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도 그녀의 창문이 열렸다.
드르륵—
이제는 저 장면이 너무 익숙했다.
내 하루에 시계처럼 반복되는 풍경.
아침이면 불이 켜지고,
창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타난다.“오늘도 환기부터 하네.”
나는 부엌에서 냄비에 물을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점심도 라면이었다.
백수가 된 뒤 가장 많이 늘어난 소비 품목이 있다면 맥주와 라면일 것이다.
회사 다닐 때는 점심 메뉴라도 매일 달랐다.
구내식당.
국밥.
중국집.
팀원들과 가끔 먹던 고깃집.
그런데 지금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배가 고프면 라면.
조금 기분 내고 싶으면 치킨.
그마저 귀찮으면 그냥 맥주.
“계란이나 하나 넣자.”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 두 개.
하나를 꺼냈다.
그러면서 또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녀가 방 안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뒤 옷 몇 벌을 들었다.
‘옷 갈아입으려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보글보글.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아!”
급하게 가스불을 줄였다.
라면봉지를 뜯어 면을 넣고 스프를 털어 넣었다.
계란까지 하나 깨 넣었다.
그러고 다시 창가 쪽을 봤을 때는—
“……어?”
이미 늦었다.
조금 전과 옷이 달라져 있었다.
“벌써 갈아입었네.”
나는 피식 웃었다.
“또 놓쳤네.”
말하고 나서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뭘 놓쳐, 이 인간아.”
스스로 머리를 한번 긁었다.
요즘 혼잣말이 정말 많이 늘었다.
사람과 대화를 안 하니까 내가 나랑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라면 냄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후루룩.
“음.”
계란 노른자를 살짝 터뜨려 면에 섞었다.
역시 맛있다.
TV를 켰다.
경제 뉴스가 나왔다.
청년 취업.
경기 침체.
기업 채용 축소.
나는 두 젓가락 먹다가 채널을 돌렸다.
“내가 밥 먹으면서까지 저걸 봐야 하냐.”
예능 프로그램.
몇 번 웃다가 그것도 재미없어 껐다.
결국 다시 조용해졌다.
라면을 다 먹고 싱크대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커피나 마시자.”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다시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무심코 맞은편을 봤다.
그녀의 방 바닥에 매트가 깔려 있었다.
“어?”
그녀가 그 위에 앉았다.
다리를 뻗고 상체를 천천히 숙인다.
다시 일어나 양팔을 뻗는다.
“필라테스인가?”
요가인지 필라테스인지 나는 잘 모른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헬스장에서 기구 몇 번 만져본 게 전부였다.
그녀는 몸에 붙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다.
한여름이라 전체적으로 짧고 편한 옷이었다.
나는 커피잔을 들고 잠시 멈췄다.
“오……”
솔직히 눈길이 갔다.
병원에서 단정하게 근무하던 모습.
출근할 때의 차분한 모습.
그것과는 또 달랐다.
집에서 혼자 운동하는 모습은 훨씬 편안해 보였다.
양팔을 위로 쭉 뻗었다가 천천히 몸을 옆으로 기울인다.
다시 반대쪽.
한동안 스트레칭을 하더니 매트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운동 꾸준히 하나 보네.”
그래서 그런지 체형이 전체적으로 슬림했다.
키는 역시 165에서 166 정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막 화려한 느낌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예쁜 얼굴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다 돌아볼 만큼 튀는 외모도 아니다.
그런데……
왜인지 계속 눈이 갔다.
“이상하네.”
길에서 처음 봤다면 그냥 지나쳤을 사람인데.
창문 너머로 계속 보다 보니 작은 행동들이 하나씩 눈에 익었다.
머리를 묶을 때의 모습.
집에 들어오면 강아지부터 챙기는 모습.
화장할 때 정신없이 방을 오가는 모습.
퇴근해서 피곤한 듯 어깨를 주무르는 모습.
그런 것들이 쌓이니까 사람 자체가 달라 보였다.
그녀가 몸을 숙였다가 다시 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조금 뛰었다.
“뭐야.”
커피 때문인가?
아니다.
아직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 진짜 외롭긴 한가 보다.”
