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오늘도 그녀의 창문이 열렸다.
드르륵—
이제는 저 장면이 너무 익숙했다.
내 하루에 시계처럼 반복되는 풍경.
아침이면 불이 켜지고,
창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타난다.“오늘도 환기부터 하네.”
나는 부엌에서 냄비에 물을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점심도 라면이었다.
백수가 된 뒤 가장 많이 늘어난 소비 품목이 있다면 맥주와 라면일 것이다.
회사 다닐 때는 점심 메뉴라도 매일 달랐다.
구내식당.
국밥.
중국집.
팀원들과 가끔 먹던 고깃집.
그런데 지금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배가 고프면 라면.
조금 기분 내고 싶으면 치킨.
그마저 귀찮으면 그냥 맥주.
“계란이나 하나 넣자.”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 두 개.
하나를 꺼냈다.
그러면서 또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녀가 방 안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뒤 옷 몇 벌을 들었다.
‘옷 갈아입으려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보글보글.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아!”
급하게 가스불을 줄였다.
라면봉지를 뜯어 면을 넣고 스프를 털어 넣었다.
계란까지 하나 깨 넣었다.
그러고 다시 창가 쪽을 봤을 때는—
“……어?”
이미 늦었다.
조금 전과 옷이 달라져 있었다.
“벌써 갈아입었네.”
나는 피식 웃었다.
“또 놓쳤네.”
말하고 나서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뭘 놓쳐, 이 인간아.”
스스로 머리를 한번 긁었다.
요즘 혼잣말이 정말 많이 늘었다.
사람과 대화를 안 하니까 내가 나랑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라면 냄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후루룩.
“음.”
계란 노른자를 살짝 터뜨려 면에 섞었다.
역시 맛있다.
TV를 켰다.
경제 뉴스가 나왔다.
청년 취업.
경기 침체.
기업 채용 축소.
나는 두 젓가락 먹다가 채널을 돌렸다.
“내가 밥 먹으면서까지 저걸 봐야 하냐.”
예능 프로그램.
몇 번 웃다가 그것도 재미없어 껐다.
결국 다시 조용해졌다.
라면을 다 먹고 싱크대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커피나 마시자.”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다시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무심코 맞은편을 봤다.
그녀의 방 바닥에 매트가 깔려 있었다.
“어?”
그녀가 그 위에 앉았다.
다리를 뻗고 상체를 천천히 숙인다.
다시 일어나 양팔을 뻗는다.
“필라테스인가?”
요가인지 필라테스인지 나는 잘 모른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헬스장에서 기구 몇 번 만져본 게 전부였다.
그녀는 몸에 붙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다.
한여름이라 전체적으로 짧고 편한 옷이었다.
나는 커피잔을 들고 잠시 멈췄다.
“오……”
솔직히 눈길이 갔다.
병원에서 단정하게 근무하던 모습.
출근할 때의 차분한 모습.
그것과는 또 달랐다.
집에서 혼자 운동하는 모습은 훨씬 편안해 보였다.
양팔을 위로 쭉 뻗었다가 천천히 몸을 옆으로 기울인다.
다시 반대쪽.
한동안 스트레칭을 하더니 매트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운동 꾸준히 하나 보네.”
그래서 그런지 체형이 전체적으로 슬림했다.
키는 역시 165에서 166 정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막 화려한 느낌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예쁜 얼굴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다 돌아볼 만큼 튀는 외모도 아니다.
그런데……
왜인지 계속 눈이 갔다.
“이상하네.”
길에서 처음 봤다면 그냥 지나쳤을 사람인데.
창문 너머로 계속 보다 보니 작은 행동들이 하나씩 눈에 익었다.
머리를 묶을 때의 모습.
집에 들어오면 강아지부터 챙기는 모습.
화장할 때 정신없이 방을 오가는 모습.
퇴근해서 피곤한 듯 어깨를 주무르는 모습.
그런 것들이 쌓이니까 사람 자체가 달라 보였다.
그녀가 몸을 숙였다가 다시 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조금 뛰었다.
