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원은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정확히는, 핸드폰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뉴스도 아니고, 유튜브도 아니고, 그냥 바탕화면이었다. 재원은 그 바탕화면을 멍하니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일곱 시 삼 분.공연이 시작됐을 시간이었다. 지금쯤 희수는 카페 안에 앉아서 시윤의 노래를 듣고 있겠지. 재원은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는데, 지워지지 않았다. 지우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졌다.재원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집어 들었다. 내려놨다가 다시 집어 드는 걸 세 번쯤 반복했다.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다. 본인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맞는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희수의 일정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믿어주는 게 맞는 거였다. 머리로는 정리가 됐다.근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일곱 시 십칠 분.재원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부엌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가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희수한테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참았다. 공연 중에 문자 보내는 건 방해가 될 것 같았다.그러다가 핸드폰이 울렸다.💬 희수: 나 집에 가고 싶어.재원은 그 문자를 세 번 읽었다.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차 키를 집었다.코트를 걸치는 것도 잊고 그냥 나갔다.나중에 코트를 안 입었다는 걸 깨달은 건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 때였다. 차가운 공기가 팔에 닿았는데, 돌아가기 싫었다. 그냥 탔다. 희수가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문자 세 글자가 재원을 소파에서 일으켰다. 이유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재원은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을 때, 희수가 공연장에서 연락해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끝나고 연락하겠지 했는데, 공연 중간에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재원은 운전하는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카페 앞에 차를 세운 건 일곱 시 사십오 분이었다.공연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카페 안에서
금요일 저녁이었다.재원이 희수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나서 차에서 내렸다. 평소처럼 현관 앞까지 배웅하며 걸었다. 희수는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돌아섰다."자기야, 나 할 말 있어."재원이 멈췄다."뭔데.""내일 시윤 씨 공연 가도 돼?"돌려말하지 않았다. 희수답게 직구였다. 재원은 잠깐 희수를 봤다. 희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알리는 거였다. 그리고 재원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고 싶다는 것도 있었다.재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희수는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이 남자가 빠르게 대답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지금 뭔가를 꽤 열심히 정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가로등 불빛이 재원의 얼굴을 비췄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턱선이 살짝 굳어 있었다."음악 좋아서 가는 거야?""응.""...그것만이야?"희수는 잠깐 멈칫했다. 재원이 저 질문을 할 줄 몰랐다. 그냥 가지 말라고 하거나, 아니면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줄 알았는데."...솔직히 잘 모르겠어. 음악이 좋아서가 제일 크긴 한데."재원이 시선을 내렸다. 희수는 그 얼굴을 보면서 가슴이 조금 조여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는 건지 잠깐 흔들렸다. 그런데 돌려말하는 건 더 나쁜 것 같았다.한참 후에 재원이 고개를 들었다.희수는 그 순간 숨을 살짝 참았다. 재원이 어떤 말을 할지 몰랐다.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희수가 원하는 건 둘 다 아니었다. 재원이 본인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는 것, 그게 희수가 원하는 거였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도.재원의 입이 열렸다."가고 싶으면 가."---"...진짜?""응."짧고 단호했다. 그런데 귀 끝이 붉었다. 희수는 그 귀를 보면서 재원이 지금 얼마나 힘들게 저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자기야.""응.""고마워."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희수를 봤다.