막상 길에서 마주쳤다면 관심도 없었을 사람이,
이렇게 매일 보고 있으니 묘하게 설렜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나도 어디 가서 그렇게 꿀리진 않는데 말이지.”
키도 평균 이상.
외모도 어디 가서 욕먹을 정도는 아니다.
대기업에 다닐 때는 소개팅도 꽤 들어왔다.
그때는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팔티.
반바지.
아직 면도도 안 했다.
그리고 직업란은—
무직.
“하.”
커피를 마셨다.
“얼른 취직해야겠다.”
노트북을 켰다.
채용 사이트에 들어갔다.
예전처럼 제조업이나 현장 쪽을 보는 건 마음이 잘 가지 않았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가 정말 다시 비슷한 일을 하고 싶은가?
그건 잘 모르겠다.
검색창에 조건을 넣었다.
서비스 운영.
고객관리.
서비스 기획 지원.
경영관리.
일반관리.
경영지원.
조금 더 사람을 상대하거나,
회사 전반적인 일을 배우는 쪽이 요즘은 눈에 들어왔다.
호텔이나 대형 서비스기업 운영관리 공고도 눌러봤다.
기업 고객관리.
사업지원.
경영관리.
총무와 운영을 섞은 직무.
하나씩 읽어봤다.
“이런 건 할 만하려나.”
연봉을 봤다.
예전 직장보다 확실히 낮은 곳이 많았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대기업을 한번 다녀봤다는 경력 때문에 자꾸 예전 연봉과 비교하게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 쳐야 하나.”
즐겨찾기를 몇 개 눌렀다.
경영관리 경력직.
서비스운영 담당자.
고객관리 및 사업운영.
경영지원.
대충 네다섯 개를 저장했다.
그러다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녀는 운동을 끝낸 듯 매트 위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녀가 녀석을 안았다.
나는 턱을 괴었다.
“취직부터 하자.”
정말 그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냥 내 생활부터 다시 정상으로 돌리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있고,
월급이 들어오고,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이 되면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삶.
그 평범한 생활이 갑자기 부러워졌다.
그녀처럼.
“그래. 일단 지원이나 해보자.”
자기소개서 파일을 열었다.
한동안 문장을 수정했다.
경영관리 쪽에서는 예전 회사 경험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고민했고,
서비스직 쪽에서는 사람들과 협업했던 경험이나 고객 대응 경험을 조금 더 앞쪽으로 옮겼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고 나니 눈이 피곤했다.
“아…… 졸린다.”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밤이었다.
맞은편 창문을 봤다.
그녀도 슬슬 잘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쌀쌀한지 창문을 닫았다.
사락.
커튼도 조금씩 정리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도 침대로 가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우웅—
화면을 봤다.
서원주.
“어?”
고등학교 친구.
최근에는 연락이 거의 없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전화를 받았다.
“어, 원주야.”
— 살아 있냐?
“살아 있지.”
— 너 회사 그만뒀다며?
“소문 빠르네.”
— 동네가 좁잖아.
“그래서?”
— 치맥 콜?
나는 시계를 봤다.
“지금?”
— 백수가 뭔 시간이 있어.
“야, 이 새끼야.”
웃음이 나왔다.
“어디야.”
한 시간 뒤.
동네 치킨집.
오랜만에 보는 서원주는 예전보다 살이 조금 빠져 있었다.
“야.”
내가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너 진짜 공부 많이 했나 보다.”
“왜?”
“삭았어.”
“죽을래?”
맥주잔을 부딪쳤다.
짠.
“캬.”
혼자 집에서 마시는 맥주와는 맛이 달랐다.
원주는 아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도?”
“야, 아직도라니.”
“몇 년째냐.”
“세지 마. 스트레스 받는다.”
“올해는 붙어야지.”
“나도 그러고 싶다.”
우리는 한동안 고등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누가 결혼했고,
누가 서울로 갔고,
누가 벌써 아이가 둘이고.
시간이 참 빠르다.
고등학교 때는 서른이면 엄청난 어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서른을 코앞에 두고 보니,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원주가 치킨을 뜯으며 물었다.
“너는 뭐 할 거냐.”