“뭐야.”
커피 때문인가?
아니다.
아직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 진짜 외롭긴 한가 보다.”
막상 길에서 마주쳤다면 관심도 없었을 사람이,
이렇게 매일 보고 있으니 묘하게 설렜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나도 어디 가서 그렇게 꿀리진 않는데 말이지.”
키도 평균 이상.
외모도 어디 가서 욕먹을 정도는 아니다.
대기업에 다닐 때는 소개팅도 꽤 들어왔다.
그때는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팔티.
반바지.
아직 면도도 안 했다.
그리고 직업란은—
무직.
“하.”
커피를 마셨다.
“얼른 취직해야겠다.”
노트북을 켰다.
채용 사이트에 들어갔다.
예전처럼 제조업이나 현장 쪽을 보는 건 마음이 잘 가지 않았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가 정말 다시 비슷한 일을 하고 싶은가?
그건 잘 모르겠다.
검색창에 조건을 넣었다.
서비스 운영.
고객관리.
서비스 기획 지원.
경영관리.
일반관리.
경영지원.
조금 더 사람을 상대하거나,
회사 전반적인 일을 배우는 쪽이 요즘은 눈에 들어왔다.
호텔이나 대형 서비스기업 운영관리 공고도 눌러봤다.
기업 고객관리.
사업지원.
경영관리.
총무와 운영을 섞은 직무.
하나씩 읽어봤다.
“이런 건 할 만하려나.”
연봉을 봤다.
예전 직장보다 확실히 낮은 곳이 많았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대기업을 한번 다녀봤다는 경력 때문에 자꾸 예전 연봉과 비교하게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 쳐야 하나.”
즐겨찾기를 몇 개 눌렀다.
경영관리 경력직.
서비스운영 담당자.
고객관리 및 사업운영.
경영지원.
대충 네다섯 개를 저장했다.
그러다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녀는 운동을 끝낸 듯 매트 위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녀가 녀석을 안았다.
나는 턱을 괴었다.
“취직부터 하자.”
정말 그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냥 내 생활부터 다시 정상으로 돌리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있고,
월급이 들어오고,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이 되면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삶.
그 평범한 생활이 갑자기 부러워졌다.
그녀처럼.
“그래. 일단 지원이나 해보자.”
자기소개서 파일을 열었다.
한동안 문장을 수정했다.
경영관리 쪽에서는 예전 회사 경험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고민했고,
서비스직 쪽에서는 사람들과 협업했던 경험이나 고객 대응 경험을 조금 더 앞쪽으로 옮겼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고 나니 눈이 피곤했다.
“아…… 졸린다.”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밤이었다.
맞은편 창문을 봤다.
그녀도 슬슬 잘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쌀쌀한지 창문을 닫았다.
사락.
커튼도 조금씩 정리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도 침대로 가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우웅—
화면을 봤다.
서원주.
“어?”
고등학교 친구.
최근에는 연락이 거의 없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전화를 받았다.
“어, 원주야.”
— 살아 있냐?
“살아 있지.”
— 너 회사 그만뒀다며?
“소문 빠르네.”
— 동네가 좁잖아.
“그래서?”
— 치맥 콜?
나는 시계를 봤다.
“지금?”
— 백수가 뭔 시간이 있어.
“야, 이 새끼야.”
웃음이 나왔다.
“어디야.”
한 시간 뒤.
동네 치킨집.
오랜만에 보는 서원주는 예전보다 살이 조금 빠져 있었다.
“야.”
내가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너 진짜 공부 많이 했나 보다.”
“왜?”
“삭았어.”
“죽을래?”
맥주잔을 부딪쳤다.
짠.
“캬.”
혼자 집에서 마시는 맥주와는 맛이 달랐다.
원주는 아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도?”
“야, 아직도라니.”
“몇 년째냐.”
“세지 마. 스트레스 받는다.”
“올해는 붙어야지.”
“나도 그러고 싶다.”
우리는 한동안 고등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누가 결혼했고,
누가 서울로 갔고,
누가 벌써 아이가 둘이고.
