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을 오르는 산길.
양옆으로 늘어선 수십 년 된 소나무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좌석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어제는 꽤 볼만했어.”
침묵을 깬 것은 서도진이었다. 그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신라호텔을 발칵 뒤집어놓고도 넌 아주 평온하게 잠들더군. 벼락 맞은 강민호와 한유라의 표정이 아직도 아른거리는데 말이야.”
“쓰레기들을 분리수거장에 처넣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흥분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저 당연한 수순이었을 뿐입니다.”
한채원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고급 저택들을 응시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오늘 그녀의 차림새는 어제의 화려한 오뜨 꾸뛰르 드레스와는 180도 달랐다. 단정하지만 빈틈없이 재단된 화이트 트위드 투피스. 과한 장신구는 모두 배제하고, 오직 도진이 어제 선물한 스위스 하이엔드 브랜드의 심플한 시계만을 찼다.
단아하고 우아했지만, 그녀의 등줄기는 칼날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오늘 갈 곳은 어제 그 삼류들 약혼식장과는 차원이 다를 텐데.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군.”
도진이 태블릿을 덮고 채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JS그룹 본가. 내 혈육들이지만, 하나같이 독을 품은 뱀들이 득실거리는 소굴이지. 한성그룹 회장의 혼외자에, 어제 막 500억 횡령범으로 쫓겨난 여자가 내 아내가 되겠다고 나타났으니. 그들이 널 어떻게 물어뜯을지 짐작은 가나?”
“뱀들이 독을 품어봤자, 머리통을 짓밟으면 그만입니다.”
채원이 도진과 시선을 맞추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대표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먹칠을 하든 말든 상관 안 해. 오히려 네가 어떻게 그들의 숨통을 조일지가 기대될 뿐이지. 어제 네가 한 약속, 내 사촌들의 목줄을 물어뜯는 ‘미친 사냥개’가 되어주겠다던 그 말. 오늘 그 능력을 증명해야 할 거다.”
도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철문이 양옆으로 육중하게 열리며 팬텀이 정원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수백 평 규모의 정원과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JS그룹 서 회장의 대저택이었다.
차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저택의 거대한 현관에 들어섰다.
도열해 있던 수십 명의 사용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저택의 총괄 집사가 깍듯하게 인사하며 두 사람을 1층의 메인 응접실로 안내했다.
수백 년 된 앤티크 가구와 최고급 명화들로 장식된 넓은 응접실 안에는 이미 세 사람이 여유롭게 홍차를 마시며 대기하고 있었다.
도진의 고모이자 JS 어패럴의 대표인 서명희.
도진의 사촌 여동생이자 JS 뷰티의 상무인 서지희.
그리고 도진과 후계 구도를 놓고 가장 치열하게 대립 중인 사촌 형, JS 화학의 서태진 전무였다.
“어머, 우리 바쁘신 조카님이 드디어 오셨네.”
서명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는 도진이 아닌, 그의 곁에 선 채원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도진은 그들의 시선 폭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채원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쥐며 에스코트했다. 철저한 쇼윈도 부부로서의 연기였다.
“고모님, 오셨습니까.”
“그래. 할아버님은 아직 서재에 계신다. 그나저나… 네 옆에 있는 그 대단한 아가씨는 누구지? 어제 뉴스에서 아주 도배를 하던데.”
서명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촌 동생 서지희가 비웃음을 흘렸다.
“오빠. 요즘 JS그룹이 자선사업도 해? 한성에서 횡령으로 쫓겨나고 파혼당한 여자를 굳이 주워 올 이유가 있어? 집안 망신도 유분수지.”
적의가 가득 찬 노골적인 무시.
도진은 굳이 나서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가 채원에게 판을 깔아준 것이다. 어디 한번 네 실력을 보여보라는 듯이.
채원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도진의 옆에 우아하게 착석했다. 그녀의 곧은 자세와 기품 있는 태도는 어설픈 재벌가 영애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한채원입니다.”
