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신라호텔 영빈관 다이너스티 홀.
대한민국 재계를 주름잡는 VVIP들과 유력 언론사 기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이곳에서는, 오늘 한성그룹의 경사가 열리고 있었다.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최고급 샴페인 잔이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호호, 감사합니다. 우리 유라가 워낙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워서 걱정했는데, 강 서방 같은 훌륭한 짝을 만나 어미로서 시름을 덜었지 뭡니까.”
한성그룹 회장의 후처이자 현재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배정아가 특유의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하객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오늘 약혼식의 주인공인 한유라와 강민호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어머, 배 이사님도 참. 강 본부장님 정도면 한성그룹의 든든한 날개가 되고도 남죠.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려요.”
한 임원의 아내가 아부를 떨자, 한유라가 콧대를 높이며 민호의 팔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럼요. 오빠는 저한테 과분할 정도로 다정한 사람인걸요.”
“유라 네가 더 예쁘지. 오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걸.”
민호가 유라의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겉보기에는 그림처럼 완벽한 선남선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객들 사이에서는 은밀한 귓속말이 독사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근데, 원래 강 본부장 약혼녀는 첫째 딸인 한채원 본부장 아니었나?”
“쉿, 목소리 낮춰. 한채원 어제 500억 횡령 터져서 한성 본가에서 빈몸으로 쫓겨났잖아.”
“세상에, 진짜야? 어쩐지 얼굴이 안 보이더라니. 그럼 강 본부장은 한채원 버리고 바로 동생으로 갈아탄 거야?”
“갈아타다니. 한채원이 횡령범이니까 파혼당한 거지. 강 본부장 입장에서는 범죄자 집안에 들일 뻔한 거, 십년감수한 거 아니겠어?”
수군거리는 소리들은 교묘하게 배정아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그녀는 속으로 통쾌한 비웃음을 삼켰다.
‘멍청한 것들. 전부 내 계획대로 움직여주고 있군.’
한채원. 그 눈엣가시 같던 년을 완벽하게 진흙탕에 처박아 버렸다.
회장인 남편이 쓰러져 병상에 누워있는 지금, 후계 구도에서 가장 앞서가던 한채원에게 500억이라는 거대한 횡령 누명을 씌웠다. 그것도 채원이 가장 믿었던 남자, 강민호의 손을 빌려서.
배정아는 민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겉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가끔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 밤, 5년간 사귀었던 채원의 등에 칼을 꽂고 얻어낸 자리였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채원이 무슨 짓을 벌일까 봐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강 서방. 왜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 오늘 같은 좋은 날에.”
배정아가 낮게 속삭이자, 민호가 흠칫 놀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장모님. 조금 긴장해서 그런가 봅니다.”
“긴장할 거 없어. 한채원은 끝났어. 지금쯤 길바닥에서 쥐새끼처럼 떨며 울고 있겠지. 당장 내일이면 구속 영장이 떨어질 테니, 자네는 유라 옆에서 한성그룹의 실세 자리만 만끽하면 돼. 알겠나?”
“네, 장모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장내에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멈추고 사회자의 활기찬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자, 내빈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한성그룹 전략기획실 한유라 실장과, 강민호 본부장의 성스러운 약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모두 뒤쪽의 버진로드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홀의 입구 쪽 거대한 마호가니 문으로 화려한 핀 조명이 쏟아졌다.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일 준비를 마쳤다.
유라와 민호는 단상 위에 서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가장 완벽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적어도, 그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같은 시각. 호텔 입구.
도열해 있는 검은색 경호 차량들 사이로, 매끄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롤스로이스 팬텀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김 비서가 재빠르게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먼저 구두를 내딛으며 차에서 내린 것은 서도진이었다. 자로 잰 듯 완벽하게 떨어지는 톰 포드의 블랙 수트, 서늘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주변의 공기마저 얼려버릴 듯한 압도적인 포식자의 오라.
도진은 차창 너머, 아직 차 안에 앉아 있는 채원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준비됐나.”
차 안의 어둠 속에서, 채원이 천천히 도진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순간,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발렛 직원들과 로비의 손님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마셨다.
