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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매화야담
소설 속 임서월은 온화하고 선량했다. 임아연이 죽었을 때 임씨 집안에서는 누구 하나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임서월만은 관을 마련하고 법사를 불러 경을 읽게 했다.

그녀가 임아연을 진심으로 잘 대해 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소설 속 여주인공과 전혀 달랐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거짓과 계산이 배어 있었다.

“언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다른 사람일 리가 있나요?”

임서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곧 평온을 되찾았다.

찰나의 변화였지만 임하연은 놓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짐작이 맞았던 걸까. 눈앞의 여자는 소설 속 여주인공이 아닌 걸까?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빠르게 스쳤다. 그러나 얼굴에는 확신에 찬 표정을 띠었다. 이미 상대의 정체를 꿰뚫어 본 사람처럼.

“네가 누군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알지. 임서월, 붉은꼬리 죽엽청이 나를 죽이지 못해서 실망했어? 임서월 행세만 하면 뭐든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니?”

임서월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임하연의 팔을 붙잡은 손에도 순간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곧 나직한 한숨을 내쉬더니,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남강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시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산에 올라가 본 적도 없고, 뱀도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언니를 해치겠어요? 저는 진심으로 잘 지내고 싶은데, 언니는 왜 자꾸 저를 못마땅해하세요?”

임하연은 잠깐 의아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다니. 설마…….

순진한 척 남을 모함하는 여자들의 수법을 떠올리자 곧바로 답이 나왔다. 임하연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뒤로 젖혔다. 그대로 땅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잘린 대나무 끝이 손바닥을 찔렀다.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임하연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밀어?”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임서월이 굳어 버렸다.

눈앞으로 그림자가 스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임태겸이 임하연 곁에 와 있었다.

“임아연, 괜찮으냐?”

“손이…… 너무 아파요!”

임하연이 피 흐르는 손을 들어 보였다. 입가가 저절로 떨렸다. 이건 연기가 아니라 정말 아팠다.

상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달은 임서월이 황급히 다가왔다.

“오라버니, 저는 정말 안 밀었어요. 언니가 혼자 넘어진 거예요. 저한테 뒤집어씌우려고…….”

“그만하고 돌아가거라.”

임태겸의 얼굴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더는 말을 보탤 여지가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임서월은 입술을 꾹 깨물고 몸을 숙였다.

“그럼 물러갈게요.”

떠나기 전, 임서월은 임하연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임하연은 아픔을 참으며 그 뒷모습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빌어먹을. 누가 더 잘하는지 한번 보자고.

임태겸은 이미 임하연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가 곁에 선 왕길에게 다급히 명했다.

“어서 상처에 바를 약을 가져오너라.”

초조해하는 임태겸의 모습을 보자 임하연의 머릿속에 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이 죽기를 바란다면 그냥 내버려두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그 약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걸까? 아니면 이 사람도 연기 중인가?

대체 줄거리가 왜 이 모양이야?

처음에는 자신 있었다. 이미 아는 줄거리만 잘 이용하면 애쓰지 않고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원래 임하연은 밝고 씩씩한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가련한 여자 행세를 해야 하니,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쳤다. 이러다 위기를 넘기기도 전에 우울해지는 건 아닌지 몰랐다.

온갖 생각에 잠긴 사이 운방각에 도착했다.

왕길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공손히 약병을 내밀었다.

임하연의 손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 곳곳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임태겸의 손가락과 소매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임하연은 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고개만 숙인 채 꼼짝하지 않았다.

더는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임태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서둘러 병마개를 열고 상처에 약을 뿌렸다. 그러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 임하연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 너무 아파요!”

“조금만 참아라.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임태겸은 다른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상처를 싸매는 손길이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이틀 동안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임하연은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간 듯했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고맙기는. 어제는 나와 가까이 지내고 싶다더니, 그것도 거짓이었느냐? 간밤에는 잘 잤느냐?”

임하연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배우들이 돈을 많이 받는 데는 이유가 있네. 연기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어.

“못 잤어요. 눈을 감기가 무서워서요. 자꾸 그 뱀이 눈앞에 어른거려요.”

임태겸은 소매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국공부에 사는 이상 너도 임씨 집안사람이야. 누가 고의로 너를 해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네. 고마워요, 오라버니.”

임하연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잠깐만이라도 조용히 있고 싶었다.