“이직 준비하지.”
“전에 하던 거?”
나는 잠깐 생각했다.
“아니. 요즘 다른 것도 보고 있어.”
“뭔데?”
“서비스 운영 같은 거. 고객관리나 경영관리 쪽도 보고.”
“완전 다른데?”
“그렇지.”
“할 수 있겠냐?”
“사람이 못 할 게 뭐 있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자신은 없었다.
“예전 회사 같은 분위기는 다시 좀 그렇기도 하고.”
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연봉 깎이는 건 감수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게 제일 문제지.”
나는 맥주를 마셨다.
그 말이 맞았다.
자존심과 현실 사이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가 물었다.
“야, 나도 공무원이나 할까?”
원주가 바로 말했다.
“하지 마.”
“왜.”
“너 공부 못하잖아.”
“야!”
“내가 네 고등학교 성적을 모를 줄 아냐?”
나는 몇 초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부머리는 없긴 하지.”
둘 다 웃었다.
“너는 그냥 회사 가.”
“그래야겠지.”
“넌 조직생활 오래 했으니까 그게 낫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날 우리는 꽤 마셨다.
한 잔.
두 잔.
세 잔.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는 걸음이 살짝 흔들렸다.
“야, 택시 타.”
“집 바로 위야.”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지 말고.”
“너나 공부해.”
“꺼져.”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
밤공기가 술기운 오른 얼굴을 식혀줬다.
“아…….”
생각보다 취했다.
달동네 계단은 술을 마신 날에는 평소보다 두 배쯤 길어 보였다.
한 칸.
두 칸.
터벅.
터벅.
난간을 잡았다.
‘원주 저 자식도 얼른 붙어야 할 텐데.’
몇 년을 시험만 준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나도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다.
빨리 취업해야 한다.
서비스든,
경영관리든,
뭔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앞쪽에 누군가 있었다.
여자.
별생각 없이 걷다가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어?”
그녀였다.
맞은편 집의 그 누나.
지금까지 창문 너머에서만 바라보던 사람.
그 사람이 내 바로 앞에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거리 약 서너 미터.
나는 순간 술이 조금 깨는 느낌이었다.
‘뭐야.’
오늘 어디 갔다 오는 건가?
그녀는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에서 올라갔다.
굳이 빨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낮에는 가끔 상상했다.
우연히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같은 동네죠?
그런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실제로 마주치니 전혀 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지금은 술까지 마신 상태였다.
‘그냥 가자.’
그녀는 자기 집으로 가는 중이고,
나도 내 집으로 가는 중이다.
그것뿐이다.
터벅.
터벅.
그녀의 발소리.
그리고 몇 걸음 뒤의 내 발소리.
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나는 일부러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너무 가까워지는 게 싫었다.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
병원에서는 멀리서 봤다.
버스에서도 몇 좌석 떨어져 있었다.
창문에서는 겨우 2미터 정도라고 해도 공간 자체가 달랐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골목.
같은 계단.
그녀의 걸음에 맞춰 나도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향이 났다.
나는 그것이 그녀에게서 나는 건지,
골목 어딘가의 섬유유연제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여름밤 냄새일 수도 있었다.
나는 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쳐다보지 말자.’
그녀가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나는 뒤에서 따라갔다.
잠시 뒤 계단 중간에서 그녀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나도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그녀가 휴대전화를 한번 확인했다.
다시 걸었다.
나도 걸었다.
몇 분 전 술집에서 그렇게 떠들던 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상했다.
며칠 동안 거의 매일 봤던 여자.
그런데 실제 거리가 가까워지니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앞질러 가지 않았다.
말도 걸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밤길에서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동네 남자.
그 정도.
그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씁쓸했다.
내게 그녀는 요즘 하루 종일 신경 쓰이는 사람인데,
그녀에게 나는 그저 뒤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행인 하나일 뿐이었다.
계단 위쪽에 갈림길이 보였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녀는 맞은편 주택 쪽으로 간다.
나는 우리 집 쪽으로 간다.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혼자 생각했다.
‘그래.’
‘지금은 이 정도면 된다.’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다.
이름을 물어볼 필요도 없다.
