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20화. 유리궁전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9 08:01:33

오후 3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강변.

지상 30층 규모로 웅장하게 솟아오른 ‘EUN 글로벌 하이 주얼리 본사 타워’ 공식 완공식. 특수 삼중 스마트글래스로 제작된 타워 외관은, 햇살을 받아 영롱한 에메랄드빛 크리스탈 궁전처럼 서울의 하늘을 눈부시게 밝히고 있었다. 각국 외교 관계자와 글로벌 명품 업계 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은서와 시후가 나란히 황금 가위를 들고 테이프를 잘랐다.

은서는 테이프가 잘리는 순간, 처음 이 건물의 미완성 골조를 올려다보던 날을 떠올렸다. 남이 중단한 공사에서 시작한 건물이었다. 기존 구조를 확인하고 내부 계획을 바꾸고, 세공실의 빛과 환기를 시험하는 동안 일정표가 여러 번 고쳐졌다.

준공 전에 들렀던 날에는 작업대 위 조명이 보석 색을 다르게 보이게 해 마지막 점검을 미루기도 했다. 빨리 문을 여는 것보다 매일 일할 사람이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현장 책임자가 새 조명 견본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122화. 반지

    다음 날 정오, 눈보라가 걷히고 거울처럼 맑게 갠 스위스 레만 호수.푸른 만년설 봉우리가 호수 수면에 그림처럼 비치는 가운데, 카일이 현지에서 마련한 전용 요트가 부드럽게 물결을 갈랐다. 지중해의 에밀리아호를 옮겨온 것이 아니라, 레만 호수에서 운항하는 배였다.요트 2층 테라스 데크.배에 오르기 전 은서는 바람을 확인하고 선장에게 가까운 항로로 부탁했다. 아이들이 불편해하면 곧 돌아오기로 했다. 시후는 전에 이 호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은서가 난간에서 한 걸음 떨어진 의자를 고르자 곁의 자리를 당겼다.서아는 담요 밖으로 손을 내밀어 햇빛을 잡으려 했다. 도윤은 물결보다 시후의 셔츠 단추에 관심이 많았다. 은서는 아이들의 얼굴이 가려지지 않게 모자를 조금 올려주었다.“이 풍경을 기억할까요?”도윤이 그때 시후의 손가락을 잡았다. 남자가 호수에서 눈을 떼자 아이가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은서는 웃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먼 풍경을 모두 담지 못해도 오늘 누구의 품에서 물결을 봤는지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담요가 들려 그녀는 사진을 찍기 전에 아이부터 덮어줬다.“기억하게 해주면 되지. 사진으로.”시후가 휴대폰을 내밀었지만 한 손에 아이가 있어 화면을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 은서가 대신 받아들었다. 카메라에는 호수보다 남자의 턱과 아이의 손이 크게 찍혔다. 그녀는 다시 찍지 않고 저장했다. 멋진 풍경만 남겼다면 오늘 시후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따스한 햇살 아래, 은서와 시후는 따뜻한 니트 옷을 입은 아기 도윤과 서아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이들이 알프스의 맑은 바람에 방긋 웃으며 옹알이를 터뜨렸다. 시후가 은서의 곁으로 다가와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케이스를 꺼냈다.케이스 안에는 최상급 마터호른 에메랄드와 바게트 컷 다이아몬드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121화. 귀환

    은서는 로젠버그 고성의 현관 앞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예전에는 이 문을 지나 도망쳤고, 그 뒤에는 시후가 부서진 문 너머로 들이닥쳤다. 지금은 새로 손본 문짝이 열리고 카일이 아이들을 맞으러 나왔다.“먼 길 오느라 고생했군요.”카일이 팔을 벌리자 도윤은 시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서아는 낯선 은빛 지팡이에 손을 뻗었다. 은서가 아이의 손을 받아 내리며 웃었다.이번 연회는 이미 지난 결혼기념일과 다가오는 아이들의 첫돌을 함께 축하하려고 마련한 자리였다. 결혼식과 출생일이 같은 계절이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로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한 번 모일 수 있는 날짜를 오래 의논해 정했다.카일이 준비한 방의 열쇠를 은서에게 건넸다. 그녀가 받아 가방 안에 넣자 시후는 짐을 든 채 기다렸다. 이번에는 돌아가는 날짜도 정해 두고 온 여행이었다. 은서는 가방을 여미며 가져온 짐을 살폈다. 전처럼 무엇을 두고 나가야 할지 헤아릴 필요가 없었다.아이들이 쉴 방을 확인한 뒤 은서는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시후가 계단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었다.***스위스 몽트뢰, 알프스 만년설과 레만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의 로젠버그 고성(Château de Rosenberg). 결혼 기념 연회와 쌍둥이 도윤과 서아의 첫돌을 앞두고, 유럽 하이주얼리 업계와 주요 컬렉터 300여 명이 운집한 그랜드 볼룸.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순백의 실크 오프숄더 드레스를 유려하게 걸친 한은서가 단상에 올랐다.그녀의 목에는 어머니의 혼이 깃든 200캐럿 마터호른 에메랄드 네크리스가 눈부신 초록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턱시도를 입고 곁에 선 시후가 은서와 눈을 맞췄다. 지난날 레만 호숫가 선착장에서 두 무릎을 꿇던 모습이 잠깐 겹쳤다. 은서는 인사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이 편히 쉬고 있는지 한 번 더 떠올렸다.&ldq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120화. 유리궁전

