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현이 맞잡은 손에 힘을 준 건 잠깐이었다.서윤은 그대로 한 걸음 가까워졌다.“왜.”“무엇이.”“또 당겼잖아.”“당기고 싶어서.”서윤이 웃었다.요즘은 정말.이런 대답이 빨랐다.이유를 돌려 말하지도 않고.자기가 하고 싶어서.자기가 골라서.그게 전부였다.“주인님.”“네.”“오늘은 여기까지?”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서윤의 손을 놓았다.“일어나십시오.”“갑자기?”“네.”“왜.”도현은 이미 소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보여드릴 게 있습니다.”서윤도 따라 일어났다.“새 도구?”“아니.”“그럼 뭐.”도현은 침실도.서재도 아닌.복도 끝 작은 방으로 향했다.원래는 거의 쓰지 않던 방이었다.큰 창 하나.낮은 수납장.벽에는 아무것도 없었고.한쪽에 작은 러그만 깔려 있었다.서윤이 문 앞에서 멈췄다.“여기?”“네.”“왜 갑자기.”도현이 불을 켰다.방 중앙에는.낮은 등받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평범한 목재 의자.새것이었다.서윤은 그걸 보다가.도현을 봤다.“이거 언제 샀어요?”“오늘 왔습니다.”“뭐 하려고.”“앉으려고.”“누가.”“당신.”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나?”“네.”“왜.”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대신.의자 위치를 아주 조금 돌렸다.창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대각선.방 안쪽도.창밖도 같이 보이는 각도.“이 자리.”“응.”“제가 골랐습니다.”서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나한테 안 물어보고?”“네.”“왜.”“물어보고 싶지 않았습니다.”몇 초.서윤은 그냥 그를 봤다.“주인님.”“네.”“그 말 좋다.”“무엇이.”“물어보고 싶지 않았다는 거.”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싫다고 할 수도 있었는데.”“그러면 바꾸면 되잖아.”“맞습니다.”“근데 일단 주인님이 정한 거잖아.”도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서윤은 의자를 다시 봤다.“앉아봐?”“아직.”멈췄다.도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제가 말하면.”서윤의
서윤은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책등을 하나씩 읽고 있었다.도현이 새로 산 건축 책과.예전에 읽던 경영서.스케치 참고 자료.그 사이에 이상하게 얇은 요리책 한 권이 끼어 있었다.서윤이 바로 꺼냈다.“이건 뭐예요?”도현이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무엇이.”서윤이 표지를 들어 보였다.《둘이 먹는 늦은 저녁》“주인님이 산 거?”“네.”“언제.”“지난주.”“왜 말 안 했어.”“책 하나 사는 것도 보고해야 합니까.”“아니.”서윤은 페이지를 넘겼다.복잡한 요리는 거의 없었다.냄비 하나.프라이팬 하나.이십 분 안에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이거 완전 우리 집용이네.”“그래서 샀습니다.”“오늘 해볼까?”도현이 시계를 봤다.아홉 시 십 분.“배고픕니까.”“조금.”“그럼.”자리에서 일어났다.“하나 고르십시오.”서윤은 목차를 훑었다.“크림파스타.”“늦은 시간에?”“그럼 토마토.”“그건 괜찮겠군요.”“주인님은?”“저도.”서윤이 책을 들고 주방으로 따라갔다.*냉장고를 열어보니 재료는 거의 다 있었다.방울토마토.마늘.베이컨.파스타 면.서윤이 냄비를 꺼내려 하자.도현이 먼저 말했다.“오늘은 제가 합니다.”“또?”“왜.”“저번에도 칼국수 주인님이 했잖아.”“그럼 오늘은 당신이 하고 싶습니까.”서윤은 잠깐 생각했다.“아니.”“그럼.”도현이 냄비를 꺼냈다.“앉아 있으십시오.”서윤이 바로 웃었다.“이거 명령?”도현이 손을 멈췄다.“원합니까.”“응.”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그럼 저쪽에 앉아 있으십시오.”주방 아일랜드 앞 높은 의자.서윤이 올라가 앉았다.“손은?”“편하게.”“뭐 하면 안 돼?”“오늘은 그런 것 없습니다.”“그럼 구경만?”“네.”도현이 물을 올렸다.서윤은 턱을 괴고 그를 봤다.소매를 걷고.마늘을 썰고.토마토를 반으로 자르고.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는 손.몇 분 지나지도 않아.도현이 말했다.“또 팔 봅니까.”“아니.”“거짓말.”
