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칼날처럼 살갗을 에이는 초 봄의 이른 아침.
작업 반장과 리모델링 공사 현장을 둘러보던 에구치는 1층 창문 치수를 무심히 확인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등 뒤에서 툭 들려온 맑은 목소리.
고요한 공사 현장에서 들린 예상치 못한 여자 목소리에,
에구치는 크게 놀라 창틀에서 발을 헛디디며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 엉덩방아를 찧은 그의 위로 매캐한 공사 먼지가 훅 피어올랐다.
“어… 괜찮으세요?”
에구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덤덤하게 벌떡 일어나 목장갑을 낀 손으로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곁에 바짝 다가온 소녀가 매운 먼지 탓에 콜록콜록 작은 기침을 토해냈다.
“앗! 죄송합니다. 먼지가 너무 많죠.”
“아니에요. 피차 서로 실수한 거니까… 괜찮습니다”
소녀가 미안해하는 에구치를 향해 베시시…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순간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미소가...
어둡고 칙칙한 공사 현장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그녀의 미소에 그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시선을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내 그의 심장이 귀가 먹먹해질 만큼, 터질 듯 힘차게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첫 눈에 반했다.
그리고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지독한 전율이었다.
“아… 아가씨… 무슨 일로…”
그때 2층에서 내려오던 작업반장이 그녀를 보고 급하게 뛰어내려와,
그녀 앞에 서서 고개를 연신 조아렸다.
“아… 부탁드릴 게 있어서… 건물 앞 로즈마리 화단에 공사 분진이 쏟아지지 않게 조치를 취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화단이요? 그럼 공사 일정 동안 위에 비닐을 씌울 까요?”
“로즈마리는 바람이 중요한 허브라서요… 공사가 최소한 세달을 진행될 텐데… 계속 비닐을 씌우면 안될 것 같아서요. 다른 방법은 없을 까요?”
“그럼… 저희가 생각을 좀 더 해보겠습니다”
“네. 부탁 좀 드릴게요. 저한테 너무 소중한 화단이라서…”
“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여기 먼지도 많은데 걱정 마시고 본채로 편히 돌아가 계세요”
작업반장에게 조곤조곤 당부를 끝낸 소녀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가냘픈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작업반장은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에구치는 멍하니 물었다.
“누구…예요?”
“이집 외동딸. KL그룹 상속녀”
“아…”
여전히 넋이 살짝 빠진 채로, 소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그의 시선이 향했다.
아이보리 후드 티에 라이트 블루진을 입은 평범한 소녀의 모습.
엉성하게 높게 올린 번머리에 노 메이크업.
그럼에도 그녀의 주변으로만 서광이 비추는 듯...
그녀는 시리도록 투명하고 눈이 부시게 예뻤다.
특히 하얀 피부 위에서 낯설고 신비로운 색깔로 빛나던 그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최고급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진짜 인형이 따로 없지? 거기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게… 아우라가 장난 아니지?”
“네. 뭐”
“그… 왜 있잖아? 세계 제일의 젊은 갑부… 너처럼 재일교포 출신인데…”
“렉스 그룹이요?”
“아… 맞아. 거기! 이거 일급 비밀인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수군거리는 거 우연히 들었거든. 근데 거기 회장이랑 이집 딸 결혼 얘기 오고 간다더라고… 그러니까 돈 좀 있음 KL그룹 주식 사놔”
“아직 많이 어려보이는데…”
“맞아. 어려. 올해 고등학생 졸업하고 대학 입학한다니까… 아마 열아홉쯤 됐을 걸?”
“근데 벌써 결혼을 해요?”
“정략 결혼이니까…”
“렉스 회장이라면… 10대때 SNS로 자기 사업 대박 내고 부친 그룹을 20대 초반에 물려 받았다고 해도… 나이가 아주 어리진 않을 텐데”
에구치는 자기도 모르게 차오르는 묘한 반발심에,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에 '렉스 그룹 회장'을 입력했다.
