, 그 위를 밟은 검은 신코가 들어왔다."폐하."발소리가 왔다. 두 걸음을 왔다.두 걸음에서 멎었다.멎은 자리가 무릎 앞 한 자였다."다쳤느냐."낮은 목소리였다. 회랑이 비어 있어서 그 소리가 기둥에 한 번 부딪혔다가 왔다."…아니옵니다.""물은 마셨느냐.""예.""밥은."한경이 숙인 고개를 더 숙였다.옷자락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그가 반 걸음 더 왔다.* * *"짐이 오늘 내보내라 하였다.""…""명부에 네 이름이 없더구나."숙인 채로 있었다.회랑 널의 결이 눈앞에 있었다.널 사이에 검은 흙이 얕게 끼어 있었고, 그 흙이 낮에 누
방에 창이 하나 있었다. 높고 작았다.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자리에 있어서, 해가 어디쯤 갔는지는 벽에 드는 빛의 각도로만 알 수 있었다.빛이 벽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내려가서 바닥에 닿았다가, 좁아지다가, 없어졌다.물이 한 번 들어왔다.밥은 들어오지 않았다.한경은 벽에 기대앉아 무릎을 세웠다.세운 무릎 위에 팔을 얹고, 얹은 팔에 이마를 댔다.머릿속으로 하나씩 놓았다. 옥패를 준 날. 사삿집에 간 날.상궁이 붓을 멈춘 자리.그 자리에서 오늘 못 나가게 된 것.거기까지 놓고 나면 답은 하나였다.나갈 수 있는 날은 저쪽이 정한다.그러면 남는 일은 하나뿐이었다.나갈 때까지 몸을 상하지 않는 것.한경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벽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세웠다.물그릇을 들어 반만 마시고 반은 남겼다.* * *저녁에 내관부 앞에서 소란이 있었다. 육정이 왔다.관가에서 자라던 말은 전해졌고, 전해진 것을 듣고 왔다.관복을 입은 채였다.내관부 서리에게 명부를 보자 했고, 명부는 내관부 것이라 외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대답이 왔다."내 처가 오늘 궁에 들었소.""…예.""나온 사람 명부에 없다는 말을 들었소."서리가 명부를 두 손으로 말아 쥐었다.육정이 문 앞에 섰다.물러가라는 말을 듣고도 서 있었고, 해가 다 진 뒤에도 서 있었다.궁문이 닫혔다. 닫힌 문 앞에 그대로 섰다.밤바람이 관복 자락을 흔들었고, 흔들리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강목이 온 것은 자시 무렵이었다.삿갓에 이슬이 앉아 있었다."…대인.""…""돌아가시지요."육정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궁문 쪽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심약.""예.""저 안에서 사람이 하룻밤을 지내면, 이튿날 아침에 나오오?"강목이 대답하지 못했다.대답을 고르는 사이가 길었다."…나오는 사람도 있고, 안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육정이 그 대답을 듣고 처음으로 자세를 고쳤다.고치면서 갓끈을 다시 맸다."심약.""예.""내 처가 저 안에서
사흘 뒤 아침, 궁문에서 가마가 멎었다.내관이 평소 가던 회랑으로 가지 않았다.태의원도 아니고 태후 처소도 아닌 쪽이었다.담이 높고 창이 작은 건물이었고, 마당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문 앞에서 내관이 물러났다.대신 상궁 하나가 나와 섰다.지난번 태후 처소에서 소반을 올리던 그 상궁이었다."안으로 드시지요."방이 좁아서 소반 하나와 자리 둘을 놓으니 남는 데가 없었고,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상궁이 마주 앉았다.앉으면서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폈다."성 밖 셋째 마을 일로 여쭐 것이 있습니다."한경이 무릎 위에 손을 겹쳐 놓았다. 오른손이 위였다."물으세요."* * *물음이 차례로 왔다.그날 그 집에 간 것이 맞느냐. 맞다.그 집 주인에게 문을 닫으라 한 것이 맞느냐. 맞다.그때 무엇을 보이었느냐.한경이 소매에서 옥패를 꺼내 소반 위에 놓았다.상궁이 그것을 보고도 집지 않았다.눈만 한 번 내렸다가 올렸다."이 물건을 어디에 쓰셨는지 아뢰라 하십니다.""애 넷 데리고 나오는 데 썼어요.""…그 아이들이 부인 댁 종이옵니까.""아니요.""부인 친정 사람입니까.""아니요.""그럼 남의 집 사람을 남의 집에서 데리고 나오신 것이군요.""저, 소인이 아뢰옵기로는 그 집이 남의 집이라 하기에는 우리 댁 어공 물목이 스물 몇 해 드나든 집이고, 드나든 집이면 아주 남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 예로부터 물건이 오가면 사람도 오가는 법이라 하여—""총관.""…예, 부인.""내가 대답하고 있었어요.""…그렇게 되나요."상궁이 붓을 들어 적었다.적는 획이 곧았다."그 집이 궁과 무슨 상관이 있어 궁의 물건을 보이셨습니까."한경이 대답하지 않았고, 소반 위의 옥패를 손끝으로 반 바퀴 돌려 놓았다."부인.""그 집이 궁하고 무슨 상관인지는, 그쪽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붓이 멎었다. 상궁이 고개를 들었다.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십니까.""아는데요."
