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씨발, 입 좀 닥쳐. 내가 네 뒤나 캐고 다니는 사람 같아?”
설주는 현관문을 끝까지 벌려젖혔다. 경첩이 삐걱거리자 2층 창문을 올려다봤는데, 부모 방 불은 꺼진 채 고요했다. 태건은 차 옆에 서서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 무심한 얼굴이 방금 던진 더러운 말보다 더 빡치게 만들었다.
그는 이미 이야기를 끝낸 듯했지만, 설주는 끝내지 못했다. 그가 누굴 만났는지 듣는 게 무서웠다. 그에게 따질 자격이 없다는 생각은 열 번도 더 떠올랐지만, 그 말이 그녀를 집 안으로 보내주진 않았다.
“누나가 먼저 물었잖아. 누구 만났냐고.”
“집에 기어들어 오는 시간이 이래서 물은 거야.”
“아버지한테 연락했어.”
“그럼 됐네. 처자.”
설주는 발을 돌리면서도 그가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젖은 슬리퍼 소리가 타일을 문지르는 게 한 발, 두 발. 태건은 차 문을 잠그고 나서야 들어왔고, 그녀 옆을 지나치면서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시간만 확인했다.
설주가 작게 욕을 뱉었다.
“뭐라고?”
“넌 사람 갖고 노는 게 그렇게 재밌냐?”
“오늘은 안 놀릴게.”
태건은 그 말로 끝내고 계단을 올랐다. 복도 센서등이 그의 발밑을 밝혔고, 맨 끝 방 문이 닫히자 다시 어두워졌다.
설주는 거실 한가운데 멈춰 섰다. 들볶을 때는 한 대 때리고 싶더니, 입을 다물어버리니 뒤통수에라도 뭐 하나 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주방에 태건 몫 저녁이 남아 있었다. 정옥이 덮어둔 냄비를 열자 식은 된장 냄새가 올라왔고, 밥솥에는 마른 밥 한 공기가 들어 있었다. 설주는 그대로 두려다 결국 국을 데웠다. 가스 불꽃을 보면서 자기가 하는 짓을 알면서도, 이미 국은 끓기 시작했다.
그릇 꺼내는 소리에 정옥이 잠옷 차림으로 내려왔다.
“아직 안 잤니?”
“배고파서.”
“저녁 잘 먹었잖아.”
“또 먹으면 안 돼?”
어머니는 대답 대신 태건 신발을 봤다.
“걔 왔구나. 배고플 텐데 밥 좀 먹으라 그래.”
설주는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놓쳤다. 행주를 다시 감는 동안 정옥이 이미 계단 쪽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 내가 부를게.”
말이 너무 급했다. 정옥이 돌아보았고, 설주는 냄비 뚜껑을 들어 보이며 둘러댔다.
“국 끓여 놨잖아. 식기 전에 내가 갖다 줄게.”
“동생 챙기는 건 처음 보네.”
정옥은 피곤한 웃음을 남기고 방으로 올라갔다.
설주는 그 말이 싫었다. 동생 챙긴다는 말 아래면 무슨 짓을 해도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이 더 싫었다.
그녀는 빈 식탁을 생각했다. 친아들도, 친딸도 아닌 둘이 한집에서 밥 먹는 풍경을 정옥은 9년 동안 애써 지켜왔다. 태건 이름이 나올 때마다 뭔가를 숨겨야 한다는 걸 어머니가 알면, 그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설주는 쟁반 위 그릇을 똑바로 맞춰 놓았다. 쟁반에 밥과 국을 올리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태건은 배고프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설주는 쟁반을 식탁에 내려놓고 김이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결국 치우지 못했다.
2층으로 올라가려던 참에 태건의 방문이 열렸다.
그가 물 마시러 내려오다 설주를 봤다. 머리칼이 젖어 있었고, 손엔 빈 컵이 들려 있었다. 수건 하나만 걸친 채 아래쪽이 축 늘어진 채로 서 있었다.
