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2화. 사진 한 장의 속도
찰칵.
소리는 작았는데, 이상하게 복도 전체에 크게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남학생 하나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방금 전까지 우리 쪽을 향해 있던 렌즈가 급히 바닥으로 내려갔다.
아니겠지.
그냥 우연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냥 화면을 켰는데 셔터음이 난 걸 수도 있고, 그냥…….
“찍었냐.”
이태건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잘랐다.
낮았다.
그런데 낮기만 한 게 아니었다. 복도 공기를 한 번에 눌러버리는 목소리였다.
남학생이 어깨를 움찔했다.
“아, 아니요.”
“아닌데 왜 숨겨.”
“진짜 아니에요.”
“보여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아이 손을 잡은 채 굳어 있었다. 이태건은 도윤을 한 팔로 안고, 다른 손으로 아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 상태로도 이상하게 위협적이었다.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다가가서 멱살을 잡지도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이미 한참 밀린 사람처럼 보였다.
남학생은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결국 휴대폰을 내밀었다.
태건은 받아 들지 않았다.
“네 손으로 열어.”
“…….”
“사진첩.”
남학생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주변 학생 몇 명이 작게 숨을 삼켰다.
내가 말려야 하나?
그 생각이 들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태건의 방식이 거칠어 보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 사진이 퍼지는 건 싫었다.
아니, 싫은 정도가 아니었다.
입학 첫날부터 고등학교 때 피해 다니던 남자의 아이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라니. 그것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찍힌 사진.
내가 아무리 조용히 살고 싶어도, 그런 사진이 퍼지는 순간 끝이었다.
“저기…….”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 태건이 나를 흘끗 봤다.
“가만히 있어.”
딱딱한 말투였다.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왜요?”
“네 사진이야.”
“그러니까 제가 말해야죠.”
“말로 안 되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마치 이미 몇 번이나 이런 상황을 겪어본 사람처럼.
남학생이 결국 사진첩을 열었다.
화면에 방금 찍힌 사진이 떠 있었다.
나와 도윤.
그리고 뒤쪽에 선 이태건.
사진 속 나는 아이 손을 붙잡고 멍청하게 서 있었고, 도윤은 태건에게 안긴 채 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구도만 보면 정말 이상한 가족사진 같았다.
머리가 아찔했다.
하린이 옆에서 작게 욕을 삼켰다.
“와, 미친. 진짜 찍었네.”
남학생이 급히 말했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올리려고 한 건 아니고요.”
“지워.”
태건이 말했다.
“지울게요.”
“최근 삭제도.”
“네?”
“최근 삭제.”
남학생의 얼굴이 더 굳었다.
그제야 주변에서 몇몇이 웅성거렸다.
“와, 최근 삭제까지 아네.”
“저건 좀 무섭다.”
“근데 찍은 애가 잘못했지.”
남학생은 마지못해 사진을 삭제하고, 최근 삭제 항목까지 비웠다. 태건은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봤다.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다 끝나자 남학생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작게 중얼거렸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 순간, 태건의 눈이 남학생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남학생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도윤이 태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아빠, 무서워.”
그 말 한마디에 태건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아이 쪽으로 내려갔다. 태건은 숨을 한 번 삼키듯 멈췄다가, 도윤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안 무서워.”
“아빠 화났어.”
“안 났어.”
거짓말이었다.
누가 봐도 화나 있었다.
하지만 도윤은 그 말을 믿고 싶은지 태건의 후드 끈을 만지작거렸다. 태건은 더 이상 남학생을 보지 않았다. 아이가 무서워하자마자, 화를 거둔 것처럼.
나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알던 이태건은, 아니 정확히는 내가 멀리서만 보던 이태건은 누군가를 달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복도에서 부딪힌 애들이 먼저 사과하게 만드는 사람. 선생님이 이름만 불러도 교실 분위기가 굳는 사람. 웃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
그런데 지금 그는 세 살짜리 아이 앞에서 자기 감정을 접고 있었다.
“밥 먹자.”
태건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요?”
“애 배고파.”
“저는요?”
“너도 안 먹었다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
말문이 막혔다.
뭐가 문제냐고?
전부 문제였다.
