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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4월 1일 오전.
네 번째 삶을 살아가는 공군 소령 강철신에게 오늘이라는 날짜는 너무도 익숙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적국기 등장에 따른 비상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스텔스 전투기에 정밀유도폭탄까지 가득 무장한 채 출격한 지 단 30분. 강철신은 또다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섰다.
저 적국 전투기에 타고 있는 자는 분명 전생의 숙적이자 라이벌, 아쳐 소령일 터였다. 녀석은 이번 생에서도 어김없이 대한민국 영공을 더럽히며 서울 한복판에 미사일을 퍼붓기 위해 북방한계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이 질긴 악연 끝낸다! 내 나라를 망하게 한 이 원흉!”
이번에도 먼저 죽을 수는 없었다.
네 번의 반복된 삶 동안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아쳐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비운이었다.
하지만 신이 준 유일한 치트키, 바로 전생의 기억이 그에게 있었다. 녀석의 비행 궤적과 독특한 고고도 배면 비행 솜씨는 이미 강철신의 머릿속에 완벽히 새겨져 있었다.
하늘 위에서 교차하는 미사일과 붉은 화염.
날개가 깎여 나가고 전투기 꼬리가 날아가는 처절한 교전 끝에, 강철신은 마침내 인천 앞바다 쪽으로 불을 뿜으며 추락하는 아쳐의 전투기를 눈에 담았다.
‘성공이다.’
다섯 번의 삶을 통틀어 녀석을 먼저 추락시킨 건 이번이 최초였다.
물론 그 대가로 강철신의 기체 역시 엔진이 화염에 휩싸이며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지만, 도심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기체를 어떻게든 바다 쪽으로 돌려놓은 그는 조용히 조종간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짝사랑하던 이신 대위에게 고백 한 자락 못 해본 게 아주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번엔 자신의 사람들과 조국을 지켜내고 죽는 영광스러운 하직이었다.
‘이 정도면······ 제법 근사하게 눈감는 거겠지.’
귀를 찢는 엔진 폭발음과 함께, 강철신의 서른네 번째 청춘이 뜨거운 바닷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 ······라고 생각했었는데.원한을 풀었으면 이제 편하게 저승길로 직행해야 정상 아닌가?
“컥! 컥! 앗, 뜨거!”
거짓말처럼 X 같은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매캐한 탄내와 함께 온몸을 구워버릴 듯한 뜨거운 열기가 눈, 코, 입을 사정없이 공격해 왔다. 대자로 누워 있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난 강철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얀 제복 상의에 초록색 망토,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활활 타오르는 목재 건물과 날뛰는 말들.
‘이거 레투카 아카데미 제복이잖아? 이번엔 또 이 세계관이야?!’
오른쪽 검지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대공가의 가주 반지.
황가에게 찍혀 망해버린 가르나르 영지의 비운의 가주, 스틸 반 가드 캔도르.
원래대로라면 으스스하고 낡은 대공가 폐허에서 눈을 떠야 하거늘, 이번 회귀는 이상하게 뒤틀려 불타는 마구간 한가운데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회귀하자마자 타 죽으라고?”
전생에 나라도 구하고, 아쳐에게 복수도 했는데.
자신의 원혼은 아직 덜 풀린 건가.
일단 화재의 열기 속에서 불을 끌 수단부터 찾아야 했다. 주변을 헐떡거리며 둘러보던 스틸의 눈에 구유통이 들어왔다.
물이라도 뒤집어쓰려고 달려간 순간,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는 억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어······? 잠깐만, 이 못난이는 뭐야?”
이목구비가 사방으로 자유분방하게 흩어져 있는 지독한 비주얼이었다. 전생이나 전전생은 평범하기라도 했건만, 이 정도로 생태계를 위협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심지어 매일 아침 단련했던 근육은 어디 가고 나무젓가락 같은 팔다리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니.
‘환장하겠네, 진짜······.’
절망도 잠시, 불길은 점점 스틸의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탈출하려 발을 디디려는데, 잿더미가 된 바닥 구석에서 반짝이는 금빛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순금 24K의 오라를 뿜어내는 금목걸이. 목걸이 펜던트는 정교하게 세공된 조그마한 기름 램프 모양이었다.
스틸이 흙먼지가 자욱한 램프 펜던트를 손으로 대충 쓱쓱 문질러 털어낸 그 순간.
화아아아!
마구간을 채우던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일순간 멈춰 섰다.
펜던트 끝에서 눈부신 황금빛 연기가 공간을 가르며 피어오르더니, 그 안에서 아스라한 형태의 잔상이 떠올랐다.
“······아, 드디어!”
연기 속에서 흘러나온 것은 꿈결처럼 투명하고 고운 목소리였다.