“아직 안 자?”
설주는 쟁반 앞을 막아섰다.
“네 밥이다. 먹든 말든 알아서 해.”
태건이 밥그릇을 내려다봤다.
“누나가 했어?”
“엄마가 시켰어.”
“엄마는 벌써 주무시는데.”
“시켜놓고 잔다고, 새끼야.”
“알았어.”
그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 설주는 올라가면 됐다. 그런데 찬물을 한 컵 따라 그의 앞에 놓고, 식탁 끝에 그대로 서 있었다.
태건은 더 묻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식은 밥을 국에 적셔 먹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맛없어?”
“괜찮아.”
“그럼 처먹기만 하지 왜 그렇게 늦게 먹어.”
“뜨거워.”
설주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식었다고 생각한 국이었다. 그는 밥을 입에 넣으며 잠깐 웃음을 삼켰지만,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태건이 빈 그릇을 싱크대에 옮긴 후 방으로 돌아갔다. 거실 시계는 새벽 2시를 넘겼다. 설주는 식탁 물자국을 문질렀다. 그가 먹고 간 자리는 깨끗했다. 그가 곁에 남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설주는 자기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부엌 불 끄러 간다는 핑계였다. 거실 끝에서 태건 방 문 아래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안에서는 누군가와 통화하는지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태건이 혼자 웃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설주는 그걸 알면서도 발을 떼지 못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정옥이 가족 단체 대화방에 남긴 메시지였다.
태건이 들어왔니? 내일 아침에 소개팅 아가씨 연락처 알려 준다고 해 줘.
설주는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답장을 쓰기 전에 태건 방에서 또 웃음이 났다.
거짓말을 쓰는 데는 손가락 두 개면 충분했다. 설주는 자신이 방금 만들어 낸 일이 내일 아침 밥상에서 어떻게 돌아올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우지 않았다.
태건이 정말 다른 여자 만난다면, 그 말을 먼저 내뱉은 사람은 자신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가 보는 단체 대화방에 이렇게 적었다.
‘태건이 여자 만나는 중이래. 소개팅 필요 없대.’
“그래, 나간다. 나가면 될 거 아니야, 이 개자식아.”설주는 203호 문턱을 넘어선 뒤에야 자신이 정말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복도는 여전했다. 문마다 번호판이 붙어 있고, 멀리서 청소 카트 바퀴가 타일 틈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등 뒤가 계속 따가웠다. 태건이 따라 나올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적어도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을까.그 생각 자체가 역겨워서 설주는 구두 뒤축으로 바닥을 세게 찍었다. 방 안에서는 공구 부딪히는 소리만 나더니, 이내 203호 문이 닫혔다.그게 끝이었다.설주는 멈춰 서서 203호 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나가라 해놓고는 정말로 자기가 떠난 자리를 확인하러 오지도 않는 놈이었다. 가서 따질까 싶었지만, 곧 몸을 돌렸다.“허, 지랄하고 있네.”붙잡지 말라고 한 건 자기였다. 가족이라는 선을 넘지 말자고 먼저 떠든 것도 자기고, 태건이 길을 막지 않은 걸 안도해야 하는 것도 자기였다. 그런데 그 새끼는 그대로 해 줬고, 설주는 입안에 씹어 뱉을 욕부터 찾았다.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일부러 발걸음을 늦췄다. 난간에 말라붙은 걸레 자국이 손에 묻었고, 1층에서는 정옥이 손님에게 체크아웃 시간을 설명하고 있었다. 태건의 작업화 소리가 계단을 밟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날에도, 새벽에 화장실 내려갈 때에도 익숙했던 그 발소리.그런데 끝내 들리지 않았다.설주는 프런트를 지나 세탁실로 들어갔다. 빨랫감 바구니를 발로 밀어 문을 가렸지만,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누가 지나가면 알 수 있게 틈을 남겨 뒀다. 그 짓을 하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구차한지 깨달았다.세탁기 두 대가 번갈아 돌아가며 바닥을 울렸다. 벽에 붙은 종이에는 세제 비율이 적혀 있었고, 바구니마다 객실 번호가 달려 있었다. 설주는 분류 끝난 수건을 다시 펼쳐 길이를 맞췄다. 접었다 펴고, 또 접었다. 손으로 일을 하면 머리가 조용해질 줄 알았다.수건 다섯 장을 정돈하고 여섯 번째를 집어 들었을 때, 그게