이태건이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것도 문제고, 그가 아이 아빠처럼 나타난 것도 문제고, 그 아이가 하필 내 손을 안 놓는 것도 문제고, 방금 사진까지 찍힌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그때 도윤이 내 손을 살짝 흔들었다.
“누나, 밥.”
아.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하린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민서야.”
“응?”
“나도 같이 가도 돼?”
“뭐?”
하린은 이미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아까까지는 당황하더니, 지금은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 혼자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럼 안 보내면 되잖아.”
“근데 애기가 너무 귀여워.”
“윤하린.”
“그리고 솔직히 궁금해.”
하린은 내 귀에 가까이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 선배 진짜 네 고등학교 동창이야? 왜 널 기억해? 왜 애가 있어? 왜 갑자기 밥 먹재? 이건 따라가야 돼.”
나는 하린을 노려봤다.
“너 지금 즐기지.”
“조금.”
부정도 안 했다.
태건은 그런 우리를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올 거면 와.”
마치 자기 허락이 필요한 것처럼.
나는 바로 쏘아붙였다.
“저희가 왜 허락받아야 하는데요?”
태건이 나를 보았다.
“그럼 네가 정해.”
“뭘요.”
“어디서 먹을지.”
내가 정하면 내가 따라가는 게 확정되는 거 아닌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도윤이 내 손을 잡고 기대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나, 밥.”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학생식당.”
“싫어.”
태건이 즉답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방금 저한테 정하라면서요.”
“도윤이 먹을 거 없어.”
“그럼 왜 물어봤는데요?”
“네가 뭘 고르는지 보려고.”
“진짜 재수 없다는 말 많이 듣죠?”
태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하린이 옆에서 입을 틀어막았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나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태건 앞에서 재수 없다고? 상상만 해도 심장이 얼어붙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했다.
무섭긴 무서운데,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도윤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어딘가 빈틈이 생겼다.
태건은 잠깐 나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처음 듣는데.”
“거짓말.”
“대놓고 말한 건 네가 처음.”
“영광이네요.”
“그러네.”
그가 너무 태연하게 받아쳐서 내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우리는 학교 정문 근처 작은 분식집으로 향했다. 학생식당은 싫다던 태건이 고른 곳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윤이 먹을 수 있는 계란찜과 주먹밥이 있다는 것.
분식집에 들어서자 아주머니가 태건을 알아보고 반겼다.
“어머, 도윤이 왔네?”
도윤이 태건 품에서 손을 흔들었다.
“안냐세요.”
“아이고, 오늘은 예쁜 누나도 데리고 왔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태건은 대꾸 없이 안쪽 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도윤의 의자를 먼저 확인하고, 테이블 모서리에 휴지를 접어 대고, 뜨거운 물컵을 아이 손이 닿지 않는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워서 나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고등학교 때 그가 뭘 하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태건은 아이와 다닌 시간이 꽤 오래된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뭐 먹어.”
태건이 메뉴판을 내 쪽으로 밀었다.
“각자 계산해요.”
“누가 뭐래?”
“미리 말하는 거예요.”
“그래.”
순순히 대답하는 게 더 불안했다.
하린은 내 옆에 앉아 메뉴판을 보다가, 테이블 아래로 내 무릎을 툭 쳤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잘생겼다.’
나는 바로 눈으로 욕했다.
‘미쳤어?’
하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하는 얼굴이었다.
부정하기 어려워서 더 짜증났다.
이태건은 확실히 눈에 띄는 얼굴이었다.
잘생겼다는 말로 끝내기엔 분위기가 너무 날카로웠고, 무섭다고 하기엔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웃지 않아도 사람을 보게 만드는 얼굴. 가까이 있으면 괜히 긴장하게 되는 타입.
나는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윤이는 뭐 먹어?”
내가 묻자, 도윤이 바로 대답했다.
“계란!”
“계란 좋아해?”
“응. 아빠는 못 해.”
태건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하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요리 못해?”
도윤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밥 까매.”
“밥이 왜 까매?”
“탔어.”
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태건이 나를 봤다.
“웃기냐.”
“조금요.”
“많이 웃는 얼굴인데.”
나는 바로 표정을 정리했다.
“아니거든요.”
