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판결장으로 향하는 내내 스틸의 마음은 여유로웠다.
자신 하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며 주변을 호위하는 기사들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대공의 친절에 기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지니, 너도 고생 많았어.”
스틸은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지니를 다정하게 부축했다. 어느새 훌쩍 자라난 키 덕분에 이제는 지니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여유롭게 내려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 우리 주인님. 내가 아주 정성껏 다듬어줬는데······ 느껴져?”
지니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스틸의 턱선을 스르륵 훑더니, 이내 그의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한층 단단해진 가슴팍을 노골적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만족스러운 탐욕과 장난기가 일렁였다.
“지니. 너의 그 기묘한 능력은 아주 높이 평가해. 하지만 남들이 보고 있으니 스킨십은 조금만······.”
스틸이 곤혹스러운 듯 문장을 흐리자, 지니가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귀밑에 뜨거운 숨결을 내뿜었다.
“지금도 내가 살짝살짝 힘을 보태고 있는걸? 뼈는 더 튼튼해지고, 근육도 늘어나라고.”
스틸은 짐짓 헛기침을 내뱉었다. 지니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정전기가 이는 듯 살갗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뭐? 나는 더 멋져지지 않아도 된다니까? 이 정도만 해도 아주 충분해!”
지니의 건강이 염려되어 저도 모르게 크게 말하자, 옆에서 동행하던 기사들은 참 가지가지 한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사실 기사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제국 천하의 망나니이자 못난이 범법자인 자가 고위 귀족이라는 신분을 핑계로 어지간히 깨가 쏟아지게 여인과 붙어 다니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하지만 '내 엘프는 내가 지킨다'는 마인드로 무장한 스틸은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지니가 무너지지 않도록 허리를 온전히 감싸 안은 채 기사들의 걸음에 맞춰 나아갔다.
건물 밖으로 나와 아카데미의 또 다른 상급 건물로 향하는 동안에도 귀족 학생들의 수많은 시선이 쏠렸다. 여전히 주변 분위기는 서늘했고, 스틸을 향한 험담과 비아냥이 끊이지 않았다. 지니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스틸의 품에 더 깊이 기대어왔다.
“쳇, 우리 주인님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데.”
“지니, 세상 모든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밝혀지는 법이야.”스틸의 담담한 말에 지니는 이내 표정을 밝게 피우며 상큼하게 윙크를 건넸.
“우리 주인님, 나이는 어린데 꼭 세상 다 산 현자 같네?”
스틸은 죄가 없는 자의 태연함으로 앞만 보고 당당히 걸었다. 그때 지니가 가만히 손을 모으더니 옅은 황금빛 연기를 두 손 위에 피워 올렸다. 그리고 그 아지랑이 같은 연기를 스틸의 몸 안으로 깊숙이 흡수시켰다.
잠시 뒤, 지니는 식은땀을 방울방울 흘리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어휴······ 오늘은 이게 내 최선이야.”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냥······ 얼굴을 좀 더 멋지게 만들었어. 이제 곧 사람들 앞에 나설 거잖아?”스틸은 내심 무심한 척하다가도 은근히 신경이 쓰여, 옆에서 걷고 있는 기사에게 한마디 툭 건넸다.
“저기······ 잠시 검 좀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대공 각하, 검을 달라니요!”깜짝 놀란 기사는 움찔하며 경계 태세를 취했고, 순식간에 살벌한 정적이 감돌며 주변의 기사들까지 일제히 칼자루를 잡고 스틸을 향해 나섰다. 스틸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이며, 해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손을 저어 보였다.
“혹시 얼굴에 뭐가 묻었나 검 날에 비춰보려는 것뿐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막상 내뱉고 보니 스스로도 너무 민망하여 스틸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기사들은 세상에 이런 미친 소리가 다 있냐는 눈빛으로 기가 차 했다. 그때 한 기사가 찌푸린 얼굴로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손거울 하나를 내밀었다.
“저······ 대공 각하. 이거라도 쓰시겠습니까?”
“거울을 소지하고 계셨군요. 감사합니다.”'저 친구도 외모 관리를 하나 보네'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스틸은 거울 속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어디 보자, 얼마나 변했나. 그런데······.
“음, 전보다 훨씬 나아졌군.”
스틸의 지극히 만족스러운 나지막한 한마디에 기사들 사이에서 일제히 피식하며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살벌한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니는 배시시 웃으며 스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주인님, 내 눈에는 처음부터 근사했어.”
스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니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찌 이리도 기특하고 충실한 엘프가 다 있을까.
“외모 다듬는 건 이제 됐어. 그보다 내 마력을 너에게 나눠주는 방법이나 알려줘.”
