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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화

작가: 유리구슬
last update 게시일: 2026-06-14 10:58:48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

한강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최고급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열렸다.

“들어와.”

서도진의 짧은 축객령 같은 허락에, 한채원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수백 평에 달하는 실내는 주인의 성정을 닮아 차갑고 건조했다. 무채색 위주의 최고급 가구들, 먼지 한 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대리석 바닥, 그리고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공기까지.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갤러리나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가까웠다.

도진은 재킷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거실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채원을 향해 돌아섰다.

“짐은 그게 다인가?”

채원의 손에 들린 것은 기내용 사이즈의 작은 블랙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네. 한성 본가에서 쫓겨날 때 입고 있던 옷과 핸드백, 그리고 김 비서님이 따로 챙겨주신 기초적인 물품 몇 개가 전부입니다.”

“대한민국 재계 10위권 안에 드는 한성그룹의 장녀 치고는 처량한 살림살이군.”

“이제 장녀가 아니라 횡령범으로 호적에서 파이기 직전이니까요. 쓸데없는 짐이 없는 편이 움직이기 가볍고 좋습니다.”

채원의 무덤덤한 대답에 도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이 여자는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도진은 걸음을 옮겨 거실 한쪽에 마련된 바(Bar)로 다가갔다. 크리스탈 글라스에 헤네시 한 잔을 따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

채원이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두고 소파에 앉자, 도진이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꼬았다.

그는 서늘한 흑요석 같은 눈동자로 채원을 응시하며, 방금 전 본가에서 보았던 흥미로운 기색을 싹 지운 채 철저한 비즈니스맨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본가에서 할아버지와 내 사촌들의 기를 꺾어놓은 건 칭찬해 주지. 덕분에 내 수고를 덜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밖에서의 일이고.”

도진이 글라스를 가볍게 흔들었다. 얼음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울렸다.

“이 집 안에서는 철저하게 룰을 지켜줘야겠어. 난 내 프라이버시가 침해받는 걸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다.”

“말씀하시죠.”

“첫째. 네 방은 2층 끝에 있는 게스트룸이다. 1층 메인 침실과 내 서재는 절대 출입 금지. 청소는 주 2회 가사도우미가 올 테니 넌 네 방에만 신경 쓰면 돼.”

채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요구였다.

“둘째. 식사는 각자 해결한다. 계약 부부 행세를 위해 공식적인 자리에 동행할 때를 제외하고, 집 안에서 마주치더라도 쓸데없는 사담이나 간섭은 금지야. 난 밖에서 피곤하게 구는 것만으로도 족해. 집 안에서까지 감정 노동을 할 생각은 없어.”

“동의합니다.”

“셋째.”

도진이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채원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가장 중요한 룰이지. 선(線) 넘지 마.”

“선이라면…….”

“네가 밖에서 내 아내 행세를 하든, 한성그룹을 잡아먹기 위해 내 이름을 팔고 다니든 그건 마음대로 해. 내가 허락한 권력이니까. 하지만 이 집 안에서, 둘만 있을 때까지 내 여자 행세를 하거나 쓸데없는 감정을 품는 짓은 용납하지 않아.”

도진의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걸렸다.

“가끔 계약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착각에 빠지는 여자들이 있거든. 내가 베푸는 호의나 자금 지원을, 자신을 향한 사적인 감정으로 오해하는 부류들. 넌 머리가 좋으니 그런 멍청한 짓은 안 하리라 믿어.”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경고였다.

자신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으니, 너 따위가 감히 나에게 여자로서 다가오려 하지 말라는 명백한 선 긋기.

보통의 여자였다면 그 차가운 태도에 상처를 받거나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채원의 표정은 처음 펜트하우스에 들어섰을 때처럼 단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도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뒤로 기대앉았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지?”

“저 역시 대표님과 같은 생각이거든요.”

채원이 도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뱉어냈다.

“저에게 지금 필요한 건 저를 이 진흙탕에서 꺼내 줄 강력한 스폰서이자 동업자일 뿐입니다. 저 역시 복수를 완수하기 전까지 남녀의 감정 놀음 따위에 낭비할 시간도, 여력도 없습니다.”

“…….”

“제 목표는 한성그룹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배정아 이사와 강민호, 한유라를 제 발밑에 꿇리는 것뿐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서도진 대표님이라는 패는 아주 유용하죠. 그러니 걱정 마세요. 저 역시 대표님을 ‘남자’로 볼 일은 추호도 없을 테니까요.”

건조하고 단호한 선언.

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먼저 선을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칼같이 동의하며 자신을 철저하게 ‘도구’ 취급하는 여자의 태도는 기분이 묘했다.