“아닌 척은.”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체 왜 이런 말투가 자연스러운 건데.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툭툭 말을 던지는 태도가 불편했다. 더 불편한 건, 내가 그 말에 하나하나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도윤은 작은 주먹밥을 야무지게 먹기 시작했다. 손에 밥풀이 묻자 내가 휴지를 내밀었고, 도윤은 당연하다는 듯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누나.”
나는 손가락에 묻은 밥풀을 닦아주었다.
“천천히 먹어. 목 막혀.”
“응.”
태건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느껴져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요.”
“잘하네.”
“그 말 아까도 했어요.”
“진짜라서.”
“저 애 본 적 거의 없어요.”
“그런데도.”
태건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도윤이가 너한테 손부터 뻗었어.”
“애들은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그의 대답이 이상하게 단호했다.
“도윤이는 사람 안 믿어.”
나는 도윤을 내려다봤다.
아이는 주먹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볼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모습만 보면, 사람을 안 믿는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왜요?”
묻고 나서 아차 싶었다.
너무 깊이 들어간 질문일지도 몰랐다.
태건의 눈빛이 잠깐 어두워졌다.
“그냥.”
역시.
그는 말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분식집 안은 점심시간이라 금세 시끄러워졌다. 주변 테이블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많았다. 처음엔 그냥 식사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태건, 도윤, 그리고 나를.
“저 사람 이태건 맞지?”
“애기 진짜 귀엽다.”
“근데 여자 누구야?”
“아까 복도에서 같이 있던 애 아냐?”
속삭임은 생각보다 잘 들렸다.
나는 젓가락을 든 손에 힘을 줬다.
하린도 눈치를 챘는지 목소리를 낮췄다.
“민서야,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거짓말이었다.
입학 첫날부터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건 생각보다 피곤했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관심받는 순간, 그 관심은 오래지 않아 소문이 됐다. 소문은 늘 진실보다 빨랐고, 설명은 늘 한발 늦었다.
나는 그런 걸 피하고 싶어서 조용히 살았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는 소문이 사람 형태로 앉아 있었다.
이태건.
그는 주변 시선에 익숙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도윤의 물컵을 챙겼다. 빨대를 꽂아주고, 아이가 너무 세게 빨지 않게 컵을 살짝 잡아주었다.
“뜨거워. 천천히.”
“응.”
“흘리지 말고.”
“응.”
아이와 말할 때도 다정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정했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정말 그랬다.
태건은 부드러운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도 행동은 한 번도 아이를 놓치지 않았다. 입가에 묻은 밥풀을 닦아주고, 의자가 밀리지 않게 발로 살짝 받치고, 아이가 기침하자 바로 물을 내밀었다.
저게 전부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많은 밤을 지나야 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태건과 눈이 마주쳤다.
“왜.”
“아니에요.”
“쳐다봤잖아.”
“그냥…….”
나는 적당한 말을 찾다가 실패했다.
“의외라서요.”
“뭐가.”
“애 잘 챙기는 거.”
태건은 잠시 말이 없었다.
“못 챙겨.”
“방금 잘 챙겼잖아요.”
“그건 안 까먹으려고 외운 거고.”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안 까먹으려고 외운 것.
밥을 얼마나 식혀야 하는지.
컵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아이가 기침할 때 뭘 먼저 줘야 하는지.
테이블 모서리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그에게는 외워야 겨우 할 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내가 말했다.
태건의 시선이 내게 멈췄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근데 못하면 애가 다쳐.”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장난처럼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짧은 한마디 안에, 그가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지 조금 보인 것 같았다.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겁내는 남자.
그게 이태건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때 하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하린은 화면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어…… 민서야.”
“왜?”
“우리 과 단톡.”
그 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뭐?”
하린이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단톡방에는 이미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야 이거 봄?]
[아까 인문관 복도에서 이태건 애기 봤대]
[애가 어떤 여자한테 안 떨어졌대]
[그 여자 우리 과 신입생이라는데?]
[이태건 애 엄마 아니냐?]
마지막 문장을 보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직 사진은 없었다.
다행히 사진은 없었다.
그런데 사진이 없다고 해서 소문이 멈추는 건 아니었다.
