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밤이 되었다.
해가 지고 하늘에 별이 뜨자 스틸은 지니와 기숙사 앞 공터에서 술을 한잔 기울이게 되었다. 인벤토리에서 나온 스펙터는 오늘 전혀 새로운 얼굴을 마법으로 만들어 뒤집어쓰고는, 인간처럼 굴면서 또 어디 구경을 하러 나가버렸다.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니 지니에게 좀 미안한 그였다. 과거의 여자에게 멍하게 굴어 얼마나 미안하던지. 스틸은 그리 지니에게 사과부터 건네며 술잔을 부딪쳤다.
“미안, 지니. 전생에 난 그녀를 닮은 여자를 좋아했었어.”
“사실 좀 놀랐어. 초월자에 시공을 넘나들었는데 그리 마음이 남아 있는 줄은 말이야.”참 의외의 말을 지니가 해 주고 있었다. 마음이 남아 있나? 이건 호기심? 아니면 그때의 감정?
자신을 한번 그렇게 되돌아본 그는 가끔 그녀가 엘프가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인간으로 생각될 때가 많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녀는 이세계에 상식이 없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하나
“아······! 이럴 수가!”재생되는 영상 속 지니는 가히 충격적인 모습이었다.지니의 가냘픈 목과 가느다란 손목, 그리고 발목에는 시퍼런 마력이 감도는 쇠사슬이 무거운 수갑 형태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쇠사슬이 살을 파고든 자리에는 거무스름한 피가 맺혀 깊은 멍 자국이 처참하게 들어 있었고, 늘 깨끗하던 하얀 튜닉은 마치 썩은 나뭇잎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상자를 내려놓는 그녀의 손가락은 뼈대만 남은 듯 앙상해 보였으며, 그녀가 뿜어내던 황금빛 마력은 마치 마지막 생명력을 억지로 쥐어짜 내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스틸은 화면 속 지니의 텅 비어버린 공허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가슴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 잔인한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피가 배어 나오는 손으로 간신히 인벤토리를 열어 예복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고 있었다.그것은 도저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끔찍한 학대를 당한 죄인이나 노예의 몰골에 불과했다.어쩌다 그녀가, 대체 어떤 지옥을 겪었기에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찾아온 거란 말인가. 스틸의 눈빛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싸늘하게 뒤집혔다.“세상에······! 지니 양이 어쩌다 저런 꼴로······.”리노 역시 깊은 안타까움에 탄식을 뱉었고, 스틸은 가슴이 먹먹하게 막혀와 차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화면 속 지니는 온 힘을 쥐어짜 황금빛 마력을 모으더니, 연미복에 가녀린 요정력을 불어넣고 있었다.“지
“스틸 대공······! 대체 가르나르 영지가 어떻게 이토록 평화롭고 번성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군요!”상단의 마차를 타고 가르나르에 당도한 리노는, 영지의 현재 모습을 목도하자마자 정신이 완전히 나간 듯 막대한 충격을 토해냈다.도저히 순간이동으로 좌표를 생성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물리적인 도구를 이용해서 나타난 것.늘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기괴한 영지 입구로 스틸이 직접 마중을 나갔을 때만 해도 리노는 내내 의아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검은 연기의 경계를 넘어 영지 내부로 들어선 순간부터는 경이로운 감탄만을 연발할 뿐이었다.“뭐······ 그리되었습니다. 상단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텐데, 제 급박한 요청에 한달음에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스틸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리노에게 영지의 상징인 광활한 꽃밭을 안내했고, 가르나르를 굳건히 수호하는 천리장성의 위용을 보여주었다.새로이 올린 대공저의 본채와 호화로운 별채는 물론, 향후 영지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살게 하기 위해 밤낮으로 비옥하게 개간해 둔 토지들까지 전부 리노의 눈앞에 가감 없이 공개했다.“스틸 대공, 아니 전하! 이제는 제대로 대공 전하로 대접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위용이라면 이 레투카 제국에 캔도르 대공가의 건재함을 당장 선포하셔도 될 정도로 차고 넘칩니다!”“저는 이 꽃들을 대륙 전역에 유통시킬 계획입니다. 곧 캔도르 상단도 발족하여 길드를 직접 운영할 예정이니, 제게는 리노 사장님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암요! 당연히 온 힘을