괜히 무언가 시작하려 할 필요도 없다.
그녀가 오른쪽 골목으로 향했다.
나는 그대로 직진했다.
몇 걸음 뒤,
나도 모르게 한번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진짜 신기하네.”
창문 너머에서는 그렇게 가까워 보이던 사람이,
막상 같은 계단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집으로 걸었다.
오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다음번에 마주쳐도,
쉽게 말을 걸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보다,
그저 멀리서 그녀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더 익숙했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갔다.나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 올라갔다.끝까지 말을 걸지는 않았다.그녀는 오른쪽 골목으로 사라졌고,나는 우리 집 쪽으로 향했다.그런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상하게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아니면 방금까지 그녀와 같은 계단을 걸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모르겠다.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창가부터 봤다.잠시 뒤.맞은편 3층.불이 켜졌다.“왔다.”이제는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었다.나는 맥주 대신 물을 한 잔 마셨다.그런데도 취기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평소 같으면 괜히 조심했을 텐데,오늘은 이상하게 대담했다.창가 가까이 다가갔다.평소보다 훨씬 가까이.‘뭐 어때.’술이 들어가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어차피 그녀는 모른다.그리고 나는 이제 그녀의 생활 패턴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집에 돌아온다.강아지들이 뛰어나온다.가방을 내려놓는다.창문을 연다.방 안을 정리한다.씻으러 들어간다.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운동을 한다.처음에는 모든 행동이 새로웠다.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아마 이제 창문 열겠지.”드르륵.정말 열렸다.나는 피식 웃었다.“역시.”잠시 후 그녀가 방 안을 오갔다.나는 그녀의 다음 행동까지 예상하고 있었다.‘이제 씻으러 가겠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나는 한동안 빈 방만 바라봤다.예전 같았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을 텐데,이제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샤워 중이겠지.’잠시 뒤 다시 나타났다.머리를 정리하고,물을 마시고,매트를 꺼냈다.“그리고 운동.”역시.매트가 깔렸다.나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너무 익숙했다.그녀의 하루가.그런데 웃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내가 이걸 왜 다 알고 있지?’몇 시쯤 집에 돌아오는지.들어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지.어디에서 운동하는지.언제쯤 창문을 닫는지.이제는 조금만 봐도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었다.그게 갑자기 소름 끼쳤다.하지만 오
오늘도 그녀의 창문이 열렸다.드르륵—이제는 저 장면이 너무 익숙했다.내 하루에 시계처럼 반복되는 풍경.아침이면 불이 켜지고,창문이 열리고,그녀가 나타난다.“오늘도 환기부터 하네.”나는 부엌에서 냄비에 물을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오늘 점심도 라면이었다.백수가 된 뒤 가장 많이 늘어난 소비 품목이 있다면 맥주와 라면일 것이다.회사 다닐 때는 점심 메뉴라도 매일 달랐다.구내식당.국밥.중국집.팀원들과 가끔 먹던 고깃집.그런데 지금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배가 고프면 라면.조금 기분 내고 싶으면 치킨.그마저 귀찮으면 그냥 맥주.“계란이나 하나 넣자.”냉장고를 열었다.계란 두 개.하나를 꺼냈다.그러면서 또 맞은편을 바라봤다.그녀가 방 안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잠시 뒤 옷 몇 벌을 들었다.‘옷 갈아입으려나?’그 생각이 드는 순간,보글보글.물이 넘치기 시작했다.“아!”급하게 가스불을 줄였다.라면봉지를 뜯어 면을 넣고 스프를 털어 넣었다.계란까지 하나 깨 넣었다.그러고 다시 창가 쪽을 봤을 때는—“……어?”이미 늦었다.조금 전과 옷이 달라져 있었다.“벌써 갈아입었네.”나는 피식 웃었다.“또 놓쳤네.”말하고 나서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뭘 놓쳐, 이 인간아.”스스로 머리를 한번 긁었다.요즘 혼잣말이 정말 많이 늘었다.사람과 대화를 안 하니까 내가 나랑 대화하는 느낌이었다.라면 냄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후루룩.“음.”계란 노른자를 살짝 터뜨려 면에 섞었다.역시 맛있다.TV를 켰다.경제 뉴스가 나왔다.청년 취업.경기 침체.기업 채용 축소.나는 두 젓가락 먹다가 채널을 돌렸다.“내가 밥 먹으면서까지 저걸 봐야 하냐.”예능 프로그램.몇 번 웃다가 그것도 재미없어 껐다.결국 다시 조용해졌다.라면을 다 먹고 싱크대에 냄비를 올려놓았다.“커피나 마시자.”커피 한 잔을 만들어 다시 창가에 앉았다.그리고 무심코 맞은편을 봤다.그녀의 방 바닥에 매트가 깔려 있었다.“어
