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안에서 사내 목소리가 둘이나 들리는구나.”
최씨 부인의 지팡이가 다시 마루를 두드렸다.
해원은 허담의 도포 깃과 돌쇠의 소매를 쥔 채 문을 바라보았다.
등잔불에 늘어난 세 사람의 그림자가 창호지 위에서 겹쳐 있었다.
저것까지 들키면 의원의 진맥만으로는 둘러댈 수 없었다.
허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문 앞에 어머님이 계신데요?”
“진맥하러 왔다고 하면 됩니다.”
해원의 시선이 돌쇠에게 옮겨갔다.
“그럼 돌쇠는?”
돌쇠는 병풍과 낮은 장롱, 반쯤 열린 창문을 빠르게 살폈다.
어느 곳도 넓은 어깨를 온전히 감춰 주지는 못했다.
“담을 넘겠습니다.”
“창을 여는 순간 들켜.”
바깥에서 최씨 부인이 재촉했다.
“해원아, 문을 열거라.”
복례가 문밖에서 황급히 말했다.
“마님께서 진맥을 받고 계십니다.”
“의원 말고 다른 사내 소리도 들렸다.”
허담이 병풍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시오.”
돌쇠의 턱선이 굳었다.
“양반 나리 뒤에 숨으라는 겁니까?”
“붙잡히고 싶다면 서 있어도 되네.”
“둘 다 그만해요.”
해원이 두 사람을 놓았다.
허담의 도포 깃과 돌쇠의 소매에는 손가락이 지나간 구김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의원 나리는 앉아요. 돌쇠는 병풍 뒤로.”
돌쇠가 병풍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지만 적삼 자락이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해원은 직접 다가가 천 끝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친 옷감 아래의 열기가 손바닥에 번졌다.
돌쇠가 숨을 한 번 삼킨 뒤 말했다.
“이러다 정말 들킵니다.”
해원은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문고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내가 직접 열어야겠느냐?”
해원은 흐트러진 옷고름을 여몄다.
머리카락도 손으로 쓸어 올렸지만 비녀가 없으니 한 가닥이 곧 다시 뺨으로 흘러내렸다.
“진맥하는 모습이어야 믿으시겠죠.”
그녀가 허담 앞에 앉아 손목을 내밀었다.
허담은 흰 천을 덮었으나 시선이 병풍 아래로 나온 돌쇠의 짚신 끝에 자꾸 걸렸다.
“저쪽 보지 마요.”
“가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나만 봐요.”
허담의 시선이 돌아온 순간 문이 열렸다.
복례가 막으려 했으나 최씨 부인은 이미 문턱 안으로 들어선 뒤였다.
“밤중에 무슨 진맥을 이리 오래 하느냐?”
해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담에게 손목을 맡겼다.
“낮부터 속이 답답하고 숨이 차 의원 나리를 불렀습니다.”
최씨 부인의 눈이 약갑과 흐트러진 자리, 미세하게 흔들리는 병풍을 차례로 훑었다.
“분명 다른 사내 목소리도 들렸다.”
허담이 답했다.
“제가 증상을 물었습니다.”
“의원이 목소리를 둘로 나눠 쓰느냐?”
병풍 뒤에서 돌쇠의 발이 조금 움직였다.
마룻바닥이 짧게 울렸다.
최씨 부인이 병풍을 향해 몸을 돌리자 해원이 허담 쪽으로 기울었다.
“갑자기 어지러워요.”
허담이 그녀의 팔을 받쳤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급격히 좁아졌고,
해원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의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
“열이 심하냐?”
최씨 부인의 걸음이 멎었다.
허담은 해원의 얼굴빛을 살피는 척 몸을 숙였다.
“열은 높지 않지만 호흡이 고르지 않습니다.”
“무슨 병인데?”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해원이 허담의 소매를 조금 더 당겼다.
“의원 나리.”
허담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 가까이 머물렀다가 올라갔다.
“상중에 오래 갇혀 생긴 울열입니다.”
“울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막힌 증세입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유 없이 숨이 차기도 합니다.”
“약으로 낫느냐?”
허담은 소매를 붙든 해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최씨 부인은 병풍을 다시 쳐다봤으나 더 다가가지는 않았다.
