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실로 들이닥친 사람은 시어머니 배옥순이었다. 반지를 낀 손을 치켜들고, 시모는 바닥의 서류부터 훑어보았다.
"이게 무슨 꼴이야! 도진아, 이 천한 년이 아직도 안 나가고 버텨?"
배옥순은 식탁의 이혼 소장과 서린을 번갈아 보더니 표독스럽게 웃었다. 시모는 내가 10년 동안 매일 아침 무릎 꿇고 주물러 주던 그 발로 내 무릎 앞을 걷어찼다.
"잘했다, 내 아들! 애도 못 배는 돌부처를 10년이나 거둬 먹였으면 천벌은 면했지. 서린아, 네가 우리 집안을 살렸다!"
"어머님, 저 너무 무서웠어요. 은서 언니가 오빠 지분을 빼앗겠다고 헛소리를 해서……."
서린이 눈물 없는 얼굴로 시모의 품에 안겨 가증스럽게 속삭였다. 시모는 내 머리채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틀어 피했다. 시모의 손끝에서 역겨운 사향 냄새가 훅 풍겼다.
"어디서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어? 야, 이 종년아! 네가 걸친 거 전부 우리 도진이 돈이야! 당장 몸만 나가!"
시모는 다용도실에서 100리터짜리 검은 쓰레기봉투 세 장을 낚아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러고는 안방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내 낡은 옷가지들을 닥치는 대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어머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런 싸구려 옷은 우리 아기한테도 해로워요."
서린이 맞장구를 치며 내 화장대를 뒤엎었다. 내가 가계부를 쓰며 보관해 둔 낡은 통장들이 마룻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도진은 소파에 거만하게 앉아 양주를 들이켜며 그 꼴을 비열하게 관망했다.
"강은서, 이제 네 현실을 알겠어? 넌 내 집에서 쓰레기봉투 세 개짜리 인생이야."
창밖에서는 거센 장대비가 유리창을 두들겨 패듯 쏟아져 내렸다. 시모는 내 짐이 쑤셔 박힌 봉투를 질질 끌고 가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쫓겨나 봐야 제 분수를 알지!"
퍽-!
촤악-!
시모와 서린이 봉투들을 비 내리는 마당 한가운데로 내던졌다. 비닐이 찢어지며 진흙탕 물 위로 내 옷가지들이 젖어 들었다. 차가운 비 냄새와 젖은 흙 비린내가 왈칵 들이쳤다.
서린이 다가와 내 목덜미를 가리켰다.
"언니, 그 목걸이도 오빠 돈으로 산 거죠? 그것도 벗어놓고 가요."
서린의 손톱이 내 쇄골에 걸린 얇은 백금 체인을 향해 뻗어왔다. 아버지가 스무 살 생일에 남겨주신 작은 열쇠 모양의 유품이었다. 그 탐욕스러운 손가락이 살갗에 닿기 직전.
탁-!
나는 서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열쇠에 닿으려던 손톱이 허공에서 멎었다. 힘을 줄수록 서린의 입이 벌어졌다.
"아악-! 오, 오빠! 이거 놔!"
"손대지 마. 네 더러운 손이 닿으면 아버지가 노하셔."
내 목소리는 빗소리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린의 손목을 비틀어 내리누르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도진이 벌떡 일어났지만 내 서늘한 흑안과 마주친 순간 숨을 들이켜며 멈칫했다.
나는 바닥의 서린을 내려다보지도 않은 채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턱에 멈춰 선 나는 뒤를 돌아 시모와 도진을 차갑게 훑어보았다.
"너희가 방금 진흙탕에 내던진 건 내 짐이 아니야."
나는 빗속에 놓인 봉투를 봤다. 입구가 벌어진 틈으로 젖은 소매가 흘러나와 있었다.
"너희 가문이 살 수 있었던 마지막 구명줄을 너희 손으로 내던진 거지."
우르릉, 쾅-!
