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칼날처럼 살갗을 에이는 초 봄의 이른 아침.
작업 반장과 리모델링 공사 현장을 둘러보던 에구치는 1층 창문 치수를 무심히 확인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등 뒤에서 툭 들려온 맑은 목소리.
고요한 공사 현장에서 들린 예상치 못한 여자 목소리에 에구치는 크게 놀라 창틀에서 발을 헛디디며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 엉덩방아를 찧은 그의 위로 매캐한 공사 먼지가 훅 피어올랐다.
“어… 괜찮으세요?”
에구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덤덤하게 벌떡 일어나 목장갑을 낀 손으로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곁에 바짝 다가온 소녀가 매운 먼지 탓에 콜록콜록 작은 기침을 토해냈다.
“앗! 죄송합니다. 먼지가 너무 많죠.”
“아니에요. 피차 서로 실수한 거니까… 괜찮습니다”
소녀가 미안해하는 에구치를 향해 베시시…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순간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미소가 어둡고 칙칙한 공사 현장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그녀의 미소에 그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시선을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내 그의 심장이 귀가 먹먹해질 만큼 터질 듯 힘차게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첫 눈에 반했다.
그리고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지독한 전율이었다.
“아… 아가씨… 무슨 일로…”
그때 2층에서 내려오던 작업반장이 그녀를 보고 급하게 뛰어내려와 그녀 앞에 서서 고개를 연신 조아렸다.
“아… 부탁드릴 게 있어서… 건물 앞 로즈마리 화단에 공사 분진을 쏟아지지 않게 조치를 취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화단이요? 그럼 공사 일정 동안 위에 비닐을 씌울 까요?”
“로즈마리는 바람이 중요한 허브라서요… 공사가 최소한 세달을 진행될 텐데… 계속 비닐을 씌우면 안될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은 없을 까요?”
“그럼… 저희가 생각을 좀 더 해보겠습니다”
“네. 부탁 좀 드릴게요. 저한테 너무 소중한 화단이라서…”
“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여기 먼지도 많은데 걱정 마시고 본채로 편히 돌아가 계세요”
작업반장에게 조곤조곤 당부를 끝낸 소녀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가냘픈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작업반장은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에구치는 멍하니 물었다.
“누구…예요?”
“이집 외동딸. KL그룹 상속녀”
“아…”
여전히 넋이 살짝 빠진 채로 소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그의 시선이 향했다.
아이보리 후드 티에 라이트 블루진을 입은 평범한 소녀의 모습…
엉성하게 높게 올린 번머리에 노 메이크업…
그럼에도 그녀의 주변으로만 서광이 비추는 듯 그녀는 시리도록 투명하고 눈이 부시게 예뻤다.
특히 하얀 피부 위에서 낯설고 신비로운 색깔로 빛나던 그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최고급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진짜 인형이 따로 없지? 거기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게… 아우라가 장난 아니지?”
“네. 뭐”
“그… 왜 있잖아? 세계 제일의 젊은 갑부… 너처럼 재일교포 출신인데…”
“렉스 그룹이요?”
“아… 맞아. 거기! 이거 일급 비밀인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수근거리는 거 우연히 들었거든. 근데 거기 회장이랑 이집 딸 결혼 얘기 오고 간다더라고… 그러니까 돈 좀 있음 KL그룹 주식 사놔”
“아직 많이 어려보이는데…”
“맞아. 어려. 올해 고등학생 졸업하고 대학 입학한다니까… 아마 열 아홉쯤 됐을 걸?”
“근데 벌써 결혼을 해요?”
“정략 결혼이니까…”
“렉스 회장이라면… 10대때 SNS로 자기 사업 대박 내고 부친 그룹을 20대 초반에 물려 받았다고 해도… 나이가 아주 어리진 않을 텐데”
에구치는 자기도 모르게 차오르는 묘한 반발심에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에 '렉스 그룹 회장'을 입력했다.
그리고 화면을 보던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 검색해 보니 29살이네요. 그럼 10살 차이라는 건데… 와… 이건 좀 너무 도둑놈 심보… 아닌가”
에구치의 날 선 독설에 작업반장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글쎄… 도둑놈 심보라고 하기엔 렉스그룹의 재산이 너무 후덜덜하잖아. 아무리 KL그룹이 재벌이라고 해도 내수용이고 거긴 글로벌 1위 기업이니까… 거기다 렉스회장도 연예인 뺨치게 잘 생긴 걸로 유명하던데… 솔직히 다들 KL 아가씨가 횡재했다고 생각하지… 저 예쁜 얼굴 하나로 세계 최고의 갑부를 잡은 거니까”
“…잡은 게 아니라… 잡힌 거겠죠”
에구치가 낮게 중얼거렸다.
