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적당히 취기가 오른 스틸은 지니와 함께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던전 공략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리나라는 든든한 동료를 얻은 것은 천운이었다. 그녀가 부르도 영지의 행방불명된 영주에게 허가만 받아온다면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터였다.
리나는 작별 선물로 스틸과 지니에게 통신마도구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 낯선 세계에서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을 지인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린 듯 가슴이 벅찼다.
스틸은 제 품속으로 파고드는 지니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말랑하고 온기 어린 그녀의 몸이 가슴에 닿을 때마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레벨은 오르고 있고, 마정석을 가공해 팔면 금세 부를 거머쥘 것이다. 무엇보다 지니와 나누는 이 달콤한 시간은 삶의 가장 큰 낙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불안이 있었다.<
스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리노 일행을 떠나보낸 뒤, 그는 광기 어린 눈으로 던전을 샅샅이 뒤졌다. 바닥만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목걸이가 떨어졌을 것이라 확신한 채 주변을 헤맸다. 심지어 듀라한과 밴시에게도 명령을 내렸다.“제발! 지니를 찾아!”6층과 5층을 집중적으로 훑어댔다. 바닥 여기저기에는 마정석이 밭을 이루고 있었고, 저걱거리는 빛과 마력을 품은 마정석이 아무리 발끝에 차여도 스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바닥을 보고 또 보며 목걸이가 떨어졌을지도 모를 곳을 찾아 헤맸고,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울부짖었다.“지니!”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미쳐 날뛰는 그의 그림자가 던전 벽면에 일렁였다. 왜 하필 오늘 비가 내려 이런 일이 생겼을까. 자책의 화살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향했다.비는 그에게 잔인한 저주처럼 내리쬐었다. 지니가 비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오늘 폐쇄를 강행했을까. 지독한 후회가 밀려왔다.“스펙터, 제발 부탁이야! 어떤 흔적이라도 좋아! 도와줘.”스펙터에게까지 도움을 요구하며 스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알았다. 다만 기대는 하지 마라.]스펙터 역시 듀라한들을 사방으로 뿌려 지니의 흔적을 좇으라 명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진작에 지니를 그냥 기숙사나 가르나르에서 쉬도록 보냈어야 했을까. 비가 오니 오늘은 던전 폐쇄를 하지 말자고 강단 있게 말했어야 했나.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야 후회의 집요한 파도가 밀려왔다.오랜 수색 끝에 절망한 그는 던전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이를 악문 입술 사이로 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어쩌면 신은 없는 게 확실했다. 왜 제 인생은 이토록
충격의 순간이었다.스틸의 심장으로 예리한 칼날이 파고들었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떨리는 손으로 주변 바닥을 다급하게 훑었다.하지만 인간의 육안에 의존해 광활한 전장에서 작은 램프를 금방 찾아내기란 애초에 만무한 일이었다.“뭡니까? 지니 양은 먼저 순간이동으로 퇴각한 겁니까?”리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스틸은 피가 배어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램프 자체가 사라진 이상, 이는 단순한 이탈이 아니었다.“어? 아까는 분명 지쳐서 벽에 기대어 쉬고 있었는데. 돌아간다면 미리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대체 어디로 간 거지?”리나의 말에 마티어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얹었다.“반대로 생각하면, 자신 때문에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던전 폐쇄를 포기할 수 없으니 조심스레 먼저 귀환한 것 아닐까요? 어서 돌아가서 찾아봅시다.”“어쩌면 리노 길드의 상점에 가서 쉬고 있거나, 스틸 대공의 숙소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모두가 이제야 지니의 부재를 눈치채고는, 그녀가 마법으로 먼저 귀환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의견에 무게를 실었다.스틸은 입술을 짓씹었다. 지니가 혼자 돌아갔을 리 없었다. 목걸이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었다. 그녀가 머무를 곳은 오직 스틸의 곁뿐이었으니까.‘격렬하게 전투를 치르다 램프를 떨어뜨린 거겠지! 지니는 그 안에서 쉬고 있을 거야!’복잡하게 엉키는 생각을 정리하며, 어떻게 지니를 찾아야 할지 현자인 램프에게 조언을 구하려던 스틸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정작 그 램프를 잃어버렸다는 엄연한 사실이 다시 한번 뇌리를 난사하자