서윤은 메일 제목을 두 번 읽었다.[유럽 차세대 운영 책임자 멘토링 요청]보낸 사람은 인사팀이었다.대상자는 세 명.프라하 한 명.파리 한 명.뮌헨 한 명.그리고 멘토 후보 첫 번째 칸에.한서윤.“이걸 왜 내가.”옆자리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예린이 고개를 들었다.“뭐가.”서윤이 화면을 돌려 보여줬다.예린은 읽자마자 웃었다.“딱인데?”“뭐가 딱이에요.”“다섯 도시 굴려본 사람이 누군데.”“굴린 게 아니라 살아남은 거죠.”“그게 그거야.”서윤은 메일을 다시 봤다.멘토링 방식은 월 1회.일대일 면담.단.실무 판단에 직접 개입하지 말 것.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예린이 바로 알아챘다.“그 문장 때문에 싫지.”“아니.”“표정은 맞는데.”“멘토링인데 답을 주면 안 된대.”“원래 그렇지.”“물어보면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방향은.”예린이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답은 본인이 찾아야지.”서윤은 한동안 화면을 봤다.“카렐이 추천했나.”“그럴 수도.”“물어볼까.”“왜.”“진짜 카렐이면 한마디 하려고.”“무슨 말.”서윤이 입술을 눌렀다.“모르겠어.”예린이 웃었다.“벌써부터 멘토 자질 없는데.”“한예린.”“왜.”“나 안 할 수도 있어요.”“그러든가.”예린은 정말 관심 없는 듯 자기 노트북을 열었다.그게 오히려 이상했다.“안 말려요?”“왜 말려.”“나한테 잘 맞는다며.”“잘 맞는 거랑 해야 하는 건 다르지.”서윤은 다시 메일을 읽었다.잠깐.그리고.답장 버튼을 눌렀다.[한 달 시험 운영 후 지속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전송.예린이 화면을 힐끗 봤다.“했네.”“한 달만.”“응.”“대신 진짜 답 안 알려줄 거야.”“그 말부터 못 믿겠는데.”서윤이 그녀를 노려봤다.예린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첫날 후기 꼭 알려줘.”“안 알려줄 거예요.”“그럼 더 궁금하지.”*집에 들어오자.거실 바닥이 난장판이었다.판자.나사.조립 설명서
아침 회의가 끝났을 때.서윤은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대신 화면에 뜬 메일 하나를 한참 보고 있었다.예린이 옆에서 물었다.“문제 있어?”“아니.”“그럼 왜 그렇게 봐.”서윤은 화면을 예린 쪽으로 돌렸다.프라하 운영팀에서 온 메일이었다.다음 달부터 일부 보고 라인을 통합하겠다는 내용.총괄 승인 없이도 실행 가능한 범위였다.예린은 빠르게 읽고 말했다.“괜찮아 보이는데.”“응.”“그럼.”서윤은 다시 화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예전 같으면 여기 한 줄 추가했을 것 같아서.”“무슨 줄.”“최종 시행 전 총괄 확인.”예린이 웃었다.“지금도 넣고 싶어?”“조금.”“넣을 거야?”서윤은 잠깐 생각했다.그리고.마우스를 움직여 메일 창을 닫았다.“아니.”“왜.”“확인 필요하면 저쪽에서 먼저 올리겠지.”“안 올리면.”“자기들 책임이고.”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 꽤 어렵게 배웠네.”“그러니까 칭찬하지 마요.”“왜.”“자꾸 내가 엄청난 걸 한 것처럼 느껴져.”“당신한텐 엄청난 거 맞잖아.”서윤이 예린을 봤다.몇 초.결국 웃었다.“그건 맞네.”*오후에는 도현 쪽 회의가 있었다.같은 회사지만.각자 참석하는 회의는 달랐다.서윤은 복도 끝에서 도현을 발견했다.그는 몇 명의 이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검은 정장.단정하게 내려온 소매.한 손에는 자료.표정은 평소처럼 냉정했다.서윤은 그냥 지나가려 했다.그때.도현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눈이 마주쳤다.몇 초.아주 짧게.그가 말했다.“한 총괄.”회사에서 쓰는 호칭.서윤도 바로 대답했다.“의장님.”도현이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먼저 들어가십시오.”사람들이 회의실로 들어간 뒤.복도에 둘만 남았다.서윤이 물었다.“왜 불렀어요?”“그냥.”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누가 요즘 그냥 금지한다더니.”도현이 아주 조금 웃었다.“그럼.”잠깐.“보고 싶었습니다.”서윤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회사에서 그런 말 해요?”
