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8화- 은인

Author: 몽베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3 13:30:24

물론, 그뿐이면 더없이 안쓰러울 김은수이지만 그 순간 건넨 통장이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챙겨.”

차례로 나온 음식을 천천히 먹고 있던 은수는,

“...이게 뭐야?”

갑작스레 제 앞에 놓인 통장을 보고 놀라 물었다.

“열어봐.”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통장 같았다.

은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통장을 집어 들고는 커버를 열었다.

“...이거.”

‘김은수.’

통장에는 그녀의 이름 석 자가 박혀있었다.

“..이건.”

동그란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은수에게, 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작은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그것만큼은 꼭 너한테 전해달라고 하셨던 거야. 모르겠다. 작은아버지가 너한테 미안한 게 좀 있으셨던 거였는지도.”

그 말은, 계모가 모든 재산을 남김없이 가져갈 거라는 걸 생전의 그가 알았다는 말도 포함된 것 같았다.

정말, 통장 안에는 차 한 대 정도 뽑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럴 줄 몰랐는데.”

조금 전까지, 자신이 버려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울던 그녀였다.

“됐어. 또 울려고 하지 말고.”

연근 튀김을 씹으며 은영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당분간 갈 데 없으면 내 집에서 지내자.”

덧붙인 그 말에 은수는 조금 더 눈을 크게 떴다.

“예?”

놀란 그녀가 얼떨결에 나온 존대에 은영은 픽 웃었다.

“오자마자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내 집에서 당분간 있으라고.”

“...그래도 돼?”

믿어지지 않아 되물었더니,

“어, 돼.”

끄덕이며 은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다.

“내 집에서 머물다가 혹시 불편한 데 있으면 그때 다른 데로 옮겨도 되고.”

은영은 마저 설명했다.

장례 첫날에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던 은수였다. 막상 혼자 되니 비교 대상 없이 몇 배로 절망한 것처럼 보였다.

은수는 또 그런 그녀를 빤히 보았다.

“...왜?”

“고마워서.”

미간을 슬쩍 구기며 물어오는 은영에게 참 작게도 말했다.

“고맙긴,”

다른 음식이 또 들어오는지라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손에 들린 제 이름 석 자의 통장을 꼭 쥐었다.

한국에서도 갈 곳이 있다는 건 어느 쪽으로나 다행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아버지가 남긴 꽤 큰 돈으로 언제든 인도에 돌아가도 괜찮다는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으로 기도했다.

버려졌다는 말이 무색하게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

동당데렝당-.

귓전을 때리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 뜨기도 전에 손으로 먼저 더듬었다.

새벽 4시 40분.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일어나야지.”

은수는 웅얼대며 몸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하나, 둘, 셋... 열까지 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자야 하지만, 다행히 그날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기지개를 켜고는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아암-.”

근처의 교회에 새벽예배를 다니고 있었다.

딱히 기도하고 싶은 게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하루를 살아도 가치롭게 살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밤늦게 깨어 있으면 오만가지 생각이 나서 감정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뭐야.”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고 나오는 은영을 보고 은수는 놀란 토끼눈을 했다.

“언니도 나하고 교회 가게?”

“...농담이지?”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은영은 은수에게 눈을 흘겼다.

“근데 웬일로?”

“허, 야, 김은수.”

같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은영은 이렇게 일찍 일어난 적 없었는데, 왜인지 은영은 기막히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이런 날 있거든. 그리고 평소에도 나 8시면 일어나서 회사 지각 안 하고 잘 가거든.”

웃는 얼굴로, 은영은 또 곱게 눈을 흘겼다.

“알지. 술이 떡이 되서 온 날도 8시에 일어나서 회사 갔으니까, 응.”

끄덕이면서도 은수는 콕 집어 말했다.

은영은 새벽 두 시쯤 되어서야 퇴근을 했고 8시쯤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그녀가 대표인 회사였다.

8시면 준비하고 출근하기에 다소 늦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먼저 출근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며 10시부터 회사 일정이 돌아가도록 했다.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한 두 시간 공부를 하고 8시쯤 출근하는 은수와는 사뭇 다른 일정이었다.