시간이 참 빠르다.
고등학교 때는 서른이면 엄청난 어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서른을 코앞에 두고 보니,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원주가 치킨을 뜯으며 물었다.
“너는 뭐 할 거냐.”
“이직 준비하지.”
“전에 하던 거?”
나는 잠깐 생각했다.
“아니. 요즘 다른 것도 보고 있어.”
“뭔데?”
“서비스 운영 같은 거. 고객관리나 경영관리 쪽도 보고.”
“완전 다른데?”
“그렇지.”
“할 수 있겠냐?”
“사람이 못 할 게 뭐 있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자신은 없었다.
“예전 회사 같은 분위기는 다시 좀 그렇기도 하고.”
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연봉 깎이는 건 감수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게 제일 문제지.”
나는 맥주를 마셨다.
그 말이 맞았다.
자존심과 현실 사이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가 물었다.
“야, 나도 공무원이나 할까?”
원주가 바로 말했다.
“하지 마.”
“왜.”
“너 공부 못하잖아.”
“야!”
“내가 네 고등학교 성적을 모를 줄 아냐?”
나는 몇 초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부머리는 없긴 하지.”
둘 다 웃었다.
“너는 그냥 회사 가.”
“그래야겠지.”
“넌 조직생활 오래 했으니까 그게 낫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날 우리는 꽤 마셨다.
한 잔.
두 잔.
세 잔.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는 걸음이 살짝 흔들렸다.
“야, 택시 타.”
“집 바로 위야.”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지 말고.”
“너나 공부해.”
“꺼져.”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
밤공기가 술기운 오른 얼굴을 식혀줬다.
“아…….”
생각보다 취했다.
달동네 계단은 술을 마신 날에는 평소보다 두 배쯤 길어 보였다.
한 칸.
두 칸.
터벅.
터벅.
난간을 잡았다.
‘원주 저 자식도 얼른 붙어야 할 텐데.’
몇 년을 시험만 준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나도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다.
빨리 취업해야 한다.
서비스든,
경영관리든,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앞쪽에 누군가 있었다.
여자.
별생각 없이 걷다가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어?”
그녀였다.
맞은편 집의 그 누나.
지금까지 창문 너머에서만 바라보던 사람.
그 사람이 내 바로 앞에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거리 약 서너 미터.
나는 순간 술이 조금 깨는 느낌이었다.
‘뭐야.’
오늘 어디 갔다 오는 건가?
그녀는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에서 올라갔다.
굳이 빨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낮에는 가끔 상상했다.
우연히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같은 동네죠?
그런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실제로 마주치니 전혀 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지금은 술까지 마신 상태였다.
‘그냥 가자.’
그녀는 자기 집으로 가는 중이고,
나도 내 집으로 가는 중이다.
그것뿐이다.
터벅.
터벅.
그녀의 발소리.
그리고 몇 걸음 뒤의 내 발소리.
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나는 일부러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너무 가까워지는 게 싫었다.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
병원에서는 멀리서 봤다.
버스에서도 몇 좌석 떨어져 있었다.
창문에서는 겨우 2미터 정도라고 해도 공간 자체가 달랐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골목.
같은 계단.
그녀의 걸음에 맞춰 나도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향이 났다.
나는 그것이 그녀에게서 나는 건지,
골목 어딘가의 섬유유연제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여름밤 냄새일 수도 있었다.
나는 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쳐다보지 말자.’
그녀가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나는 뒤에서 따라갔다.
잠시 뒤 계단 중간에서 그녀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나도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그녀가 휴대전화를 한번 확인했다.
다시 걸었다.
나도 걸었다.
몇 분 전 술집에서 그렇게 떠들던 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상했다.
며칠 동안 거의 매일 봤던 여자.
그런데 실제 거리가 가까워지니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앞질러 가지 않았다.
말도 걸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밤길에서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동네 남자.
그 정도.
그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씁쓸했다.
내게 그녀는 요즘 하루 종일 신경 쓰이는 사람인데,
그녀에게 나는 그저 뒤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행인 하나일 뿐이었다.