“어! 근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빨리 치수랑 구조 확인하고 사무실로 돌아가시죠. 늦게 들어가면 또 농땡이 친다고 소장한테 잔소리 한 바가지로 듣겠어요”
에구치는 반장을 재촉하며 다시 건물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급하게 치수들을 수첩에 적어 내려가는 와중에도 자꾸 그의 시선이 소녀가 애틋하게 당부했던 건물 앞 로즈마리 화단으로 향했다.
왠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녀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화단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백화점 식품관에서 최고급 식재료들과 온갖 간식 그리고 셰프급 주방 도구들을 두 손 가득 무겁게 사 들고 유정과 유진은 에구치의 임대 아파트로 향했다.텅 비어있는 좁은 주방.그곳이 새로 산 각종 조리도구들로 가득 채워졌다.그리고 쾅쾅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정이 번개처럼 주문한 4인용 최고급 세라믹 식탁 세트와 번쩍이는 최신 주방 가전들이 집 안으로 배달되어 들어왔다.“와… 이렇게 가구까지 들어오니까 꼭 어렸을 때 너랑 나 소꿉놀이 주방세트에서 엄마놀이 하는 것 같다. 여기 부엌 사이즈가 딱 그때랑 비슷한 것 같지?”“여기 공용 공간인데… 우리 맘대로 이렇게 짐들 채워도 되나? 집주인한테 미리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딱 보면 몰라? 진짜 컵라면 밖에 안 먹은 부엌이야. 아무 것도 없잖아. 심지어 접시도 수저세트도 컵도 딱 2개씩. 그리고 나 혼자 쓰자고 이래? 다 같이 쓸 거고 거기다 이렇게 텅 빈 주방을 꽉꽉 채워준다는데 감사해야지 무슨?”유정은 새로운 장난감을 가진 아이처럼 온통 신이 나 있었다.반면에 유진은 남의 영역을 강제로 침범한 것 같은 기분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도저 같은 유정의 말대로 상황은 종료되었다.마블링이 예술인 최고급 한우 등심을 듬뿍 넣은 불고기 오일 파스타…은은한 레몬 소스를 곁들인 그릴 납작복숭아 샐러드…그리고 달콤하게 토치로 그을린 크렘 브륄레까지.유진은 고등학교 시절 스위스 요리학교에서 배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역시! 우리 유진… 결혼 수업 한다고 배운 솜씨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너 아예 이쪽으로 커리어를 잡아도 될 듯! 사실 파리에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보다 네가 해 준 음식이 더 그리웠어”새 식탁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보며 유정이 만족스러운 듯 얼굴에 미소를 가득 채웠다.언니의 미소에 잠시 불편했던 유진의 마음도 스르르 풀어졌다.“음식 식는데… 언제 오신다고 했어?”유진이 은근슬쩍 현관문을 흘낏 바라보며 묻자 유정이 포크를 쥐며 쾌활하
새벽 5시 30분.유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또 다시 눈이 자동적으로 떠졌다.알람도 울리지 않은 이른 시간.유진은 홀린 듯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확인했다.예상대로 정원 한편의 자욱한 새벽안개 사이로 묵묵히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잠시 후 서둘러 간단한 샤워를 마친 유진이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대충 묶은 채 로즈마리 화단으로 향했다.허리를 숙여 흙을 만지던 에구치가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유진은 그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채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안녕히 주무셨어요? 혹시… 어제 저희 언니가 밤늦게까지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니죠?”“네. 괜찮습니다”“다행이네요. 워낙 대책 없는 스타일이라 걱정했거든요”“그럼… 다음에 뵙죠”에구치가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려 하자 유진이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의 옷소매를 잡을 뻔하다가 허공에서 손을 거두며 외쳤다.“저! 제가 버스정류장까지 태워 드릴 게요”“네?”에구치의 짙은 눈동자가 유진을 향했다.유진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여기…지대가 높아서… 아래 정류장까지 걸어가려면 꽤 멀고 힘드니까”“괜찮습니다. 바이크로 와서…”에구치가 헬멧을 집어 들며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리고 정원 한 편에 서 있는 블랙 색상의 바이크가 눈에 보였다.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묵직한 바이크 시트 위로 무심히 걸쳐지는 순간…엔진이 거칠고 와일드한 배기음을 토해내며 새벽의 정적을 찢었다.매캐한 가솔린 냄새와 에구치의 묵직한 잔상이 안개 속으로 멀어졌다.유진은 자신이 선의로 베푼 호의가 단칼에 베어나가자 가슴 한구석이 쌉싸름했다.마치 자신과 친해지기를 꺼려 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너무도 정중했다.어제 저녁 순대국밥집에서 유정의 엉뚱한 궤변을 들으며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그 남자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온도감.멀어지는 그의 등 뒤에서 유진은 가슴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전공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유진의 시
