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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러다 반할지도 몰라]

Autor: silver구슬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4-05 18:27:26

스틸은 수차례의 삶을 반복하며 마모되고 닳아버린 직감으로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커튼 뒤, 기묘하게 일렁이는 공기 너머에 숨어 있는 그놈.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기어이 제 목숨줄을 끊어놓던 지독한 숙적, 아쳐였다.

찰나의 분노가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화마처럼 일렁였다. 아쳐는 전생의 전투기 조종사 시절에도, 레투카 제국의 대공으로 살던 이전 생에서도 늘 스틸의 파멸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집행한 장본인이었다.

지독했던 악연의 기억이 붉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스틸은 입가에 비스듬하고 서늘한 미소를 매달았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처럼 느긋하면서도 위험천만한 여유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누가 마지막에 웃을지 두고 보면 알겠지.’

***

“1학년 스틸 폰 가드 캔도르 대공. 묻겠습니다. 그대는 그 시각, 마구간에 왜 간 겁니까?”

단상 옆에서 금테 안경을 추켜올린 파란 단발머리의 남학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상벌위원회의 진행을 맡은 그의 어조는 취조실의 형사처럼 집요하고 공격적이었다.

서슬 퍼런 질문이었으나 스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제국을 휘젓던 ‘망나니 대공’이라는 오명은 이럴 때 꽤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스틸은 품 안의 지니를 조금 더 단단히 고쳐 안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쎄요. 연기를 너무 마셔서인지 화재 이전의 기억은 안개라도 낀 듯 흐릿하군요. 기억상실······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의 낮은 저음이 강당에 퍼지자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세상에, 저 뻔뻔한 낯짝 좀 봐.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그나저나 소문 속의 추남 대공 맞아? 생각보다 외모는······ 평범하잖아?”

“품에 안고 있는 여학생은 또 누구야? 망나니 대공에게 붙잡힌 걸까? 가련하기도 하지.”

멸시와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하지만 스틸은 오히려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정면을 응시했다. 단발머리 진행자가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스틸 대공. 그런 얄팍한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혹시 황태자 전하나 아카데미에 깊은 앙심이라도 품은 겁니까?”

스틸은 피식, 입매를 비틀며 웃어 보였다. 앙심이야 골수까지 사무쳤으나, 적어도 이 방화 사건만큼은 당당했다. 결백을 증명해 줄 확실한 목격자, 지니가 지금 제 품 안에 있었으니까.

“제가 마구간에 간 것이 교칙 위반이라도 됩니까? 그곳에 무기고가 있던 것도, 금단의 구역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서늘한 반문에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도 감히 대공의 권위에 선뜻 토를 달지 못했다. 스틸은 이 기세를 몰아 변론을 이어갔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불길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마구간이 타버리도록 버려두고 도망칠 만큼 비겁하진 않아서 불을 끈 기억은 선명하군요. 이 자리가 상벌위원회라면, 제게 벌이 아니라 상을 내려주셔야 마땅할 겁니다.”

전직 군인다운 쩌렁쩌렁한 성량이 강당을 울리자 군중의 분위기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진행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거기는 수로 시설도 멀고, 구유통의 물도 그대로였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물도 없는 곳에서 대체 무슨 수로 불을 껐다는 겁니까!”

진행자가 발끈하며 소리치자, 스틸은 어깨를 가볍게 움직이며 오만하게 대꾸했다.

“물이야······ 내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덕분으로 끄게 되었습니다.”

비웃음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무능력자 대공의 입에서 나온 마법 이야기는 그들에게 농담보다 가벼웠다.

“하, 이제 거짓말까지! 그대는 그냥 거기서 도망치기 바빴던 것 아닙니까? 아카데미 순찰대가 도착했을 때 대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고 했습니다!”

단발머리의 질책이 어딘가 미심쩍었다. 이 짧은 순간에 상황을 너무나 상세히 꿰고 있었다. 누군가 치밀하게 짜놓은 판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그때, 다시 커튼 뒤에서 황금빛 망토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스틸의 눈에 짙은 살기가 스쳤다.