흩어지는 금빛 연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눈처럼 깨끗하고 하얀 피부, 햇살을 머금은 듯 찬란하게 휘날리는 금빛 머리카락.
하얀 나신에 완벽한 몸매까지.
그녀의 투명한 갈색 동공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스틸을 향했다.
“반가워, 나의 새로운 주인님!”
환한 미소와 함께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여자는 타오르는 화염을 배경으로 스틸을 향해 사뿐히 다가서며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스틸은 멍하니 눈을 벅벅 비볐다.
‘내가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서 미친 건가?’
망해버린 대공가의 거지 가주,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얼굴을 한 자신 앞에 빛나는 여인이 주인이라 부르다니.
확실히 자신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여기며 바로 몸을 돌려 버렸다.
내용이 굿노벨 독자님들 시선에 맞게 조정이 되는 중입니다. 즐겁게 즐겨 주시길요. 이 소설은 전 종로 및 광역수사대에 근무하신 이회림 (드라마 시그널, 더킹, 보이스, 영화 사냥의 시간, 선물 등 시나리오 감수 다수)형사님의 범죄 자문과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송X(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 닥치고 내게로 와!, 언더커버 스캔들 등 웹소설 다수)의사 선생님의 의학 자문을 받아 내실 있게 구성한 장편 소설입니다. 판타지 소설이니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렇게 무사히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나 봐.”지니의 말은 명확한 정답이었고, 스틸과 스펙터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우리가 죽을 각오로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고서 저렇게 격렬하게 반기는 건가?”“스틸, 저들은 당연히 네가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거라 확신하기에 마중까지 나온 모양이다.”스틸과 스펙터의 예상대로, 현재 대치 상황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케르베로스는 영혼을 저승으로 안식하게 하는 일에는 관대할지 몰라도, 저승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영혼은 사정없이 짓씹어 삼키는 잔혹한 본성을 지녔음을 스틸은 신화를 읽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일단 죽이는 게 낫지 않겠어?”“감히 플로럴 스피릿의 마력이 우리에게 닿지 못하도록 방해까지 했으니 말이다.”“저 셋이 품은 영혼의 무게감이 실로 상당하니, 하데스 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겠지.”순간, 던전 내부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케르베로스는 흥분으로 눈을 번뜩이며 본능적인 공격 자세를 취했다.그 찰나, 폭풍 같은 마력의 일갈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지니와 스틸, 스펙터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무자비하게 덮쳐왔다.“어머나!”“이 자식들이!”“스틸, 이곳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어서 흙으로 장벽을 세워라!”스틸은 마법을 활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치유해 주러 온 호의를 무시하고 다짜고짜 공격부터 퍼붓다니 어이가 없었다.고집스러운 괴수들에게는 약간의 매운맛과 따끔한 교훈이 필요한 순간이라 판단되었다.***&nb
스틸이 자리를 비운 대공저.리나와 마티어스는 영지의 가신들을 도와 귀빈들의 배웅을 다정하게 도왔다.미궁 순찰을 이유로 주인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어머, 이 술은 향이 어쩜 이리 그윽한지요. 스틸 대공에게 직접 인사도 못 전하고 떠나게 되어 아쉽군요.”“던전을 넘나드는 게 저 친구에게는 일상이 된 모양이군. 군대를 이끌고 미궁으로 당당히 입성하는 광경이라니, 대단하네.”“신비로운 빛의 기운이 던전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다니······ 레투카 제국의 방패라는 칭송이 결코 괜한 말이 아니었네요.”속 편한 귀족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스틸을 향한 찬사를 내뱉으며 유유히 발길을 돌렸다.시간이 흐르고 초대받은 하객들이 하나둘 떠나자, 넓은 연회장에는 스틸과 깊은 인연을 맺은 지인들만 남게 되었다.“오늘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하루였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마티어스.”마티어스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은 리나는, 주변에 시선이 많음에도 차분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오늘 꽤 당황했을 텐데 잘 견뎌 줬어. 넌 이제 엄연한 로테 여공작이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리나는 오늘 황태자로 인해 너무 놀라 하마터면 정체를 들킬 뻔했기에 간담을 쓸어내렸다.“그리고 후작님 내외분께서 날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 돌아가시기 전에 정식으로 인사부터 드리고 싶어.”“그래, 따라와라.”리나는 마티어스의 곁에서 그의 가족들을 우아하게 배웅했다.단란한 후작가가 작별