자시 무렵 곁방 쪽에서 소리가 났다.아이가 자는 방이라 한경이 등을 들고 나갔다.아이는 자고 있었고 어미가 그 옆에 웅크려 있었다.소리는 곁방이 아니라 그 너머, 뒷문 쪽이었다.빗장이 안에서 걸려 있었다.걸린 빗장을 누가 밖에서 두 번 두드렸다.두드리는 소리가 크지 않았다.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소리였다.한경이 등을 낮추고 문에 귀를 댔다. 나무가 차가웠다."부인." 빗장을 뺐다.* * *서란이 서 있었다. 한 달 만이었다.얼굴이 반쯤 상해 있었고 광대뼈 아래가 부어 있었다.옷은 이 집에서 입던 것이 아니었고, 어디서 얻어 입은 남자 옷이었다.발에 신이 한 짝뿐이었다.들어오라는 말을 하기 전에 서란이 문지방을 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부인. 소인이 돌아왔습니다."한경이 그 팔을 잡아 일으켰다.일으키는데 팔이 가벼웠다.곁방으로 데려가 앉히고 물을 먹였다.서란이 두 모금 마시고 사레가 들렸다.기침이 오래갔고, 기침 끝에 손등으로 입을 닦자 손등에 붉은 것이 묻었다.한경이 그 손을 잡아 등불 아래로 가져갔다."어디 맞았어.""괜찮습니다.""어디 맞았냐고."서란이 대답하지 않자 한경이 그 옷깃을 벌리려 했고, 벌리려는 손을 서란이 막았다."부인. 그것보다.""…""들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서란이 한 달 동안 어디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말한 것은 셋이었다. 첫째.심가 서재의 상자는 궁으로 들어갔다.명부 원본이 태후 처소 어딘가에 있다.둘째. 대부인께 선단을 보낸 비단 파는 여자는 태후 처소 상궁의 조카다.값을 안 받은 것은 값을 나중에 부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집에 넣기 위한 것이었다.셋째. 서란이 여기서 한 번 숨을 골랐다."…성 밖 사삿집 일로 부인을 걸려 하십니다."한경이 등불을 조금 당겼다.불빛이 서란의 얼굴까지 올라왔다."걸어요? 뭘로.""궁의 물건을 성 밖 사삿집에 쓰셨다고요.옥패를 보이시고 남의 집 문을 닫게 하셨으니, 그 일이 궁의 위
가마가 낮에 중문에 닿았다.해가 아직 마당 한복판에 있었다.초하가 뛰어나와 주렴을 걷다가 시각을 보고 한 번 멈칫했다."부인. 벌써요?""내관부에서 나가라 그러던데.""물목은요.""세 짝 남았는데 내일 보래.""내일 보래요?""응.""궁에서요?""응."초하가 주렴을 든 채로 서 있었다.궁이라는 데가 내일 보자는 말을 하는 데인 줄 몰랐던 얼굴이었다."거기 사람들도 내일 보재요?"한경이 웃음을 터뜨렸다."소인이 또 무얼 잘못 여쭈었습니까.""아니. 너 궁을 무슨 절간인 줄 아는구나.""절간은 아니고요, 소인이 아는 데가 없어서 그런데, 거기가 밥은 준대요?아씨 아침 안 드시고 가셨잖아요.물목을 세 짝이나 보시는데 밥도 안 주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아니 아씨, 밥은 드셨어요? 안 드셨죠. 얼굴이—""초하야.""예.""밥 얘기부터 했으면 내가 더 빨리 대답했지."한경이 가마에서 내렸다.내리면서 치맛단을 한 번 털었다.마루에 대부인이 나와 앉아 있었다.굳은 손을 무릎에 놓고, 며느리가 마당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일찍 왔구나.""예."대부인이 무어라 더 말하려다 말았다.