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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

Auteur: 유리구슬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6-24 15:40:37

제7화. 악마와의 거래조건(1)

오전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펜트하우스의 다이닝룸.

하지만 한채원의 시선은 창밖의 풍경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놓인 세 장짜리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 혼 인 계 약 서 ]

가장 상단에 적힌 다섯 글자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망막을 찔렀다.

채원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최고급 특수 용지의 사각거리는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길바닥에 버려진 빈털터리였던 자신이, 지금은 대한민국 재계 1위 JS그룹 후계자의 아내 자리를 제안받고 있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서도 채원의 머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윽-.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맞은편에 앉은 서도진은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채, 여유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

채원의 시선이 서류의 첫 번째 페이지, 제1조 항목에서 멈췄다.

“제1조. 본 계약의 유효 기간은 서명일로부터 정확히 1년으로 한다. 1년 후, 양측은 합의 이혼 절차를 밟으며, 갑(서도진)은 을(한채원)에게 위자료 명목으로 JS 건설이 보유한 강남의 상업용 빌딩 세 채와 현금 100억 원을 지급한다.”

채원이 건조한 목소리로 항목을 소리 내어 읽자, 도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위자료치고는 나쁘지 않은 조건일 텐데. 네가 한성에서 쫓겨나면서 잃어버린 자산을 보전하고도 남을 금액이야. 어때, 마음에 드나?”

“돈은 필요 없습니다.”

채원의 단호한 대답에 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돈이 필요 없다고? 어제 빈몸으로 쫓겨난 여자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 목표는 한성그룹을 되찾는 겁니다. 위자료 몇 푼 쥐고 떨어져서 편하게 먹고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당신 차 앞을 가로막지도 않았습니다.”

채원은 서류의 첫 장을 과감하게 넘겨버렸다. 위자료 항목 따위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확인해야 할 것은, 이 계약이 자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보호하고 또 옭아맬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시선이 두 번째 페이지의 핵심 조항들로 향했다.

“제3조. 갑과 을은 철저한 쇼윈도 부부로서, 대외적으로는 서 회장과 대중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잉꼬부부의 역할을 수행한다. 단, 대외적인 일정이 없을 시 철저히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며 어떠한 간섭이나 터치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항목이지.”

도진이 테이블 위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깍지를 꼈다.

“난 내 구역에 누군가 함부로 선을 넘고 들어오는 걸 극도로 혐오해. 넌 내 아내라는 타이틀을 달고 공식 석상에서 완벽하게 웃어주기만 하면 돼. 내 개인적인 스케줄, 만나는 사람, 내 사적인 공간에 대해서는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마. 그게 내 첫 번째 조건이야.”

“동의합니다. 저 역시 제 사적인 영역에 당신이 개입하는 건 사양이니까요. 사생활 터치 금지. 완벽하게 지켜드리죠.”

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항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곧,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4조…….”

채원의 입술이 멈칫하자, 도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으며 직접 조항을 읊었다.

“갑과 을은 본 계약 기간 동안 상대방에게 어떠한 사적 감정도 품지 않으며,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네가 서명하기 전에 가장 명심해야 할 내 두 번째 조건이야. 절대, 내게 사랑에 빠지지 말 것.”

도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뼈가 박혀 있었다.

채원은 황당하다는 듯 서류에서 눈을 떼고 도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 완벽한 피지컬, 그리고 대한민국 전체를 쥐고 흔드는 엄청난 재력.

그가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서에까지 이런 유치한 조항을 명시해 놓다니.

“서 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자의식 과잉 아니신가요?”

채원의 차가운 비아냥에 도진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오히려 어깨를 으쓱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방어책이라고 해두지. 비즈니스로 만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금만 친절을 베풀거나 다정하게 굴면 꼭 선을 넘고 착각하는 여자들이 많았거든. 자신과 나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믿어버리는 부류들 말이야.”

도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난 그런 귀찮은 감정놀음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내 아내 자리에 앉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널 떠받들 거고 넌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겠지. 그 달콤함에 취해 진짜 내 여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야.”

“걱정 마시죠.”

채원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볼펜을 집어 들었다.

“저는 지금 막, 가장 믿었던 남자에게 가장 더러운 방식으로 배신을 당하고 온 참입니다. 사랑? 운명? 그런 쓰레기 같은 감정에 알레르기가 생겼거든요.”

“다행이군.”

“오히려 제가 대표님께 똑같은 경고를 돌려드리고 싶네요. 1년 동안 저와 완벽한 부부 연기를 하시다 보면, 저의 유능함과 매력에 대표님이 먼저 빠지실지도 모르니까요.”

채원의 도발에 도진의 눈매가 흥미롭게 가늘어졌다.

“내가? 너한테?”

“네. 그러니까 대표님이나 조심하세요. 저한테 반해서 계약 기간 끝나고도 질척거리시면 곤란하니까요.”

“하, 이거 참.”

도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처량한 몰골로 자신의 차 앞을 막아섰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당돌하고 오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거침없는 태도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지금껏 도진의 앞에서 이렇게 눈을 똑바로 치뜨고 받아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좋아. 그 엄청난 자신감, 어디 한번 지켜보도록 하지. 계약 조건에 이의가 없다면 그만 사인해.”

도진이 만년필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채원은 펜을 잡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의 마지막 빈 공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제 조건은 어디 있습니까?”

“조건?”

“네. 사생활 터치 금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 전부 대표님의 조건들뿐이잖아요. 이 계약서에는 가장 중요한 ‘제 조건’이 빠져 있습니다.”

도진이 턱을 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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