스틸이 손님맞이를 위해 정성껏 꾸며 둔 준의전실(Semi-State Room)의 소파 위에서는, 아슬아슬한 스릴을 즐기며 밀로투스와 메스메리아가 은밀하고 질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어머, 밀로투스 교수님. 무시무시한 가르나르 미궁을 바로 앞에 두고 목숨을 걸고 나눌 때의 이 열기가 너무 짜릿하네요.”“이곳은 더 이상 무시무시하지도,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하지도 않으니…… 내게만 집중하십시오, 메스메리아 교수님.”소파 위에서 서로의 뜨거운 숨결을 탐닉하던 두 사람은 은밀한 열기를 드레스 자락 속에 감춘 채 농염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스틸의 초대석에서 펼쳐진 화려한 광경과 입안을 가득 채우던 와인의 그윽한 풍미를 떠올리자, 메스메리아의 붉은 입술 끝에 절로 유혹적인 미소가 번졌다.밀로투스의 손길이 그녀의 매끄러운 허리선을 따라 미끄러지며 드레스 아래로 은밀하게 파고들자, 메스메리아의 숨소리가 한층 가늘고 낮게 잦아들었다.격정이 고조될수록 그들의 움직임은 더욱 치밀하고 대담해졌으며, 피부 위로 피어오른 열꽃은 은은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하아…… 우리 스틸 대공은 참으로 멋진 제자가 아닐 수 없어요. 이번 학기 수학 시험에서도 무려 만점을 받았지 뭐예요. 심지어 제가 수식을 배워야 할 정도로 고차원적인 풀이 과정을 선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군사학 역시 만점이었습니다. 수업 시간 내용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완벽히 외웠더군요. 게다가 방어술은 이미 전문 기사의 경지를 훌륭히 넘어섰습니다.”절정에 다다른 교밀의 순간에도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스틸을 향한 찬사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메스메리아의 날카로운 손끝이 밀로투스의 턱선을 스치자, 둘 사이로 묘하고 팽팽
시간은 흘러 마침내 연회가 끝나고 귀족들이 하나둘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황족인 안젤루스가 먼저 자리를 터주자, 고위 귀족들 역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아쳐는 독기가 오른 술에 가득 취해 비틀거렸고, 결국 마지션 교수에게 끌려가듯 저택을 나섰다.“전하, 발을 디딤에 넘어지실까 두렵습니다. 천천히 걸으십시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스틸의 영지는 정비가 어찌나 완벽한지, 아쳐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거슬리는 것뿐이었다.볼룸(Ballroom)을 나와 웅장한 복도를 지나치자, 귀족들이 쉬어 가도록 마련된 준의전실(Semi-State Room)이 눈에 들어왔다.“쳇,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제 주제에 황제라도 된 줄 아나?”“스틸 대공은…… 연금술이나 독자적인 건축 스킬을 터득한 듯합니다. 참으로 경탄스러운 양식이군요……”아쳐는 그 칭찬마저 듣기 싫어 홧김에 마력을 피워 올렸다. 순간이동으로 단번에 황궁 침실로 돌아갈 셈이었다. 하지만 마력이 지지직거리며 불꽃을 튀기더니 허무하게 사그라들고 말았다.“전하! 마력을 억지로 끌어쓰지 마십시오! 타바로 채운 흑마법이 정화되는 과정에서 전하의 잔여 마력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뭐? 쳇, 번거롭긴!”아쳐는 마지션을 대동한 채 어수선하게 비틀거리며 성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상하게도 제 주변에 늘 늘어서 있던 호위 기사나 피닉스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회색 망토를 두른 호위대의 숫자가 부쩍 줄어든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충성심이 식어 버린 것 같았다.황태자인 자신이 이렇게 홀로 비틀거려도 신경 쓰는 자 하나 없다니.&
휘청휘청, 건들건들.추태를 부리며 비틀거리는 아쳐의 뒤를 따르는 것은 다름 아닌 마지션 교수였다.“다들 전하께서 취해 그러신 것이니 괘념치 마시고 즐겁게 연회를 즐기십시오. 하하, 그런데 이 성은 볼수록 훌륭하군요. 새로운 건축 양식이라 제국 역사에 유서 깊게 남을 듯합니다.”마지션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자, 사람들도 그제야 스틸이 구축한 이 화려한 저택으로 관심대를 옮겼다.아쳐는 마지션의 손에 이끌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하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이다.귓가를 울리는 건 전부 스틸에 대한 찬사뿐이었다. 스틸이 대단하다, 그의 마력이 경이롭다, 등등. 하나같이 피가 거꾸로 솟구칠 만큼 듣기 싫은 소리뿐이었다.그때, 세도르가 귀족들에게 나누는 대화가 아쳐의 귀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전 실은 스틸 대공 전하 덕분에 시력을 거의 회복했습니다.”세도르의 말에 안젤루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스틸 대공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황궁에 드리웠던 저주까지 거두어 주신 덕에 어머니께서 지금은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셨답니다.”아쳐의 발길이 오뚝 멈춰 섰다.저주를 거두고, 치유를 행하고.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자신의 이 비참한 몸을 고칠 수 있는 자가 오직 스틸뿐이라는 현실이 절망처럼 그를 짓눌렀다.이제는 마지션 교수마저 뛰어넘어 버린 것이 스틸이었다.제발 살려 달라고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은 참담함에 아쳐는 이를 악물었다.***살다 살다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괴수를 치료하러 가게 될 줄이야.죽
