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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도망 잘가요

Author: 무취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7 03:21:48

하늘은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까칠한 눈이 창밖을 향해 있다.

"뭐라고요? 하. 원래 가수라는 직업이 그런 거 아닌가요? 잘은 모르지만 팬들이 있으니까, 당신들도 먹고 살 수 있는."

강우주는 하늘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팬이랑 사생은 다른 거에요. 그 차이를 좀 아셔야.."

그는 말끝을 흐리며 살짝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뒤 늦게 인식한 듯, 괜히 열 올린 자신이 우스웠는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뭐, 맞는 말이기도 하죠. 근데 동생분 한테 전해요. 팬이랑 사생짓은 구분 좀 하라고."

사생? 뭔가 이 남자. 오해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것 같다.

쫓아다닌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하늘은 그의 말에 반박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 사이로 굳은 턱선이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차 안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늘은 이내 고개를 돌려 업무를 마저 하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업무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늘은 폰을 집어 들어, 사진을 하나 찾았다.

그리곤 그에게 불쑥 그 사진을 내밀었다.

"제 동생이에요. 보시다시피, 몸이 불편해요. 몇 해 전에 사고로 다리를 잃었거든요."

강우주는 무심코 하늘이 내민 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묘하게 닮아 있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그의 눈이 잠시 화면 위에 머물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뾰족하게 세워뒀던 말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폰 화면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다리를 잃은 애한테 쫓아다닌다는 표현을 쓴 제가 잘못했네요. 오해라구요."

그녀의 말에 쌀쌀맞던 그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섣불리 오해를 한 것이 민망했다.

그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야 뭐..오해라니 그냥 넘어가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민망한 마음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 때 그녀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다리를 잃고 힘들어하는 동생한테 난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저 열심히 돈 벌어서 동생 치료비에 보태는 것 말고는..

우울증으로 한동안 힘들어 하는 동생까지 챙겨 줄 여력이 없었죠. 근데, 동생이 요즘 많이 밝아졌어요.

연예인에 빠졌거든요. 그 가수 때문에 열심히 살고 싶어 졌데요.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죠. 근데 그 가수가 당신이었네요."

그는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나 때문에 밝아졌다고요."

자신이 누군가 에게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언제나 벗어나고 싶었던 그 시선들이 다른 무게를 처음으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퉁명스럽고 날카로웠던 눈빛이 사라지고,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도망 다니는 신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신 하나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받는 사람도 있다는 거.

얘기해 주고 싶어서요. 동생을 대신해서 고맙게 생각해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깊숙한 얘기를 꺼낸 하늘은 말을 끝마치자 괜히 멋쩍은 듯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나에게 시선을 두는 그의 눈빛을 피해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 애썻다.

강우주는 헛기침을 하며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옆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곤두 선 신경이 조금씩 가라앉아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느릿 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택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내 조용한 차 안으로 타자 치는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지자 강우주는 잠시 흥미롭다는 듯 발을 까딱거리다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기요. 바쁘신 건 아는데. 잠시만 멈춰 볼래요? 염치없이 차도 얻어 탔고, 동생분 특별한 사연도 들었는데

그냥 넘어가기가 좀 그래서요."

그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며, 화면이 켜진 자신의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눈썹을 살짝 으쓱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특유의 여유롭고 능글맞은 기색이 달아올라 있었다.

"인스타 아이디 하나만 알려줘요. 택시비도 갚아야 하고, 동생분한테 사인이라도 한장 보내드리고 싶어서요.

나쁜 사람 아닌거 아니까 의심은 하지말고."

하늘은 그가 건네는 폰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했다.

"저 인스타 안하는데요."

강우주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멈칫하더니,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흔하게 물어보는 질문에 돌아온 단호한 대답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 탓이다.

"인스타를 안한다고요? 요즘 세상에 꽤 희귀한 분이시네요."

그는 무안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조작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인스타그램 앱 대신 전화번호 다이얼 화면을 띄운 그는 다시금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럼 문자로 하죠. 연락처라도 찍어주실래요? 제가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

그는 푹신한 택시 등받이에 몸을 조금 더 편안하게 기대며 발을 까딱거렸다.

공항에서부터 그를 짓누르던 예민함과 까칠함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미세한 흥미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은 그가 내민 폰을 잠시 바라보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꽤나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어짜피 가는길이라 택시비는 받을 생각 없어요. 동생 우울증 치료비 정도로 생각할게요.

