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누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희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대답했다."말해봐.""그게, 오늘 회사에서 진혜리 씨가요—"그때 수화기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야, 이동현. 너 지금 뭐해."재원이었다.희수는 핸드폰을 내리지 않았다. 그냥 들고 있었다. 동현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 대리님. 저 그냥 개인 통화 중이었어요.""누구랑.""그, 그냥 아는 사람이요.""핸드폰 줘봐.""네?""희수 목소리 들렸어. 줘봐."잠깐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희수는 미용실 의자에 앉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재원이 동현한테서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것 같았다. 동현이 버티는 것 같았다."대리님, 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나한테 하면 되잖아.""그게... 대리님 얘기라서요."재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뭔데."동현이 잠깐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오늘 진혜리 씨가 대리님한테 좀 심하게 붙더라고요. 복도에서 팔도 잡고. 대리님이 빼셨는데 혜리 씨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서. 누님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한 거예요."희수는 핸드폰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재원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걸 왜 희수한테 말해.""누님이 알아야 하지 않아요?""내가 처리할 거야.""대리님이 모르셨잖아요. 혜리 씨가 대리님 좋아하는 거."희수는 그 말을 들으며 숨을 살짝 참았다. 재원이 몰랐다. 혜리가 재원을 좋아한다는 걸. 그리고 동현은 알고 있었다. 희수는 이 대화를 듣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재원이 낮게 말했다."알았어. 끊어.""누님한테—""내가 한다고."뚝.전화가 끊겼다.희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않고 잠깐 그대로 있었다. 재원이 알았다고 했다. 내가 처리한다고 했다. 동현한테 끊으라고 했다. 그 말들이 순서대로 머릿속에서 재생됐다.재원이 몰랐다는 게 먼저 들어왔다. 혜리가 재원을 좋아한다는 걸. 집안끼리 친하고 오래 알던 후배인데, 그 후배가 재원을 좋아한다는 걸 재원 본
수요일 오전이었다.재원이 회의실에서 나오는데 복도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오빠!"진혜리였다. 입사 첫 주라 아직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재원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모습이 꽤 반가워 보였다. 재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적응은 돼?""아직 좀 헷갈려요. 오빠가 옆에 있으니까 든든하긴 한데.""모르는 거 있으면 팀장한테 물어봐. 내가 일일이 봐줄 시간은 없어.""에이, 그래도 오빠잖아요."혜리가 웃으며 재원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재원은 팔을 빼며 서류를 고쳐 들었다."점심 같이 먹어요. 아는 사람이 오빠밖에 없어서요.""오늘은 일정 있어.""그럼 다음에요. 오빠네 엄마가 저희 엄마한테 잘 챙겨주라고 했다고요."재원은 짧게 대꾸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장면을 복도 끝에서 지켜보던 이동현이 자리로 돌아오며 혼잣말을 했다."저 누나 좀 적극적이네."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이었지만, 동현은 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았다. 재원이 팔을 뺀 것도, 혜리가 그걸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것도.동현은 핸드폰을 꺼내 잠깐 보다가 다시 넣었다.누님한테 말해야 하나. 말하지 말아야 하나.동현은 모니터를 보는 척하면서 생각했다. 재원이 팔을 뺀 건 그냥 불편해서일 수도 있었다. 재원은 원래 스킨십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근데 혜리가 그걸 신경 안 쓰고 계속 붙으려는 게 동현 눈엔 보였다. 저게 그냥 친한 후배가 오빠한테 하는 행동인지, 아닌지.동현은 재원이 희수 누님 얘기를 꺼낼 때 표정이 달라진다는 걸 알았다. 91화 그날 이후로 희수가 미용실 오는 날이랑 아닌 날의 재원이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그 재원이 저 후배한테 어떻게 대하는지도 봤다. 딱히 특별하게 대하는 게 없었다. 그냥 아는 후배였다.근데 혜리 쪽이 문제였다.동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놨다. 일단 좀 더 보기로 했다. 괜히 말했다가 희수 누님 괜한 걱정 끼치면 안 됐다. 근데 또 말 안 했다가 나중에 더 큰일 나면 그것도 문제였다.이동현의 고민은 계속됐다.-