하린이 급히 말했다.
“사진은 없어. 아까 지워서 그런가 봐. 그냥 말로만 도는 것 같아.”
“말로만 도는 게 더 무서워.”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빈칸을 싫어한다.
정확한 사실이 없으면 상상으로 채운다.
그리고 상상은 대체로 현실보다 더 자극적이다.
이태건이 내 표정을 봤다.
“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린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단톡에…… 조금 이상하게 올라왔어요.”
태건이 손을 내밀었다.
“보여줘.”
하린은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건넸다.
태건은 화면을 한 번 훑었다.
그의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신경 쓰지 마.”
그가 말했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요?”
“어.”
“지금 저를 애 엄마로 오해하는데요?”
“아니면 됐잖아.”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뭐라고 해명할 건데.”
“사실대로요. 길 잃은 아이 도와줬다고.”
“믿을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재미있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을 테니까.
태건은 휴대폰을 하린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태연하게 물컵을 도윤 앞으로 밀었다.
“그럼 그냥 둬.”
“그냥 두라고요?”
“며칠 지나면 딴 얘기 나오겠지.”
“그 며칠 동안 저는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
도윤이 놀란 듯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바로 입술을 다물었다.
태건의 시선이 잠깐 도윤에게 갔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미안.”
짧았다.
너무 짧아서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미안하다고.”
“이태건 씨가요?”
“씨 하지 말라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중요한데.”
“사과를…… 할 줄 아네요.”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너무 무례했나 싶었다.
하지만 태건은 화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나를 보다가 낮게 웃었다.
“너 나를 뭐로 기억하는 거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학.
싸움.
소문.
차가운 눈.
복도 끝에 서 있던 검은 교복.
말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런데 태건이 먼저 말했다.
“괴물?”
나는 숨이 멎었다.
“그런 뜻 아니었어요.”
“비슷하잖아.”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물을 마셨다.
“다들 그렇게 봤어.”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걸렸다.
나는 그를 무서워했다.
피했다.
소문만 듣고 판단했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그를 그렇게 봤으니까.
도윤이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 쪽으로 작은 주먹밥을 내밀었다.
“누나, 먹어.”
나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고마워.”
“맛있어.”
“응. 맛있네.”
밥은 미지근했고, 손에 조금 달라붙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도윤은 만족한 듯 웃었다.
태건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유민서.”
“네.”
“오늘 일은 내가 정리해.”
“어떻게요?”
“내 방식대로.”
그 말이 제일 불안했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뭘 상상했길래.”
“그쪽 방식이면 누가 다칠 것 같아서요.”
태건의 눈매가 아주 살짝 가늘어졌다.
“나 이제 안 그래.”
조용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장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받아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바깥 공기가 조금 차가웠다. 3월 초의 햇빛은 따뜻해 보여도 바람 끝은 아직 겨울을 붙잡고 있었다.
도윤은 졸린지 태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태건은 아이를 한쪽 팔로 고쳐 안았다.
“너 다음 강의 어디야.”
“왜요.”
“데려다줄게.”
“필요 없어요.”
“소문 돌았다며.”
“그래서 더 같이 다니면 안 되죠.”
“혼자 가면 더 쳐다볼걸.”
얄밉게도 맞는 말이었다.
하린이 옆에서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도 있어요.”
태건은 하린을 봤다.
“너는?”
“저도 같은 강의요.”
“그럼 셋이 가.”
“넷이죠. 도윤이까지.”
하린이 그렇게 말하자 도윤이 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나도 가?”
태건이 아이 머리를 손바닥으로 살짝 눌렀다.
“넌 자.”
“싫어. 누나.”
도윤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못 본 척하려 했다.
하지만 도윤의 눈이 너무 졸리고, 너무 믿고 있었다.
결국 나는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도윤이 다시 그 손을 잡았다.
멀리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사진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시선은 있었다.
이태건은 내 옆을 걸었다.
딱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 가까운 듯 멀고, 멀다고 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유민서.”
“왜요.”
“너 아직도 나 무서워하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섭냐고 묻는다면, 무섭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저 남자가 나를 해칠까 봐 무서웠다.
지금은, 저 남자를 조금 더 알게 될까 봐 무서웠다.