“나 출장 가거든.”

헤어 드라이어를 연결하며 은영은 말했다.

“2주 일정이니까 그 때까지 집 잘 보고 있어라.”

“...그걸 왜 지금 말해?”

세상 황당하다는 투로 은수가 그녀에게 따져 묻자,

“지금이라도 말 했으니 됐지.”

은영은 무심히 말했다.

“어제 장 봤는데...”

도시락도 싸가는 그녀와 달리, 은영은 집밥을 먹는 날이 드물었다.

그래도 이 틀에 한 끼 정도는 먹기에, 은수는 꼬박꼬박 그녀의 몫으로도 음식을 해놓았었다.

“그냥 두었다 먹으면 되지.”

별 걱정을 다 한다며 은영은 풀썩 웃었다.

“샐러드 좋아한다며? 비싼 양상추도 사고 훈제오리도 사놨구만.”

밥 아니면 그런 거라도 먹었으면 해서 채소도 과일도 몇 가지 샀다.

평소보다 돈이 조금 더 들었지만, 은수는 은영에게 그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 그거 너 먹어.”

속도 모르고 은영은 허허 웃더니,

“교회 안 가?”

시계를 힐끗 보며 물었다.

“...가.”

뭘 바라냐 싶었다.

갈 곳 없으면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던 그녀였다.

방세라도 일부 내겠다는 은수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관두라고도 했다. 푼돈 받아 쓸 정도로 아쉽지 않다고.

은영은, 광물과 액세서리에 쓸 보석 원석을 수입해 거래처에 넘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자 보석 세공 및 판매 부서도 겸하고 있는데, 그쪽이 매출이 더 늘었다고 했다.

사람 보는 안목을 제대로 갖춘 데다, 아들 딸 구분치 않고 유학 기회를 주었던 부모님 덕분에 미국에서 경영을 공부했다고 했다.

의학이나 공학을 전공한 오빠와 남동생이 그곳에 눌러앉아 터를 닦는 것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게 잘 된 것이다.

모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덮어버린 대범함은 그 덕분에 파생된 성향일 터였다.

‘그게 문제지. 그래서 잔정 없는 거.’

교회로 걸어가며 은수는 한숨을 쉬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우연히, 필연   11화- 반가운 목소리

    회의가 시작하고 마치기까지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종이나 옷만 아니라, 시간도 접을 수 있다면 딱 각을 잡았을 거라며 그들은 혀를 찼다.두 시간이면 될 거라더니, 딱 두 시간을 쓰더라고.“이쯤 되면,”회의에서 썼던 서류를 들고 그의 뒤를 쫓으며,“시계 인간이라고 욕들 할 겁니다.”정비서가 한 소리를 했다.“내 1분이 소중한 만큼 남의 1분도 소중히 여긴 것뿐인데, 왜?”앞만 보고 걸으며 재헌은 말했다.유순한 목소리나 저변에 납이 깔린 듯 묵직했다.“융통성 있게 10분 일찍 끝내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10시 정각에 시작하시던가요.”여전히 그를 나무라고 있었다.융통성없는 그에게 그리 야단칠 수 있는 사람 중 한국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정비서일 터였다.재헌은 픽 웃었다.“12시에, ‘모노스톤’의 김은영 대표와 점심 미팅 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그가 스케쥴을 상기시켰다.“아...”정비서의 목소리에서 심하게 당황한 기운을 느낀 그가 돌아보았다.“왜?”“그게, 오늘 일정을 확인하려고 연락을 했는데, 출장을 갔다네요.”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정비서는 말했다.멈춰 서서 그런 그를 바라보던 재헌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뭐?”“...아무래도,”정비서는 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쪽과의 미팅을 잊은 것 같습니다.”“이 날, 점심 미팅을 주선한 건 그 쪽이었잖아.”재헌은 헛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다시,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거액이 왔다갔다 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이미 투자를 약속하고 일부 투자금을 투입한 거래처와의 약속을 이런 식으로 어길 수는 없었다.못마땅했지만, 재헌은 말없이 끄덕였다.‘이런 경우가...’자신의 시간이 소중하듯 남의 시간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게 그의 집안 가훈이자 회사의 신조였다.시간을 잘 관리하고 운용하는 사람이 사회적 성공에 한 발 더 가까이 가는 거라고.재헌은 생각했다.안목을 믿었으나, 아무래도 김은영은 채 거르지 못한 파트너일지도 모