토요일 오후였다.희수는 미용실 마감을 끝내고 앞치마를 벗었다. 오늘 마지막 손님이 나간 지 십 분쯤 됐을 때 재원이 들어왔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이었다."오늘 일찍 왔네.""회의가 일찍 끝났어."예전엔 저 말이 달력 확인이랑 세트였는데, 요즘은 달랐다. 그냥 들어오자마자 희수 얼굴 보고, 다 끝났냐고 묻고, 옆에 서는 거였다. 희수는 그 변화가 아직도 새로웠다."밥 먹었어?""점심은 먹었어. 저녁은 같이 먹으려고.""뭐 먹고 싶어?"재원이 잠깐 생각했다."네가 먹고 싶은 거."희수는 픽 웃었다. 저 말도 변한 거였다. 예전엔 삼겹살 같은 걸 딱 짚어서 말하던 남자가, 요즘은 희수한테 먼저 물어봤다. 작은 것 같아도 작지 않은 변화였다."그럼 파스타 먹자. 근처에 새로 생긴 데 있어.""그러자."둘이 나란히 미용실을 나섰다. 재원이 자연스럽게 희수 손을 잡았다. 희수는 그 손을 잡으며 걸었다.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저녁이었다. 이런 저녁이 요즘 부쩍 늘었다. 별일 없고, 싸우지 않고, 그냥 같이 있는 저녁.희수는 그게 좋았다. 이렇게 편안한 게 오히려 낯설 정도로.재원이랑 처음 다시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철벽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공과 사 구분한다고 로비에서 돌려보내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지금은 희수가 먹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고, 좋다는 말 두 글자를 꺼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과정이 다 보여서 더 좋았다.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계속 바뀌려고 하는 사람이라서.희수는 재원 손을 살짝 더 꽉 쥐었다.재원이 눈치챘는지 손에 힘을 살짝 더 줬다. 말은 없었다. 그래도 됐다.---파스타집은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었다.둘이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재원이 메뉴판을 보다가 희수한테 건넸다. 희수가 고르는 동안 재원은 창밖을 봤다. 저녁 거리가 조용히 흘러갔다.주문을 마치고 나서 재원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요즘 어때?""뭐가?""그냥. 요즘."희수는 잠깐 재원을 봤다. 저런 질문을 하는 남
네 번째 곡이 시작될 때였다.시윤은 기타를 치면서 무대 아래를 한 번 훑었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노래하는 동안 객석을 보는 것. 누가 듣고 있는지, 어떤 표정으로 듣고 있는지. 십 년 넘게 무대에 서면서 몸에 밴 버릇이었다.구석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비어 있었다.시윤은 기타 줄을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이 코드를 짚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노래도 계속됐다. 그런데 그 빈자리가 계속 시야에 걸렸다. 희수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공연 시작 전에 확인했었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희수를.언제 나간 거지.네 번째 곡이 끝났다. 박수 소리가 났다. 시윤은 마이크 앞에서 고맙다고 했다. 다섯 번째 곡을 소개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나왔다. 그런데 머릿속은 달랐다.네 번째 곡은 희수 때문에 쓴 곡이었다. 오래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희수 쪽을 봤었다. 눈이 마주쳤는지 안 마주쳤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직후에 자리가 비었다.시윤은 다섯 번째 곡의 첫 코드를 짚으며 조용히 생각했다.알아챈 건가.시윤은 다음 코드를 짚으면서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은 노래에 집중해야 했다. 여기 온 사람들은 희수 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 음악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시윤은 그 사람들한테 집중해야 했다.그런데 빈자리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오늘 공연 초대를 받아준 사람이 희수 하나였다는 건 아니었다. 지인들도 왔고, 팬들도 왔다. 그런데 유독 희수한테 직접 카드를 건넸던 건, 시윤도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냥 왔으면 했다. 이 공간에서, 이 노래를 들어줬으면 했다.그게 이미 선을 넘은 거라는 걸 알면서도.---공연이 끝나고 나서 시윤은 카페 안을 한 번 둘러봤다.희수는 없었다. 당연했다. 공연 중간에 나갔으니까. 시윤은 장비를 정리하면서 카페 주인과 짧게 얘기를 나눴다. 오늘 공연 잘 됐다고, 다음에 또 하자고.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마무리였다.그런데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 조금 이상했다.뭉게가 리드줄을
재원은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정확히는, 핸드폰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뉴스도 아니고, 유튜브도 아니고, 그냥 바탕화면이었다. 재원은 그 바탕화면을 멍하니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일곱 시 삼 분.공연이 시작됐을 시간이었다. 지금쯤 희수는 카페 안에 앉아서 시윤의 노래를 듣고 있겠지. 재원은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는데, 지워지지 않았다. 지우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졌다.재원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집어 들었다. 내려놨다가 다시 집어 드는 걸 세 번쯤 반복했다.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다. 본인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맞는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희수의 일정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믿어주는 게 맞는 거였다. 머리로는 정리가 됐다.근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일곱 시 십칠 분.