“조금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태건은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럼 도망가야지.”
“그러고 싶은데.”
“그런데?”
나는 도윤의 손을 내려다봤다.
“얘가 안 놔요.”
태건이 낮게 웃었다.
“도윤이 핑계 대네.”
“그쪽이 먼저 댔잖아요.”
“나야 아빠니까.”
아빠.
그 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는데도, 이상하게 어딘가 비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묻고 싶었다.
정말 아빠냐고.
도윤이는 왜 태건을 아빠라고 부르는지.
왜 서류 가방 대신 아이 가방을 들고 캠퍼스에 나타났는지.
왜 사람들 시선에는 무심한데, 도윤이 무서워한다는 말에는 바로 멈추는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아직은.
강의동 앞에 도착했을 때, 하린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 자리 잡고 있을게.”라는 말과 함께였지만, 표정은 누가 봐도 ‘둘이 얘기해’였다.
배신자.
나는 하린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다시 태건을 봤다.
“이제 가세요.”
“수업 끝나고.”
“네?”
“도윤이 어린이집 데려가야 하는데, 너 잠깐만 같이 가.”
나는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같이 가자고.”
“제가 왜요?”
“도윤이가 너 찾을 거니까.”
“그걸 왜 당연하게 말해요?”
“당연하니까.”
“이태건 씨.”
“태건.”
“네?”
“씨 붙이지 말라고.”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바람이 불어 그의 앞머리가 살짝 흐트러졌다. 도윤은 그의 어깨에 기대 잠들기 직전이었다. 아이를 안은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운데, 이상하게 그 차가움이 나를 향해 날을 세운 것 같지는 않았다.
“수업 끝나고 여기 있어.”
“싫다면요?”
“그러면.”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내가 기다리지.”
그 말이 왜 그렇게 심장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붙잡겠다는 말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었다.
그냥 기다리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태건이 하면 이상하게 달랐다.
마치 내가 오지 않아도, 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을 사람처럼 들렸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건은 더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도윤의 작은 손을 들어 내 쪽으로 살짝 흔들어 보였다.
“누나, 빠빠.”
잠에 취한 도윤이 중얼거렸다.
나는 결국 작게 손을 흔들었다.
“빠빠.”
태건이 돌아섰다.
검은 후드 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하린에게 온 메시지였다.
[민서야 큰일남]
[아까 그 소문]
[우리 과 단톡 말고 에타에도 올라왔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바로 화면을 열었다.
익명 게시판 첫 줄에 제목 하나가 떠 있었다.
[인문관에서 이태건 애 엄마 봄]
그리고 그 아래, 댓글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 특별외전 2화. 나를 선택한 사람- 태건시점 - 결혼 다음 날, 나는 민서가 도윤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며 눈을 떴다.도윤의 발이 민서의 뺨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민서는 아이의 발목을 잡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고, 도윤은 잠든 채 다시 다리를 뻗었다.“도윤아.”민서가 낮게 불렀다.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이 덜 깬 채 대답했지만 민서가 웃는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이상한 아침이었다.도윤은 내 옆에서 자고 있었고, 민서는 같은 반지를 낀 채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우리 침대였다.나는 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우리 집.우리 방.우리 침대.민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이었다.처음 본 유민서는 지나치게 태연했다.길을 잃은 도윤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울리지 않았고, 내가 나타났을 때 겁먹은 얼굴로 물러나지도 않았다.오히려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도윤이 아빠 맞아요?”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도윤이 나를 아빠라고 불렀는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맞는데.”내가 대답하자 민서는 도윤을 바로 넘겨주지 않았다.“그럼 아이가 왜 혼자 있었어요?”첫 만남부터 따졌다.나는 그게 싫었다.도윤을 잃어버린 사람은 나였고, 아이를 찾을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내가 부족한 아빠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잠깐 놓친 거야.”“잠깐이어도 아이는 무서웠을 수 있잖아요.”민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래서 더 싫었다.나는 틀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수 있었다.맞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부터 마주해야 했다.그런데 도윤은 민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누나도 가.”도윤이 말했다.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아이는 원래 낯선 사람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처음 보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 특별외전 1화. 내가 먼저 고른 사람-민서 시점 - 결혼 다음 날 아침,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태건의 얼굴이 아니었다.도윤의 발바닥이었다.정확히는 내 뺨 옆에 놓인 작은 발이었다.나는 눈을 뜬 채 한동안 그 발을 바라봤다.어젯밤 분명 도윤을 가운데 눕혔다. 