“날 이곳에 세운 신고자라는 자는 왜 부르지 않습니까? 내가 목숨 걸고 불을 끌 때, 돕기는커녕 구석에서 구경만 하던 목격자 말입니다. 그자도 이 자리에 세워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군중의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스틸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행자는 당황한 듯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 그건 증인 보호 차원에서 밝힐 수 없습니다! 그보다, 왜 그 레이디를 이 자리까지 안고 있는 겁니까? 설마 연약한 여학생을 인질로 삼기라도 한 겁니다?”

스틸은 품 안의 지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동자엔 기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스틸은 보란 듯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모두의 귓가에 속삭이듯 나른하게 선언했다.

“이 여성을 어제 처음 만났는데, 보다시피 몸이 좋지 않아 신사의 도리로 보살피는 중입니다.”

스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지니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했다. 간지러운 숨결이 닿자 지니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 떨렸다. 비난 섞인 시선들 속에서도 지니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스틸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주인님······ 고마워. 이제 나 내려줘도 돼. 그리고 저기, 투명화 마법을 쓴 남자가 보여. 그런데 마구간에서 불을 지르던 그 사내랑 닮은 것 같아.”

빙고. 망할 아쳐가 불을 낸 장본인이라는 합리적 의심에 쐐기가 박혔다.

“지니, 저자는 천하의 나쁜 놈인데 잘됐군. 참교육시킬 명분이 생겼어.”

“어머! 주인님······ 저 사람이 보여? 신기하네. 뚜렷하지 않지만, 황금빛 망토를 펄럭이고 있거든.”

지니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주인님 레벨이 궁금한데, 뽀뽀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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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229. [자꾸 선 넘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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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227. [제국을 뒤흔든 폭로 영상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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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226. [뜻밖의 폭로전은 환영이지]

    고블린과 오크, 흉포한 몬스터들이 인간들을 잔혹하게 살육하고 불태우며 갈가리 찢어 잡아먹는 참혹한 광경이 스크린에 띄워지자, 지니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서늘한 식은땀을 흘렸다.“너무 무서워······!”“램프 안이나 인벤토리로 들어올래?”지니가 아직 어린 엘프여서인지 마물들의 지독한 흉악함에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끼는 듯했다.“그냥 눈을 꼭 감고 있으면 돼.”스틸은 지니의 차가워진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판타지 세계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잔혹한 어둠이라 여기며 마도 스크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던전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주변의 마력이 기이하게 일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영지인 가르나르가 의식되어서인지 결코 허투루 넘겨볼 수가 없었다.“던전 내부의 마력이 안정화되지 못하고, 마수의 수장이 지나치게 강력해 내부 결계를 부수고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면 이렇게 마물들이 인간계를 아수라장으로 덮치게 됩니다.”강의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숙연하게 침착해졌다. 스틸 역시 던전 자체가 마물들을 가둬 두는 일종의 억제제이자 봉인 역할을 한다고 되새기며, 스펙터와 하데스의 존재를 떠올렸다.그들은 스틸에게 호의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명확한 이성과 지성을 갖추고 있어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스러웠다.그러나 지성이 결여되었거나 오직 살의와 악의만 가득한 마족, 혹은 흉포한 짐승의 본능만 남아 핏빛 욕망을 좇는 마물이 인간계를 습격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여러 끔찍한 실상들이 마도 스크린을 통해 구현되는 긴장감 넘치는 수업이 이어졌다.리노 역시 긴장감에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225. [궁극의 회복이 필요한데]

