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은영의 마음과 배려는 늘 고마웠다.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것이었다.
장 봐와서 곤란했다는 건 핑계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지내는 건 어쨌거나 고역이어서 역정이 났던 것뿐이었다.
‘뭘 바라냐?’
그런 마음을 애써 지웠다.
그녀가 잠들고 깰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퇴근했던 그녀였다.
그저 갈 곳 없는 몸 의탁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했다.
예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이 많았던 지라 기도도 잘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은영은 나가고 없었다.
‘뭘 일찍부터...’
도대체 출장지가 어디길래 그러나 싶기도 했다.
물이라도 마시려고 주방에 불을 켰을 때, 식탁 위에 놓인 쪽지가 눈에 띄었다.
‘김은수, 혼자 있다고 맨날 김치에다 밥만 먹지 말고 장 봐온 걸로 제대로 된 밥 해먹어라. 용돈 좀 두고 갈 테니까 중간중간 맛있는 거 사먹고.’
은수는 풀썩 웃었다. 교회 가기 전까지 품었던 서운한 감정이 모두 해소되어서.
봉투에는, 그녀가 계모에게 도로 던졌던 그 지폐보다 몇 장이 더 들어 있었다.
휴대폰으로 은영의 번호를 찾아 문자를 남겼다.
‘고마워.’
운전 중인지, 안 읽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일을 그만두고, 은수는 욕실로 들어갔다.
비입-.
읽음 표시 후, 웃고 있는 이모티콘이 액정에 떴다.
-----
띠이잇-.
인터폰 소리에 절로 눈이 뜨였다.
눈이 뻑뻑하고 따가웠다.
비틀대며 일어나자, 이불처럼 그를 덮고 있던 서류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는 인터폰 있는 곳으로 걸었다.
“네.”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일어나셨습니까?]
그 무감한 표정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잠김설정을 해제하자, 말쑥한 차림의 정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
다짜고짜 묻는데도 그는 손에 든 컵을 자연스레 그에게 내밀었다.
“...소파에서 주무신 겁니까?”
서류며 노트북까지 어지러운 광경에 정비서는 물었다.
“...회의 몇 시지?”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재헌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10시입니다.”
체념조로 답하며 정비서는 한숨을 쉬었다.
“늦군. 30분 당겨 봐.”
미간을 구기며 그가 지시했다.
“이사진들 생각 좀 해주십시오.”
택도 없다는 듯, 정비서는 소파와 탁자에 널브러진 서류를 치웠다.
“가정도 있는 분들, 그 쯤 봐주시면 좋지 않습니..?”
“30분.”
커피를 마시며 윗층으로 오르던 재헌은 그 한 마디로 정비서의 말을 끊었다. 그 뒤에는,
탁. 여지없이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정비서는 한숨을 쉬었다.
“30, 분.”
정확히는 말이 한숨이 된 것 같았다.
전날도 아니고, 당일 날 아침 회의 시간이 앞당겨졌다고 통보할 때마다 싫은 소리를 듣는 건 그였다.
너나없이 가정이 있는 그들인데, 아침에 굳이 이렇게 일찌감치 사람을 불러내도 되는 거냐고.
심지어, 대표인 재헌과 비서인 그가 미혼이라서 기혼자들의 애환을 모르는 거라는 비난 아닌 비난도 들어야 했다.
“허, 양호하네, 그래도.”
하루 이틀이냐 싶었다. 그러니 헛웃음도 여유로웠겠지.
정비서는 단톡방에 회의가 앞당겨졌다는 공지를 띄웠다.
띠리리리-.
서류를 모으며 그는 휴대폰과 연결된 블루투스를 켰다.
“네.”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는 항의였다. 이사들은 한사람씩 돌아가며 전화할 터였다.
언제든 하소연은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끝나는 법이라고, 정비서는 탄식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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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서늘했다.
아버지 장례 때문에 한국에 귀국했을 때는 그래도 여름이었는데, 석 달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가을이란 계절이 무색할 정도였다.
“으, 춥다.”
더운 나라에서만 3년을 보낸 그녀였다.
“추워?”