그런데 자는 동안 세로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이의 머리는 태건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고, 두 다리는 내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도윤아.”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발을 살짝 밀자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내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결혼 첫날밤의 다음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나는 결국 도윤의 발을 붙잡아 이불 안으로 넣었다.그때 태건이 눈을 떴다.“왜.”“네 아들이 나 걷어찼어.”태건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도윤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이런 아침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이태건을 처음 봤을 때의 나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장면이었다.그날의 태건은 무서운 사람이었다.검은 옷.굳은 표정.사람을 믿지 않는 눈.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아빠.”도윤이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나는 내가 알던 세상의 규칙 하나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저런 사람이 아빠라고?그것도 저렇게 작은 아이의?나는 처음부터 태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그가 도윤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더 의심했다.아이는 왜 혼자 있었는지.태건은 왜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지.아이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은 맞는지.지금 생각하면 태건 역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 것이다.자기 아이 옆에 붙어 있으면서 계속 따지는 여자.그런데도 나는 떠나지 않았다.도윤이 내 손가락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때는 아이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대단한
#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결혼을 정한 다음 날.태건과 민서는 하연을 먼저 만났다.장소는 도윤이 자주 가는 어린이도서관 근처 카페였다. 도윤과 하연의 정기 만남이 없는 날이라 세 사람만 마주 앉았다.하연은 민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태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짧은 말이었다.하연의 시선이 태건에게서 민서에게로 옮겨 갔다.놀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축하해.”“고마워.”민서가 대답했다.하연은 물잔을 만지며 잠시 생각했다.“도윤이한테는 말했어?”“아직.”태건이 말했다.“너한테 먼저 알리기로 했어.”하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허락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윤보다 먼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결혼하면 바로 달라지는 게 있어?”하연이 물었다.“생활은 지금이랑 비슷해.”민서가 대답했다.“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도윤이 돌봄은?”“지금처럼 태건이가 주로 맡고요.”민서는 준비해 온 말을 천천히 꺼냈다.“저도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만큼 제가 선택한 범위에서는 함께할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하연 씨와의 일정은 두 분이 계속 직접 조율해 주세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서 씨한테 엄마 역할을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알아요.”“도윤이가 결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엄마가 바뀐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부터 설명하려고.”태건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엄마는 그대로 너라고.”하연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렸다.도윤의 엄마라는 자리를 확인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자신이 그 자리를 온전히 지켜 온 사람도 아니었다.그런데 태건은 하연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가족식은 작게 하려고 해.”태건이 말했다.“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는 정도로.
#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토요일 오후.도윤은 준우네 집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갔다.태건은 아침부터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네 시에 데리러 가는 거 맞지?”민서가 물었다.“응.”“그럼 세 시간밖에 없네.”“결혼 이야기하는 데 세 시간이 부족해?”태건은 소파에 앉아 민서를 바라봤다.민서는 식탁 위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두고 있었다.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뭐야.”“내가 준비한 말.”“결혼 이야기하는데 서류가 필요해?”“필요해.”민서는 종이를 태건 쪽으로 밀었다.가장 위에는 두 사람의 현재 생활이 적혀 있었다.태건의 센터 근무와 소득.민서의 학업과 프로젝트 일정.공동생활비 분담.도윤의 양육비와 돌봄 체계.하연과의 정기 만남.태건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이거 우리 집 구할 때 다 이야기한 거잖아.”“결혼하면 달라지는 게 있으니까 다시 보는 거야.”“뭐가 달라져.”“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거.”민서는 옆에 놓인 자료를 펼쳤다.혼인신고 이후 달라지는 법적 관계와 재산 관리, 의료 상황에서의 보호자 지위, 주거 계약과 세금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이었다.