그리고 화면을 보던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 검색해 보니 29살이네요. 그럼 10살 차이라는 건데… 와… 이건 좀 너무 도둑놈 심보… 아닌가”
에구치의 날 선 독설에 작업반장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글쎄… 도둑놈 심보라고 하기엔 렉스그룹의 재산이 너무 후덜덜하잖아. 아무리 KL그룹이 재벌이라고 해도 내수용이고 거긴 글로벌 1위 기업이니까… 거기다 렉스회장도 연예인 뺨치게 잘 생긴 걸로 유명하던데… 솔직히 다들 KL 아가씨가 횡재했다고 생각하지… 저 예쁜 얼굴 하나로 세계 최고의 갑부를 잡은 거니까”
“…잡은 게 아니라… 잡힌 거겠죠”
에구치가 낮게 중얼거렸다.
“어! 근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빨리 치수랑 구조 확인하고 사무실로 돌아가시죠. 늦게 들어가면 또 농땡이 친다고 소장한테 잔소리 한 바가지로 듣겠어요”
에구치는 반장을 재촉하며 다시 건물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급하게 치수들을 수첩에 적어 내려가는 와중에도,
자꾸 그의 시선이 소녀가 애틋하게 당부했던 건물 앞 로즈마리 화단으로 향했다.
왠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녀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화단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에구치와 유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곳에도 떡밥이 있습니다. 이번 떡밥은 단어의 숨겨진 의미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 떡밥 회수는 여러 회차에 나눠져 있습니다. 51회, 103회, 125회, 152회에 있습니다.
정확히 한 달 후.자신의 모든 삶이 통째로 화려한 새장 속에 처박히게 될,결혼 날짜가 사전 통보나 상의도 없이 가문의 손에 의해 잔인하게 정해졌다.그 날벼락 같은 통보가 떨어진 이후에도,류는 그 어떤 사적인 연락도, 의례적인 메시지 한 통조차 유진에게 건네지 않았다.늘상 그랬던 것처럼, 철저한 침묵만이 그녀를 무겁게 내리 눌렀다.[최소한…… 아무리 가문끼리의 정략적 약속이라 해도, 의례적으로나마 내 동의나 기분 정도는 한 번쯤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결혼을 코앞에 앞두고 5달 동안이나 뜨겁게 안았던 당신 애인이라는 여자가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절대 못 헤어지겠다고 무릎까지 꿇고 매달렸는데… 일말의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다면, 내가 지금 괜찮은지 정도는 걱정하고 수습하려 드는 게 최소한의 상식이잖아!]류에게 자신을 감정도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 인형이었다.오만방자한 그의 태도에, 유진은 머리끝까지 지독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무관심이라는 단단한 갑옷을 온몸에 두른 채,그가 선사하는 비참함과 배신감에 완벽하게 면역이 됐다고,사소한 감정 하나쯤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자부했었는데,아니었다. 지독한 오만이자 착각이었다.하필이면 인생의 가장 거대하고 무서운 종착지인 결혼을 눈앞에 두고,지금껏 꿋꿋하게 참아내고 억눌러왔던 서러운 감정들이,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처럼 일시에 폭발하고 말았다.아니…… 어쩌면 5개월 전,그 은밀하고도 비극적이었던 제주도에서의 그 밤부터……두 사람의 감정 궤도는, 겉잡을 수 없이 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여태껏 단 한 번도 나를 온전한 여자로 바라본 적도 없었으면서… 그것도 무려 5개월이나 온 세상이 다 알게 시끄러운 스캔들을 터뜨려 가며, 그렇게 뜨겁게 다른 여자를 안아놓고… 어떻게 내 앞에서 이렇게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날 함부로 대하고 방치할 수 있죠?]비참함에 유진의 몸이 덜덜 떨렸다.[아무리 내가 당신이 우리 가문에 인질처럼 묶어