한국의 추위가 새삼스러웠다. ‘재문화 충격’ 이라고, 이런 충격이 없었다.
“허이고, 한겨울에는 꽁꽁 얼어 죽겄네.”
짝지인 영실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중년을 훌쩍 넘긴 영실은 그녀보다 훨씬 선배였다.
일도, 인생도.
“겨울에는 그렇게 추워요?”
오만상을 구기며 걱정스레 되묻는 은수를 보고 영실은 박장대소를 하듯 했다.
은수는 그녀를 ‘조씨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이고, 진짜로 얼어 죽을까 봐 걱정하는겨?”
허허 웃으며 그녀는 휘휘 손사래를 쳤다.
“안 죽어, 안 죽어. 염려 말어.”
영실은 보온병을 기울여 종이컵에 차를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추우니께, 얼른 이거나 한 잔 마셔. 추위를 이렇게 많이 타서 어쩐대?”
영실의 애정어린 한 마디에 은수는 씨익 웃기만 했다.
다른 직원이 수저로 휘휘 저은 믹스 커피를 건네받으며 영실은 푸짐하게 칭찬으로 보답했다.
“아따, 뜨셔서 좋고만.”
함께 일하는 다른 그녀들이 영실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영실은 속정이 깊어 사람을 잘 챙기고 뭘 받으면 말이든 정이든 몇 배로 되갚는 사람이었으니까.
“은수는? 커피 안 마시지?”
“네.”
은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인도에서도, 그들 생활의 일부인 짜이를 그녀는 적응하지 못했다.
원래 커피도 안 마시거니와, 홍차 끓인 물에 우유 넣는 것도 별로였다.
그런 그녀를 위해, 영실은 손수 따끈한 보리차를 담아와 그녀에게 건넸던 것이다.
커피 한 잔과 함께 그녀들의 간소한 수다가 오갔다.
“아까 작업반장이 그러든데, 10시 회의가 9시 반으로 바뀌었다는 구만.”
“9시 반? 왜 또 변덕이랴?”
“사장이 젊은데, 결혼을 안 했다잖여. 그래갖고 결혼한 이사들 사정 안 봐주고 그렇게 회의 시간 바꾸고 그런다대.”
톡 끼어드는 다른 목소리가 이유를 댔다.
꽤 정확했지만,
“에이, 고것이 말이 되야?”
진실은 다 모르니 반박이 일어섰다.
“이 큰 회사를 짊어지고 갈랑께 나 어린 사장이 얼매나 속 시끄럽겄어?”
그래서 중역들을 들들 볶는 걸 거라고.
“워매~, 누가 보믄 성님이 여그 사장 어메인 줄 알겄어.”
속 깊은 소리를 한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그리 말하자,
“인자 알았어? 긍께 잘혀.”
능청스런 답변과 함께 한 번 더 박장대소가 터졌다.
은수는 그런 그들을 내내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회의가 시작하고 마치기까지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종이나 옷만 아니라, 시간도 접을 수 있다면 딱 각을 잡았을 거라며 그들은 혀를 찼다.두 시간이면 될 거라더니, 딱 두 시간을 쓰더라고.“이쯤 되면,”회의에서 썼던 서류를 들고 그의 뒤를 쫓으며,“시계 인간이라고 욕들 할 겁니다.”정비서가 한 소리를 했다.“내 1분이 소중한 만큼 남의 1분도 소중히 여긴 것뿐인데, 왜?”앞만 보고 걸으며 재헌은 말했다.유순한 목소리나 저변에 납이 깔린 듯 묵직했다.“융통성 있게 10분 일찍 끝내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10시 정각에 시작하시던가요.”여전히 그를 나무라고 있었다.융통성없는 그에게 그리 야단칠 수 있는 사람 중 한국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정비서일 터였다.재헌은 픽 웃었다.“12시에, ‘모노스톤’의 김은영 대표와 점심 미팅 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그가 스케쥴을 상기시켰다.“아...”정비서의 목소리에서 심하게 당황한 기운을 느낀 그가 돌아보았다.“왜?”“그게, 오늘 일정을 확인하려고 연락을 했는데, 출장을 갔다네요.”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정비서는 말했다.멈춰 서서 그런 그를 바라보던 재헌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뭐?”“...아무래도,”정비서는 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쪽과의 미팅을 잊은 것 같습니다.”“이 날, 점심 미팅을 주선한 건 그 쪽이었잖아.”