“……그거 참 안심되는 대답이군.”

도진이 굳은 표정으로 글라스에 남은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3일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께 네 누명을 벗고 가치를 증명하겠다고 한 시간.”

“알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움직일 겁니다.”

“필요한 인력이나 자금이 있다면 김 비서에게 청구해. 넌 내 파트너니까, 파트너가 진흙탕에 구르는 걸 구경만 하고 있진 않을 테니.”

“감사합니다만,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한성에서 놀고먹은 건 아니니까요.”

채원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룰은 숙지한 것으로 하고, 전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피곤하네요.”

채원이 캐리어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을, 도진은 서늘한 눈으로 오래도록 응시했다.

자신이 그은 선 안으로 완벽하게 들어오지도,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여자.

분명 통제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제 마음대로 휘둘리지 않는 묘한 불쾌감이 가슴 한구석을 맴돌았다.

“……건방지긴.”

도진은 텅 빈 글라스를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새벽 2시.

펜트하우스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2층 게스트룸에 짐을 푼 채원은 침대에 눕지도 못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노트북과 김 비서가 임시로 구해다 준 보안 패드가 놓여 있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숫자들과 자금 흐름도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강민호…….”

채원은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어제 약혼식장에서 강민호에게 던진 서류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서류만으로는 500억이라는 거대한 횡령 누명을 완벽하게 뒤집기엔 부족했다.

배정아는 교활한 여자다. 분명 꼬리를 자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강민호라는 쓸모없는 장기말을 버려서라도 자신이 살길을 찾겠지.

채원의 목표는 강민호 하나가 아니었다. 강민호의 숨통을 조여, 그가 살기 위해 배정아의 지시였음을 스스로 불게 만들어야 했다.

‘한성건설 페이퍼 컴퍼니의 실제 소유주 명의. 그걸 찾아야 해.’

채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미친 듯이 날아다녔다.

그녀가 한성그룹 전략기획실 본부장으로 재직하며 몰래 구축해 두었던 이면 장부와 해킹 파일들을 하나씩 대조하는 작업.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당장 내일. 아니, 오늘 아침이 밝는 대로 검찰의 소환 조사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 전에 완벽한 반격의 카드를 손에 쥐어야만 서도진의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었다.

“하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면의 폴더 하나가 암호를 해제하고 열리자, 채원은 그제야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 HK 건설 리베이트 차명 계좌 내역 ]

찾았다. 배정아의 숨통을 끊을 첫 번째 동아줄.

이것만 있으면 내일 아침 당장 판을 뒤집을 수 있다.

긴장이 풀리자 끔찍한 피로와 땀방울이 온몸을 덮쳤다. 어제 비를 맞고 쫓겨난 후, 호텔에서 샤워를 하긴 했지만 약혼식장을 뒤집어엎고 본가까지 다녀오느라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목을 돌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그녀는 캐리어를 열었지만, 아차 싶었다.

급하게 쫓겨나느라 제대로 된 세면도구조차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김 비서가 사다 준 종이가방에는 기초 화장품만 있을 뿐, 바디워시나 샴푸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게스트룸 화장실인데 뭐라도 비치되어 있겠지.’

채원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욕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도진이 평소에 손님을 들이지 않는 성격 탓인지, 아니면 가사도우미가 비품을 채워두지 않은 것인지 비누조차 보이지 않았다.

채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금 이 찝찝한 상태로는 도저히 침대에 누울 수 없었다.

‘……1층 메인 욕실을 쓰는 건 규칙 위반이라고 했지.’

채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1층은 불이 다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 도진은 이미 잠들었을 시간이다.

‘공용 화장실 정도는 써도 괜찮겠지. 몰래 씻고 오면 모를 거야.’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히 거실 안쪽에 작은 손님용 공용 욕실이 있었다.

그곳에는 다행히 샤워 용품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전부 검은색 무광 용기에 담긴 남성용 제품들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채원은 샤워기를 틀고 따뜻한 물 아래로 몸을 맡겼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독기를 조금이나마 씻어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선반에 놓인 바디워시를 펌핑했다.

묵직하고 깊은 우디 향이 섞인 톰 포드의 타바코 바닐라 향이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누가 봐도 서도진, 그 남자의 체향과 똑같은 향기였다.

‘독한 남자. 집 안 비품도 전부 자기 취향대로 맞춰 놨네.’

채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씻어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채원은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어 말렸다.

옷을 가져오지 않아 욕실에 비치되어 있던 도톰한 흰색 샤워 가운을 걸쳤다. 도진의 사이즈에 맞춰진 가운이라 그녀에게는 품이 너무 커서, 어깨선이 흘러내리고 소매가 손등을 덮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목이 마르네. 물 한 잔만 마시고 올라가자.’