재원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부엌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가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희수한테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참았다. 공연 중에 문자 보내는 건 방해가 될 것 같았다.그러다가 핸드폰이 울렸다.💬 희수: 나 집에 가고 싶어.재원은 그 문자를 세 번 읽었다.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차 키를 집었다.코트를 걸치는 것도 잊고 그냥 나갔다.나중에 코트를 안 입었다는 걸 깨달은 건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 때였다. 차가운 공기가 팔에 닿았는데, 돌아가기 싫었다. 그냥 탔다. 희수가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문자 세 글자가 재원을 소파에서 일으켰다. 이유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재원은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을 때, 희수가 공연장에서 연락해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끝나고 연락하겠지 했는데, 공연 중간에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재원은 운전하는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카페 앞에 차를 세운 건 일곱 시 사십오 분이었다.공연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카페 안에서
금요일 저녁이었다.재원이 희수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나서 차에서 내렸다. 평소처럼 현관 앞까지 배웅하며 걸었다. 희수는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돌아섰다."자기야, 나 할 말 있어."재원이 멈췄다."뭔데.""내일 시윤 씨 공연 가도 돼?"돌려말하지 않았다. 희수답게 직구였다. 재원은 잠깐 희수를 봤다. 희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알리는 거였다. 그리고 재원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고 싶다는 것도 있었다.재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희수는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이 남자가 빠르게 대답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지금 뭔가를 꽤 열심히 정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가로등 불빛이 재원의 얼굴을 비췄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턱선이 살짝 굳어 있었다."음악 좋아서 가는 거야?""응.""...그것만이야?"희수는 잠깐 멈칫했다. 재원이 저 질문을 할 줄 몰랐다. 그냥 가지 말라고 하거나, 아니면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줄 알았는데."...솔직히 잘 모르겠어. 음악이 좋아서가 제일 크긴 한데."재원이 시선을 내렸다. 희수는 그 얼굴을 보면서 가슴이 조금 조여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는 건지 잠깐 흔들렸다. 그런데 돌려말하는 건 더 나쁜 것 같았다.한참 후에 재원이 고개를 들었다.희수는 그 순간 숨을 살짝 참았다. 재원이 어떤 말을 할지 몰랐다.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희수가 원하는 건 둘 다 아니었다. 재원이 본인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는 것, 그게 희수가 원하는 거였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도.재원의 입이 열렸다."가고 싶으면 가."---"...진짜?""응."짧고 단호했다. 그런데 귀 끝이 붉었다. 희수는 그 귀를 보면서 재원이 지금 얼마나 힘들게 저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자기야.""응.""고마워."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희수를 봤다.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 재원의 루틴이 오늘은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12:30 / 15:40 / 18:00] 같이 칼같이 들어오던 보고였다.희수는 처음엔 “바빴겠지” 하고 넘겼다.하지만 점심시간도, 퇴근 시간도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왜 보고 안 해…?’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희수에게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선물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희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진심을 담아 길게 메시지를 보냈다.[자기 늦어도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재원이 아침부터 보내는 ‘초건조 모드’를 보며슬슬 불쾌함이 쌓여갔다.[회의들어간다] 09:30[끝났다] 10:10[밥먹고 쉰다] 12:31[일하는 중] 13:05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유난히 ‘정보만 던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심지어 온도도 없음.희수는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나름의 감정을 조금씩 섞었다.[나 지금 밥먹었어!] 13:30[오늘 손님 많아 ㅠㅠ 지쳐어~] 14:25그런데 돌아오는 답은—[네에] 15:40[집이다 쉰다] 15:4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