그의 집에 오자마자 유정은 집도 둘러보지 않고 유진의 차 트렁크에서 거대한 여행 가방을 낑낑거리며 꺼내 와 텅 빈 작은 아파트에 냅다 짐부터 풀었다.화려한 대저택에 비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좁고 소박한 아파트였다.벽에 비스듬히 기댄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얆은 티셔츠 너머로 풍기는 짙은 수컷의 체취가 좁은 임대 아파트 벽면에 부딪히며 묘하게 야릇하고 밀폐된 긴장감을 자아냈다.“이 방인데… 둘러 보세요”싱글 침대 하나로도 꽉 차는 작은 공간에 187cm의 단단하고 거대한 에구치의 체구가 들어서자 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훅 밀려들며 비좁아졌다.“여기 지내기 괜찮겠어요?”에구치가 방문 틀에 기댄 채 묻자 유정이 침대 매트리스에 털썩 앉으며 화사하게 웃었다.유정의 얼굴에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감돌았다.“네. 딱인데요. 제 마음에 쏙 들어요”“그럼 한달에 50만원. 공과금 포함해서 주면 됩니다”“저 혼자 쓰는 비용인 거죠?”“네”“그럼 월세를 100 드릴게요. 그럼 유진이 여기서 맘껏 있어도 될까요? 여기 유진이 학교 바로 앞이고 저랑 유진이 한 몸이라 계속 붙어 다닐 것 같은데”에구치는 탁자 위의 현금 뭉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나직하게 대꾸했다.“공간이 크지 않아서 불편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으시면 70만원만 주시죠”“아니요. 100 드릴게요. 그래야 저도 유진이도 맘이 편할 것 같아서 그리고 공용공간에서 생활은 최대한 자제하도록 할게요. 불편하시지 않게”“전 상관없어요. 집에서는 잠만 자니까…”에구치의 무뚝뚝하면서도 배려 깊은 태도에 유정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근데 호칭은 어떻게 정리할까요?”“맘대로 하세요. 편한대로”“그럼 오빠? 어때요?”“저 죄송한데… 먼저 일어나 볼게요. 언니! 나 갈게”“뭐?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집에는 이미 안 들어간다고 했는데 왜?”“그건 부산 갈 줄 알았으니까 그런 거고 언니도 피곤할테니까 그냥 혼자 편히 쉬어”유진은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빠져나왔다.좁은
“어디… 대안이라도…”유진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묻자 에구치가 뚝배기에서 시선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제가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에 마침 방이 하나 남거든요. 안 그래도 월세를 셰어할 룸메이트를 구하던 참이었습니다. 일단 와서 보시고 괜찮으시면 들어오셔도 됩니다”“괜찮으시겠어요? 동성이 아니라 불편할 텐데”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류하려 하자 에구치가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아… 불편하신가요? 요즘 기숙사도 거의 유니섹스라 괜찮으실 줄 알았어요"유정이 반색하며 끼어들었다.“전 괜찮아요. 파리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유니섹스 기숙사에 놀러가 본 적 있어서… 어떤 지는 대충 알아요. 근데 괜찮으신 거죠? 괜히 저희에게 휩쓸려서 무리하시는 거 아니시죠?”“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빈 방에 예전 룸메이트도 여자였습니다”“어머! 진짜요? 그럼 우리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당장 한번 가볼까요?”“잠깐만! 언니! 나랑 얘기 좀…”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자 유진은 유정의 팔목을 낚아채듯 끌고 순대국밥집 식당 밖으로 허겁지겁 나왔다.매서운 밤 바람이 뺨을 스쳤다.“언니! 이게 맞아?”유진의 다급한 다그침에 유정은 평소의 장난기 가득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저 남자 말 틀린 거 하나 없어. 경제적 독립 해야 하고 그게 아님 집에 복종 해야 하는 게 맞잖아”“언니! 나 저 남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좋은 사람인지 아닌 지도 모르고… 심지어 이름도 몰라. 그런데 저 남자와 같이 살겠다고?유진은 유정의 어깨를 꽉 쥐며 협박하듯 말을 이어갔다.“이거 이모가 알면… 진짜 정신병원에 감금될 거야. 농담 아니고 이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고? 만약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거 언니에게 괜한 구설수만 줄 수도 있어”“그 정도 각오도 없이 사고 쳤을까 봐? 대책은 없었지만 각오는 했어. 그리고 룸 세어 찾으면서 같이 사는 사람들에 대해 사적으