유정의 인생 최대의 반항이 끝났다.프랑스 파리로 돌아가기 싫다며, 집안을 상대로 벌였던 지독하고 외로운 가출 소동.재벌가의 압박에, 전쟁이 터질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결말은 너무도 싱겁고 허무하게 오유정, 그녀의 완벽한 승리로 쉽게 마무리가 되어버렸다.언제나 그녀의 인생이 그러했듯, 결국 유정이 원하는 대로 됐다.“저… 여기 내 짐 안 빼려고 요. 월세는 1년은 내야 한다고 집에 뻥쳐서 한꺼번에 지불할 게요. 그러니까 혹시 우리 유진이 학교에서 쉘터 필요하면 여기 쓰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저도 아마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계속 여기 쓸 수도 있고…… 나도 우리 집안 분위기를 피해 숨 쉴 공간이 필요하거든요.”유정은 에구치의 좁은 아파트 거실 한구석에,자신의 짐들을 고스란히 남겨두며, 붙잡아달라는 듯……주저리주저리 구차하고 기나긴 변명들을 늘어놓았다.에구치는 덤덤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나직하게 읊조렸다.“편한대로 해. 잘 해결 되어 다행이다”“네. 요스케 덕분이에요”“난 별로 한 거 없는데…… 내가 더 고맙지. 월세 꼬박꼬박 내는 룸메이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야.”에구치가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선을 그었다.“아니요. 감사해요. 그리고……”한참 동안, 유정이 월세 계약을 계속 하겠다는 변명을 쏟아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입술 끝에...... 더 무겁게 할 말이 남은 듯,유정은 한동안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거렸다.좁은 거실 안에 묘한 텐션이 감돌았다.“뭐… 더 할 말 있어?”“그게 아! 몰라. 나 필터 없어요. 대충 알죠?”“대충. 눈치는 챘어”“내가 요스케한테 반했던 것도 알테고?”유정의 직설적인 화법에, 에구치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미소만 지었다.“내가 왜 요스케 포기했는지 알아요?”“나란 놈 별 볼 일 없다는 거 대충 알았을 거잖아. 너랑 나 세상이 달라.”“그런 건 이유도 안돼요. 적어도 나에게는. 나 한다면 하거든요. 수습은 못할지 몰라도......”“하하하…… 최악인
류를 사랑한다는 카린의 고백에 유진은 기분이 별로였다.명치끝이 더러운 오물을 삼킨 것처럼 기분 나쁘게 뒤틀렸다.어쩌면 지난 주말의 여파였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늘 그렇듯,자신이 어쩌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느낀 일말의 풋풋한 설렘마저,그는 어김없이 다른 여자의 흔적을 통해 모조리 처참하게 박살 내 버렸다.이번만큼은 정말 다를지도 모른다는 멍청하고 순진한 기대를 품었던 제 자신이,지독하게 한심하고 등신처럼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진짜… 기대할 걸 기대했어야지… 바보같이…]수치심이 해일처럼 밀려왔지만,유진은 이내 익숙하게 감정을 거두어들였다.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서글프게 우는 그 남자의 전 연인을 향해,애써 차분하고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헤어지지 마세요. 안 헤어져도 돼요.”“네?”카린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유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스캔들이 터지든, 밤새 뭘 하든 난 상관없어요.”이미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빠른 체념.유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질투도, 분노도 섞이지 않은 채 얼음처럼 냉정했다.“그럼 오빠 놔주세요.”“잡고 있었던 적 없어요.”“오빠 저랑 만나는 동안 계속 유진씨 얘기 했어요. 자신이 원하는 여자는 유진씨뿐이라고… 그래서 욕심내지 말라고… 그러니까 유진씨가 먼저 오빠를 버려주세요.”[원하는 여자가 오직 나뿐이라고? 정말 웃기지도 않네.]카린의 절규를 들은, 유진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가슴이 잔인하게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이젠 나를…… 다른 여자들을 내다 버리는, 자기 편리한 이별 핑계로까지, 갖다 쓰는 거야, 이 인간은? 진짜 끝까지 어이없어.]유진은 자신을 붙잡고 애처롭게 애원하는 여자를 한심하다는 듯 빤히 바라봤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저랑 오빠 이미 깊은 관계예요. 저 오빠 없으면 못 살아요. 제발 오빠가 제게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안 그럼 저 죽어요. 제발…”그