“중요하니까.”그 말이 끝나자마자 설주는 창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건 실은 카트가 복도를 지나가고, 정옥이 납품업자랑 수량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몇 걸음 밖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데, 태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네 말이 중요하다”고 했다.“씨발, 중요하면 뭐 해. 내 말이라면 다 들을 거야?”태건은 대답 대신 비뚤어진 수건 상자를 똑바로 세웠다. 조금 전 그가 다가왔을 때 설주는 물러서지 못했다. 선반 끝이 등을 찌른 것도 아닌데 발을 떼지 않았다. 그걸 스스로 깨닫자 괜히 상자 모서리를 잡아뜯었다. 종이 가루가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소개팅 안 나간 건 내 결정이야. 누나가 책임질 일 없다고.”“그래 놓고 왜 내 말이 중요하다고 지랄이야.”“그건 누나가 먼저 물었잖아.”설주는 잘린 포장 끈을 바닥에 내던졌다. 정옥이 문 앞에서 이름을 부르자 둘은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 태건은 납품서에 숫자를 적고, 설주는 수건 묶음을 다시 세었다.어머니가 203호 욕실 바닥에 물이 번졌다며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귀까지 달아오르던 설주는 그 말에 오히려 안도했다. 할 일이 생기면 저 새끼의 말이 잠시라도 잊힐 것 같았다.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면서부터 또 계산이 시작됐다. 태건이 따라올까. 혼자 가겠다고 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배관 하나 확인하는 일에도 자기 마음이 먼저 들통 나는 게 이제는 버릇처럼 느껴졌다.난간에 물걸레 자국이 길게 나 있었고, 아래층에서 정옥이 식사 준비하는 소리가 났다. 설주는 매일 오르던 계단을 오늘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걸었다. 그게 더럽게 겁이 났다.203호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객실에는 투숙객 흔적 대신 새 침구에서 나는 세제 냄새가 남아 있었고, 작은 냉장고가 불규칙하게 웅웅거렸다. 창문 없는 복도에서 들어온 불빛이 욕실 문턱까지만 닿았다.설주는 문을 열어 둔 채 바닥의 물 자국을 살폈다. 타일과 세면대 받침 사이에 얇게 물기가 번져 있었다.태건은 작업 가방에서 마른 휴지를 꺼내 연결부
“그 여자한테 전화하지 마, 씨발.”설주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말이었다. 본인도 놀랐다. 태건이 다른 년한테 전화하려던 순간, 벽시계는 11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에 쥔 수리 내역서는 이미 구겨져 있었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수화기 너머로 태건의 숨소리가 멎었다.“뭐라고?”태건은 웃지 않았다. 설주는 목소리를 낮췄다.“아니… 그냥. 엄마가 붙여준 년한테 밤늦게 전화하지 말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그냥 나가지 마.”설주는 자신이 한 말을 되돌리기는커녕 더 깊게 박아버린 걸 깨달았다. 통화를 끊자마자 태건의 이름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프런트 냉장고 소음마저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설주는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발소리를 죽였다. 부모님 방 앞을 지날 때는 이유도 없이 숨을 참았다. 언제부터 남의 소개팅을 막는 일이 어머니에게 들키면 안 될 비밀이 된 걸까.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불을 확 잡아당겼다. 자기 입에서 나온 한 마디가 계속 귓속을 맴돌았다. 누가 들으면 애인 잡는 소리처럼 들릴 텐데. 정작 둘은 가족사진 속에서 나란히 서 있는 사이였다. 그 사진 아래에서 혼자 질투로 발광하는 년이 자기라는 게 숨통을 조였다. 