대신 복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져온 것을 달아라.”
복례가 머뭇거리며 작은 방울을 꺼냈다.
붉은 실이 매달린 놋방울이었다.
해원의 눈빛이 문 쪽으로 향했다.
최씨 부인은 방울을 가리켰다.
“문이 움직이면 안채에서도 들리게 매달아라.”
“어머님.”
“밤에는 문을 열어 둘 것이고, 내일부터 행랑어멈을 별당 앞에 재우겠다.”
복례가 문고리 위에 붉은 실을 묶었다. 놋방울이 가볍게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딸랑.
“열녀문을 세우기도 전에 집안 망신부터 세우지는 마라.”
최씨 부인이 돌아섰다. 복례가 뒤를 따르며 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
마루 끝에서 지팡이 소리가 세 차례 더 울린 뒤 완전히 끊겼다.
아무도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병풍 뒤에서 돌쇠가 빠져나왔다.
참았던 숨을 길게 내보낸 뒤 해원이 놓은 허담의 소매를 바라보았다.
“진맥은 손목으로 하는 줄 알았습니다.”
허담이 구겨진 도포 깃을 바로잡았다.
“무슨 뜻인가?”
돌쇠가 그의 옷깃을 가리켰다.
“거기까지 잡혀야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급한 상황이었네.”
“그래 보입니다.”
해원은 열린 문 앞까지 걸어갔다.
등잔 심지를 누르려던 손끝이 한 번 비껴갔다.
그녀는 다시 손을 뻗어 불을 껐다.
어둠이 방 안을 덮었다.
“문이 열렸다고 안이 보이는 건 아니지.”
허담이 약갑을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십시오.”
“더 머물면 어때서요?”
“다음에는 변명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원은 어둠 속에서 허담의 도포 깃을 다시 찾아 쥐었다.
허담은 그 손을 떼어 내지 않았다.
대신 흘러내린 소매로 해원의 손등을 가렸다.
“밤공기가 찹니다.”
해원이 웃었다.
“내 손이 차가운 게 아니라는 건 알잖아요.”
돌쇠의 손이 해원의 손목 가까이 다가왔다가 멈췄다.
“확인해도 됩니까?”
해원이 허담의 옷깃을 놓고 팔을 내밀었다.
그제야 돌쇠가 소매 끝을 받쳐 들었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뒤 짧게 숨을 들이켰다.
송진 대신 씁쓸한 약향이 배어 있었다.
돌쇠가 허담을 바라보았다.
“이 냄새도 진맥에 필요한 겁니까?”
허담이 답하기 전, 문고리에 매달린 방울이 울렸다.
딸랑.
세 사람이 동시에 문밖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치맛자락 하나가 마루 아래로 사라졌다.
해원은 다음 날 아침 돌쇠를 불렀고,별당 문은 열어 두었으나 그는 문턱 밖에서 더 들어오지 않았다.마당 건너편에는 허담이 약갑을 내려놓고 있었는데,전날 해원이 약만 두고 가라고 했던 탓에 계단 아래에서 발을 멈춘 채였다.거울 앞에 앉은 해원은 옥비녀를 머리에 꽂은 채 돌쇠를 바라봤다.“들어와.”돌쇠는 문턱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들어가도 됩니까?”“불렀으니까.”그제야 한 발 안으로 들어왔지만,시선은 해원의 얼굴보다 비녀에 먼저 닿았다.어제 제 품에서 떨어졌던 물건이라 눈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빼고 싶어?”“예.”“오늘은 안 돼.”돌쇠의 손가락이 옷자락 곁에서 접혔고,해원은 거울로 그의 반응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으며,비녀를 한 번 더 본 뒤 스스로 문턱 쪽으로 물러났다.“왜 가?”“안 된다고 하셨으니까요.”“갖고 싶은데도?”돌쇠는 비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숨을 삼켰다.