지니는 살다 살다 이런 희한한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내 마력을 못 뽑아 먹어서 안달인데, 주인님은 참 희한해. 뭐······ 나를 많이 예뻐해 주면 돼. 뽀뽀도 해주고, 더한 것도 해주면 좋지.”
“······뭐?”순간 스틸은 뇌가 정지해 버린 듯 그 어떤 질문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지니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요망해도 보통 요망한 엘프가 아니었다.
*** “레투카 제국력 125년, 제10회 레투카 아카데미 상벌위원회를 지금부터 개회합니다.”스틸이 발을 들인 곳은 웅장하고 넓은 강당이었다. 그는 기운이 빠져 비틀거리는 지니가 안쓰러워 망설임 없이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안아 들고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다.
품에 안긴 지니를 가만히 내려다보자 여러 의미로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그녀의 무게가 너무나 가벼워 흠칫했고, 쌔액거리며 내쉬는 고른 숨소리가 인간 여인의 나약함과 꼭 닮아 있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심판을 받는 험악한 상황보다 제 품에 안겨 힘겨워하는 지니가 훨씬 신경 쓰였다. 현재 자신의 외모도 '정상인'에 가까워지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지만, 어찌 됐든 힘겨운 그녀에게 무리하게 힘을 쓰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었다.
스틸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지니를 걱정하던 그때,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단상 위에는 교수진으로 보이는 자들 10명이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배심원 신분의 학생 20여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지간히도 볼거리가 없었는지 수백 명의 학생들이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묘한 위화감은 대체 뭘까.
순간, 강당 맨 뒤쪽 커튼 사이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희미한 안개 너머로, 스틸의 눈에 한 사내의 형상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사내. 황금빛 망토를 두르고 투명하게 실루엣을 반짝이는 자.
‘네놈도 왔구나? 망할 아쳐.’
스틸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그곳을 빤히 응시하며, 입꼬리를 올려 차갑고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오스카와 라이엔은 인간화한 스펙터와 그 주변의 군대만 놀라 시선으로 훑었다.“대단합니다. 스틸 대공. 안 그래도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데 참모가 또 계셨군요.”“저 수많은 군세가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는 걸 보니 지휘 능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아요.”지니는 스틸의 옆구리를 가볍게 찌르며 손가락으로 먼 해안선을 가리켰다.“주인님, 저쪽이 좋겠어. 파도가 부드럽게 밀려오는 곳이니 뭔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지니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농염한 빛을 띠었다. 스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붉은 마력이 그의 손바닥에서 피어올랐다.화염이 공기를 가르며 타오르자 오스카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렸다.“오스카 대공,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내가 여기에 주변을 탐지할 빛을 발하는 마도구가 되는 건물을 선물로 주겠습니다.”스틸의 목소리엔 단호함이 묻어났다.오스카는 라이엔과 시선을 마주하더니 바로 이해를 못 하고 계속 눈만 깜빡거렸다.“음, 그럼······.”“그게 뭔지 몰라도··· 전하께서 원하시는 건 뭘까요?”스틸은 망설임 없이 오스카와 라이엔을 향해 즉답을 건넸다.“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가능한 마도구 제조 기술과 숙련 기술자들을 한 달간 지원해 주시오.”오스카의 눈썹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의 뒤에 선 참모진 사이에서 낮은 탄식과 함께 조롱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뭔 저런 파렴치범이 있나 하는 뉘앙스였다.몇 달간 구축한 천리장성의 노력이 헛되진 않는 법.“&mid
리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자신이 제대로 역할을 못 해 괜히 대공끼리 사이만 안 좋아지면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죄인이 되는 셈이었다.“스틸 대공은 지혜로우니 잘해 나가시겠지?”이건 간절한 바람이자 스틸에 대한 신뢰였다.“게다가 조력자가 생겨 별 탈 없이 가셨을 거예요. 이번에 참모가 생기셨어요. 예법도 대단하고 마력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 같았어요.”이건 금시초문이었다. 참모? 어느 귀족이 스틸에게 손을 내민 건가.“누구?”“일단 잘 모르겠지만 훤칠한 보라색 머리 남성분과 붉은 머리 아름다운 여인이었어요.”리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침대에 누워 시에라의 마사지를 받으며 한숨을 흘렸다.그때 레나가 급히 리노에게 찾아와 주변부터 두리번거렸다.“레나, 무슨 일이야?”리노의 물음에 그녀의 눈엔 긴장감이 서려 흔들리고 있었다.“소식지 기자래요. 마지션 교수님이 돌아가신 것에 관해 물어본다고 왔어요.”그때 잠시 리노는 마른침을 삼켰다.“뭐? 돌아가셨어?”그의 목소리는 잠긴 듯 낮았다. 눈동자가 어둠에 잠겨 가쁜 숨만 내쉬었다.심장이 거칠게 뛰며 귓가를 울려 자신의 맥박 소리만 방안을 가득 채운 것만 같았다.***밤이 되었다.스틸은 지니와 식사를 마치고 오스카 대공과 그의 아내 라이엔 대공비를 따라 해안가 모래사장으로 향했다.모두는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이곳저곳에 대한 영지 설명을 전해 들었다.그리고 그들 뒤로 서로의 대공가를 호위하는 무사들도 줄을 이었다.