속옷 사이로 이미 축축하게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태건의 좆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씹이 간질거렸다.다음 날 아침, 정옥이 수건 수량을 적고 있을 때 설주는 식탁 앞으로 반찬 접시를 바짝 끌어당겼다.“쟤 어디 갔어?”“일찍 나가서 자재 정리한다던데. 왜?”“어제 보내라는 내역서가 틀려서.”거짓말이었다. 태건은 이미 다 보냈고, 설주는 그 서류를 어젯밤에 움켜쥐고 있었다. 어머니 앞에서조차 본능적으로 거짓말이 나왔다.창고에 들어서자 페인트 냄새와 축축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설주는 수건을 풀면서도 계속 태건의 작업화 소리를 기다렸다. 아홉 개, 열 개… 숫자를 세면서도 머릿속은 태건의 손이 자기 가슴을 움켜쥐는 상상으로 가득했다. 보지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태건의 작업화가 창고 입
“말해 보라고? 씨발, 엄마 앞에서도 똑같이 물을 수 있으면 해 봐.”설주가 이를 악물고 내뱉는 순간, 계단참에서 정옥의 발이 멈췄다.태건은 그녀의 방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 돌아섰다. 설주는 파일을 품에 끌어안았다. 어머니가 나타나자 제일 먼저 그에게서 거리를 벌리는 자신이 지긋지긋했다.“이 시간에 둘이 왜 안 자니?”“내일 결재받을 장부 줬어요.”태건이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옥은 수납장에서 여분의 베갯잇을 꺼내며 설주에게도 일찍 자라고 했다.설주는 엄마가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문을 붙들고 있었고, 태건은 그런 그녀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사소한 일 하나를 들고 밤늦게 제 방 앞까지 온 이유를 생각하다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다음 날 아침, 정옥의 휴대전화가 식탁 위에서 두 번 울렸다.설주는 계란국에 뜬 파를 걷어 내고 있었다. 승표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태건은 고장 난 객실 도어록 부품을 봉투에 담고 있었다.“태건아, 너 지난번 소개팅 싫다고 했지?”그릇을 잡은 설주의 손이 멈췄다.전에 정옥이 소개해 주겠다고 했을 때 설주는 가족방에 없던 여자친구까지 만들어 일을 망쳤다. 이번에는 제법 마음에 드는 상대가 생긴 모양이었다.“우리 단골 손님 조카래. 서른이고, 여기서 멀지 않은 데서 일한대. 사진도 보내 주셨네.”정옥이 화면을 태건 쪽으로 돌렸다.설주는 보지 않으려고 국에 밥을 말았다.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는 동안 화면의 빛이 맞은편 남자의 턱을 비췄다.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벌써 이 식탁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나이와 사는 동네, 정옥의 기대까지 갖춘 여자였다.“한 번 만나 봐. 이번엔 누나가 괜한 소리 안 하겠지?”정옥이 웃으며 설주를 돌아봤다.설주는 뜨거운 밥알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한 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난번 거짓말을 또 들먹이고 싶지 않았다. 태건 앞에서 화내는 이유도 설명할 수 없었다.“만나 봐. 나이 먹었으면 여자도 만나고 그래야지, 씨발.”승표가 신문을 내리며 말버릇을
“기태건.”제 방에서 혼자 그 이름을 뱉었는데, 문밖에서 대답이 돌아왔다.“불렀어?”설주는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졌다. 도경이 보낸 ‘네가 못 떠나는 이유, 진짜 집 때문이야?’라는 문장이 아직 화면에 떠 있었다. 문 아래에는 태건의 그림자가 걸려 있었고, 복도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까지 선명했다. 제 머릿속에서만 맴돌아야 할 이름이 벽을 뚫고 나간 것이다.“안 불렀거든. 남의 방 앞에서 뭘 엿들어?”“객실 장부 갖다주러 왔어. 문 열어.”설주는 옷깃을 여미고 잠금쇠를 풀었다. 태건은 수리비 영수증을 끼운 파일을 들고 있었다. 문턱 안쪽을 넘겨다보지도 않았는데 설주는 그가 침대 위의 휴대전화까지 봤다고 느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자기 가슴을 스치듯 지나가는 게 느껴져, 유두가 스르르 서는 게 싫었다.일부러 문을 좁게 열자 파일 모서리가 문틀에 걸렸다. 