채원의 모습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도진이 공수해 온 디올의 한정판 오뜨 꾸뛰르 블랙 드레스는 그녀의 창백하고 투명한 피부를 더욱 비현실적으로 돋보이게 했다. 과감하게 파인 쇄골 라인 위로는 수십억을 호가하는 해리 윈스턴의 다이아몬드 네클리스가 눈부시게 빛났다.
단정하게 묶어 올렸던 머리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굵은 웨이브로 연출되어 그녀의 오만한 인상을 한층 더 우아하고 치명적으로 만들었다.
어젯밤 비에 젖어 처참하게 쫓겨나던 여자의 모습은 단 1퍼센트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복수의 여신 그 자체였다.
도진은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완벽하군.”
“비싼 값을 입혀주셨으니, 그 정도 밥값은 해야죠.”
채원이 무심하게 대꾸하며 도진의 팔짱을 꼈다.
“떨리나?”
도진이 묻자, 채원은 콧방귀를 뀌었다.
“설마요. 쓰레기통을 엎으러 가는데 떨릴 이유가 있나요? 오히려 피가 끓어서 주체하기 힘들 정도인데.”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도진이 채원의 손등을 자신의 반대쪽 손으로 가볍게 덮어 쥐었다. 계약의 일부였지만, 그의 크고 단단한 손에서 전해지는 묘한 온기에 채원은 아주 찰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오늘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넌 한성그룹의 버려진 딸이 아니라 대한민국 서열 1위 JS그룹 서도진의 여자다. 고개 똑바로 들고, 오만하게 굴어. 그 누구도 널 내려다보지 못하게.”
“걱정 마세요. 제 전공이니까.”
도진의 시선이 김 비서를 향했다.
“길 열어.”
“네, 대표님.”
김 비서의 신호에 맞춰 수십 명의 검은 양복을 입은 JS그룹 전속 경호팀이 호텔 로비를 장악하며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호텔 지배인이 놀라 달려왔지만, 서도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사색이 되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아무런 제지 없이 V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른 두 사람은, 곧바로 다이너스티 홀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올라갈수록 채원의 눈동자에 서린 독기는 더욱 차갑고 단단하게 응집되었다.
강민호, 한유라, 그리고 배정아.
너희들이 내게 준 절망감의 무게를, 오늘 이 자리에서 정확히 갚아주마.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홀 앞을 지키고 있던 한성그룹 측 경호원들이 도진의 무리를 발견하고 당황하며 막아섰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금은 VVIP 초청자 외에는 출입이…….”
“비켜.”
도진의 낮고 서늘한 한마디에 경호원들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김 비서와 JS 경호팀이 한성 측 인원들을 가볍게 양옆으로 밀어내며 제압했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다이너스티 홀의 거대한 마호가니 문 앞.
안에서는 사회자의 활기찬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 자, 모두 뒤쪽의 버진로드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도진이 채원과 시선을 맞췄다.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자, 파티를 시작해 볼까.”
도진이 턱짓하자, 두 명의 경호원이 거대한 홀의 양쪽 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쾅-!!
대포 소리처럼 무거운 굉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동시에 홀 안을 비추고 있던 핀 조명이 열린 문틈으로 쏟아져 내리며, 그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극적으로 비추었다.
박수를 치기 위해 양손을 올리고 있던 하객들이 일제히 굳어버렸다.
음악이 뚝 끊겼다.
장내에는 샴페인 기포가 터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완벽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저, 저게 누구야?”
“한…… 한채원?!”
누군가 경악에 차서 내뱉은 이름에, 홀 전체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단상 위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던 한유라의 표정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일그러졌다.
“뭐, 뭐야…? 언니가 왜 여기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강민호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어제 비를 맞으며 바닥에 웅크려 있던 처량한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숨이 멎을 만큼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절세의 미녀가 서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감히 눈을 맞추기조차 버거운 대한민국의 진짜 권력자, JS그룹 서도진 대표의 팔짱을 낀 채로!
“서, 서도진 대표? JS그룹 서도진이 왜 한채원이랑 같이 있는 거지?”
