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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심가

작가: moominkiller
last update 게시일: 2026-08-04 21:33:04

동짓달에 사람이 왔다.

별채 문밖에서 시녀가 누군가와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았고, 명주가 가만히 창에 귀를 댔다.

"…심 대인이 하옥되셨다는데."

"쉿."

"세곡이라던가. 삼 년 치가 비었다고."

"심가가 저리 되면 이 댁 뱃길은 어찌 된대."

"그걸 우리가 왜."

"쉿, 안에서 듣는다."

명주가 문을 열었다.

시녀가 놀라 돌아섰다.

"우리 아버지가."

"부인."

"우리 아버지가 어찌 되었다고."

시녀는 대답하지 않고 물러갔다.

명주는 문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심가, 하옥, 세곡.

들은 말들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흩어지고, 아버지가 옥에 있다는 것만 남았다.

옥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명주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것임엔 틀림이 없었다.

갑자기 마음이 까닭 모르게 조급해졌다.

명주는 비뚤어진 옷끈 채로 안채로 달려 나갔다.

별채에서 안채까지는 마당을 두 번 건너야 했다.

바람이 담을 훌쩍 넘어와 마당에서 휘 돌았고, 서리 앉은 흙이 내딛는 자리마다 신 밑에서 버석버석 부서졌다.

명주는 안채로 가는 그 길을 쭉 따라 허둥지둥 걸으며 아버지. 하옥.

두 단어를 입으로 되뇌었다.

지금 육정에게 고해야만 아버지가 괜찮을 것 같았다.

안채에서 서재로 꺾어 드는 길목에서, 서재를 지키던 종이 명주를 가로막고 섰다.

"나리께서 안 계십니다."

명주는 그제야 육정을 찾아서 아비의 일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리겠다."

종은 고집을 부리는 옛 안채의 주인을 향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땀만 뻘뻘 흘렸다.

명주는 다시 한 번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리를 여기에서 기다리겠다."

명주는 서재 앞 섬돌 위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섬돌은 얼음장처럼 찼고 그 찬 기운이 치마를 지나 스멀스멀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오가던 계집종들이 명주를 흘끔 돌아봤다가는 이내 눈을 돌렸다.

추위에 핏기가 가신 낯이 저무는 빛 속에서 서리를 맞은 배꽃처럼 희게 피어났고 젖은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남은 빛이 잘게 부서졌다.

부엌의 늙은 오어멈이 두 번째 지나갈 때 저도 모르게 앞치마 자락을 꾹 쥔 채 한참 서 있다가 행랑 쪽에서 누가 부르자 그제야 발걸음을 옮겼다.

명주가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사이 행랑에 둘, 서재에 하나, 등에 불이 들어왔다.

불빛에 사람 그림자가 왔다 갔다 지나갔는데 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밤이 깊도록 그 그림자는 한자리에 앉지 못했다.

서재에서 사람이 두 번 나왔는데 한 번은 종이를 들고 뛰었고 한 번은 빈손으로 뛰었다.

나오는 이들은 섬돌 곁에 앉은 명주를 흘끔 보고는 그대로 뛰어갔다.

완전히 어둔 밤이 찾아왔다.

시녀가 등을 들고 나와 무어라 했지만 명주는 듣지 못했다.

섬돌 위에서 싸늘하게 식은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이마를 얹고 앉아 있는 명주의 버선이 축축했다.

갈아 신을 것을 가져오겠다고 시녀가 말했을 때 명주는 가만 고개를 저었다.

젖은 버선은 싸늘한 밤바람에 발을 얼렸다.

발가락의 감각이 무뎌져 어느 때부터는 발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치맛단이 젖었다가 그대로 뻣뻣하게 얼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종아리를 서걱서걱 스쳤는데 나중에는 닿는 줄도 몰랐다.

컹, 컹. 담 밖 어딘가에서 개 한 마리가 짖다가 그 소리마저 뚝 그치자 세상이 고요했다.

제 숨소리가 귀에 너무 크게 울려 명주는 숨을 얕게 쉬었다.

새벽에 삐걱, 서재 문이 열렸다.

명주가 고개를 들었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육정이 십 년은 늙어 버린 얼굴로 서 있었다.

밤새 갈아 낸 먹이 손끝마다 거뭇거뭇 배어 있었고, 어제 그대로인 옷깃은 후줄근하게 꺾여 있었다.

관자놀이께 머리가 눌리고 눈 밑은 시커멓게 꺼졌는데, 그 퀭한 눈이 섬돌 위의 여인에게 닿는 순간 흠칫, 아주 잠깐 흔들렸다가 이내 굳었다.

탁한 먹 냄새가 진동하는 손으로 명주의 팔꿈치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막상 그의 얼굴을 보자 계속 읊조리던 그 두 마디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명주는 비틀거리며 반쯤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돌아가시오."

늘 다정하게 이야기하던 육정의 목소리가 오늘은 몹시 화난 사람처럼 거칠었다.

다만 그 거친 말끝이 실낱처럼 가늘게 갈라져 있었다.

명주는 가까스로 떠올린 말을 황급히 내뱉었다.

"아버지가. 옥에."

"돌아가시오, 부인."

명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처롭게 육정을 올려다보았다.

밤새 언 몸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늘게 떨렸고, 여윈 어깨 위로 새벽빛이 얇게 얹혔다.

까맣고 큰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말 듯 했는데, 긴 속눈썹에 앉은 서리가 그 물기를 받아 잘게 반짝여서, 우는 것보다 더 우는 얼굴이 되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할 만한 낯이었다.

육정은 심가에 드나들던 어린 시절부터 명주에게 애타는 마음이 있었기에, 더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심복 장복에게 명주를 처소로 데려가라 이르고 발길을 돌렸을 때, 명주가 그의 등 뒤에다 또 물었다.

"우리 아버지가."

육정이 발을 멈추었다.

명주가 그의 옷자락 아래로 손가락이 작게 오므라드는 것을 보았다.

"내가… 사람을 넣겠소."

명주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육정은 서리를 맞고 몸이 굳어 어정쩡하게 선 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제 여인을 당장 안아 들고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의 지난날부터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지금 제 손을 떠난 이 사건까지도 목숨을 걸고 돌려놓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녀를 끝까지 지킬 방도도, 그럴 만한 심지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장복아. 부인을 처소로 모셔라."

육정은 그대로 돌아서 서재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도 문고리를 바로 놓지 못하고, 문고리를 쥔 채로 그대로 서 있었다.

명주는 부축을 받아 별채로 돌아갔다.

별채에는 따뜻한 물도 시중드는 손도 없었다.

제 손으로 언 버선을 벗고 붉어진 발을 끝에서부터 꼬물거려 보았으나 잘 움직이지 않았고, 조금 지나자 저리기 시작했다.

저린 것이 가라앉기도 전에 명주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이 들었다.

누워 잔 것도 아닌데, 십 년 중에 가장 단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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