복도 벽지는 오래된 습기 때문에 아래쪽이 들떠 있었고, 수납장 위에는 정옥이 접어 둔 객실용 수건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집에 붙은 사소한 흔적 하나까지 자기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특히 태건의 체온이 복도 공기를 타고 밀려오는 게, 보지 사이가 이미 미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여기 놔. 내일 보면 되잖아.”“내일 아침에 아버지 결재받아야 해.”영수증을 받아드는 사이 도경의 메시지가 다시 울렸다. 설주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뒤집었다. 태건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왔고, 그녀는 별것 아닌 행동 하나에도 변명을 준비하는 자신에게 욕이 나왔다. 속옷이 이미 젖어서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뭘 봐, 씨발.”“아무것도.”그가 돌아서자 설주는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런데 정작 손은 문고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지면 오늘도 혼자 남아 태건이 한 말과 하지 않은 말까지 뒤집어 볼 터였다. 좆이라도 한 번 박히면 이 답답한 마음이 좀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부동산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못한 까닭을 누구에게라도 뒤집어씌우고 싶었다. 다시 계약할 기회가 생기면
24화. 대답하지 않는 번호“그러니까 전기 나간 게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네 말에 기어오는지 시험한 거야?”설주는 계약서를 움켜쥔 채 카운터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이 끝이 손바닥을 베었지만, 그보다 더 따가운 건 태건이 던진 말이었다. 복구된 천장등 아래로 환불 영수증과 카드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손님들의 짜증도, 정옥이 허리를 굽혀 사과하던 일도 다 실제였다. 그런데 태건은 그 난리판에서 설주가 집을 떠날 수 있는지만 궁금했다는 거다.“전기는 진짜 나갔어. 손님들 줄 서 있던 것도 봤잖아.”“그러니까 더 좆같다는 거지. 엄마 힘든 거까지 이용해서 날 불러낸 거냐?”태건이 장갑을 벗다 말고 멈췄다. 설주는 그가 뭐라 변명하기 전에 계약서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정옥이 부엌에서 그릇 긁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고함을 지르면 어머니는 전기 때문에 예민해졌다고 믿을 테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릴 수 있는 일이 또 하나 늘었다는 생각에 속이 뒤집혔다.“잘 봤냐? 네가 부르면 내가 기어오는 꼴.”그 말만 남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태건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게 더 얄미웠다. 붙잡아서 욕이라도 퍼부을 작정이었는데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설주는 문을 쾅 닫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팬티 안이 후끈거렸다.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태건이 장갑 벗는 순간 드러난 팔뚝 근육과, 그 좆이 바지 안에서 꿈틀거릴 것 같은 상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밤에 부동산으로 전화했을 때 중개사는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했다. 계약금을 먼저 넣은 사람이 생겨서 그 빌라 3층은 나갔다는 것이다. 같은 금액대의 방을 더 보여 주겠다는 말에 설주는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책상에 펼쳐 놓은 계약서가 우스웠다. 현관의 희미한 신발 자국과, 맞은편 벽만 보이던 부엌 창이 아깝다고 느껴질 줄 몰랐다. 도장을 찍기 1분 전에 돌아섰던 자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태건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정말 계약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