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재원은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아니, 정확히는 감정보다 데이터에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희수가 표정 관리를 잘하는 편이라 웬만해선 티가 나지 않았는데, 요 며칠은 달랐다.퇴근하러 미용실에 들어서면 희수가 핸드폰을 뒤집어 놓는 게 보였다. 한 번은 그냥 넘겼다. 두 번째도 그냥 넘겼다. 그런데 세 번이 되니까 패턴이 보였다. 재원이 들어오기 직전에 뭔가를 보다가 급히 화면을 끄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물어보고 싶었지만, 희수한테 한 소리 들은 게 얼마 되지 않았다. 확인하는 거랑 챙기는 게 다르다고 했다.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 참아야 하는 거였다.그런데 참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목요일 저녁, 차 안에서 재원이 슬쩍 물었다."요즘 뭔가 생각 많아?""응? 왜?""그냥. 좀 달라 보여서."희수가 잠깐 재원을 봤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별거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한가 봐."재원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핸들 잡은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가 있었다. 희수는 그 손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이 남자, 다 알면서 참고 있구나.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재원은 원래 모르는 걸 그냥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업무에서도, 일상에서도, 불확실한 변수가 생기면 반드시 확인하고 정리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희수한테는 그게 안 됐다. 확인하면 또 달력 보던 눈빛이라고 할 것 같았고, 그 말이 무서웠다. 챙기는 게 아니라 감시하는 거라는 말. 그 말 한마디가 재원을 이렇게 묶어두고 있었다.희수는 그걸 알까. 모를 것 같았다.재원은 창밖을 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다음날 오전, 미용실 문이 딸랑거렸다.예약 없는 시간이었다. 시윤이었다. 뭉게 없이 혼자였다."안녕하세요. 갑자기 왔죠?""어서 오세요. 뭉게는요?""오늘은 혼자 왔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희수는 가위를 내려놓으며 시윤을 봤다. 시윤이 카운터 앞에 서서 작은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이
그 주말은 조용히 지나갔다.재원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말이 많아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조심스러워졌다. 희수 일정을 물어볼 때도 예전처럼 달력을 먼저 보는 게 아니라 희수 얼굴을 먼저 봤고, 미용실에 들어올 때도 문을 열자마자 "다 끝났어?" 하고 먼저 물었다.작은 차이였는데, 희수한테는 크게 느껴졌다.일요일 저녁, 재원이 치킨을 사들고 왔다."갑자기 왜?""그냥. 먹고 싶었어.""자기가 치킨을 그냥 먹고 싶어?""왜. 안 되냐."희수는 웃으며 문을 열어줬다.재원은 치킨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면서 희수를 힐끗 봤다."지난번에 내가 좀 답답하게 굴었다.""알아.""그래도 다시 안 그럴게.""그것도 알아."재원이 잠깐 멈췄다가 치킨 뚜껑을 열었다.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거기서 접는 얼굴이었다. 희수는 그냥 앉으며 치킨을 집었다.말 안 해도 됐다.이미 충분히 알았으니까.---화요일 오후였다.뭉게 정기 예약 날이었다. 시윤이 뭉게를 안고 들어오며 가볍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뭐 많이 바쁘셨어요?""그럭저럭요. 어서 오세요."희수는 뭉게를 받아 테이블에 올렸다. 뭉게가 꼬리를 흔들며 희수 손을 핥았다."뭉게 이번엔 밥 잘 먹어요?""네, 완전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걱정 끼쳐드렸죠.""아니에요. 연락 주시는 게 맞아요."시윤이 소파에 앉으며 커피를 뽑았다. 희수가 목욕을 시작할 때쯤 시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원장님, 저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응? 뭔데요?""이번에 앨범이 나왔거든요."희수는 손을 멈추며 시윤을 봤다."앨범이요?""네. 음악 한 지 꽤 됐어요. 인디 씬에서 오래 했는데, 이번에 정규 앨범 처음 냈어요."희수는 잠깐 시윤을 바라봤다. 동네에서 뭉게 산책시키는 남자인 줄만 알았는데, 앨범을 냈다는 말이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얼마나 됐어요? 음악 한 지.""한 십 년 넘었어요. 처음엔 밴드로 시작했다가 솔로로 전향했고, 그러다 인디 레이블이랑 계약하고 싱글 몇 개
그날 이후로 재원이 조금씩 달라졌다.달력을 확인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예전엔 미용실에 들어오자마자 카운터 위 달력으로 시선이 갔는데, 요즘은 들어오자마자 희수 얼굴부터 봤다. 그 순서가 바뀐 게 희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고, 의식해서 바꿨다는 것도 알았다. 의식해서 바꿨다는 건 스스로 뭔가 알아챘다는 뜻이었다.예약 알림 공유 얘기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대신 퇴근 데리러 오기 전에 문자가 왔다.'오늘 몇 시에 끝나?'달력 대신 희수한테 직접 물어보는 방식으로 바꾼 거였다. 희수는 그 문자를 받으면서 잠깐 멈췄다. 방식을 바꿨다는 건 뭔가 생각했다는 뜻이었고, 생각했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말로 먼저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 행동으로 먼저 움직이는 방식. 