계단 위쪽에 갈림길이 보였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녀는 맞은편 주택 쪽으로 간다.
나는 우리 집 쪽으로 간다.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혼자 생각했다.
‘그래.’
‘지금은 이 정도면 된다.’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다.
이름을 물어볼 필요도 없다.
괜히 무언가 시작하려 할 필요도 없다.
그녀가 오른쪽 골목으로 향했다.
나는 그대로 직진했다.
몇 걸음 뒤,
나도 모르게 한번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진짜 신기하네.”
창문 너머에서는 그렇게 가까워 보이던 사람이,
막상 같은 계단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집으로 걸었다.
오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다음번에 마주쳐도,
쉽게 말을 걸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보다,
그저 멀리서 그녀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더 익숙했다.
그 주에 고등학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평소엔 몇 달씩 조용하던 방이었다. 동창회 공지나 부고 정도만 올라오던. 그런데 재홍이 신혼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불이 붙었다.[재홍: 몰디브 다녀왔다 ㅋㅋ 사진 투척][사진 12장]에메랄드빛 바다. 수상 방갈로. 선글라스를 쓴 재홍과 신부.[태훈: 와 부럽다 ㅋㅋ 우리는 애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감][민혁: 재홍이 성공했네][성호: 몰디브 좋지. 나도 작년에 갔는데][재홍: 민혁이 니도 이번에 팀장 됐다매 축하한다!!][민혁: ㅋㅋ 아직 대행이다][태훈: 대행이 어디냐 우리 회사는 40 넘어야 팀장인데][성호: 나 이번에 차 바꿨다 ㅋㅋ][사진 1장 — 검은색 외제 SUV][준영: 다들 잘 사네 ㅋㅋ 나도 요즘 가게 자리 잡았다. 다음에 놀러 와라]나는 알림을 끄지 않았다. 한 줄씩 올라오는 메시지를 봤다. 반지하 매트리스 위에서. 깁스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몰디브. 팀장. 외제 SUV. 가게.그리고 원주.[원주: 나도 발령받고 첫 명절 보너스 받았다 ㅋㅋ][사진 1장 — 공무원증을 목에 건 원주가 청사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재홍: 원주 드디어!! 4년 고생했다 진짜][태훈: 원주 축하한다 ㅠㅠ 진짜 대단하다][민혁: 서원주 공무원 ㅋㅋㅋ 적응 안 되네]모두가 원주를 축하했다. 원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4년.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가던.나는 그 사진 속 원주의 얼굴을 봤다. 공무원증. 청사. 새 정장. 반듯한.그리고 한 줄이 올라왔다.[성호: 근데 동진이는 요새 뭐 하노? 대기업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단톡방이 조용해졌다.일 분. 이 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창회에서의 일. 재홍과의 충돌. 담배를 다시 피우던 나. 소문은 돌았을 것이다. 원주를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삼 분 뒤.[원주: 동진이 잘 지낸다. 요새 바쁘다]원주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차단당한 채로. 단톡방에서.[성호: 오 그래? 어디 들어갔나?]