“말도 안 돼… 한채원은 횡령범으로 쫓겨난 거 아니었어?”
“세상에, 저 목걸이 봐. 저거 해리 윈스턴 경매에 나왔던 그 30억짜리 아니야?”
하객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거세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대한민국 재계를 뒤흔들 특종임을 직감하고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찰칵찰칵!
플래시 세례 속에서, 채원은 단상 위에 굳어 있는 민호와 유라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곁에서 보폭을 맞추는 도진의 존재감은 흡사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 사이의 길을 갈라놓았다. 아무도 감히 그들 앞을 막아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은 것은 배정아였다.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하게 달려 나와 채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당장 끌어내! 경호원들 뭐하는 거야! 당장 이 도둑년 끌어내지 못해?!”
배정아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성그룹 경호원들은 감히 서도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채원은 배정아의 발악을 보며 얼음장처럼 차갑게 웃었다.
“어머니. 딸의 전 약혼자를 동생에게 넘겨주는 훌륭한 취향을 가지신 건 알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매너까지 이렇게 저급하실 줄은 몰랐네요.”
“뭐… 뭐? 이, 이 미친년이…! 500억이나 해 먹고 쫓겨난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배정아가 손을 번쩍 치켜들며 채원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채원의 얼굴에 닿기 전, 도진의 크고 단단한 손이 허공에서 배정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악!”
배정아가 손목이 부서질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도진은 배정아의 손목을 잡은 채, 오물이라도 보는 듯한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손버릇이 아주 고약하시군요, 배정아 이사님.”
도진의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에 홀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서… 서 대표님? 이, 이거 놓으세요! 왜 대표님이 이 횡령범 년을 비호하시는 겁니까!”
배정아가 고통에 찬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도진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뿌리쳤다. 배정아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흉하게 주저앉았다.
“어머니!”
단상에 있던 유라가 기겁하며 뛰어내려 왔다. 민호 역시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채, 채원아.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네가 왜 서 대표님과 함께… 아니, 애초에 여기 올 염치가 있어? 너 때문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는데!”
민호가 어떻게든 덜떨어진 명분을 잡으려 허세를 부렸다.
그 위선적인 얼굴을 보자 채원의 뱃속에서 짙은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남자를 사랑했던 자신의 안목을 스스로 저주하고 싶을 정도였다.
채원은 민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10센티미터의 킬힐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채원의 기백에 민호가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염치? 강민호 본부장. 네가 내 앞에서 염치를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채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마이크라도 댄 것처럼 장내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내 개인 보안 토큰을 빼돌려 배정아 이사 동생의 페이퍼 컴퍼니로 자금을 이체한 다음, 내가 출장 간 사이에 모든 서류를 내 이름으로 조작한 게 누구지?”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네가 한 짓이잖아!”
민호가 사색이 되어 발뺌했다.
채원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아직도 네가 완벽하게 내 숨통을 끊었다고 착각하나 본데. 어쩌지?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호구로 보였니?”
채원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뒤에 서 있던 김 비서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민호의 가슴팍에 거칠게 찔러 넣었다.
“이게… 이게 뭡니까?”
“열어봐. 네가 내 토큰을 사용해 배정아 이사 측근들과 주고받은 IP 접속 기록과, 자금 세탁 경로가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으니까.”
민호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서류를 확인한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런 완벽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이건 조작이야! 네가 살려고 억지를 부리는 거라고!”
유라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언니! 어디서 감히 오빠한테 누명을 씌워! 쫓겨났으면 쥐 죽은 듯이 숨어 살 것이지, 어디서 남의 약혼식에 쳐들어와서 행패야! 경호원! 당장 이 여자 안 끌어내고 뭐 해!!”
그 순간이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서도진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장내에는 숨 막히는 압박감이 짓눌렀다.
도진은 유라를 지나쳐,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배정아와 새파랗게 질린 강민호를 차례대로 응시했다.
“상황 파악이 아직 안 되는 모양이군. 내 입으로 직접 설명을 해줘야 알아듣겠습니까?”