서윤은 오후 회의를 끝내자마자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예린이 맞은편에서 눈썹을 올렸다.“뭐야.”“왜.”“한 총괄이 회의 끝나자마자 메일 안 보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과장하지 마요.”오늘 회의는 프라하와 파리의 다음 분기 인력 재배치였다.서윤은 두 번 질문했고, 한 번 의견을 냈다.최종 결정은 카렐과 각 도시 운영 책임자의 몫이었다.예린이 물었다.“카렐이 수정하는 거 진짜 안 볼 거야?”“내일 보면 되죠.”“오늘 밤에 올 텐데.”“그래서요.”“불안하지 않아?”서윤은 잠깐 생각했다.“조금.”“그런데도?”“불안하다고 다시 내가 가져가면 맡긴 의미가 없어지잖아요.”예린이 웃었다.“요즘 진짜 달라졌다.”“또 평가.”“취소.”서윤은 가방을 들었다.“난 갈게요.”“오늘 바로 집?”“응.”“무슨 일 있어?”서윤이 웃었다.“아니. 그냥 집에 가고 싶어서.”*욕실 안에서는 드라이어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서윤은 거울 앞에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문틀에 기대 있던 도현이 말했다.“그렇게 하면 내일 엉킵니다.”“팔 아파.”“그럼 내려놓으십시오.”“왜.”도현이 손을 내밀었다.“제가 합니다.”서윤이 거울 너머로 그를 봤다.“머리를?”“네.”“할 줄 알아요?”“말리는 데 기술이 필요합니까.”“은근 필요해.”“그럼 알려주십시오.”서윤은 드라이어를 넘겼다.“뜨겁게 하지 말고. 한 군데 오래 대지도 말고.”“네.”“막 흔들어서 엉키게 하지 말고.”“요구가 많군요.”“내 머리잖아.”“알겠습니다.”웅—바람이 다시 시작됐다.도현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머리카락을 조금씩 들어 올리고, 엉킨 곳은 손가락으로 풀어가며 천천히 말렸다.서윤은 거울을 보다가 말했다.“어.”“왜.”“잘하네.”“무시했습니까.”“조금.”도현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마주쳤다.“기억하겠습니다.”“복수할 건 아니죠?”“아직 모르겠습니다.”서윤이 웃었다.“주인님.”도현의 손이 잠깐 멈췄다.“지금은
서윤이 회의실을 나온 건 오후 네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카렐이 뒤에서 불렀다.“한 총괄.”“네.”“뮌헨 쪽에서 수정한 안 왔습니다.”서윤은 걸음을 멈췄다.“어디까지?”“예산은 그대로고, 일정만 일주일 늦췄습니다.”“이유는.”“현장팀이 먼저 요청했습니다.”서윤은 손을 내밀었다.“봐요.”카렐이 태블릿을 건넸다.서윤은 화면을 빠르게 훑었다.이전 같았으면 숫자를 다시 계산하고, 담당자 이름과 다른 도시의 일정까지 직접 확인했을 것이다.그런데 이번에는 중간에서 멈췄다.“이거 당신이 봤죠?”“네.”“문제?”“없습니다.”서윤은 태블릿을 돌려줬다.“그럼 됐어요.”카렐이 잠깐 멈칫했다.“끝입니까?”“왜.”“더 볼 줄 알았습니다.”“나도.”서윤이 웃었다.“근데 안 볼래.”“좋네요.”“또 평가.”“그럼 칭찬.”“그게 더 싫어요.”카렐이 웃었다.“알겠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서윤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한 총괄.”“또 뭐예요.”“오늘 저도 여섯 시 전에 갑니다.”“왜 나한테 보고해.”“예전 습관.”서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그거 없애요. 오늘 그냥 가요. 말도 하지 말고.”“네.”이번에는 정말 끝이었다.*집에 들어왔을 때 도현은 거실 테이블에 종이를 펼쳐 놓고 있었다.“또 그림?”“네.”“이번엔 뭐예요?”“창문.”서윤이 옆에 앉았다.종이 위에는 큰 창과 낮은 벤치, 바깥으로 이어지는 작은 테라스가 있었다.“예쁘다.”“어디가.”“창문 큰 거.”“채광 때문에.”“벤치는?”“앉으려고.”“누가.”도현이 연필을 멈췄다.“누구든.”서윤이 웃었다.“주인님 그림에는 사람 잘 안 넣네.”“넣어야 합니까.”“아니.”도현은 다시 선을 그었다.서윤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잠시 뒤 도현이 물었다.“왜 계속 봅니까.”“재밌어서.”“제가 그리는 게?”“응.”도현은 종이 위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당신은 결과보다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