이 남자 특유의 방식이었다.귀엽다고 생각했다가, 그 생각을 바로 거뒀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방식만 바꿨을 뿐이었고,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대로라는 건 희수도 알았다. 그리고 재원이 그 차이를 아직 모른다는 것도. 언젠간 얘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며칠째 머릿속에 걸려 있었다.그 언젠간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주말 오후, 희수가 미용실 마감을 하고 있을 때 재원이 들어왔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희수가 청소를 마무리하는 동안 재원이 카운터 앞에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는데, 그러다가 시선이 카운터 위 메모지로 갔다. 희수가 손님 연락처를 적어둔 메모지였다.재원의 시선이 딱 한 군데에서 멈췄다. 박시윤. 메모지 한쪽에 적힌 이름과 번호. 희수는 그 시선을 봤고, 재원은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희수는 걸레를 내려놓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자기야.""응.""나 할 말 있어."재원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희수를 봤다. 희수는 카운터 앞에 서서 재원을 똑바로 마주봤다."챙겨주는 거랑 확인하는 거 달라."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수는 계속했다."달력 확인하고, 예약 알림 공유 요청하고, 지금 저 메모지 보
퇴근 후 희수 미용실 앞에 재원의 차가 섰다. 희수가 가방을 들고 나오자 재원이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저녁이었고, 차 안에는 라디오가 낮게 깔려 있었다.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원이 입을 열었다."희수야, 부탁이 하나 있는데.""응, 뭔데?""네이버 예약 알림 나한테도 공유해줄 수 있어?"희수는 잠깐 재원을 봤다. 예약 알림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는데, 재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예약 알림을? 왜?""네가 몇 시에 끝나는지 알아야 데리러 가는 시간 조정이 되잖아. 그리고 쉬는 날 미리 알면 불필요하게 연락하는 것도 줄일 수 있고. 효율적이잖아."논리적이었다. 틀린 말도 없었다. 그런데 희수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예약 알림에는 손님 이름이 다 뜬다. 박시윤 예약도 뜬다. 재원이 그걸 모를 리 없었고, 희수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생각해볼게.""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구글 캘린더 연동하면 되잖아.""알아. 그냥 생각해본다고."재원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입을 다무는 타이밍이 딱 한 박자 늦었고, 그 한 박자가 희수 머릿속에서 꽤 오래 남았다. 효율 때문이라고 했는데, 왜 지금 이 타이밍에 이 얘기가 나오는 건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희수는 창밖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날 오후, 마지막 손님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된 이름이 떴다.💬 박시윤: 원장님, 뭉게가 어제부터 밥을 잘 안 먹고 기운이 없어요. 혹시 미용할 때 뭔가 이상한 거 없었나요?희수는 잠깐 손을 멈췄다. 미용 직후에 이런 증상이 생기면 걱정되는 게 당연했고, 샴푸 알러지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 반응일 수도 있었다. 담당 미용사한테 물어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희수는 마무리 손질을 끝내고 답장을 보냈다.💬 희수: 미용할 때는 이상 없었어요. 혹시 구토나 설사는요?💬 박시윤: 그건 없어요. 그냥 축 처져 있어요.💬 희수: 미용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 재원의 루틴이 오늘은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12:30 / 15:40 / 18:00] 같이 칼같이 들어오던 보고였다.희수는 처음엔 “바빴겠지” 하고 넘겼다.하지만 점심시간도, 퇴근 시간도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왜 보고 안 해…?’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희수에게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선물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희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진심을 담아 길게 메시지를 보냈다.[자기 늦어도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재원이 아침부터 보내는 ‘초건조 모드’를 보며슬슬 불쾌함이 쌓여갔다.[회의들어간다] 09:30[끝났다] 10:10[밥먹고 쉰다] 12:31[일하는 중] 13:05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유난히 ‘정보만 던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심지어 온도도 없음.희수는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나름의 감정을 조금씩 섞었다.[나 지금 밥먹었어!] 13:30[오늘 손님 많아 ㅠㅠ 지쳐어~] 14:25그런데 돌아오는 답은—[네에] 15:40[집이다 쉰다]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