재헌은 헛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다시,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거액이 왔다갔다 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이미 투자를 약속하고 일부 투자금을 투입한 거래처와의 약속을 이런 식으로 어길 수는 없었다.못마땅했지만, 재헌은 말없이 끄덕였다.‘이런 경우가...’자신의 시간이 소중하듯 남의 시간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게 그의 집안 가훈이자 회사의 신조였다.시간을 잘 관리하고 운용하는 사람이 사회적 성공에 한 발 더 가까이 가는 거라고.재헌은 생각했다.안목을 믿었으나, 아무래도 김은영은 채 거르지 못한 파트너일지도 모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녀였다.그러니,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눈치 없다는 오해가 따라붙었다.그러나 그녀보다 연배가 몇십 년 차이 나는 그들은 결국, 은수를 따뜻이 포용했다. 이십 대 중반을 넘긴 청년이 청소 일을 삼 개월 넘긴 경우는 그들도 처음이었던 것이다.기특하다는 한 마디가 은수에게는 힘이 되었다.어쩌면 그래서, 은수는 청소일이 힘들었음에도 지금껏 버텼는지도 몰랐다.“암튼,”영실은 남은 커피를 다 마시더니, 종이컵을 한데 모아 버리도록 건네고 일어섰다.“이제는 일어나야지. 회의실이면, 하필 우리 구역이기도 허니께.”영실의 말에, 은수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보리차를 훌떡 마셨다.“한 잔 더 줘?”저에게 맞춰 함께 움직이려는 은수를 영실은 예쁘게 보았다.“아니에요. 지금 가는 거지요?”그녀도 얼른 종이컵을 한데 모아 버리는 곳에 넣고 도구를 챙겼다.“급할 거 없는데...”은수는 눈치가 있거나 약은 기색 하나 없었다.처음에는 답답해서 같이 어떻게 일 할까 고민도 했건만,“그래도, 같이 가야죠.”일 요령은 없어도 곰처럼 우직하게 역할을 다하려는 그 모습이 예뻤다.그렇게 삼 개월이 지났더니, 이제는 제법 손도 빨라졌다.“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내가 혈압약 먹는다는 걸 깜빡했네이.”갑자기 멈춰 선 영실이, 멋쩍게 웃었다.“커피 드셨는데, 괜찮아요?”염려를 담아 묻자,“아침에 한 잔 마시는 건 괜찮대.”별거 아니라며, 그녀는 얼른 다녀오겠다며 걸음을 재촉했다.그녀의 도구까지 챙겨서, 은수는 회의실로 향했다.작업 시간은 9시부터였지만, 회의실이 전담인 두 사람은 서둘러야 했다.“아.”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죄, 죄송합니다.”그 시간에 누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문을 열자마자,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을 줄은.블라우스를 추스르는 여자와 달리,“너무 이르잖아.”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남자는 짜증을 부렸다.“어... 9시 반에 회의가 잡히셨다고...”“어차피 깨끗한데, 15분 만에 끝낼
은영의 마음과 배려는 늘 고마웠다.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것이었다.장 봐와서 곤란했다는 건 핑계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지내는 건 어쨌거나 고역이어서 역정이 났던 것뿐이었다.‘뭘 바라냐?’그런 마음을 애써 지웠다.그녀가 잠들고 깰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퇴근했던 그녀였다.그저 갈 곳 없는 몸 의탁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했다.예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이 많았던 지라 기도도 잘 나오지 않았다.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은영은 나가고 없었다.‘뭘 일찍부터...’도대체 출장지가 어디길래 그러나 싶기도 했다.물이라도 마시려고 주방에 불을 켰을 때, 식탁 위에 놓인 쪽지가 눈에 띄었다.‘김은수, 혼자 있다고 맨날 김치에다 밥만 먹지 말고 장 봐온 걸로 제대로 된 밥 해먹어라. 