채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응접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변했다. 서지희가 눈을 치켜뜨며 쏘아붙였다.
“인사? 핏줄도 불분명한 혼외자가 감히 우리 집안 응접실에 앉아서 인사를 해? 넌 부끄러움도 없니? 500억을 해 먹고도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멘탈은 인정해 줘야겠네.”
“지희야, 말조심해라. 아무리 근본 없는 핏줄이라도 지금은 네 오빠가 데려온 손님 아니니.”
서명희가 조카를 나무라는 척하며 채원의 ‘근본’을 다시 한번 난도질했다.
두 여자의 완벽한 합작 공격. 보통의 여자였다면 이쯤에서 얼굴이 붉어지거나 도진의 뒤로 숨었을 것이다.
하지만 채원의 입가에는 오히려 부드럽고도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근본을 따지시는 걸 보니, 고모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핏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가 봅니다.”
“뭐? 고모님? 네가 뭔데 날 고모라고 불러!”
서명희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팍 구겼다. 채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본차이나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족보 정리가 덜 되어서요. 작년에 고모님께서 세 번째 남편분과 이혼 소송을 하시면서, 그분의 내연녀와 벌이셨던 위자료 진흙탕 싸움이 언론에 오르내렸던 기억이 나서 친근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JS그룹의 ‘근본’있는 핏줄도 사생활 관리는 꽤나 서민적이시구나, 하고 감명받았거든요.”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서명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세 번째 이혼은 집안에서도 금기시되는 수치스러운 흑역사였다.
채원은 찻잔의 향을 음미하며 가볍게 덧붙였다.
“혈통의 순수성보다는 현재의 가치가 비즈니스에서는 더 중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서지희 상무님.”
타겟이 순식간에 자신에게 넘아오자, 서지희가 흠칫 놀라며 채원을 노려보았다.
“뭐, 뭐.”
“방금 제 멘탈을 칭찬해 주셨는데, 상무님의 멘탈이야말로 제가 본받아야 할 것 같더군요.”
“무슨 개소리야?”
“작년 상반기. 서 상무님께서 야심 차게 론칭하셨던 JS 뷰티의 비건 화장품 라인. 마케팅 비용으로만 300억을 쏟아부었지만, 런칭 한 달 만에 피부 트러블 논란으로 전량 리콜 사태를 맞으셨죠? 그로 인해 JS 뷰티의 영업 이익률이 마이너스 20%를 기록했는데도 상무직을 유지하고 계신 걸 보면, 그룹의 낙하산 멘탈이 제 횡령 누명 멘탈보다 훨씬 두꺼운 것 같아서요.”
채원의 또박또박한 팩트 폭력에 서지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 미친…! 네가 뭔데 내 사업을 평가질이야! 넌 횡령범 주제에!”
“횡령은 조작된 누명입니다. 조만간 검찰과 언론이 진실을 밝혀주겠죠.”
채원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서지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상무님이 낸 300억의 적자는 누명이 아니라 팩트 아닙니까? 제가 한성그룹 전략기획실에 있는 5년 동안, 저는 단 한 번도 마이너스 성적표를 낸 적이 없습니다. 핏줄이라는 온실 속에서 적자나 내는 분에게 훈계를 들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완벽한 논리와 숫자로 무장한 반격.
서명희와 서지희는 채원의 맹렬한 독설에 숨이 막힌 듯 입만 뻐끔거릴 뿐, 단 한마디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서태진 전무가 비로소 묵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말솜씨가 아주 매섭군. 한성에서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본부장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알만해.”
태진은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채원을 향해 뱀처럼 끈적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한채원 씨. 여긴 당신이 놀던 한성 같은 우물 안이 아니야. 입만 살아서 혀를 놀린다고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도진이 녀석이 당신을 방패막이 삼아 데려온 모양인데, 여자 뒤에 숨는 놈이나 재벌가에 몸을 의탁하려는 뱀 같은 여자나, 우리 할아버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뻔하지 않나?”