“더 보고 있으면 또 손이 먼저 갈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들은 해원의 손이 옥비녀 끝에서 멈췄다.어제는 욕심이 먼저였으나 오늘은 물러날 자리를 골랐고,해원은 잠시 그를 본 뒤 손짓했다.“이제 와.”돌쇠가 고개를 들었다.“비녀만 빼.”“허락하시는 겁니까?”“이번에는.”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해원은 등을 보였고,거울 속에서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거친 손이 옥비녀 가까이 올라왔으나 곧장 닿지는 않았다.“머리카락에는 닿아도 됩니까?”“필요한 만큼만.”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돌쇠의 손가락이 매끈한 옥을 감쌌다.이윽고 비녀가 검은 머리 사이에서 빠져나오자 풀린 머리카락이 해원의 등 위로 흘러내렸고,가까워진 돌쇠의 숨도 함께 흐트러졌다.다만 그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지 않았으며, 옥비녀만 받쳐 들었다.해원이 손바닥을 내밀자 돌쇠는 곧바로 비녀를 올려놓지 못했다.엄지가 옥 표면을 한 번 쓸었고,해원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비녀가 손바닥 위로 옮겨졌다.“아직 놓기 싫지?”“예.”“그런데 놓았
“못 봤다고 했지?”흰 옥비녀가 마루 위에서 멈췄다.돌쇠도 허담도 허리를 굽히지 못했다.해원은 비녀보다 두 남자의 손을 먼저 봤다.한쪽은 대패 자국으로 거칠었고, 다른 한쪽은 약재 물이 배었지만 반듯했다.허담의 손이 비녀를 향해 움직였다.돌쇠도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해원이 옥비녀 위에 손바닥을 덮었다.“둘 다 손대지 마.”두 손이 동시에 멎었다.해원은 직접 비녀를 집었다.차갑던 옥 표면에는 돌쇠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비녀 끝에 붙은 대팻밥 한 조각을 손톱으로 떼어 냈다.밤새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갖고 싶다고 했지.”돌쇠의 시선이 비녀에 붙었다.“예.”“가져도 된다고는 안 했어.”“알고 있습니다.”“알면서 가져갔고, 물었을 때는 못 봤다고 했네.”돌쇠는 변명하지 못했다.허담이 약갑을 내려놓았다.“거짓말까지 한 사람을 다시 곁에 두실 겁니까?”해원이 고개를 돌렸다.“그 말을 할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해요?”허담의 입술이 닫혔다.“훔치지 않았으니 돌쇠보다 낫다고 생각했죠?”“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지금도요?”허담은 대답하지 못했다.해원은 그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아직도 그러네.”허담의 맥이 손끝 아래에서 빠르게 뛰었다.“다시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누가요?”대답이 늦어졌다.“의원 나리가?”“마님께서 원하신다면.”“그 말을 끝까지 하면 의원 나리도 오늘은 돌아가야 해요.”해원이 손을 놓자 허담은 더 말하지 못했다.돌쇠가 마루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무엇을?”“허락 없이 가져갔습니다.”“또.”“못 봤다고 거짓말했습니다.”“또.”돌쇠는 비녀를 바라보다 입술을 다물었다.해원이 옥비녀 끝으로 그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내가 찾아오길 바랐어?”돌쇠의 손이 천천히 접혔다.“갖고 있고 싶었습니다.”“그게 전부야?”“그 말까지 하면 더 비겁해질 것 같습니다.”