2월이 됐다.깁스는 3주째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봤다.입력창의 한 줄은 그대로였다. 서연 씨, 저 박동진입니다. 매일 밤 대화방을 열어 그 한 줄을 확인했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보내지지 않았는지. 장전된 총을 점검하듯이.월세 날이 지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렸다."총각, 이번 달 거는?""…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을 다쳐서 일을 못 해서요. 산재 나오면 바로 드릴게요."할아버지는 깁스를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알았다. 보름만 기다리꾸마."문이 닫혔다. 나는 노트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대기업 시절에 산. 이력서를 쓰던. 이틀 만에 팔렸다. 사십만 원.노트북이 사라진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볼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더 이상 척할 필요가 없었다.*토요일 오전, 누가 문을 두드렸다.통장이었다. 26화에서 이상한 남자를 봤느냐고 묻던. 클립보드 대신 작은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아이고, 새로 이사 온 총각이가. 반상회비 받으러 왔어요. 한 달에 오천 원."통장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깁스, 덥수룩한 수염, 푹 눌러쓴 모자. 몇 달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네, 잠깐만요."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는 동안, 통장은 현관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요 위에 간호사 아가씨 있제?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 그 아가씨 4월에 시집간다. 내가 청첩장 받았다 아이가. 봐라, 이쁘제."통장이 봉투 뭉치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베이지색 종이. 금박 테두리. 레이스 문양. 41화,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시안이 완성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위에 사진. 벚꽃 아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서로를 보며 웃는.신랑 정도윤 · 신부 한서연.4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나는 오천 원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통장이 오천 원을 받아 들며 계속 말했다."그 아가씨 고생 많이 했다. 저 위
다른 간호사가 왔다. 오십 대. 수간호사 같은 얼굴. 무표정하게 라인을 잡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 설명도 없었다. 진통제가 들어갔다."깁스는 정형외과 선생님 오시면 할 거예요. 기다리세요."그녀는 그 말만 하고 커튼을 쳤다. 세게.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쨍하고 울렸다.진통제가 퍼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이 멀어졌다. 대신 귀가 밝아졌다.커튼 너머 스테이션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간호사들. 낮게, 그러나 들리게."…그 사람이야? 서연 쌤 말한 그?""응. 창문에 돌 던지고, 새벽에 전화하고. 경찰서까지 갔었대.""미친. 근데 왜 여기 와.""공사장에서 다쳤대. 일용직 한대.""서연 쌤 불쌍해 죽겠네. 결혼 앞두고 이게 뭐야. 요즘 겨우 좀 살 만하다더니.""수간 쌤이 7번 볼 때 두 명씩 들어가래. 혹시 모르니까."혹시 모르니까.나는 들것 위에서 그 말들을 들었다.스토커. 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모든 문장 사이에 있었다. 그 사람. 창문에 돌. 새벽에 전화. 경찰서. 혹시 모르니까.나는 이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진통제 때문인지 분노가 늦게 왔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뜨겁게.그녀가 말했다.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병원 전체가 나를 알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내 입장을. 내 마음을. 83번 버스를. 강릉을. 두부를. 캔커피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오래.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만 듣는다. 경찰도, 어머니들도, 원주도, 이 간호사들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단 한 번만.*깁스를 한 채 새벽 두 시에 반지하로 돌아왔다.택시비 이만 원. 응급실 비용은 산재 처리한다고 반장이 말했다. 한 달은 일을 못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한 달이면 월세를 못 낸다.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천장을 봤다.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돈. 손. 일. 그리고 3월 초, 그녀의 신혼집 입주
1월 둘째 주. 현장은 신축 오피스텔 공사장이었다.오후 세 시, 3층 슬라브에서 거푸집 자재를 나르던 중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였다. 제야 이후로, 눈을 감으면 스파클러 불꽃이 보였다. 불꽃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발이 꼬였다. 자재 더미가 무너졌다. 나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 위로 합판 모서리가 떨어졌다.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둔하고 짧았다.그다음은 소리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꺼졌다.*현장 반장이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물었다."가까운 데 삼성병원 응급실 갑니다. 괜찮으시죠?"삼성병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데는 안 됩니까.""손 상태 보면 빨리 가야 돼요.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나는 들것 위에서 천장을 봤다. 오른손이 붓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그녀는 병동 간호사다. 응급실이 아니다. 3화에서 건강검진 때 봤을 때도, 12화에서 간 수치 상담 때 봤을 때도, 그녀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응급실에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커튼으로 나뉜 베드들. 모니터 소리. 의사를 부르는 방송. 누군가의 신음.나는 7번 베드에 눕혀졌다. 젊은 의사가 와서 손을 봤다. 엑스레이. 골절. 두 군데. 수술은 필요 없고 정복 후 깁스. 진통제부터."간호사 선생님, 7번 베드 진통제 라인 좀 잡아주세요."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얀 크록스. 빠르고 가벼운.커튼이 걷혔다."박동진 님, 팔 좀 이쪽으로…"그녀였다.하늘색 간호복. 마스크. 그 위로 고양이 같은 눈매. 손에 수액 세트와 주사 바늘을 든 채.그녀가 나를 봤다. 차트의 이름을 다시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그녀의 손에서 수액 세트가 떨어졌다. 바닥에. 투명한 튜브가 풀리며 뱀처럼 굴렀다.*우리는 서로를 봤다. 삼 초. 오 초.