용돈 좀 두고 갈 테니까 중간중간 맛있는 거 사먹고.’은수는 풀썩 웃었다. 교회 가기 전까지 품었던 서운한 감정이 모두 해소되어서.봉투에는, 그녀가 계모에게 도로 던졌던 그 지폐보다 몇 장이 더 들어 있었다.휴대폰으로 은영의 번호를 찾아 문자를 남겼다.‘고마워.’운전 중인지, 안 읽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일을 그만두고, 은수는 욕실로 들어갔다.비입-.읽음 표시 후, 웃고 있는 이모티콘이 액정에 떴다.-----띠이잇-.인터폰 소리에 절로 눈이 뜨였다.눈이 뻑뻑하고 따가웠다.비틀대며 일어나자, 이불처럼 그를 덮고 있던 서류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는 인터폰 있는 곳으로 걸었다.“네.”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일어나셨습니까?]그 무감한 표정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잠김설정을 해제하자, 말쑥한 차림의 정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커피?”다짜고짜 묻는데도 그는 손에 든 컵을 자연스레 그에게 내밀었다.“...소파에서 주무신 겁니까?”서류며 노트북까지 어지러운 광경에 정비서는 물었다.“...회의 몇 시지?”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재헌은 커피를 한 모금
물론, 그뿐이면 더없이 안쓰러울 김은수이지만 그 순간 건넨 통장이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챙겨.”차례로 나온 음식을 천천히 먹고 있던 은수는,“...이게 뭐야?”갑작스레 제 앞에 놓인 통장을 보고 놀라 물었다.“열어봐.”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통장 같았다.은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통장을 집어 들고는 커버를 열었다.“...이거.”‘김은수.’통장에는 그녀의 이름 석 자가 박혀있었다.“..이건.”동그란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은수에게, 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작은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그것만큼은 꼭 너한테 전해달라고 하셨던 거야. 모르겠다. 작은아버지가 너한테 미안한 게 좀 있으셨던 거였는지도.”그 말은, 계모가 모든 재산을 남김없이 가져갈 거라는 걸 생전의 그가 알았다는 말도 포함된 것 같았다.정말, 통장 안에는 차 한 대 정도 뽑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명시되어 있었다.“...이럴 줄 몰랐는데.”조금 전까지, 자신이 버려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울던 그녀였다.“됐어. 또 울려고 하지 말고.”연근 튀김을 씹으며 은영은 손을 휘휘 저었다.“그리고, 당분간 갈 데 없으면 내 집에서 지내자.”덧붙인 그 말에 은수는 조금 더 눈을 크게 떴다.“예?”놀란 그녀가 얼떨결에 나온 존대에 은영은 픽 웃었다.“오자마자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내 집에서 당분간 있으라고.”“...그래도 돼?”믿어지지 않아 되물었더니,“어, 돼.”끄덕이며 은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다.“내 집에서 머물다가 혹시 불편한 데 있으면 그때 다른 데로 옮겨도 되고.”은영은 마저 설명했다.장례 첫날에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던 은수였다. 막상 혼자 되니 비교 대상 없이 몇 배로 절망한 것처럼 보였다.은수는 또 그런 그녀를 빤히 보았다.“...왜?”“고마워서.”미간을 슬쩍 구기며 물어오는 은영에게 참 작게도 말했다.“고맙긴,”다른 음식이 또 들어오는지라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그녀는 손에 들