말하려다 만 것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 *육정이 돌아온 것은 해가 기울고서였다.관복이 젖어 있었다.비가 오지 않았는데 등판이 젖어 있었고, 갈아입지 않고 사랑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저녁상을 물리고 한경이 사랑으로 갔다.문을 열자 그가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관복을 그대로 입은 채였고, 갓끈을 풀지 않았다."오늘 궁에 드셨다면서요.""어공 물목 때문이오.""물목요.""…""물목이면 서리를 보내지, 왜 나리를 불러요."육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한경이 문을 닫고 들어와 앉았다."무슨 말 들으셨어요.""아무것도.""나리.""부인."육정이 갓끈을 풀었다.푸는 손이 두 번 어긋났다."오늘은 왜 일찍 오셨소.""내관부에서 나가라던데요.""어제는 해 지고 나오셨소.""오늘은 사시에 나가래
육정이 편전에 든 것은 사시였다.부름의 명분은 어공이었다.가을 물목에 빠진 것이 있어 낸 집에 묻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것은 관가에서 서리를 보내 물으면 될 일이었다.관복을 입고 궁문을 지나면서 육정은 그것을 알았다. 알면서 걸었다.편전은 넓고 조용했다.승지 둘이 벽 쪽에 서 있었고, 발은 드리워 있지 않았다.황제가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등을 기대지 않았다.검은 곤복이었고 금실이 깃과 소매 끝에만 들어가 있었다.육정이 그것을 보고 값을 매기려다 매기지 못했다.관가에서 물목을 스무 해 보아 온 눈이었다.비단의 결은 짚였고 금실의 산지도 짚였는데, 깃의 시침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났는지가 보이지 않았다.실밥이 한 올도 나와 있지 않았다.이런 옷은 짓는 사람이 여럿이고 그 여럿이 서로 얼굴을 모른다.값을 셈하려면 사람 수부터 세어야 했는데, 세다가 그만두었다.옥대 하나였다. 그 밖에 몸에 걸친 것이 없었다.없는데도 방 안의 균형이 그쪽으로 기울어 있어서, 육정은 절을 올리기 전에 제 관복 소매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붓을 놓은 자리에 종이가 한 장 있었다.글자가 다 쓰여 있었다.육정이 절을 올렸다.* * *어공 물목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빠진 것이 셋이라 했고, 남방 것으로 채우겠다는 대답에 그리하라는 말이 왔다.그것으로 부름의 명분은 끝났다.끝나고도 물러가라는 말이 오지 않았다."육 대인.""예, 폐하.""성 남쪽에 밭이 있다지."육정의 등이 굳었다.굳은 것이 어깨선에서 먼저 보였다."…있었사옵니다.""있었다.""…지난달에 넘겼사옵니다."무엇에 넘겼느냐는 물음이 오지 않았다.황제가 종이를 밀어 놓았다."남쪽 세 고을이 비어 있다.자사(刺史) 자리다."승지 둘이 고개를 들었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도로 내렸다."…폐하.""육가는 대대로 어공을 내온 집이고, 대인은 관가에서 물목을 보아 왔다.물건이 어디서 나고 어디로 가는지 아는 자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이치에 맞는 말이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