돌쇠는 해원의 비녀를 훔칠 생각이 없었다.적어도 별당 마루의 대팻밥을 쓸어 담을 때까지는 그랬다.새벽빛이 담장 위로 번지고 있었지만 방 안에는 아직 등잔불이 남아 있었다.돌쇠는 닫힌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기다리는 것과 부름받는 것은 다르다는 말을 전날 밤 배웠다.바구니를 들고 돌아서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해원은 풀어진 머리를 한쪽 어깨로 넘긴 채 서 있었다.손목에는 허담의 갓끈이 그대로 감겨 있었다.“아직도 안 갔어?”“치울 게 남았습니다.”“나무 조각보다 네가 더 오래 남아 있네.”돌쇠는 대답하지 않았다.시선만 갓끈에서 해원의 머리로 옮겨 갔다.검은 머리 사이에 꽂힌 옥비녀가 등잔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해원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왜 봐?”“아무것도 아닙니다.”“아무것도 아닌 얼굴은 아닌데.”그녀가 비녀를 뽑았다.머리카락이 어깨와 등 위로 한꺼번에 흘러내렸다.돌쇠의 손이 바구니 가장자리를 눌렀다.해원은 비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갖고 싶어?”돌쇠의 대답은 늦었다.“예.”“왜?”“마님이 늘 몸에 지니는 것이니까요.”“그걸 가지면 나도 네 쪽에 남는 것 같아?”돌쇠는 부정하지 못했다.“갖고 싶다고 다 가져도 되는 건 아니라는 말, 들었지?”“들었습니다.”“그럼 돌아가.”회랑 끝에서 복례가 해원을 불렀다.“마님, 안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해원이 고개를 돌렸다.최씨 부인이 보낸 사람이 무슨 말을 가져왔는지 묻는 짧은 사이였다.돌쇠의 손이 문턱을 넘었다가 멈췄다.해원이 돌아보면 바로 들킬 거리였다.그 순간 손목에 감긴 허담의 갓끈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돌쇠는 옥비녀를 움켜쥐어 소매 안에 숨겼다.해원이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바구니를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왜 아직 있어?”“이제 갑니다.”돌쇠는 별당을 떠나면서도 소매 안 비녀를 놓지 못했다.차갑던 옥은 손바닥의 열을 먹고 빠르게 미지근해졌다.몇 걸음 지나지 않아 비녀 끝이 손바닥을 찔렀다.해원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미 마님이 제 문 안에 계시니까요.”허담의 말이 끝나자 의원방 안이 조용해졌다.해원은 손가락에 감긴 갓끈을 놓지 않았다.팽팽해진 끈 아래로 그의 숨이 빠르게 오갔다.“다시는 문밖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다리겠다고 했죠.”“그렇습니다.”“둘 중 어느 쪽이 진심이에요?”“둘 다입니다.”해원은 매듭을 한 번 당겼다.허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그럼 오늘은 기다리는 쪽만 보여 줘요.”“무엇을 기다리면 됩니까?”“내가 이걸 풀 때까지.”허담은 손을 올리지 않았다.해원은 매듭부터 풀지 않고 갓 아래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끈이 그의 뺨을 스치며 느슨해졌다.그 순간 허담의 손이 해원의 허리를 끌어당기려다 옷감 위에서 멎었다.“또 참네요.”“풀라고 하신 것은 갓끈뿐입니다.”“내가 허락한 만큼만 가지려고요?”“그러지 않으면 전부 원하게 될 테니까요.”해원은 마지막 매듭을 풀었다.갓이 기울어 책상 위 약서로 떨어졌다.먹 받침이 밀리고 붓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허담은 줍지 않았다.해원은 풀린 갓끈을 그의 목에 느슨하게 둘렀다.“이제 의원인 척 못 하겠네요.”“마님이 벗기셨으니까요.”“갓 하나 풀었다고 남자가 돼요?”허담의 손이 허리에서 등으로 올라갔다.이번에는 해원이 막지 않았다.“어젯밤부터 남자였습니다.”“그런데 오늘까지 의원방에 숨었네.”“여기로 오시면 덜 흔들릴 줄 알았습니다.”“틀렸어요?”허담은 바닥에 떨어진 약서를 보지 않았다.“마님이 들어오신 뒤로 이 방의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무엇부터요?”“제가 앉던 자리부터.”그의 시선이 해원이 밀어낸 약서와 비뚤어진 먹 받침을 지나 그녀에게 멈췄다.“그리고 문을 열어 두는 일까지.”해원은 갓끈을 목 뒤로 당겨 그의 얼굴을 가까이 끌었다.“내가 벗긴 건 갓이지 예법이 아니에요.”허담의 눈길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예법까지 벗기고 싶으십니까?”“의원 나리가 얼마나 버티는지 보고.”허담의 손이 옷고름 가까이에서 멎었다.“제