“그 아이…… 꼭 고집 안했으면 좋겠다”류의 어머니는 렉스 그룹 도쿄 회장실로 예고도 없이 직접 찾아왔다.방 안을 가득 채운 재벌가 최고 어른의 강압적이고 서늘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류는 차갑게 반박했다.“어머니가 반대할 이유 없습니다. 어머니가 제 결혼 상대로 원하시는 기본적인 조건…… 모두를 갖춘 사람입니다”“그래. 한국인이고 좋은 가문에 외모 학력 인성 예의범절까지 전부 갖춘 아이는 맞다. 근데 난 걔가 싫다”“뭐가 문제입니까? 나이가 너무 어린 게 문제입니까? 아시다시피, 어린 여자가 제 취향입니다. 저와 열애설 난 친구들 나이 조사해 보셨으면 아실 것 아닙니까?”류가 펜을 탁 내려놓으며 오만하게 상체를 뒤로 기댔다.류의 건방진 태도에도, 그의 어머니는 매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나이가 너무 어린 것도 보기 좋지 않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 아이의 외모… 지나치다. 그리고 그런 그 아이에게 정신 빠진 너도 문제고”“많이 좋아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까? 그 반대라면 몰라도?”“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네 혼 다 빼 먹고 흐트려 놓을 아이이기에 안된다는 거다. 너…… 이미 그 아이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보고를 여기 저기서 받았다. 큰 일하는 놈이 여자 미색에 빠져서, 우선 순위가 흔들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어머니의 매서운 다그침이 회장실 벽면을 거칠게 때렸다.“그 아이의 문자 한통에 임원회의며 회사 일정이며 전부 무시하고, 쓸데 없는 곳에 회사 자금을 투자하고…… 그 아이는 네 정신과 이성을 흐트리고 있어. 그래서 안된다”“죄송하지만 전 이미 결정했습니다”류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안 그래도 말씀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저 유진과 약혼 없이 다음 달이라도…… 최대한 빨리 결혼할 생각입니다. 유진과 상의 후 세부 일정 전달드리겠습니다. 어머니께선 그저 축하만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더는 타협할 수 없다는 오만한 아들의 완강한 선언에,회장실의 공기는 영하로 얼어붙었다.
방 문 너머, 침실에 누워 있을 유진의 잔상이,그녀의 살결에서 풍기던 달콤하고 싱그러운 복숭아 향이,지독하게 류의 밤을 괴롭혔다.찹쌀떡처럼 하얗고 말랑하게 자신의 손 안에서…녹아내릴 듯 부드러웠던 그녀 속살의 감촉이…어두운 펜트하우스의 밤 내내…그의 차가운 이성을 사정없이 갉아먹고 헤집어 놓았다.온몸에 열병처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류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마른세수를 했다.아무리 숨을 들이켜도, 아랫배의 묵직한 정욕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더 빨리 널… 내 곁에 데려와야 겠어. 이제는 정말… 자신이 없어졌어… 내가 널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아니. 더 이상은 안되겠어. 못 참겠어… 널 가져야 겠어. 그러지 않으면 난 미쳐 버릴 테니까.]3년의 기다림. 그는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그리고 오늘 밤…가슴이 터지도록 참고 참았던 사랑한다는 말이 결국 터져 나와 버렸다.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안달이 났다.그리고 자신의 것이 된 그녀를 맘껏 사랑하고 싶었다.*따스한 도쿄의 오전 햇살이 눈꺼풀을 찌를 때가 돼서야,유진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침 9시 정각.“음…….”유진은 너무도 잘 잤다.술의 효과인지, 낯선 호텔 방임에도 불구하고 단잠을 잤다.아침 늦게까지, 단 한번의 뒤척임도 없이 눈을 떴다.그리고 이불을 걷는 순간,너무 놀라 다시 이불을 얼굴까지 덮었다.[뭐 야? 왜 팬티 차림…이야?]순식간에 뺨에서부터 온몸의 살결 위로, 새빨간 열기로 소름이 돋아났다.심지어 은밀하게 촉촉히 젖어 있는 팬티…유진은 정신없이 머리 속을 헤맸다.‘사랑해… 널 사랑하게 됐어’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상한 기억의 파편들…선명하게 귓가에 맴도는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류의 뜨겁게 달아올랐던 단단한 맨살의 상반신…그리고 부끄러움도 없이,그에게 매달려 유혹하듯 안겨 들던 자신의 낯선 모습까지…한낱 지독한 밤의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입술과 가슴 위로 남겨진