그러나 거듭된 감사 인사에 임태겸의 기분은 오히려 가라앉았다.

“앞으로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네 혼인은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머니도 강요하실 수 없다. 간밤에 못 잤다니 지금이라도 자 두어라.”

임하연은 속으로 조금 기뻐했다.

역시 짐작이 맞았다. 임태겸의 말에는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래도 얼굴에는 쓸쓸한 기색을 남겨 두었다.

“알겠어요. 오라버니도 일 보세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임태겸은 깊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서재로 찾아오너라.”

“네, 오라버니.”

임태겸이 일어나 나가자 왕길도 서둘러 뒤따랐다. 손과 소매에 묻은 피를 본 왕길이 얼른 말했다.

“도련님, 제가 깨끗한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임태겸은 짧게 응했다. 무심결에 손가락이 입술을 스치자, 그 위로 붉은 핏자국이 남았다.

방 안에 남은 임하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갔네.

그녀는 곧장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채의, 나한테 남은 은전이 얼마나 있어?”

이 어수선한 국공부에서는 한시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채의가 밖에서 달려 들어와 사실대로 답했다.

“다섯 냥뿐이에요.”

“뭐? 그것밖에 없어?”

부잣집 아가씨라면 매달 받는 돈도 수십 냥은 되지 않을까? 먹고 입는 건 집에서 다 마련해 주는데, 대체 어디에 그 많은 돈을 썼다는 거지?

채의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가씨께서 술도 좋아하시고, 주사위 놀이도 즐기시잖아요. 남은 돈은 심 공자께 드릴 물건을 사는 데 다 쓰셨어요.”

그제야 임하연은 소설 속 임아연의 행적을 떠올렸다.

심청운을 만나려고 온갖 우연을 꾸며 냈다. 그가 즐겨 찾는 곳이라면 그녀도 빠짐없이 드나들었으니, 결국 돈을 모두 그에게 쏟아부은 셈이었다.

원래 주인도 참 답답한 사람이네!

“보석이나 장신구는? 그것도 하나도 없어?”

채의가 얼른 답했다.

“조금 남아 있기는 해요. 그것도 대부분 전당포에 맡기셨지만요.”

채의는 몸을 굽혀 침상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모양이 고르지 않은 진주 목걸이 몇 줄과 빛이 바랜 귀걸이 서너 쌍,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옥팔찌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빛깔이나 모양으로 보아 값이 나갈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임하연은 원래 주인에게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다.

처지가 딱하다고 해서 잘못까지 없는 건 아니라더니.

“알았어. 나가 봐.”

임하연은 장신구를 모두 꺼내 꽃무늬 천에 싸 두었다.

지금쯤이면 자신에게 신경 쓰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일단 전당포에 가져가 값을 물어보자. 혹시 원래 주인이 좋은 물건만 남겨 놓았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차피 자신은 장신구를 볼 줄도 몰랐다.

임하연은 몸을 낮추고 옆문으로 몰래 빠져나왔다. 그런데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마차에 앉아 있는 임태겸과 마주쳤다.

그는 관복을 벗고 옅은 달빛 같은 장포로 갈아입은 뒤였다. 밝은 옷빛 아래 수려한 용모가 더욱 돋보였다. 몸가짐에는 문인의 기개가, 눈매에는 무인의 늠름함이 어려 있었다.

열여섯에 문과와 무과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더니, 과연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임태겸도 그녀를 발견했다. 눈매에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

“왜 나왔느냐? 쉬라고 하지 않았어?”

“잠이 안 와서요…… 시장에 가서 조금 걷고 싶었어요.”

임태겸의 시선이 붉게 부은 눈을 스쳤다. 지난 이틀 동안 벌어진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 바람이라도 쐬려는 모양이었다.

“그럼 타거라. 데려다주마.”

괜히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던 임하연은 발판을 밟고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입구에 깔린 깔개가 방금 물로 씻었는지 젖어 있었다. 발이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임하연은 그대로 임태겸의 다리 위에 엎어졌다.

단단한 무릎에 가슴을 부딪치자 눈물이 날 만큼 아팠다.

임하연은 얼른 몸을 일으켜 몰래 아픈 곳을 문지르려 했다. 그러나 비단 옷감이 너무 매끄러웠다. 버티려던 손이 미끄러지더니 장포 가운데 움푹 들어간 곳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은 것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임하연은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버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도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맹세코.

이번에는 정말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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