채원은 젖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거실에 연결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은 희미한 무드등만 켜져 있어 어스름했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어둠 속에서 불쑥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채원은 놀라 어깨를 흠칫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일랜드 식탁 끝.

어둠에 잠겨 있어 미처 보지 못했던 그곳에, 서도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 편안한 다크 네이비 실크 파자마 차림의 그는, 한 손에 위스키 잔을 든 채 뚫어지게 채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채원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도진의 시선이 채원의 얼굴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카락.

열기로 인해 평소의 창백함 대신 옅은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

무엇보다, 자신의 덩치에 한참 못 미쳐 헐렁하게 흘러내린 샤워 가운의 V넥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하얀 쇄골과 깊은 가슴골.

도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방금 내가 묻지 않았나. 내 허락 없이 1층으로 내려온 이유를.”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더 낮고 억눌려 있었다.

“게스트룸 욕실에 세면도구가 없어서 공용 욕실을 썼습니다. 잠시 물을 마시러 나온 것뿐이고요. 룰을 어길 의도는 없었습니다.”

“거짓말.”

도진이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큰 키가 다가올수록 주방의 공기가 순식간에 압도적인 위압감으로 짓눌렸다.

“변명치고는 꽤나 고전적이군.”

“무슨…….”

도진이 채원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우뚝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채 한 뼘도 되지 않았다. 도진의 시선이 채원의 목덜미에 닿았다.

순간, 도진의 코끝으로 아주 익숙하고도 낯선 향기가 확 끼쳐왔다.

묵직한 타바코 바닐라의 향.

매일 아침 자신이 쓰는 그 독한 바디워시 향기가, 눈앞의 이 여자, 한채원의 살냄새와 뒤섞여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관능적이고 아찔한 체향으로 변해 있었다.

도진의 호흡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너.”

도진이 손을 뻗어, 채원의 흘러내린 가운 깃을 거칠게 낚아챘다.

“아윽……!”

채원이 중심을 잃고 도진의 단단한 가슴팍으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도진은 채원의 허리를 한 손으로 으스러지게 감아쥔 채, 그녀를 아일랜드 식탁 쪽으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차가운 대리석 상판에 허리가 닿자 채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도진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룰을 어기지 말라고 한 건 대표님 아니었나요!”

“룰?”

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는 명백한 이질적인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녀 감정 놀음 따위 할 여력은 없다더니. 새벽 2시에 내 가운을 뒤집어쓰고, 내 바디워시 향기를 풀풀 풍기면서 내 앞에 나타난 건.”

도진의 얼굴이 채원의 귓가로 아슬아슬하게 다가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채원의 젖은 머리카락을 스쳤다.

“날 도발하려는 수작이 아닌가?”

“착각하지 마세요. 비품이 없어서 쓴 것뿐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대표님이야말로 지금 억지 트집을 잡고 선을 넘고 계십니다.”

채원은 지지 않고 똑바로 도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도망치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그 오만한 눈동자.

그 서늘한 눈빛과, 반대로 뜨겁게 젖어있는 몸의 괴리감이 도진의 이성을 미친 듯이 자극하기 시작했다.

분명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그저 한성그룹을 무너뜨리기 위한 완벽한 체스 말일 뿐이라고.

자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흔해 빠진 육체적 유혹 따위에 흔들릴 남자가 아니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품에 갇힌 채원의 몸에서 풍기는 그 지독한 체향과, 젖은 맨살의 감촉이 그의 말초신경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미쳤군, 서도진.’

도진은 스스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채원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이대로 짓눌러버리면 이 알 수 없는 갈증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채원은 도진의 팔에 갇힌 채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도진의 눈빛이 방금 전의 차가운 비즈니스 파트너의 것이 아님을, 그녀 역시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위험하다.

이 남자는 지금 짐승처럼 날이 서 있다.

“……이거 놓으세요, 서도진 대표님.”

채원이 낮게 경고하며 도진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도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채원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식탁 위로 결박하듯 짓눌렀다.

“네가 먼저 내 영역을 침범했어.”

도진의 시선이 채원의 파르르 떨리는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내 냄새를 묻히고, 내 공간을 더럽히고, 내 이성을 시험하는 건 너야.”

“전 그런 적……!”

“입 다물어. 변명은 듣기 싫으니까.”

도진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코끝이 스칠 듯 가까워졌다.

채원은 숨을 흡 들이마시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의 짙은 위스키 향과 체온이 온몸을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아득한 거리.