4화 — 아침부터 그녀를 따라가다아침.눈을 뜨자마자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아…….”대충 팬티 위로 긁적거리며 천장을 바라봤다.무료하다.진짜 너무 무료하다.회사 다닐 때는 아침이 그렇게 싫었다.알람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났고,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이불 속에서 버텼다.그런데 지금은?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출근할 회사도 없다.회의도 없고.보고할 것도 없다.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처음 한두 달은 분명 좋았다.평일 아침 늦잠.낮술.게임.넷플릭스.그런데 이것도 계속되니까 사람이 점점 썩는 느낌이었다.나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리고……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맞은편.그 누나네 집.이제는 거의 습관이었다.눈을 뜨면 휴대전화를 보는 게 아니라,먼저 맞은편 창문을 본다.“하…….”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나 진짜 왜 이러냐.”그런데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어?”아침부터 일어났네.출근 준비인가?나는 조금 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그녀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한여름이라 그런지 편한 홈웨어 차림이었다.짧은 민소매.그리고 숏팬츠.잠이 덜 깬 듯한 흐트러진 머리.회사나 병원에서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오…….”괜히 웃음이 나왔다.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묘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거울 앞에 앉았다.화장품을 하나 꺼냈다.뭔가를 바르고.다시 일어났다.옷장을 열었다.다시 거울.또 옷장.또 거울.“여자들은 출근 준비도 바쁘네.”그녀는 침대 위에 옷을 하나 던졌다.휙.또 하나.휙.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집었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나는 피식 웃었다.“은근히 덤벙거리네.”그녀가 옷을 들고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시야에서 없어졌다.“아…….”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나왔다.그리고 바로 정신을 차렸다.“야.”내가 내 머리를 한번 쳤다.“뭐가 아쉬워.”혼자 웃었다.몇 분 뒤 그녀가
3화 — 우연은 두 번 겹쳤다“아…….”눈을 뜨자마자 천장이 보였다.익숙한 천장.벽지 귀퉁이는 아주 조금 떠 있었고, 형광등 옆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작은 얼룩이 있었다.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것만 바라봤다.휴대전화를 확인했다.오전 10시 47분.“미친…….”회사 다닐 때였으면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지금은 이제 막 눈을 떴다.알람도 없고.누가 깨우는 사람도 없고.어디로 출근하라는 사람도 없다.처음 퇴사했을 때는 이게 그렇게 좋았다.월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알람을 꺼버리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쓸 때의 해방감.회사 단체메신저가 울리지 않는다는 것.팀장의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한 달이 지나고,두 달이 지나고,매일이 일요일처럼 변하자 이번에는 그 자유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오늘이 월요일인지 수요일인지도 가끔 헷갈렸다.일어나서 씻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고,점심을 건너뛰어도 상관없었고,낮부터 맥주를 마셔도 아무도 모른다.좋은 일 같지만……이게 계속되니까 사람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어젯밤 일이 다시 떠올랐다.옥상.맞은편 창문.그리고 그 누나.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하…….”내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박동진. 너 원래 이런 놈이었냐?”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옥상에 올라갔고,사람을 구경했고,맞은편 집에 우연히 그 누나가 살고 있었다.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창문이 열릴 때 괜히 신경이 쓰였고,그녀가 방 안에서 움직일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갔다.심지어 혹시나 그녀가 이쪽을 바라볼까 봐 몸을 숨겼다.숨었다는 것 자체가 웃겼다.아무 잘못도 없다면 왜 숨었겠는가.“아…… 내가 이렇게 변태였나?”나는 머리를 긁적였다.그러다가 혼자 변명했다.“아니지.”집에만 있으니까 그런 거다.사람을 너무 안 만나서 그렇다.회사 다닐 때는