    오후 3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강변.지상 30층 규모로 웅장하게 솟아오른 ‘EUN 글로벌 하이 주얼리 본사 타워’ 공식 완공식. 특수 삼중 스마트글래스로 제작된 타워 외관은, 햇살을 받아 영롱한 에메랄드빛 크리스탈 궁전처럼 서울의 하늘을 눈부시게 밝히고 있었다. 각국 외교 관계자와 글로벌 명품 업계 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은서와 시후가 나란히 황금 가위를 들고 테이프를 잘랐다.은서는 테이프가 잘리는 순간, 처음 이 건물의 미완성 골조를 올려다보던 날을 떠올렸다. 남이 중단한 공사에서 시작한 건물이었다. 기존 구조를 확인하고 내부 계획을 바꾸고, 세공실의 빛과 환기를 시험하는 동안 일정표가 여러 번 고쳐졌다.준공 전에 들렀던 날에는 작업대 위 조명이 보석 색을 다르게 보이게 해 마지막 점검을 미루기도 했다. 빨리 문을 여는 것보다 매일 일할 사람이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현장 책임자가 새 조명 견본을 가져왔다.오늘은 그가 하객석 끝에 서 있었다. 은서는 그쪽을 향해 인사한 뒤 마이크를 잡았다. 성수동의 작은 계약서에서 시작된 길이 여기까지 이어졌다. 처음부터 이런 건물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제 이름으로 일을 하고, 일을 끝내면 스스로 문을 닫고 나갈 수 있는 자리면 충분했다.“이 타워는 닫힌 방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뻗어나간 모든 상처 입은 이들의 영원한 자유와 사랑의 안식처입니다.”은서가 마이크에서 물러나자 축포가 터졌다. 타워 외벽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었고, 현장 책임자는 하객석 끝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자정, 타워 최상층 30층 펜트하우스 ‘유리궁전’.사방 벽면과 천장 전체가 투명한 통유리로 열려 있어, 발아래로 한강의 황금빛 물결과 서울의 백만 불짜리 야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한남동의 기존 45층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119화. 태강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 대법정.재판장의 단호한 법봉 소리가 법정에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태강그룹 지주사 및 주요 계열사 전원에 대하여 최종 파산 및 법인 청산을 선고한다.”조수현 모자와 결탁해 은서 모친 서혜진 여사의 독살을 방조하고 방산 비리를 일삼았던 재계 10위 태강그룹이 법인 청산을 선고받았다. 법정에서 이름이 불릴 때마다 관련자들이 자료를 챙겼고, 태강 측 자리에서는 한동안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경그룹과 ‘EUN’ 연합은 태강의 핵심 방산·물류 계열사를 법원 경매를 통해 합법적으로 인수 완료했다.은서는 법정 밖에서 인수 대상 사업장의 명단을 넘겼다. 회사 이름 아래에 적힌 직원 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숫자 안에는 자신을 해치라는 명령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인수 후에 계속 일하는 분들한테 통보는 갔나요?”담당자가 서류의 다음 장을 펼쳤다. 회사가 사라진다는 기사를 먼저 보고 연락한 직원들도 있었다. 은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종이에서 시선을 들었다. 자신에게는 기다렸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는 당장 내일의 생계일 수 있었다.“확인되지 않은 약속은 하지 마세요. 대신 정해진 건 늦추지 말고 전해주시고요.”담당자가 표시한 항목을 시후도 확인했다. 은서는 앞뒤 페이지를 함께 접어두었다. 반격에 성공했다는 발표만으로 일을 마칠 수는 없었다. 없어진 이름 아래서 계속 일할 사람들에게 무엇이 달라지는지 알려줘야 했다. 법정 복도를 나설 때 그녀는 그 자료를 다른 서류와 섞지 않고 따로 챙겼다.담당자가 준비한 설명회 일정을 펼쳤다. 은서는 새 명패를 다는 날짜보다 급여와 업무가 끊기는 구간이 없는지 먼저 물었다. 시후는 옆에서 답변이 끝날 때까지 듣다가 보완할 사항에 표시했다.&ld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118화. 백일