태진의 말에는 도진과 채원 두 사람 모두를 깔아뭉개려는 오만함이 가득했다.
그는 자신이 JS그룹의 진정한 실세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채원의 눈빛은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더욱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태진 전무님.”
“왜. 내 말에 틀린 구석이라도 있나?”
“입만 살아서 혀를 놀리는 건 제가 아니라 전무님 같은데요.”
“뭐라고?”
태진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감히 자신에게 덤벼들 줄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채원은 핸드백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제가 우물 안에서만 놀았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제 정보망은 생각보다 넓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한성건설이 진행 중인 판교 신도시 3공구 하청 비리 건 같은 거 말입니다.”
그 순간, 서태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거칠게 흔들렸다.
그건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자신만의 자금줄이었다.
채원은 그의 당황한 기색을 놓치지 않고 뱀처럼 파고들었다.
“한성건설에서 빼돌려진 리베이트 자금이 페이퍼 컴퍼니를 거쳐서 JS 화학의 차명 주식 매입에 사용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물론, 아직은 소문일 뿐이지만요.”
“너…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지껄이는 거냐!”
태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목대 위에 핏대가 시퍼렇게 섰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여자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앉으시죠, 전무님. 제가 무서운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흥분하십니까.”
채원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태진을 올려다보았다.
“전 그저 충고를 드리는 겁니다. 제게 근본이니 횡령이니 떠들 시간 있으시면, 내부 단속부터 철저히 하시라고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 ‘소문’을 완벽한 ‘팩트’로 만들어서 금융감독원에 꽂아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정적.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정적이 응접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 덤벼들었던 뱀 세 마리의 대가리를, 채원은 단 몇 마디의 팩트와 정보력으로 처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누가 감히 그녀를 몰락한 가문의 버려진 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지금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건 압도적인 포식자, 한채원 하나뿐이었다.
“크… 크흡.”
그때, 참을 수 없다는 듯 낮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침묵을 깼다.
내내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상황을 관망하던 서도진이었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실소를 흘렸다. 서명희와 서지희, 그리고 서태진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도진을 쳐다보았다.
“아, 미안합니다. 우리 아내가 너무 유능해서 저도 모르게 기뻐서 말이죠.”
도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채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채원의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다들 보셨습니까? 제가 왜 이 여자를 선택했는지.”
도진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사촌들을 차례대로 훑고 지나갔다.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짙은 조롱과, 채원에 대한 강렬한 소유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를 만큼 서늘하고 파괴적인 감정이었다.
“어디서 굴러온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질 멍청한 것들보다는, 내 등에 꽂힐 칼을 미리 알아서 쳐내 주는 뱀 같은 여자가 나한테는 훨씬 더 필요하거든요.”
도진은 태진을 똑바로 응시하며 경고했다.
“그러니 앞으로 내 아내 앞에서 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채원이 말대로, 형님의 그 알량한 자금줄이 진짜로 금감원에 넘어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태진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지만, 도진의 살기 어린 압박 앞에서는 차마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1층 서재를 지키는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서 대표님. 회장님께서 두 분을 서재로 모시라고 하십니다.”
도진은 채원의 어깨를 감쌌던 손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손을 단단하게 깍지 껴 잡았다.
“가지.”
채원은 깍지 낀 손에서 전해지는 도진의 묵직한 체온을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응접실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등 뒤에 남겨진 세 사람의 시선에는 짙은 공포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서 회장의 서재는 마치 거대한 요새 같았다.
어두운 톤의 원목과 수만 권의 장서들이 뿜어내는 위압감. 그 한가운데 놓인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 뒤에, JS그룹의 살아있는 전설 서 회장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매처럼 날카로운 안광이 채원을 꿰뚫을 듯 쏘아보았다.