  • 우연히, 필연   10화- 일과 일상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녀였다.그러니,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눈치 없다는 오해가 따라붙었다.그러나 그녀보다 연배가 몇십 년 차이 나는 그들은 결국, 은수를 따뜻이 포용했다. 이십 대 중반을 넘긴 청년이 청소 일을 삼 개월 넘긴 경우는 그들도 처음이었던 것이다.기특하다는 한 마디가 은수에게는 힘이 되었다.어쩌면 그래서, 은수는 청소일이 힘들었음에도 지금껏 버텼는지도 몰랐다.“암튼,”영실은 남은 커피를 다 마시더니, 종이컵을 한데 모아 버리도록 건네고 일어섰다.“이제는 일어나야지. 회의실이면, 하필 우리 구역이기도 허니께.”영실의 말에, 은수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보리차를 훌떡 마셨다.“한 잔 더 줘?”저에게 맞춰 함께 움직이려는 은수를 영실은 예쁘게 보았다.“아니에요. 지금 가는 거지요?”그녀도 얼른 종이컵을 한데 모아 버리는 곳에 넣고 도구를 챙겼다.“급할 거 없는데...”은수는 눈치가 있거나 약은 기색 하나 없었다.처음에는 답답해서 같이 어떻게 일 할까 고민도 했건만,“그래도, 같이 가야죠.”일 요령은 없어도 곰처럼 우직하게 역할을 다하려는 그 모습이 예뻤다.그렇게 삼 개월이 지났더니, 이제는 제법 손도 빨라졌다.“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내가 혈압약 먹는다는 걸 깜빡했네이.”갑자기 멈춰 선 영실이, 멋쩍게 웃었다.“커피 드셨는데, 괜찮아요?”염려를 담아 묻자,“아침에 한 잔 마시는 건 괜찮대.”별거 아니라며, 그녀는 얼른 다녀오겠다며 걸음을 재촉했다.그녀의 도구까지 챙겨서, 은수는 회의실로 향했다.작업 시간은 9시부터였지만, 회의실이 전담인 두 사람은 서둘러야 했다.“아.”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죄, 죄송합니다.”그 시간에 누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문을 열자마자,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을 줄은.블라우스를 추스르는 여자와 달리,“너무 이르잖아.”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남자는 짜증을 부렸다.“어... 9시 반에 회의가 잡히셨다고...”“어차피 깨끗한데, 15분 만에 끝낼

  • 우연히, 필연   9화-사회인

    은영의 마음과 배려는 늘 고마웠다.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것이었다.장 봐와서 곤란했다는 건 핑계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지내는 건 어쨌거나 고역이어서 역정이 났던 것뿐이었다.‘뭘 바라냐?’그런 마음을 애써 지웠다.그녀가 잠들고 깰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퇴근했던 그녀였다.그저 갈 곳 없는 몸 의탁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했다.예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이 많았던 지라 기도도 잘 나오지 않았다.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은영은 나가고 없었다.‘뭘 일찍부터...’도대체 출장지가 어디길래 그러나 싶기도 했다.물이라도 마시려고 주방에 불을 켰을 때, 식탁 위에 놓인 쪽지가 눈에 띄었다.‘김은수, 혼자 있다고 맨날 김치에다 밥만 먹지 말고 장 봐온 걸로 제대로 된 밥 해먹어라. 용돈 좀 두고 갈 테니까 중간중간 맛있는 거 사먹고.’은수는 풀썩 웃었다. 교회 가기 전까지 품었던 서운한 감정이 모두 해소되어서.봉투에는, 그녀가 계모에게 도로 던졌던 그 지폐보다 몇 장이 더 들어 있었다.휴대폰으로 은영의 번호를 찾아 문자를 남겼다.‘고마워.’운전 중인지, 안 읽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일을 그만두고, 은수는 욕실로 들어갔다.비입-.읽음 표시 후, 웃고 있는 이모티콘이 액정에 떴다.-----띠이잇-.인터폰 소리에 절로 눈이 뜨였다.눈이 뻑뻑하고 따가웠다.비틀대며 일어나자, 이불처럼 그를 덮고 있던 서류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는 인터폰 있는 곳으로 걸었다.“네.”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일어나셨습니까?]그 무감한 표정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잠김설정을 해제하자, 말쑥한 차림의 정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커피?”다짜고짜 묻는데도 그는 손에 든 컵을 자연스레 그에게 내밀었다.“...소파에서 주무신 겁니까?”서류며 노트북까지 어지러운 광경에 정비서는 물었다.“...회의 몇 시지?”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재헌은 커피를 한 모금