“오늘 가르나르가 사납게 요동치는구나.”황제 골타르는 황궁 제 침실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자드키엘을 품에 안은 채, 자못 흥미롭다는 듯 나지막하게 읊조렸다.조금 전, 통신 마도구를 통해 아쳐를 호위하던 피닉스로부터 그곳의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가르나르 한가운데 SS급 미궁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으며, 스틸이 직접 미궁 속으로 들어가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선언하며 연회가 정리되었다는 보고였다.골타르는 기분 좋은 만족감에 젖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하지만 오늘따라 품 안의 자드키엘이 유독 조급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도도하고 당당하던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태도였다. 흔들리는 눈동자, 가늘게 떨리는 밭은 숨결 속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넘실거렸다.“그러게 말이에요. 전 오늘 이상할 정도로 겁이 나네요. 저 멀리서 거대하고 추악한 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서요.”“겁은 무슨. 레투카의 품 안에서 네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골타르는 그저 느긋하게 응수할 뿐이었다.얼마 전, 황궁 의원에게 명령해 자드키엘의 상태를 진찰하게 했을 때 그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황홀함이 그를 사로잡았고, 여전히 자신이 건재하며 아쳐 따위가 아니더라도 제국을 이을 후계자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오만한 자부심이 솟구쳤다.그러니 도른의 마법사인 그녀가 미궁의 출현에 불안해하며 떠는 것도 그저 애교스럽게 보일 뿐이었다.“스틸 그 가엾은 자식은 곧 완벽한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 염려 마라. 너는 그저 내 씨앗이나 고이 품어 키우면 돼.”그 순간, 자드키엘은 골타르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마구간 아래, 공기가 무겁게 감도는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황태자의 은밀한 아지트인 침대 위에서, 아쳐는 억눌린 짐승 같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리나를 제 육체 아래로 뜨겁게 가두었다. 그는 옷가지가 채 다 벗겨지지도 않아 날것의 살결과 옷감이 뒤엉킨 그녀의 몸을 거칠게 뒤돌려 세웠다. 매끄러운 척추 라인이 쾌락의 예감으로 잘게 떨렸다.질척, 찌걱.밀폐된 정적을 깨는 노골적인 파찰음과 함께 리나의 하얀 둔덕이 아쳐의 손자국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쳐의 뜨거운 손길에, 그녀의 가녀린 신음은 축축한 지하의 공기 중으로 애처롭게 흩어졌
극단의 조치!“지니, 너는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이뤄주나?”이건 사심을 품고 물어 보게 되었다.“당연히 마력이 높으면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많이 들어줄 수 있지.”어쨌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든 천일야화 판타지든 간에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지니, 이왕이면 돈이나 외모를 어찌해 봐야겠어.”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겠는가.“어머, 드디어 주인님! 욕망이 생긴 거야?”지니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틸에게 더욱 바짝 의자를 붙였다.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 너와 힘을
스틸은 죽음과 동시에 이세계로 떨어졌다. 환생을 겪으면서 이렇게 기사들에게 끌려가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대단한 경험을 지금 하게 되었다. 스틸을 체포하러 왔을 때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기사들은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머쓱한 듯 거리를 좁히며 따라붙었다.나름 고위 귀족이라 그런지 포박은 안 하고 수 미터 거리만 둔 채 걷는 수준이었다.전생에는 죄짓고 산적이 없어 이런 자들도 만난 기억이 없었다.스틸은 현재 자신이 마구간 방화범으로 몰려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딱 봐도 건초만 탄 정도지 어디가 무너져 내린
스틸은 군중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광장을 둘러싼 대리석 건물들은 마정석의 푸른 빛으로 반짝였고, 학생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반면 귀족들은 마차에 올라탄 채 지나갔다.이곳 건물은 현대 건축 양식처럼 꽤 잘 정비된 데다가 전기라는 개념은 없는 대신 마정석이라는 마력을 이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의 레투카 제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현생의 이 몸이 지닌 기억 따윈 전혀 없었기에 스스로 이 상황을 살펴야 하니 그건 머리가 복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