처음으로 평범한 커플처럼 데이트를 했다.꽤나 즐거웠고 편했다.그리고 어느새 유진은 홀짝거리며 2잔의 레몬사와를 모두 마셔 버렸다.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부드럽게 퍼지자,그동안 류를 향해 단단하게 얼려두었던 그녀의 방어벽이…봄눈 녹듯 점점 말랑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게다가 하필이면,지금 제 눈앞에 앉은 남자가,평소처럼 오만하게 통제하려 들거나 짜증 나게 굴지 않았다.아니…… 짜증이 날 정도로,다정하게 자꾸만 자신의 시선을 집요하게 붙잡아맸다.브라운 뿔테 안경 너머의 깊고 처연한 눈동자.편안한 캐시미어 니트임에도 드러나는 넒은 어깨.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갈 때마다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들었다.[이러면 안되는데… 또 다시 이 남자의 놀림감이 되기는 싫은데… 내 마음까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싫은데… 나 왜 이렇게 쉽지?]다시 속도 모르고 설레었다.이렇게 그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어쩌면 스위스때처럼 그가 다시 좋아질 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가,또다시 수면 위로 찰랑거리며 생겨나 버렸다.그 달콤한 기대감에 취해,낮은 도수의 알코올에도 유진은 결국 완벽하게 취해버렸다.탁-.가녀린 팔꿈치를 테이블에 위태롭게 괸 채…깜빡거리던 유진의 긴 속눈썹이,결국 밀려드는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감겼다.류는 조용히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갈 곳 잃은 그녀의 고개를 제 어깨 위에 가만히 기대게 했다.그러자 유진은 솜털처럼 가볍게 그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완전 아기가 따로 없네. 어떻게 내 품 안에서 이렇게 잘 잘 수가 있니?”자신의 품에 완전히 쏟아져 안긴 채,미세한 숨소리 하나 외엔…아무런 경계도 없이 곤히 잠든 유진을 내려다보며,류의 입가에 나직하고 깊은 웃음이 번져나갔다.가슴 한구석이 채워지는 듯한 지독한 충만감.류는 한 손으로 유진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은 채,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아사쿠사 이자카야로 와’그는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문자를 보내고,
“왜 벌써부터… 저 건물 공사를 하겠다는 거야? 아직 겨울도 안 끝났는데… 날씨 좀 풀리고 해도 되잖아”“회장님께서 아가씨 결혼을 서두르려고 그러시는 거죠.”유모의 덤덤한 대답에 유진은 짜증이 난 듯 팩 하고 고개를 돌렸다.“굳이… 뭘 그렇게까지.”“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맘 놓고 있을 때에요? 요즘 젊은 애들 사이에서 제일 예쁘다는 아이돌 여자애… 그 이름이 뭐더라… 암튼 그 계집애가 그렇게 류 회장님께 꼬리친다고 소문이 파다 하던데… 거기다 류 회장님 마지막으로 아가씨 만나러 제주도 오셨던 게 벌써 5개월이나 됐으니… 걱정
“아빠…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KL 그룹 서회장이 스위스 기숙학교 교장실에 나타났다.10살 때부터 다닌 이 학교에 아버지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열여섯의 유진은 제 눈을 의심했다.“우리 딸 보고 싶어서 왔지. 진작에 와 봤어야 했는데… 네 엄마 죽고 회사가 엉망이어서 수습하느라 아빠가 정신이 없었잖니? 이해하지?”“네…”“아빠가 말은 안 했지만… 알아서 척척 잘해내는 우리 딸 소식 들으면서 뿌듯하고 힘이 많이 됐다. 고맙다. 우리 착하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가 건네는 다정한
파리 리츠의 화려한 야외 연회장.'아시아 기업인의 밤'황금빛 조명 아래......류는 아시아의 내로라하는 신흥 부호들에 둘러싸여 있었다.하지만 정작 그는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이 연회장 한편의 무대에서 흐르는 감미로운 첼로 선율로 향했지만,끊임없이 밀려드는 비즈니스 인사들 탓에, 온전히 연주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공연이 끝나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질 무렵.KL 그룹의 회장 부부가 득달같이 류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겉치레뿐인 정형적인 대화가 몇 마디 오갔다.“공연 잘 보셨어요?”“아…
“Do you mind me sitting here?”(“여기 자리 있어요?”)작은 몸집의 소녀가 류가 앉은 야외 테이블에 맞은 편 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고글과 넥워머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맑았다.“No, please.”“Thanks.”작은 소녀는 핫초코 한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더니,자신의 백팩에서 작은 컵라면과 보온병을 꺼냈다.그리고 마테호른 정상의 야외 테라스에서...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붇고, 핫초코를 홀짝거리며 마셨다.이내 사방으로 퍼지는 익숙한 매운 라면 냄새에, 류는 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