2화 — 밤 9시의 귀가아…… 무료하다.집에만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이직 준비를 한다고 노트북을 켜놓긴 했는데, 어느 순간 채용 사이트 대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그러다 배가 고파졌다.결국 배달앱을 켰다.치킨.그리고 맥주.“캬…….”대낮부터 한 모금 들이켜니 기가 막혔다.“낮술은 역시 최고네.”스스로 말해놓고 피식 웃었다.백수가 낮술 마시는 걸 자랑할 일은 아닌데.그래도 회사 다닐 때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평일 낮에 치킨을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는 것.처음 며칠은 자유 같았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자유도 지루했다.“이러다 진짜 대인기피증 걸리는 거 아냐?”오늘 대화한 사람이 배달기사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밖에라도 구경해야겠다.옥상으로 올라갔다.철문을 밀어 열자 익숙한 동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낡은 주택.빨랫줄.복잡하게 얽힌 전선.좁은 골목.이상하게 회사 다닐 때는 이런 걸 볼 시간도 없었다.아침이면 출근하기 바빴고,밤이면 피곤해서 집에 들어오기 바빴으니까.옥상 난간에 기대 사람들을 바라봤다.저기 슈퍼마켓 앞에는 김 씨 아저씨가 있었다.고등학교 동창놈 아버지다.“어?”걷는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한쪽 다리를 조금씩 끌고 있었다.“다리가 안 좋으신가 보네…….”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게 이런 데서 느껴졌다.나만 늙는 게 아니었다.동네도,사람들도,조금씩 변하고 있었다.그렇게 별 의미 없이 사람 구경을 했다.학생들이 지나가고,퇴근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배달 오토바이가 골목을 오갔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휴대전화를 확인했다.오후 8시 58분.“벌써 아홉 시네.”슬슬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그 순간,아래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또각.또각.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나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멈췄다.“어?”그 누나다.어제 봤던 여자.고등학교 때 버스에서 몇 번 봤던 그 사람.시간을 확인했다.9시 2분.‘
1화 — 다시 보게 된 여자내 이름은 박동진.스물아홉.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들이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을 다녔다.월급도 제때 들어왔고, 회사 명함을 내밀 때만큼은 그래도 남들 앞에서 기죽을 일은 없었다.그런데 사람 인생이라는 게 참 웃기다.한 번 꼬이기 시작하니까 정말 순식간이었다.회사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고.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모든 책임이 내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퇴사.그리고 지금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신세다.“참 부질없다…….”나는 창문 너머로 빼곡하게 붙어 있는 낡은 주택들을 바라보며 맥주캔을 땄다.칙.오늘도 저녁은 맥주 한 캔에 마른오징어.퇴사 초기에는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했다.자격증 책도 샀고, 운동도 시작했고, 이력서도 몇 군데 넣었다.딱 한 달이었다.두 달째부터는 늦잠을 자기 시작했고,세 달째부터는 요일도 헷갈렸다.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하나였다.오늘은 뭘 하지?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생각이 따라왔다.아무것도 하기 싫다.“아…… 이 동네도 지긋지긋하네.”내가 사는 곳은 오래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였다.집은 4층짜리 낡은 주택.골목은 좁고, 전봇대마다 전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창문을 열면 맞은편 집 벽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웠다.잘해야 2미터.어렸을 때야 아무 생각 없었다.그런데 스물아홉이 되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게 초라하게 느껴졌다.나는 가끔 상상했다.좋은 차.넓은 아파트.그리고 조수석에는 예쁜 여자친구.주말이면 어디 근사한 곳에 가서 밥을 먹고,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삶.그런데 현실은?낡은 방.구겨진 티셔츠.편의점 맥주.그리고 오징어.“내 인생 참…….”피식 웃으며 오징어 다리를 뜯었다.그때였다.맞은편 집 창문 하나가 열렸다.드르륵.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잠깐 멈췄다.“어?”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