청담동의 한 중고 명품 숍.유진은 자신이 가진 에르메스 켈리 백 컬렉션 중 하나와 반클리프 아펠 목걸이를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팔아치웠다.솔직히 평생 가격표를 보고 물건을 사본 적이 없는 유진은 그 제품들의 가격도 제대로 몰랐다.그리고 거의 사용도 하지 않은 제품을 팔면서 숍 직원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보여준 금액이 맞는 금액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하지만 손에 쥐어진 현금 뭉치가 생각보다 큰 금액이어서 차로 돌아오자마자 유진은 폰으로 중고 시세를 검색해 보았다.그리고 이내 이마를 짚었다.“아… 너무 싸게 팔았네”“뭐야? 우리 청담동 한복판에서 대놓고 호구 당한 거야?”“그러니까 대책도 없이 이렇게 서두르니까… 암튼 담부터는 국물도 없어”“알았다. 대신 크게 갚을 게. 사채이자로”유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어느 호텔로 갈래?”“글쎄… 반얀으로 갈까? 아님 깔끔하게 신라?”두 자매가 세상 물정 모르는 화려한 대화를 나누던 그때 뒷좌석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에구치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화에 훅 끼어 들었다.“얼마나 가출할 예정인 가요?”“최대한 오래? 하지만 안 들키고 어찌어찌 버틴다 해도 6월 말에 다음 학기 등록금이 비서실에서 지불될 테니까. 그럼 대략 3개월?”유정의 천연덕스러운 답변에 에구치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럼 그 다음은 요?”“이제 계획 세워 봐야 줘”“지금 버짓 (Budget)이 얼마 죠?”이번엔 유진이 백미러로 에구치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현금으로 대략 2천만원. 중간 중간 생활비는 내 카드로 결제하면 되니까… 3개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유진의 말에 에구치가 폰 화면을 슥슥 넘기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검색해 보니… 말씀하신 호텔 비용만 한달 3천인데 3개월 가능하겠어요?”“그럼…”순간 차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유정과 유진은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수천만 원짜리 명품 백은 가볍게 던지면서도 정작 한 달 생
“죄송해요. 저희 언니가 너무 마음이 급해서 무례한 부탁을 했네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고 가셔도 돼요. 언니! 미쳤어?”유진은 당장이라도 에구치를 보쌈해 갈 기세인 유정을 반강제로 끌고 집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문이 닫히자마자 유정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야! 가만 있어 봐. 지금 저 남자 말고 더 좋은 대안 있어? 네 말대로 nobody! 저 남자 때문에 우리가 들킬 가능성도 제로! 들킨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고 거기다 네 비밀도 지켜준다는데 비밀을 여기저기 지레밭처럼 뿌려놓느니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게 낫잖아”“아무리 그래도… 이건 생판 모르는 남에게 민폐야”“거하게 저녁이나 사면 되지 않을까?”“저 남자가 우리랑 밥 먹고 싶다고 했어?”유진은 대책 없는 유정을 잠시 째려봤다.“머리 아프니까 보채지 말고 잠깐 있어 봐. 생각 좀 해 볼 테니까”결국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렀다.“아무래도 부산 가자”“엥? 부산?”유정은 여전히 동생이 못 미더운 듯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거대한 여행 가방을 유진의 차 트렁크 깊숙이 밀어 넣었다.“진짜… 부산 리조트는 안전한 거야?”“류 회장 여기서 지낸다고 했으니까 내가 직접 가서 부산 리조트 관리자분께는 부산에서 지낸다고 거짓말 하면… 어쩌면?”“너… 부산까지 운전 가능하겠어?”“몰라. 해봐야지”“그냥 깔끔하게 기차 타는 건 어때?”“당일인데 자리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내 카드로 KTX 예매 하면 어떨 것 같아? 서울 시내 안에서는 어떻게든 내가 감시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부산행을 끊으면… 바로 비서실에서 연락 올 걸? 무슨 일이냐고?”유진이 한숨을 쉬며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순간 사이드 미러에 꼿꼿이 서 있는 에구치의 길고 단단한 실루엣이 비쳤다.그는 미동도 없이 유진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것을 포착한 유정이 조수석에서 비명을 질렀다.“유진! 잠깐 세워!”“응?”유진이 브레이크를 밟기도 전에 유정은 잽싸게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