상자 안에는 캔도르 대공 가문의 위엄 넘치는 상징, 불사조 문양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진 최고급 예복이 정갈하게 개어 있었다.대공가의 유서 깊은 기본 복색과 완벽히 일치하는 고혹적인 색감, 그리고 황금빛 실로 한 땀 한 땀 수놓인 불사조의 형상이라니.최상급 비단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완벽한 핏을 자아내는 예복의 자태에도 위엄이 느껴져 스틸의 입술 사이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아무래도 너의 그 엘프와 관련이 아주 깊은 듯하다.]“그럼 지니가······ 지니가 돌아온 건가? 지니! 지니 어디 있어!”스틸은 이성을 잃고 사방을 둘러보며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외쳤다.그러나 목걸이는 여전히 스틸에게 걸려 있지도 않았고, 주변의 마력 흐름 속에서도 지니의 인기척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워 투명화 마법이나 은신 탐지 스킬까지 발동해 보았으나, 허공에는 그 어떤 흔적도 포착되지 않았다.하지만 연미복의 옷깃을 끌어 안는 순간, 그곳에 깊게 배어 있는 그녀 특유의 포근하고 달콤한 향기가 말없이 모든 진실을 증명하고 있었다.예복을 품에 부서질 듯 안아 내리자, 마치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 가슴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스펙터······. 그래도 이건 희망의 증거야. 맞지?”자신을 냉정하게 버리고 가버린 줄만 알았는데, 이토록 눈부신 예복을 남겨두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그래, 아무래도 사정이 있는 것 같다.]그녀는 어째서 자신의 얼굴 한 번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이 서글픈 흔적만을 남긴 채 또
리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고 보니 자신이 지니에게 귀한 옷감을 맡겼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깜빡 잊고 있었다.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리나는 시녀 소르도가 건넨 커다란 종이 상자 속에서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꺼내 올렸다.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최고급 원단이 화려한 금빛 자수, 그리고 풍성한 실루엣을 자랑하는 드레스로 완벽하게 탈바꿈해 있었다.“어쩜······ 이리도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 수 있단 말이야?”누가 보아도 금화를 치러야만 손에 넣을 수 있을 법한 대작이었다.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허술한 재봉 흔적 따위는 단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 공인 최고의 디자이너가 온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완성도였다.이음새와 솔기 처리는 어찌나 정교한지, 옷의 앞뒤를 아무리 번갈아 보아도 원래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었던 것처럼 무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맞아떨어졌다.“소르도 할멈, 이거 대체 누가 전해준 거야?”“아가씨, 저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만······ 웬 낯선 아가씨가 문 앞에 상자를 살짝 내려놓고 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답니다.”그럼 지니인데!“뭐? 그랬으면 당장 날 불렀어야지!”“그게······ 누구시냐고 말을 붙이기도 전에,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찰나의 순간에 사라져 버리셨거든요. 그리고······.&r