  • 우연히, 필연   8화- 은인

    물론, 그뿐이면 더없이 안쓰러울 김은수이지만 그 순간 건넨 통장이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챙겨.”차례로 나온 음식을 천천히 먹고 있던 은수는,“...이게 뭐야?”갑작스레 제 앞에 놓인 통장을 보고 놀라 물었다.“열어봐.”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통장 같았다.은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통장을 집어 들고는 커버를 열었다.“...이거.”‘김은수.’통장에는 그녀의 이름 석 자가 박혀있었다.“..이건.”동그란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은수에게, 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작은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그것만큼은 꼭 너한테 전해달라고 하셨던 거야. 모르겠다. 작은아버지가 너한테 미안한 게 좀 있으셨던 거였는지도.”그 말은, 계모가 모든 재산을 남김없이 가져갈 거라는 걸 생전의 그가 알았다는 말도 포함된 것 같았다.정말, 통장 안에는 차 한 대 정도 뽑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명시되어 있었다.“...이럴 줄 몰랐는데.”조금 전까지, 자신이 버려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울던 그녀였다.“됐어. 또 울려고 하지 말고.”연근 튀김을 씹으며 은영은 손을 휘휘 저었다.“그리고, 당분간 갈 데 없으면 내 집에서 지내자.”덧붙인 그 말에 은수는 조금 더 눈을 크게 떴다.“예?”놀란 그녀가 얼떨결에 나온 존대에 은영은 픽 웃었다.“오자마자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내 집에서 당분간 있으라고.”“...그래도 돼?”믿어지지 않아 되물었더니,“어, 돼.”끄덕이며 은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다.“내 집에서 머물다가 혹시 불편한 데 있으면 그때 다른 데로 옮겨도 되고.”은영은 마저 설명했다.장례 첫날에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던 은수였다. 막상 혼자 되니 비교 대상 없이 몇 배로 절망한 것처럼 보였다.은수는 또 그런 그녀를 빤히 보았다.“...왜?”“고마워서.”미간을 슬쩍 구기며 물어오는 은영에게 참 작게도 말했다.“고맙긴,”다른 음식이 또 들어오는지라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그녀는 손에 들