스틸은 앞에서 던전의 주인에게 조금은 마력이 통해 검을 휘두르면서도 맹공격을 퍼부었다.대신 듀라한 무리와 스펙터의 마력이 정면으로 충돌하자, 다행히 마수의 기세는 꺾였으나 사방에서 공간의 왜곡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어우, 숨이 너무 막히네요.”“젠장, 공기 중의 마력 밀도가 조밀해졌어!”“이런, 빗방울이 마력을 응축시키고 있습니다! 공기가 마치 철벽 같군요! 다들 조심하십시오!”리나가 휘청거리자 마티어스가 즉각 그녀의 팔을 붙잡아 지탱했다. 리노 역시 스틸의 인벤토리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듀라한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마력 돌풍이 버거운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스틸 또한 불이 붙은 듯 붉게 부풀어 오른 손바닥에서 강력한 마나를 뿜어내고 있었다.“최단 시간 내에 폐쇄를 완료합시다! 체력이 한계에 달한 자는 즉시 전선에서 이탈해도 좋습니다!”스틸은 검집을 박차며 코카트리스의 머리 위, 허공을 향해 거침없이 도약했다.[불은 흡수해 버리니 절대 금지다.]저 거대한 괴조의 형상을 내려다보며 스틸은 실소했다. 인생을 다섯 번이나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본다 싶었다.“물리 공격뿐만 아니라 마법 반격에도 대비하십시오! 시간차를 노려야 합니다!”스틸이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밀려오는 크롤들을 흙 속에 묶어버렸다. 이어 코카트리스가 토해내는 불꽃을 바람의 벽으로 튕겨내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갔다.투명화한 듀라한들이 측면으로 소리 없이 파고들어 마수들을 베어 넘기자, 비로소 전열이 안정되며 일행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크롤의 돌격이 멎었습니다!”“다행입니다! 어서 힘을
분명 마수가 없다고 했는데, 산처럼 쌓여 있는 크롤도 문제지만 이 상황에서 던전의 주인까지 나타나다니.“꺅! 이게 뭐래요!”“으악! 심각하군요!”리나와 마티어스의 비명대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기괴한 소리를 내는 수백 마리의 박쥐 떼까지 몰려들자, 지축과 귀가 찢어질 듯한 혼란이 전장을 뒤덮었다.“던전의 주인이 뒤에서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온 것 같습니다!”리노의 말에 스틸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도망쳐야 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같은 폭우 속에서는 무리입니다!”“퇴로는 괜찮지 않나요? 아! 순간이동이 안 되는군요!”순간이동이 막힌 마당에 달려서 도망치는 건 자살행위였다. 곁을 보니 지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지니, 괜찮아?”“조금만 여기서 버텨 볼게. 앉아서는 주인님께 요정력을 줄 수 있을 것 같아.”“램프 속으로 들어와.”“그건 싫어. 빛의 요정이라는 걸 들키는 건 소멸하는 것보다 싫어.”지니의 완강한 의지를 강제로 꺾을 수는 없었다. 스틸은 빠르게 스펙터에게 조언을 구했다.‘어쩌지, 스펙터?’[퇴로에도 상당수의 마수가 몰려오고 있다. 이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곳에 마수를 이동시킨 형국이다. 내가 앞뒤로 듀라한을 풀 테니, 정면 돌파하여 타계하는 것이 유일한 정답으로 보인다.]이젠 던전의 주인을 목 베는 수밖에 없었다.“자, 전진! 던전을 빠르게 폐쇄합니다! 해결책은 그것뿐입니다!”스틸은 지니를 바라보는 동시에 인벤토리 속
아쳐는 목적 달성을 위해 폭우 속에서도 정원을 더 거닐었다. 무언가에 주눅이 든 마지션은 그러면서도 주변의 꽃들을 보며 감탄을 자아냈다.“전하, 이 정원은 참 아름다운 곳이네요.”마지션이 은백색 꽃잎을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리며 속삭였다.“교수님의 미모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스틸이 가졌다는 그 하찮은 치유의 꽃과도 비교가 안 되지요.”“그래도 유한한 것은 그 자체로 값진 법이랍니다.”허리를 숙여 손바닥만 한 꽃을 매만지던 마지션이 아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슬 맺힌 꽃술이 그녀의 은발과 어우러져 기이한 색기를 자아냈다.그러나 아쳐는 이 순간이 지독하게 지루했다. 그가 가면 뒤로 하품을 삼키며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어차피 곧 시들어 문드러질 생명에 왜 그리 연연하십니까.”“그래서 의미 있는 거죠.”마지션의 시선이 아쳐의 어깨너머, 정원의 가장 음산한 구석으로 향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이 호기심으로 치켜올라갔다.“어라······ 저기 계신 분은 누구시죠?”아쳐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세찬 빗줄기 한가운데, 젖지 않는 은빛 망토를 두른 여성이 공중에 정지한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 안녕하세요.”아쳐는 슬쩍 마지션을 바라보고는, 기다렸던 사람의 등장을 천천히 반기듯 입을 열었다.“내 정원에 그대를 초대한 적은 없습니다. 자드키엘.”“황태자 전하, 전 이 황궁에 못 다닐 곳은 없다고 황
“이런! 너무 많잖아! 마법도 제대로 안 먹혀!”마티어스의 고함이 스틸의 귓전에도 닿았다.검을 휘둘러도 오크들의 파도는 끝없이 밀려들었다. 뒤틀린 육체들이 두 다리로 뛰어오르고 네 발로 기어오며 쇄도하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온몸이 비늘과 종기로 뒤덮인 괴수가 포효할 때마다 지축이 흔들렸다.마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은 뼈아팠다. 날씨 탓인가 마법 자체도 왜곡이 되어 방향이 비틀어지거나, 그 성능도 약화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지금 다섯 명의 전력은 오로지 검을 휘둘러야만 하는 혈전이 되어 버렸다. 무질서하게 덤벼드는 흉포한 무리 탓에 땀방울이 눈가를 흐렸다.“넘어지면 끝장입니다! 다리에 힘 꽉 주십시오! 순간이동도 지금은 불가합니다!”스틸이 모두를 데리고 순간이동을 시도해봤지만, 그것도 먹히지 않았다.“그래도 지능이 없는 놈들이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잠시 뒤 비가 잦아들면 마법은 제대로 통할 겁니다! 버티십시오!”리노의 호통이 고막을 찢었다. 스틸은 현실 감각이 마비될 듯한 혼란 속에서도 검을 악물고 쥐었다. 5층이 이토록 지옥일 줄이야. 반면에 오늘 반드시 이 던전을 폐쇄하겠다는 오기가 전신을 지탱했다.“불 마법으로 상공을 덮겠습니다! 효력이 약하더라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전방을 밀어붙이십시오!”스틸의 외침과 함께 대검이 사선을 그리며 화염을 분사했다. 본능만으로 달려드는 마수들의 숨통을 끊어내며 차근차근 전열을 전진시켰다.리나의 검이 매끄럽게 번뜩이며 제 몫을 다했고, 지니의 찬란한 광선은 오크의 미간을 꿰뚫으며 어둠 속에 길을 냈다.그런데 지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지니, 괜찮아?”&l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