화내지 않았다.그럴 수 있을 거라고, 강박적으로 용서하려 했다.남이라고 여겨도 피 한 방울 섞인 게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그저, 아는 사람 정도라도...인사 정도만 하고 살아도 그게 어디냐고...“남한테도... 이렇게는 안 하잖아요.”눈두덩이 불타는 것 같았다.아버지의 여자였다.그러니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왔다.때때로 가슴이 따끔거릴 만큼 아픈 말을 들었고 가끔 손찌검을 당해도 가족이니 그러려니 했다.“꼴 보기 싫어서 그랬다 왜!”그녀의 언성이 조금 더 높았다.“내가 왜 딴 년이 낳은 년을 내 집에 들여야 하는데? 그게 억울해서 더 그랬다고!”가감 없는 속마음.“그러면 못 데리고 있겠다, 같이 살기 싫다고 그러지 그랬어요?”울컥울컥 울음이 넘어왔지만, 뒤이은 말에 기가 턱 막혀서 꿀꺽 삼켜버렸다.“노인네들이 너 안 데려가면 땅도 집도 안 줄 거라잖아. 네 애비가 너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하라고, 그래야 집도 땅도 받는다고 했어.”“...허.”미안하다고 했다.간간이 생존을 알리러 전화할 때면, 자신에게 무심했던 지난날을 후회한다고도 했다.짧게나마 부녀지간 같은 담소가 오갔건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끝끝내 비겁했다.“3년 전에 네가 집 나간 거야.”삿대질하며 그녀는 말했다.“어차피 네 애비 죽고, 집이든 뭐든 다 나한테 상속되었으니까 너도 이제 필요 없어.”기가 막히니 귀가 먹먹해야 하는데, 왜 마음이 울렁이는지.은수는 꿀렁꿀렁 넘어오려는 설움을 눌러 참았다.“하 참 나, 어디서 더러운 게. 싫으면 말지.”재촉하는 친척들을 따라 버스 타러 가면서도, 그녀는 제게 던진 구겨진 돈뭉치를 집어 들었다.연달아 내뱉는 욕지거리 뒤에 칵, 침을 뱉고 돌아서서 가버리는 그녀를, 은수는 멍하니 보았다. 못 박힌 듯 서서.버스가 눈앞에서 떠날 때까지.“...김은수.”꼭 장승이나 마네킹처럼, 그렇게 넋 놓고 선 그녀 곁에 은영이 다가왔다.“은수야. 이제 그만...”은영은 곁에 가까이 와서야 은수가 울고 있
장례는 힘들었다.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수없이 인사하고, 가끔 앉았다가도 일어나기를 반복했다.계모는 친척들과 자주 밖으로 나갔다.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수는 거의 혼자서 상주 노릇을 했다. 예사로 끼니도 놓치고.발인 날, 계모는 그녀에게 통보하듯 했다.“성남의 OO동에 있는 납골당에 모실 거야. 나중에 가보든지 하고, 넌 안 와도 돼.”“예?”은수는 이틀 밤을 꼬박 샌지라 피곤하고 허기진 상태였다.“발인 날인데, 같이 가지 말라구요?”기가 막혔다.“네가 뭐 자식이었어?”계모는 눈을 부릅떴다.“해준 것도 없는 년이 자식이라고 이틀 설쳤으면 됐지 뭘 끝까지 나서, 나서길?”“아니, 그래도 마지막인데...”“아 됐으니까,”밀치는 손길에 은수는 휘청거렸다.“이제 가. 찾아오지도 말고.”그녀는 오만원 권 지폐 몇 장을 그녀에게 휙 뿌렸다.“엄...”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엄마’라니.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이름이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그들이 떠나고, 은수는 혼자 남았다.바닥에는, 계모가 던져놓고 간 오만원 권 지폐가 휴지조각처럼도 보였다.사흘동안, 한 번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눈물이 나올 만큼 아버지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던 게 아니라서.그 오만원권 지폐를 주우면서, 그제야 눈물이 났다.한 번 더, 버려졌으니까.‘...네 장이네.’고교 시절 그녀가 알바해서 계모에게 건넨 돈은 열 배가 넘었다.‘고작 이걸 바라고 온 게 아닌데...’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휴지조각처럼 버려졌던 그 돈을 구깃구깃 쥔 채로 그녀는 일어섰다.자지 못하고 먹지 못했다.휘청거렸지만, 그녀는 어지럼증을 털어내고 밖으로 성큼 성큼 나갔다.그들은 막 버스에 오르려던 참이었다.납골당까지는 한 시간여의 꽤나 긴 여정일 터였다.돌진하듯, 계모에게 다가간 은수는 손부터 뻗어 그녀의 어깨를 확 돌렸다.“너...”놀란 얼굴로 저를 알아본 그녀에게 은수는 쥐고 있던 돈을 홱 던졌다.“이게,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