“앉아라.”
서 회장의 짧은 명령에 두 사람은 책상 앞 가죽 소파에 나란히 착석했다.
“밖이 아주 소란스럽더구나. 네 고모와 사촌 형제들이 아주 혼쭐이 난 모양이던데.”
서 회장이 채원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어른들이 계신 자리에서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회장님.”
채원이 정중하게, 그러나 결코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할 짓을 왜 해. 네가 내 식구들 기를 꺾어놓은 게 자랑이냐?”
“그들이 저를 짓밟으려 했기에 방어했을 뿐입니다. JS그룹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 고작 입방아에 휘둘려 고개를 숙인다면 그게 더 회장님의 체면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 판단했습니다.”
채원의 당돌한 대답에 서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돌한 것. 500억이나 횡령하고 쫓겨난 주제에 혓바닥이 아주 길구나. 내가 너 같은 범죄자를 내 손주의 짝으로 인정할 것 같으냐?”
“횡령은 3일 안에 완벽하게 누명임을 입증하겠습니다. 제 결백이 밝혀지면, 회장님께서는 저를 손주 며느리가 아니라 JS그룹의 가장 유능한 파트너로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허, 파트너?”
“네. 도진 대표님은 무자비한 추진력을 가지셨지만, 그룹 내부의 늙은 이사들을 회유하고 정리하는 세밀함이 부족하십니다. 제가 그 역할을 하겠습니다. 대표님의 등 뒤에서 날아오는 칼은 제가 다 부러뜨리고, JS그룹의 방해가 되는 썩은 가지들은 제가 직접 치겠습니다.”
채원은 서 회장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저를 받아들이십시오. 결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서 회장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평생을 비정하고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온 인물이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아부나 떠는 재벌가 영애들보다, 이렇게 이빨을 드러내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맹수를 훨씬 더 선호했다.
“3일이라고 했지.”
서 회장이 지팡이를 바닥에 툭 치며 말했다.
“3일 안에 네 누명을 벗고 네가 말한 그 가치를 증명해 봐라. 만약 실패한다면, 도진이 녀석의 후계 구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고, 넌 JS그룹의 이름으로 내 손에 직접 매장될 것이다.”
자비 없는 경고였다. 하지만 채원에게는 완벽한 합격 통보나 다름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서재를 나와 저택의 현관을 빠져나오는 길.
차갑고 맑은 밤공기가 채원의 폐부를 시원하게 채웠다.
발렛 직원이 차를 대기시키는 동안, 도진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옆에 선 채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늘 아주 인상 깊었어.”
도진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서늘한 비아냥 대신, 진득한 흥미와 기묘한 열기가 섞여 있었다.
“서태진의 약점까지 쥐고 흔들 줄은 몰랐거든. 대체 네 머릿속에는 남의 약점이 몇 개나 들어있는 거지?”
“글쎄요. 대표님 약점도 하나쯤은 캘 수 있을지도 모르죠.”
채원이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도진은 그런 채원의 웃는 옆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저 복수심에 미친 가여운 여자인 줄만 알았다.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하고 부릴 수 있는 유용한 장기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사촌들을 짓밟고 회장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며, 도진은 처음으로 한채원이라는 여자 자체에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잔혹하다.
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은 포식자의 본성을 가진 여자.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어지겠는데.’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채원을 향해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순간적인 그의 다정한 스킨십에 채원이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하시는 겁니까?”
“계약 조건 위반은 아니잖아. 대외적인 연기의 연장선이라고 해두지.”
도진은 뻔뻔하게 미소 지으며 조수석의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타. 내일은 아주 바빠질 테니까.”
채원은 찝찝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차에 올랐다.
도진은 닫힌 차문을 손으로 짚은 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실루엣을 깊고 짙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녀를 향한 호기심이, 아주 위험한 감정의 경계선으로 천천히 한 발짝 내딛고 있음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