의원방의 등불은 해원이 문 앞에 서자 한 번 크게 흔들렸다.문은 닫혀 있었다.허담은 안에서 기다리면서도 먼저 열지 않았다.해원은 손목에 감은 약향 밴 천을 한 번 당겼다.“들어오십시오.”“먼저 열어 주지는 않네요.”“오실지 제가 정할 수 없으니까요.”해원은 문고리를 잡았다.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안에는 약재 서랍과 낮은 책상, 침상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등불을 켜 둔다더니 정말 진맥만 하려고요?”“필요하시면.”해원은 문을 닫지 않은 채 들어갔다.약향이 별당에서 맡았을 때보다 짙었다.옷이 아니라 벽과 이불, 오래 밴 나무 서랍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여기서는 의원 나리 향을 피할 곳이 없네요.”“다만 문을 닫으면 의원 나리 방에 갇힌 모양이 되겠네.”허담이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해원은 문을 절반만 닫았다.“아직은 이것만.”허담은 남은 틈에 손대지 않았다.해원은 그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약서 위에 손을 얹고 붓을 옆으로 밀자 먹 받침이 비뚤어졌다.“바로잡고 싶어요?”“평소라면 그랬을 겁니다.”“오늘은?”“마님이 무엇을 흐트러뜨리는지 보고 싶습니다.”해원은 그의 손목에 두 손가락을 올렸다.맥박이 곧 손끝을 밀어냈다.“빠르네.”“의원방에 환자가 아닌 분이 오셨으니까요.”해원이 손가락을 손목 안쪽으로 옮겼다.“어젯밤의 남자?”“그 이름으로 부르시면 오늘도 그 사람이 될 겁니다.”“여긴 의원 나리 방인데.”“그래서 더 어렵습니다.”“뭐가요?”허담의 시선이 반쯤 닫힌 문으로 향했다.“제가 정한 곳에서까지 허락을 기다리는 일입니다.”해원은 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자기 방에서는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아닙니다.”“거짓말.”허담의 손이 책상 가장자리를 짚었다.정렬돼 있던 약서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는 줍지 않았다.“제가 문을 닫으면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이미 그러고 싶은 얼굴인데요.”“그래서 손대지 않는 겁니다.”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돌쇠는 밤이 지나도록 허담의 향이 묻은 손을 씻지 않았다.우물은 몇 걸음 앞에 있었지만 그는 대패부터 집었다.나무 장식의 둥근 면이 얇게 벗겨졌다.해원은 문턱에 기대어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그러다 전부 없어지겠어.”“없어지면 다시 만들겠습니다.”“내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대패날이 나무 위에서 멎었다.돌쇠는 해원의 풀어진 머리와 새로 여민 옷고름을 차례로 살폈다.허담의 약향은 소매뿐 아니라 소복 안쪽까지 깊이 배어 있었다.“마님께 드리려고 깎는 게 아닙니다.”“그럼 왜 깎아?”“손을 멈추면 방 안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날 것 같아서요.”해원이 계단을 내려갔다.소매 끝이 돌쇠의 손등을 스쳤다.옅어졌던 약향이 다시 짙어진 듯했다.“궁금해?”“예.”“어디까지 갔는지?”돌쇠는 대패를 내려놓았다.“묻지 않으려 했습니다.”“왜?”“마님이 고른 밤이니까요.”“그런데 떠나지도 않았잖아.”그의 시선이 깊게 파인 문살에 머물렀다.“떠났으면 문을 열고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내 허락도 없이?”“그래서 밖에 있었습니다.”해원은 그의 바로 앞에 섰다.“의원 나리와도 끝까지 갔어.”돌쇠의 엄지가 나무 장식의 모서리를 눌렀다.한동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화나?”“의원에게 화가 납니다.”“나한테는?”돌쇠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마님께 화낼 자격이 없다는 게 더 화납니다.”해원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내가 다른 남자를 고른 게 싫어?”“제가 받았던 걸 저 사람도 받았다는 게 싫습니다.”해원은 돌쇠의 손에서 나무 장식을 빼앗아 대패 옆에 놓았다.“내가 너한테 준 걸 의원 나리한테 나눠 준 게 아니야.”그녀가 약향 밴 소매를 들어 올렸다.“그날에는 너를 골랐고, 어젯밤에는 그 사람을 골랐어.”돌쇠의 입술이 닫혔다.“같은 밤 아니었어.”“무엇이 달랐습니까?”“그걸 왜 알고 싶은데?”“다음에는 더 잘하고 싶습니다.”“누구보다?”대답이 막혔다.해원의 표정에서 남아 있던 장난기가 사라졌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