    꽃밭 한가운데로 순간이동을 감행한 스틸은 곧바로 주위에 단단한 결계부터 쳐버렸다.“여기서 식사를 하든, 사랑을 나누든 간에 널 완벽히 회복시켜야겠어.”“윽, 주인님!”스틸은 이제 듀라한이든 밴시든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가을볕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꽃밭 한가운데로 침대까지 곧장 이동시켜 버렸다. 지니를 온전히 품에 안을 태세였다.“주인님, 어지럽거나 무리되는 건 없어? 정말 괜찮은 거야?”“그럼. 예전의 나약했던 나는 잊어버려.”이왕 이곳까지 온 이상, 요정력을 가장 빠르게 회복하는 최고의 수단이 궁극의 남녀관계임을 잘 알고 있기에 스틸은 마다하지 않고 지니를 꼭 끌어안았다.순식간에 지니의 옷을 가볍게 벗겨내는 동시에 품 안에 꽉 가둔 채 진한 입맞춤을 퍼부었다.부드럽고 다정하게 몸을 감싸 안고 구석구석 쓸어내리며, 뜨거운 손길로 자신의 옷가지도 훌훌 벗어던졌다.그렇게 편안하게 누워 교감을 나누니, 마치 천국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듯한 차원 높은 쾌감이 쏟아졌다.스틸의 체격은 이제 단순히 건장한 수준을 넘어 묵직하고 우람해져 있었다. 지난 4월 1일에 보았던 초라했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온몸이 촘촘하게 쪼개진 강철 근육으로 가득 차 있어, 그야말로 ‘스틸’이라는 이름 그 자체였다.“주인님, 우리 조금만 하자. 학교 가야지.”지니는 당황한 기색으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러나 스틸의 눈에는 그 모습조차 너무 고아 보여, 쉽게 끝낼 생각 따위는 접어둔 채 더욱 거세게 열을 올렸다.“다 하고 천천히 가도 돼.”어찌 되었든 지니의 요정력을 극대화하고 스틸의 마력을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15.(수정) [엇갈린 뜨거운 밤, 깨어나는 감각]

    마구간 아래, 공기가 무겁게 감도는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황태자의 은밀한 아지트인 침대 위에서, 아쳐는 억눌린 짐승 같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리나를 제 육체 아래로 뜨겁게 가두었다. 그는 옷가지가 채 다 벗겨지지도 않아 날것의 살결과 옷감이 뒤엉킨 그녀의 몸을 거칠게 뒤돌려 세웠다. 매끄러운 척추 라인이 쾌락의 예감으로 잘게 떨렸다.질척, 찌걱.밀폐된 정적을 깨는 노골적인 파찰음과 함께 리나의 하얀 둔덕이 아쳐의 손자국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쳐의 뜨거운 손길에, 그녀의 가녀린 신음은 축축한 지하의 공기 중으로 애처롭게 흩어졌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8. [조치의 결과는?]

    극단의 조치!“지니, 너는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이뤄주나?”이건 사심을 품고 물어 보게 되었다.“당연히 마력이 높으면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많이 들어줄 수 있지.”어쨌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든 천일야화 판타지든 간에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지니, 이왕이면 돈이나 외모를 어찌해 봐야겠어.”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겠는가.“어머, 드디어 주인님! 욕망이 생긴 거야?”지니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틸에게 더욱 바짝 의자를 붙였다.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 너와 힘을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7. [뭔가 조치가 필요할 듯!]

    스틸은 죽음과 동시에 이세계로 떨어졌다. 환생을 겪으면서 이렇게 기사들에게 끌려가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대단한 경험을 지금 하게 되었다. 스틸을 체포하러 왔을 때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기사들은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머쓱한 듯 거리를 좁히며 따라붙었다.나름 고위 귀족이라 그런지 포박은 안 하고 수 미터 거리만 둔 채 걷는 수준이었다.전생에는 죄짓고 산적이 없어 이런 자들도 만난 기억이 없었다.스틸은 현재 자신이 마구간 방화범으로 몰려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딱 봐도 건초만 탄 정도지 어디가 무너져 내린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6. [사람 돌아버리게]

    스틸은 군중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광장을 둘러싼 대리석 건물들은 마정석의 푸른 빛으로 반짝였고, 학생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반면 귀족들은 마차에 올라탄 채 지나갔다.이곳 건물은 현대 건축 양식처럼 꽤 잘 정비된 데다가 전기라는 개념은 없는 대신 마정석이라는 마력을 이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의 레투카 제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현생의 이 몸이 지닌 기억 따윈 전혀 없었기에 스스로 이 상황을 살펴야 하니 그건 머리가 복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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