오호, 오스카는 직진으로 그리 물으면서 기브엔 테이크 주고받고에 대한 계산기를 두드리는 듯한 말을 건넸다.스틸은 지니와 눈을 마주하고 환히 웃었다.‘드디어, 협상 시작이군.’스틸은 오스카가 직설적인 사람이라 오히려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아 흥미진진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이 자를 위해 뭘 해주면, 그 역시 캔도르를 위해 뭔가를 내어 줄 건 같았다.옆을 보니 스펙터도 흥미롭게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네가 제일 잘하는 담벼락 좀 쌓아 주지 그래?”담벼락이라.스틸은 피식 웃으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어쨌든 공간 지배 스킬을 쓰니 벤시를 비롯하여 듀라한도 그렇고 플로럴스피릿까지 모두를 잘 거느릴 수도 있어 현재는 든든했다.그러나 자신이 떠나고 난 다음 오스카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해안가 이기는 한데.”그때 지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여기 담을 쌓으면 좀 이상할 것 같은데. 배는 못 들어오기는 하겠다.”그때 스펙터가 껄껄거리는 웃는 소리를 내더니 한마디 툭 하고 내뱉었다.“그러니 필요하지. 높은 곳에서 공격을 감행하면 모래밭에서 싸우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그런가. 하긴 방파제 같은 것을 쌓으면 나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전직 군인의 조언은 적재적소에서 쓰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들 상상이 되지 않는지 의아한 듯 고개만 갸우뚱거렸다.“션, 의견 좀 줘 봐.”그러자 마지션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 전하의 영상 구현화 스킬을 발현된 상황을 확인하였
오스카는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우리가 너무 정보에 어두웠군. 바르트 경!”그때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기사 하나가 오스카 곁으로 다가왔다.위아래로 검은색 밀착복을 입었고 자객처럼 매우 날렵하게 순식간에 오스카 뒤에 자리를 잡았다.이동하는 순간에도 인기척조차 일지 않을 만큼 은밀하게 존재감을 공기처럼 투명하게 조절하는 자였다.“네. 전하.”“황성에 도는 소식지를 다 쓸어와. 그리고 스틸 대공에 대한 정보도 좀 구해오고.”“알겠습니다.”오스카가 제 최측근 호위 기사 바르트에게 명을 내리는 순간.라이엔의 탄식이 크게 흘러나왔다.“어머, 전하! 마법사 군대도 너무 대단하네요. 아직 끝이 아닌가 봐요.”그때 스틸이 아닌 지니의 인벤토리 안에서도 얼굴을 가릴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쓴 불사조 문양의 망토를 휘날리는 마법사들이 허공을 떠서 줄을 맞추어 나오고 있었다.세시르 영지에서 그 모습을 보던 오스카와 그의 군대를 비롯한 가신들은 다시 탄식만 뱉어내었다.***어이없는 힘자랑이 이어지고 나서야 레투카 제국의 대공이 만나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맞이했다.20대 후반의 미남 오스카 헤세 본 루카스크는 그의 21살 사랑스러운 아내 라이엔과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하고자 만전을 기했다.“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멀리서 온 손님께 무례했네요.”이제는 의젓하게 옆에서 마지션이 참모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스틸과 지니도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식사를 즐겼다.“주인님, 해산
스틸이 여유롭게 웃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제 감각을 키워 사람들과 벤시들, 그리고 오스카의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뭐 군사력은 보여주면 되지.”“주인님, 그러게. 하데스 님의 호의는 다 이유가 있었네.”아쳐가 중간에 농간을 피워서 일이 꼬이다니.하긴 반년 전이면 스틸은 그런 대접을 받을 수준이기는 했다.하지만 이리 떵떵거리면서 위세를 떨칠 정도라면 뭐 어려운 가문에 나라를 지킨 스틸에게 밥 한번 줄 수 있는 것 아닌가?그때 옆에 있던 마지션은 한숨을 흘리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대공 전하가 얼마나 위상이 높아졌는지 이 지역 소식지는 별로 안 다뤘나 봅니다.”“아쳐가 만든 소문만 믿는다면 앞으로 곤란할 거라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마지리안의 말도 옳았다.오스카 대공과 저 대공비는 눈 막고 귀 닫고 살았나.하지만 레투카는 대지가 넓었고, 이곳 사람들에게 황성의 일은 관심 밖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소문이 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환경이기도 하니 말이다.지니는 저 멀리 스틸의 첫사랑과 닮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라이엔이라고 했던가. 저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스틸을 바라보고 있을까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그때 라이엔은 오스카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자, 오스카는 쐐기를 박듯 스틸을 향해 더 소리를 쳤다.“우리 영지는 제국을 수호하느라 바쁘니 이만 가시오! 어제 오전에 국지전이 있었소!”그리 오스카가 호통을 치듯 말하자 갑자기 이곳의 수천 기사들은 여기저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우린 제국을 지키느라 바쁜데, 스틸 대공이 여기에 놀러 온 거야?