도진은 채원의 뺨에 거의 입술을 댄 채로 멈춰 섰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채원의 피부 위로 뜨겁게 흩어졌다.

머릿속에서는 당장이라도 저 건방진 입술을 짓이기고 취하라는 본능이 날뛰고 있었지만, 이성의 끈이 간신히 그를 벼랑 끝에서 잡아채고 있었다.

여기서 선을 넘으면,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여자에게 휘둘리게 된다.

도진의 턱관절에 핏대가 섰다.

그는 이를 악물며 결박했던 채원의 손목을 거칠게 놔버렸다.

“하아…….”

채원이 억눌렸던 숨을 몰아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도진은 한 발짝 떨어져서,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채원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여전히 수습하지 못한 지독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주제 파악해.”

도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일부터 게스트룸 욕실에 비품 채워놓으라고 지시할 테니, 두 번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알짱거리지 마. 한 번만 더 이따위 얄팍한 수작을 부렸다간, 쫓겨나는 건 한성 본가가 아니라 이 집 밖이 될 테니까.”

독설을 쏟아낸 도진은 더 이상 채원의 대답을 듣지 않고 뒤돌아 1층의 메인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히며 거실은 다시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홀로 주방에 남겨진 채원은 식탁을 짚은 채 거칠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방금 전 자신을 짓누르던 도진의 힘과, 자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던 그 짐승 같은 눈빛.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히 수컷으로서의 포식욕이었다.

채원은 자신의 손목에 선명하게 남은 도진의 붉은 손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미친 인간…….”

자신이 먼저 선을 그어놓고, 정작 이성을 잃고 흔들린 것은 그 자신이라는 걸 도진은 알고나 있을까.

채원은 젖은 가운을 단단히 여미며 차가운 생수를 들이켰다.

‘신경 쓰지 마. 저 남자가 어떻게 나오든, 내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야.’

채원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당장 내일, 한성그룹을 향해 쏠 칼날을 다듬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내내, 자신을 짓눌렀던 도진의 묵직한 체온과 짙은 숨결의 잔상이 피부에 들러붙은 듯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절대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완벽한 계산에, 미세하지만 치명적인 균열이 가기 시작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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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2화. 썩은 미끼를 문 쥐새끼들(2) 같은 시각. 한성 어패럴 본사, 수석 디자이너실. 블라인드가 굳게 쳐진 어두운 사무실 안. 채원은 모니터의 푸른 불빛만을 의지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서늘하고 창백한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고요할 뿐이었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렸다. “팀장님. 저 오 대리입니다.” “들어와.” 채원의 건조한 목소리에 오 대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10 화

    의식은 깊은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듯 돌아왔다.코끝을 스치는 옅은 소독약 냄새. 규칙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산소 발생기의 백색소음.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지독한 근육통.한채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다 이내 선명해졌다. 고급스러운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천장. 그저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거대한 VVIP 병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채원은 마른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따가워 밭은기침을 내뱉었다.“콜록, 켁……!”그 작은 소리에, 창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9 화

    상황은 불과 3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JS그룹 본사 120층, 대회의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내년도 핵심 전략 사업에 대한 임원진의 브리핑이 이어지고 있었다. 단상에 선 기획조정실장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거대한 마호가니 테이블 상석에 앉은 서도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스크린의 수치들을 해체하듯 뜯어보고 있었다.“그래서, 리스크 대비 수익률이 고작 4퍼센트라는 겁니까? 그딴 쓰레기 같은 기획안을 들고 내 시간을 뺏으러 온 용기는 가상하군.”도진의 건조한 독설이 회의실을 얼어붙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지이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8 화

    다음 날 아침. 간밤의 폭풍 같았던 텐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다시 서늘하고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한채원은 완벽하게 세팅된 블랙 수트 차림으로 1층 거실로 내려왔다. 다이닝 테이블에는 서도진이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젯밤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남자의 흔적은 단 1퍼센트도 남아있지 않았다.“나갑니까.”채원이 무심하게 묻자, 도진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오전 10시에 JS 본사에서 임원 회의가 있어. 당신은?”“한성건설 재무팀장이었던 박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6 화

    평창동을 오르는 산길. 양옆으로 늘어선 수십 년 된 소나무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좌석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어제는 꽤 볼만했어.”침묵을 깬 것은 서도진이었다. 그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신라호텔을 발칵 뒤집어놓고도 넌 아주 평온하게 잠들더군. 벼락 맞은 강민호와 한유라의 표정이 아직도 아른거리는데 말이야.”“쓰레기들을 분리수거장에 처넣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흥분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저 당연한 수순이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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