도진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벼려진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한채원 씨의 횡령 혐의는 이미 우리 JS그룹 감사팀과 최고 법무법인에서 사건을 전면 재조사 중입니다. 방금 강민호 씨가 쥐고 있는 서류는 그 첫 번째 결과물이고. 조만간 검찰의 압수수색이 한성그룹 본사로 향하게 될 겁니다. 진범을 잡기 위해서 말이죠.”
“뭐… 뭐라고요? JS그룹이 왜 우리 한성그룹의 내부 일에 개입을 합니까! 이건 명백한 경영권 침해입니다!”
배정아가 악을 썼다.
재계 1위 JS그룹이 작정하고 법무팀을 움직인다면, 자신들이 급조한 조작 증거 따위는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될 것이 뻔했다.
도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채원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밀착된 두 사람의 거리에 하객들의 숨소리조차 멈췄다.
“개입할 명분이야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도진의 차가운 시선이 홀 안을 가득 메운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를 향했다.
“다들 잘 들으십시오.”
그의 한마디에 기자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녹음기를 바짝 들이댔다.
도진이 채원의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폭탄 같은 선언을 내뱉었다.
“여기 있는 한채원 씨는, 나와 평생을 함께할 유일한 반려자이자, JS그룹의 안주인이 될 사람입니다.”
“……!!”
“헉……!”
홀 안 곳곳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라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민호는 아예 넋이 나간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 서 대표님… 그, 그게 무슨 농담을… 이 여자는 방금 파혼당한 범죄자……!”
“입 조심해.”
도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섬뜩한 맹수의 것으로 돌변했다. 민호의 숨통을 당장이라도 끊어버릴 듯한 살기였다.
“내 아내 될 사람에게 한 번만 더 그딴 쓰레기 같은 호칭을 붙인다면, 한성그룹이고 나발이고 네놈들 일가를 오늘 밤 안으로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압도적인 권력자의 경고.
그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도진의 서슬 퍼런 분노 앞에서 배정아도, 강민호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채원은 경악으로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우아하게 끌어올렸다.
지금 이 순간, 이 홀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은 그녀였다.
채원은 도진의 품에 안긴 채, 유라를 향해 다정하게 속삭였다.
“약혼 축하해, 유라야. 내가 쓰다 버린 쓰레기, 평생 잘 재활용하면서 살아. 난 더 높은 곳으로 갈 테니까.”
“너… 이 악마 같은 년…!”
유라가 피눈물을 흘리며 저주를 퍼부었지만, 채원은 더 이상 그들을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가시죠, 여보. 더 이상 이 탁한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네요.”
여보.
채원의 도발적인 호칭에 도진의 눈동자에 짙은 유열이 스쳤다.
“그러지. 네가 원한다면.”
도진은 채원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돌아섰다.
두 사람이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지며 그들의 완벽한 뒷모습을 담아냈다.
단상 위에 남겨진 배정아 일가는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들이 준비한 완벽한 축제는, 대한민국을 뒤흔들 ‘JS그룹 후계자의 결혼 발표’라는 메가톤급 뉴스의 들러리로 전락해 버렸다.
호텔을 빠져나와 다시 롤스로이스에 올라탄 채원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드레날린이 가라앉으며 미세한 떨림이 밀려왔다. 통쾌했다. 지난 5년간 뼈 빠지게 헌신했던 자신을 짓밟은 자들에게 선사한 완벽한 굴욕이었다.
도진이 시가를 꺼내 물며 옆자리의 채원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첫 번째 사냥치고는 아주 훌륭했어. 놈들 표정이 볼만하더군.”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채원이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호텔을 응시하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제가 가진 걸 뺏었지만, 전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겁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다.”
도진은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채원의 독기 어린 눈동자를 깊게 응시했다.
자신이 주워 온 이 작은 사냥개가 얼마나 더 포악하게 적들을 물어뜯을지, 벌써부터 다음 판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마음껏 날뛰어봐. 뒷수습은 내가 할 테니.”
위험한 동맹의 첫 번째 신호탄이, 화려한 서울의 밤하늘 위로 완벽하게 쏘아 올려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