    서울 성북동 서경그룹 본가 대저택 후원 정원. 맑은 가을 햇살 아래, 도윤과 서아의 생후 백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100일 잔치’가 열렸다. 고운 옥빛 한복을 맞춰 입은 은서와 시후가 아들과 딸을 품에 안고 있었다.은서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 하객용 그늘막부터 둘러봤다. 본관 박물관 공사 구역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길을 나누고, 아이들이 피곤하면 바로 쉴 수 있게 별채 방을 비워두었다. 긴 연설 순서를 줄이자는 말에 사회자가 원고 한 장을 덜어냈다.시후는 도윤을 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이가 옷깃을 잡아 구겼지만 펴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은서가 서아의 등을 받쳐 안자 두 아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오늘도 같이 안 보네.”“사진 찍을 때는 잠깐 보겠죠.”은서는 서아의 모자를 조금 올려줬다. 아이가 얼굴을 찡그리자 곧바로 손을 뗐다. 몇 초 뒤에는 다시 편안해졌다. 그 작은 표정 하나에 온 신경을 쓰는 자신이 신기했다.시후는 도윤의 등을 받친 손을 바꿨다. 서로 같은 자세를 취하라는 사진가의 부탁에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아이들이 편한 쪽으로 안고 찍자고 은서가 먼저 말했다.사진작가가 장난감을 흔들었다.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안 서아는 입을 벌리고 하품했다. 완벽한 가족사진을 기다리던 시후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은서는 그때 찍어 달라고 손짓했다.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흠잡히지 않아야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오늘의 사진에는 구겨진 옷과 하품하는 아기가 그대로 남아도 괜찮았다.순금과 에메랄드로 세공된 아기 팔찌가 두 아이의 통통한 손목에서 찰랑거렸다. 어린 시절, 16살의 은서가 피눈물을 흘리며 갇혀 있던 성북동 저택. 그러나 오늘, 그 저택은 두 아이의 까르르 웃는 맑은 웃음소리와 수백 명 하객들의 따스한 축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117화. 그랑프리

    수상 통보를 받은 뒤 은서는 곧바로 비행기 표부터 잡지 않았다. 몸 상태와 아이들을 돌볼 일정을 먼저 상의했고, 파리 본부에는 짧게 머물 계획을 보냈다.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하루에 모두 넣어둔 일정표는 두 번 돌려보냈다.“상 받으러 갔다가 쓰러져서 돌아올 수는 없잖아요.”시후는 그 말에 이견이 없었다. 다만 본부에서 보낸 드레스 치수를 들여다보다가 은서의 눈치를 살폈다.“다시 맞추라고 할까?”“제가 입어보고 말할게요.”피팅을 마친 뒤 은서는 허리 안쪽의 여유를 조금 늘려 달라고 했다. 예전 치수에 몸을 억지로 끼워 넣지 않았다. 재단사가 새 표시를 하는 동안 시후는 아이들의 사진을 확인했다. 은서가 돌아보자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기들은 자신들이 빠진 며칠을 무사히 보내고 있었다.그걸 알고도 보고 싶었다. 은서는 그리운 마음을 가방 속에 넣어두듯 사진을 저장하고, 무대에 오를 원고를 다시 펼쳤다.***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 인근, 리츠 파리 호텔(Hôtel Ritz Paris) 그랜드 살롱. 해외 5대 명품 하우스의 총수들과 유럽 황실 귀빈 500여 명이 숨을 죽인 가운데, 2026 프랑스 명품 협회(Comité Colbert) 최고 권위의 ‘그랑프리 럭셔리 대상’ 시상식이 장엄하게 거행되었다.“영예의 대상, ‘EUN 글로벌’ 한은서 회장!”사회자의 발표와 함께 기립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지금의 몸에 맞춘 에메랄드빛 실크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은서가 단상에 올랐다.그녀의 목에는 故 서혜진 여사의 숨결이 깃든 200캐럿 마터호른 에메랄드가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마이크 높이를 낮추는 직원에게 감사를 전한 뒤 은서는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