태건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민서를 바라봤다.“이걸 다 알아봤어?”“응.”“언제.”“네가 계속 결혼 이야기할 때부터.”태건은 서류를 다시 내려다봤다.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런데 정작 결혼이 두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좋아하고, 함께 살고, 오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민서는 마음이 부족해서 자료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오래 함께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결혼하면 내 빚도 네가 책임져야 해?”민서가 물었다.태건의 표정이 굳었다.“빚 있어?”“없어.”“그럼 왜 물어.”“서로 모르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고.”민서는 질문 목록을 꺼냈다.학자금 대출.개인 채무.보험.저축.가족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돈.태건은
#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도윤의 유치원 발표회 날.태건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도윤의 흰 셔츠를 다리고, 바지 주름을 펴고, 유치원에서 보내 준 안내문을 세 번 확인했다.준비물은 없었다.보호자는 열 시까지 강당으로 오라는 내용뿐이었다.그런데도 태건은 도윤의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아빠.”잠옷 차림의 도윤이 방문에 기대 서 있었다.“왜.”“오늘 가방 안 가져가.”태건의 손이 멈췄다.“알아.”“그런데 왜 봐?”“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해서.”“없어.”도윤은 하품을 하며 욕실로 걸어갔다.“나 노래 안 틀리게 해야 돼.”“집에서 계속 불렀잖아.”“친구들이 틀리면 나도 틀릴 수 있어.”태건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지.”도윤이 욕실 앞에서 돌아봤다.“틀려도 돼?”“응.”“선생님 안 화내?”“발표회는 시험 아니야.”도윤은 안심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민서는 그때까지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전날 프로젝트 회의가 늦게 끝난 탓이었다.태건은 침실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발표회 보호자는 자신과 하연이었다.민서는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도윤이 직접 정한 일이었고, 민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그런데 태건은 괜히 침실 안을 한 번 더 바라봤다.민서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이미 함께 돌아올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하연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짙은 남색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손에는 작은 꽃다발도, 선물도 없었다.유치원에서 꽃과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아 달라고 안내했기 때문이었다.“엄마.”도윤이 하연을 발견하고 뛰어갔다.태건은 따라가지 않았다.하연이 아이 앞에 몸을 낮췄다.“긴장돼?”“조금.”“엄마도 조금 긴장돼.”“엄마는 노래 안 하잖아.”“도윤이 보는 게 처음이니까.”도윤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같이 들어가.”하연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강당에는
#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엄마, 내 집 봐.”도윤이 하연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연은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거실 바닥에는 새 수납장이 놓여 있었고, 민서의 책상 옆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조명이 기대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태건의 겉옷과 도윤의 작은 가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는 일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보였다.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누구의 물건이 어디에 놓이는지.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어떤 생활이 만들어졌는지.“잠깐 보고 가세요.”민서가 다시 말했다.하연은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실례할게요.”“엄마, 여기.”도윤은 하연이 신발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작은방으로 데려갔다.방문 안쪽에는 자동차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창문 아래 낮은 침대에는 공룡 이불이 깔려 있었다.벽 한쪽 수납장에는 자동차와 기차가 줄을 맞춰 들어가 있었다.“이게 파란 자동차.”도윤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민서의 이전 집에 두고 다니던 장난감이었다.“누나 집에 있던 거 기억나?”하연은 자동차를 받아 들지 않고 아이가 든 모습을 바라봤다.“응. 도윤이 자리라고 했던 거.”“이제 여기 있어.”“좋겠다.”“엄마 집에도 내 거 있어?”질문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하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응.”태건이 그녀를 바라봤다.하연은 도윤에게 설명했다.“지난번에 같이 산 기차책이랑 도윤이 쓰는 컵 하나 있어.”“내 컵?”“초록색.”“왜 나한테 안 보여 줬어?”“도윤이가 엄마 집에 올 수 있게 되면 보여 주려고 했어.”도윤은 곧바로 물었다.“나 언제 가?”하연은 태건 쪽을 보지 않았다.도윤에게 묻고, 태건이 대신 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피하지 않았다.“아직 날짜는 안 정했어.”“왜?”“엄마 집에서 도윤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아빠랑 먼저 확인해야 해.”“침대 있어?”“도윤이가 낮잠 잘 수 있는 자리부터 만들려고.”도윤은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내 침대는 여기 있는데.”“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