그리고 사인은.."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고 가방을 뒤적 거리다 그녀의 다이어리를 꺼내 내밀었다.

"사인은 여기다 해주실래요?"

우주는 한순간 픽 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연락처도, 아이디도 건네지 않겠다는 의사가 완고하게 담긴 대답이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잠깐 눈을 내리 깔았다가 내밀어진 다이어리로 천천히 시선을 훑었다.

"..꽤 단호하시네요."

그는 피식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로 손을 뻗어 다이어리를 받아들었다.

익숙한 솜씨로 자켓 안쪽 포켓에서 검정 펜을 꺼내든 그는 다이어리를 무릎에 올려두고 능숙하게 펜을 굴렸다.

깔끔한 필체로 사인을 하던 그는 고개를 들었다.

"동생분 이름이 어떻게 돼요?"

그의 질문에 하늘이 그를 쳐다봤다가 그가 쓴 사인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에 그는 펜으로 자신의 사인 종이를 가볍게 톡톡 내리 찍었다.

to. 가 적힌 것을 보고 하늘은 동생의 이름이 '서하윤' 이라고 알려줬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는 곧장 동생의 이름을 능숙하게 적어 내렸다.

그가 사인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그녀는 노트북을 접고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멀리 그녀가 다니는 회사가 보인다.

"나 이제 내리는데. 따라 내릴 거 에요?"

강우주는 평소보다 좀 더 정성스럽게 사인을 적어 내려갔다.

서하윤에게, 강우주.

사인을 마무리 한 그는 다이어리를 덮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대낮이라 거리엔 사람들도 북적인다.

"저는 더 가야죠. 여기서 내렸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는 능글맞게 대꾸하며 펜을 도로 포켓에 찔러 넣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눈썹을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근데, 동생 이름이 서하윤이면 그쪽 이름은 뭐에요? 본인 이름은 안 알려줬는데"

내릴 준비를 하는 그녀의 옆 얼굴을 무심한 듯 흘끔 바라보았다.

연락처 한자리 내어주지 않고 훌쩍 내려버릴 사람이라는 게 뻔히 보였지만 딱히 연락처를 잡을 명분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 만큼은 알고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은 가방 정리를 마저 마무리하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서하늘. 제 이름이요. 저도 그 쪽 이름 아니까 공평하게 제 이름정도는."

택시는 서서히 그녀의 회사 앞으로 부드럽게 진입하고 있었다.

하늘은 지갑에서 카드를 빼내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강우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돈 있어요? 더 갈거라면서요."

강우주는 서하늘 이란 이름을 속으로 작게 되뇌었다.

이내 그를 향해 불쑥 날아온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여유로운 태도로 텅 빈 바지 주머니를 툭툭 쳐보던 그는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당장 지갑 챙길 정신은 없었는데 핸드폰으로 결제가 되니까 길바닥에 나앉을 일은 없을겁니다.

생판 남인 제 걱정까지 다 해주시고. 은근 다정한 편이네요, 서하늘씨"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매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택시는 부드럽게 갓길로 진입하며 슬며시 멈춰 섰다.

강우주는 흥미롭다는 듯 까딱거리던 발을 멈추고,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건냈다.

"택시비 고마워요. 동생한테 제 사인 꼭 전해주는 거 잊지 말구요."

하늘은 기사님 에게서 결제된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럴게요. 도망 잘 가요."

짐이 꽤 나 많은 가방을 들고 내린 서하늘은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다 이내 급하게 회사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강우주는 쏜살같이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도망 잘 가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마스크 아래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오늘의 작은 소동이 마치 한편의 시트콤처럼 느껴졌다.

"기사님 일단 강남역 쪽으로 가주세요. 가다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는 앞 좌석에 나지막이 말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택시가 다시 부드럽게 출발하자 그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머릿속에 방금 전 헤어진 서하늘 이라는 이름 세 글자와 그녀의 무심하고도 단호했던 얼굴로 가득 찼다.

"서 하늘."

강우주는 혼잣말처럼 그 이름을 한번 더 나직이 읆조렸다.

그는 핸드폰을 다시 꺼내들었다. 사생들과 기자들을 따돌리느라 정신없이 자리를 비운 그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택시 탔으니까 위치 찍어줄게. 그쪽으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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