옥상에는 바람이 불었다. 1월 1일을 앞둔 부산의 겨울바람.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나는 옥상 난간 뒤, 물탱크 그림자 속에 웅크렸다. 2화에서 처음 그녀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백수 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치킨과 낮술을 곁에 두고, 사람 구경을 하던.그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은.맞은편 옥상. 그녀와 도윤이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담요 한 장을 둘이 덮고.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제야의 종 중계가 흘러나왔다. 보신각. 사람들의 함성.두부가 도윤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콩이는 그녀의 발치에.행복한 한 장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나는 그 카드 바깥, 물탱크 그림자 속에 있었다.*"오빠, 올해 소원 뭐야?"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2미터. 옥상과 옥상 사이도 그 거리였다."음… 너랑 결혼하는 거?""그건 이미 하잖아.""그럼 너랑 잘 사는 거.""뻔해.""너는?"그녀가 잠깐 말이 없었다. 담요 속에서 도윤의 손을 잡는 게 보였다."…나는 그냥, 무섭지 않은 거. 올해는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윤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도윤의 어깨에 기댔다."안 무섭게 해줄게. 약속.""…응."나는 그 대화를 들었다. 물탱크 그림자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그녀의 새해 소원은, 무섭지 않은 것이었다.그 소원의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무섭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바로 그 순간, 나는 2미터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나는 그 아이러니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스피커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열. 아홉. 여덟.도윤이 일어섰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 불꽃놀이용 스파클러.일곱. 여섯. 다섯.라이터 불이 켜졌다. 스파클러 끝에 불이 붙었다. 치지직.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넷. 셋.그녀가 웃으며 스파클러 하나를 받았다. 두 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두부가 짖었다. 내 발을 향해.나는 철문 손잡이를 쥔 채 굳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그녀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계단 두어 칸 위, 1미터 거리."두부야, 왜 그래. 가자."그녀의 목소리. 리드줄을 당기는 소리. 두부가 버텼다. 계속 짖었다.나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먼지 묻은 작업 모자. 마스크는 턱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올렸다. 코까지."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래요."그녀가 사과했다. 나에게. 모르는 인부에게 하듯이."……괜찮습니다."목소리를 낮췄다. 갈라지게. 먼지 때문에 쉰 목소리처럼.그녀가 리드줄을 짧게 감았다. 두부를 안아 올렸다. 두부는 그녀 품에서도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콩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 골목 아래로 걸어갔다.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았다.1미터. 그녀가 나를 보지 않았다. 먼지와 모자와 마스크가 나를 지웠다. 그녀의 눈에 나는 그냥, 반지하에 사는 일용직 인부였다.투명 인간.다시.*그날 밤 열한 시 반. 산책에서 돌아오는 발소리.나는 창문 아래 벽에 붙어 있었다. 늘 그렇듯이.발소리가 계단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부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창문을 향해."두부야, 또 왜 그래. 아까부터."두부가 리드줄을 끌었다. 반지하 창문 쪽으로. 창문 바로 앞 골목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유리 너머 5센티미터. 두부의 까만 코가 유리에 닿았다. 김이 서렸다.나는 창문 바로 아래,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멈췄다. 두부의 코는 내 머리 위 30센티미터에 있었다."여기 뭐 있어?"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그녀가 쪼그려 앉았다.창문 너머로 그녀의 무릎이 보였다. 그다음 그녀의 손.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햇빛을 가리듯이. 그리고 얼굴.그녀의 얼굴이 반지하 창문에 다가왔다. 유리에 이마를 댈 듯이. 어두운 방 안을 들여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