  • 우연히, 필연   7화- 미아

    화내지 않았다.그럴 수 있을 거라고, 강박적으로 용서하려 했다.남이라고 여겨도 피 한 방울 섞인 게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그저, 아는 사람 정도라도...인사 정도만 하고 살아도 그게 어디냐고...“남한테도... 이렇게는 안 하잖아요.”눈두덩이 불타는 것 같았다.아버지의 여자였다.그러니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왔다.때때로 가슴이 따끔거릴 만큼 아픈 말을 들었고 가끔 손찌검을 당해도 가족이니 그러려니 했다.“꼴 보기 싫어서 그랬다 왜!”그녀의 언성이 조금 더 높았다.“내가 왜 딴 년이 낳은 년을 내 집에 들여야 하는데? 그게 억울해서 더 그랬다고!”가감 없는 속마음.“그러면 못 데리고 있겠다, 같이 살기 싫다고 그러지 그랬어요?”울컥울컥 울음이 넘어왔지만, 뒤이은 말에 기가 턱 막혀서 꿀꺽 삼켜버렸다.“노인네들이 너 안 데려가면 땅도 집도 안 줄 거라잖아. 네 애비가 너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하라고, 그래야 집도 땅도 받는다고 했어.”“...허.”미안하다고 했다.간간이 생존을 알리러 전화할 때면, 자신에게 무심했던 지난날을 후회한다고도 했다.짧게나마 부녀지간 같은 담소가 오갔건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끝끝내 비겁했다.“3년 전에 네가 집 나간 거야.”삿대질하며 그녀는 말했다.“어차피 네 애비 죽고, 집이든 뭐든 다 나한테 상속되었으니까 너도 이제 필요 없어.”기가 막히니 귀가 먹먹해야 하는데, 왜 마음이 울렁이는지.은수는 꿀렁꿀렁 넘어오려는 설움을 눌러 참았다.“하 참 나, 어디서 더러운 게. 싫으면 말지.”재촉하는 친척들을 따라 버스 타러 가면서도, 그녀는 제게 던진 구겨진 돈뭉치를 집어 들었다.연달아 내뱉는 욕지거리 뒤에 칵, 침을 뱉고 돌아서서 가버리는 그녀를, 은수는 멍하니 보았다. 못 박힌 듯 서서.버스가 눈앞에서 떠날 때까지.“...김은수.”꼭 장승이나 마네킹처럼, 그렇게 넋 놓고 선 그녀 곁에 은영이 다가왔다.“은수야. 이제 그만...”은영은 곁에 가까이 와서야 은수가 울고 있

  • 우연히, 필연   6- 버려진 아이

    장례는 힘들었다.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수없이 인사하고, 가끔 앉았다가도 일어나기를 반복했다.계모는 친척들과 자주 밖으로 나갔다.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수는 거의 혼자서 상주 노릇을 했다. 예사로 끼니도 놓치고.발인 날, 계모는 그녀에게 통보하듯 했다.“성남의 OO동에 있는 납골당에 모실 거야. 나중에 가보든지 하고, 넌 안 와도 돼.”“예?”은수는 이틀 밤을 꼬박 샌지라 피곤하고 허기진 상태였다.“발인 날인데, 같이 가지 말라구요?”기가 막혔다.“네가 뭐 자식이었어?”계모는 눈을 부릅떴다.“해준 것도 없는 년이 자식이라고 이틀 설쳤으면 됐지 뭘 끝까지 나서, 나서길?”“아니, 그래도 마지막인데...”“아 됐으니까,”밀치는 손길에 은수는 휘청거렸다.“이제 가. 찾아오지도 말고.”그녀는 오만원 권 지폐 몇 장을 그녀에게 휙 뿌렸다.“엄...”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엄마’라니.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이름이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그들이 떠나고, 은수는 혼자 남았다.바닥에는, 계모가 던져놓고 간 오만원 권 지폐가 휴지조각처럼도 보였다.사흘동안, 한 번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눈물이 나올 만큼 아버지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던 게 아니라서.그 오만원권 지폐를 주우면서, 그제야 눈물이 났다.한 번 더, 버려졌으니까.‘...네 장이네.’고교 시절 그녀가 알바해서 계모에게 건넨 돈은 열 배가 넘었다.‘고작 이걸 바라고 온 게 아닌데...’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휴지조각처럼 버려졌던 그 돈을 구깃구깃 쥔 채로 그녀는 일어섰다.자지 못하고 먹지 못했다.휘청거렸지만, 그녀는 어지럼증을 털어내고 밖으로 성큼 성큼 나갔다.그들은 막 버스에 오르려던 참이었다.납골당까지는 한 시간여의 꽤나 긴 여정일 터였다.돌진하듯, 계모에게 다가간 은수는 손부터 뻗어 그녀의 어깨를 확 돌렸다.“너...”놀란 얼굴로 저를 알아본 그녀에게 은수는 쥐고 있던 돈을 홱 던졌다.“이게, 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