붉은 인장이라니.“······안젤루스가 보낸 초대장이야.”[황가에 초청을 받다니. 축하한다, 스틸.]나름 위상이 올라갔다는 증거인가.지니를 만나기 전 폐급에 망나니에 거지 대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게 입지가 다져진 스틸이었다.제국의 황녀가 자신의 데뷔탕트 초대장을 스틸의 앞으로 보냈다니.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세계에 그저 지니와 사랑 타령이나 하며 유유자적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숙적 아쳐를 향한 처절한 복수, 레투카 황실의 콧대를 꺾어놓으며 붕괴한 캔도르 가문을 대륙 위에 찬란하게 재건하는 것.그것이 그가 다섯 번째 삶을 부여받으며 가슴에 새긴 본연의 목표였다.이대로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린다면, 설령 지니가 돌아올 여건이 마련된다 한들 이 한심한 모습을 보고 다시 발길을 돌리지 않겠는가.“······정신 차려야겠어. 어디 보자. 여기나 가볼까?”[사교 활동에 발을 들이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고위 관료들과 거물들이 죄다 모일 테니 말이다.]황실의 심장부이자 권력의 집약체인 북관 응접실.스틸은 오랜만에 캔도르 대공 가주의 지배자다운, 결의에 찬 눈빛을 두 눈에 담았다.지니가 북돋아준 능력이 빛을 발했고, 램프가 없어도 스틸은 대단한 고위 귀족으로 입지도 다진 상태였다.제대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서 전장으로 향한다면, 이 지독한 우울감도 마침내 떨쳐낼 수 있으리라 믿으며 초대장을 꽉 움켜쥐었다.***그 시각,
[부르도 영지, 두 번째 던전 폐쇄 전격 성공! 이번에도 스틸 대공의 압도적 활약 돋보여······.][부르도 영지의 주인, 마 리나 로테 여공작 드디어 사교계 전면 데뷔? 황실에서 발송된 황녀 데뷔탕트 초대장에 응해······.][스틸 반 가드 캔도르 대공, 리노 상단과 손잡고 화훼 산업 본격 전개! 사교계의 이목 집중][소문과 진실: 가르나르 영지에 거대한 뽕나무 군락지가 존재한다는 설에 대륙 섬유업계 술렁······.][가르나르 영지와 부르도 영지 개발 초읽기. 베일에 싸인 가르나르의 내부 공개 소문, 과연 진짜인가 가짜인가?]며칠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스틸에게는 이제 시간도, 공간도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했다.그저 가르나르 성벽 안에 스스로를 잔인하게 고립시킨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마티어스와 리나가 여전히 지니를 찾고 있다며 끈질기게 연락을 취해왔지만, 스틸은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연락도 서서히 뜸해졌다. 시곗바늘은 무자비하게 굴러갔고, 스틸은 그 가차 없는 속도감을 외면했다.지니의 부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곁을 지키던 존재의 무게를 뼈아프게 각인시켰다.24시간 내내 붙어 있었던 존재가 지니였는데.과거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했을 때조차 이 정도로 참혹한 박탈감을 느끼진 않았었다.어제 같은 오늘, 그리고 내일 역시 전혀 기대되지 않는 무채색의 나날들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달력은 어느덧 7월 중순을 가리키고 있었다.
*****************************★ 가르나르 일대는 긴급 재난지역으로 선포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명시됨.★ 현재 제국에서는 대형 S급 미궁 및 S급 던전급으로 기이한 지역이라 분류됨.★ 그곳에 귀속된 모든 자연물 또는 토지의 소유권은 스틸 폰 가드 캔도르의 것임.★ 기타 사항 1. 제국세는 년 금화 1개(은화 98개 미납된 상황)★ 기타 사항 2. 올해 6월 말까지 체납 세금을 내지 않으면 영지는 제국에
밤이 깊었다. 그런데 후작가 마차 안은 조용하다가 다시 들썩이는 진동이 상당했다.하지만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고, 조금씩 어둑어둑 사위도 어두워져 가는 데다가 모두 돌아간 시각이라 전혀 알아차리는 이가 없었다.있다고 한들 뭐 어쩌겠는가.위세가 당당한 도르트 후작가 문양이 저리 번쩍이는데.“하흣, 마티어스. 돌아가. 이제 그만······.”“그래, 이 아까운
마티어스가 리나를 이끈 곳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자신의 후작가 마차였다.말이 마차일 뿐, 내부는 웬만한 귀족의 침실보다 화려했다.두툼하고 폭신한 가죽 시트, 은밀하게 빛을 차단하는 고급 직물들, 그리고 외부의 충격을 완벽하게 흡수하는 마법각인까지.황실 마차조차 무색게 할 사치스러움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마티어스는 거칠게 리나를 품에 안았다.이상하게도 리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그의 강한
창밖을 때리는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강의실 안, 눅눅한 공기 사이로 정적이 내려앉았다.스틸은 펜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후, 정작 자신의 가장 큰 자산인 영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민망하게 다가왔다.아카데미에 오기 전, 자신이 어디서 숨을 쉬며 살았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유일한 재산이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되어가는지도 모른 채 방치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