해변가에 대공가 마차를 이끌고 오스카 대공이 있는 곳으로 가던 그 순간..갑자기 마차는 멈추게 되었다.“······이런!”“윽! 전하······?”그런데, 역시.스틸 제 인생이 그렇지.강철신 인생에서도 뭐 놀랄 일도 아니고.“······주 주인님! 이게 뭐야?”그런데 조금 전까지 밝은 분위기에서 즐겁게 이 땅을 밟았지만, 현재는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세상일이 술술 풀릴 리가 없지.”스틸도 자조하듯 그리 웃음을 흘리고는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세시르 영지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부산처럼 대규모 항구도시다.바다 내음이 한껏 나는 거대한 해안가에 자리 잡은 발전된 영지라 배도 상당하고 사람들 역시 곳곳에 활력도 넘쳤다.그런데, 이런 풍경 따위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갑작스러운 시커먼 수 천의 군사들이 스틸을 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게 아니던가.분명 식사를 하고 즐겁게 담소를 나누자는 분위기가 아닌 건가?리노가 배신했나? 아니면 무슨 덫에 걸렸나? 잠시 만나자고 했더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한 거 아니었나?-스틸, 뒤통수를 맞았군.스펙터도 덤덤하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케르베로스도 아주 살판났다고 들떠 있었다.-인간들의 검은 속내는 알 수가 없군. 허허. 흥미진진해.-이런 볼만하겠어. 우리도
마구간 아래, 공기가 무겁게 감도는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황태자의 은밀한 아지트인 침대 위에서, 아쳐는 억눌린 짐승 같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리나를 제 육체 아래로 뜨겁게 가두었다. 그는 옷가지가 채 다 벗겨지지도 않아 날것의 살결과 옷감이 뒤엉킨 그녀의 몸을 거칠게 뒤돌려 세웠다. 매끄러운 척추 라인이 쾌락의 예감으로 잘게 떨렸다.질척, 찌걱.밀폐된 정적을 깨는 노골적인 파찰음과 함께 리나의 하얀 둔덕이 아쳐의 손자국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쳐의 뜨거운 손길에, 그녀의 가녀린 신음은 축축한 지하의 공기 중으로 애처롭게 흩어졌
극단의 조치!“지니, 너는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이뤄주나?”이건 사심을 품고 물어 보게 되었다.“당연히 마력이 높으면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많이 들어줄 수 있지.”어쨌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든 천일야화 판타지든 간에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지니, 이왕이면 돈이나 외모를 어찌해 봐야겠어.”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겠는가.“어머, 드디어 주인님! 욕망이 생긴 거야?”지니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틸에게 더욱 바짝 의자를 붙였다.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 너와 힘을
스틸은 죽음과 동시에 이세계로 떨어졌다. 환생을 겪으면서 이렇게 기사들에게 끌려가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대단한 경험을 지금 하게 되었다. 스틸을 체포하러 왔을 때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기사들은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머쓱한 듯 거리를 좁히며 따라붙었다.나름 고위 귀족이라 그런지 포박은 안 하고 수 미터 거리만 둔 채 걷는 수준이었다.전생에는 죄짓고 산적이 없어 이런 자들도 만난 기억이 없었다.스틸은 현재 자신이 마구간 방화범으로 몰려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딱 봐도 건초만 탄 정도지 어디가 무너져 내린
스틸은 군중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광장을 둘러싼 대리석 건물들은 마정석의 푸른 빛으로 반짝였고, 학생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반면 귀족들은 마차에 올라탄 채 지나갔다.이곳 건물은 현대 건축 양식처럼 꽤 잘 정비된 데다가 전기라는 개념은 없는 대신 마정석이라는 마력을 이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의 레투카 제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현생의 이 몸이 지닌 기억 따윈 전혀 없었기에 스스로 이 상황을 살펴야 하니 그건 머리가 복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