그 순간, 탁자 위 두 사람의 스마트폰이 잇따라 진동했다. 민혁의 법무팀이 앞서 진행한 경매 사건과 채권 인수 사실을 통지한 것이었다. 도진은 여러 차례 온 법원 우편을 내게 내밀며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었다.
[담보권 실행 사건 진행 통지: 한남동 대저택 외 담보 부동산]
[채권자: 블랙스톤 파트너스 / 인수 채권액: 420억 원]
시모의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 도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갔다. 나는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태연히 발을 내딛으며 속삭였다.
"지옥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어. 즐겨봐, 박도진."
다음 해 봄, 첫 현장 점검은 아침 아홉 시였다.나는 알람이 울리기 십 분 전에 눈을 떴다. 창밖에서 쓰레기 수거 차량이 지나갔다. 예전 같으면 누가 돌아온 줄 알고 일어났을 소리였다. 이제는 이 동네의 수거 요일을 알고 있었다.주방에서 밥을 데우고 전날 사 둔 달걀을 부쳤다. 노란 컵은 새로 산 것이었다. 물을 따르다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날짜를 봤다.3월 14일.한동안 달걀이 익는 소리만 들었다. 작년 이날, 나는 피 묻은 입술로 도진에게 이혼 소장을 받았다. 현관 밖으로 내 옷이 날아갔고 밤새 비가 왔다.오늘 일기예보에는 비가 없었다.뒤집개를 들었다. 가장자리가 조금 탔지만 달걀은 잘 뒤집혔다. 밥 위에 얹어 앉아서 먹었다. 다 먹은 그릇을 물에 담근 뒤 가방을 챙겼다.현관 거울 앞에서 옷깃을 폈다.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백금 열쇠를 만지던 손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대신 재킷 주머니에 작은 수첩을 넣었다.첫 장에는 오늘 확인할 현장 문제가 적혀 있었다.출입로 물 고임. 휴게 공간. 지난달 지급 확인.차에 오르자 민혁이 태블릿을 건넸다."점검 후 회의는 열한 시입니다. 법무 보고는 내일 정기 회의 자료에 넣었습니다. 오늘 따로 결정하실 내용은 없습니다.""그럼 내일 볼게요."도진과 서린에 관한 소식도 한동안은 보고서에서 이름부터 찾았다. 어느 날부터는 민혁이 표시한 확인 사항을 먼저 읽게 됐다. 아직 남은 절차가 있었고, 내가 직접 살피지 않아도 정해진 날에 보고가 올라왔다.차는 추모공원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현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께는 지난 주말에 다녀왔다. 그날 나는 회사 이야기를 조금 하고, 태운 생선 이야기를 더 오래 했다.현장 입구에서 안전모를 받아 썼다. 정애 씨가 작업 조끼 차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성우환경의 계약이 끝난 뒤 새로 선정된 업체로 옮겼고,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대표님, 저쪽으로 오세요. 어제 청소하다 보니까 물이 아직 남더라고요."그가 가리킨 출입로 모서리에
이사한 지 삼 주가 지나서야 식탁 의자를 두 개 더 샀다.민혁과 비서실의 윤 대리, 정애 씨를 저녁에 초대했다. 정애 씨는 밀린 임금을 받은 뒤에도 현장 근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사진으로만 본 생선구이를 이번에는 내가 대접하고 싶었다."제가 대표님 댁에 가도 됩니까?"전화 속 목소리가 높아졌다."불편하시면 밖에서 먹어도 돼요.""아니요. 아들이 자꾸 잘 다녀오라네요.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요."과일 한 봉지만 가져오시라는 말에 정애 씨가 웃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메모지에 세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손님 명단을 쓰면서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아직 낯설었다.토요일 오후, 시장에서 고등어를 샀다. 된장을 풀고 채소를 썰었다. 칼끝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익숙했다.도진의 결혼기념일 상도 이런 순서로 준비했었다. 국을 먼저 끓이고, 고기를 재우고, 늦게 오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불을 줄였다. 나는 칼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손등을 식혔다.오늘은 여섯 시에 먹기로 했다. 늦는 사람이 있어도 그 시간에 먹으면 됐다.첫 손님은 윤 대리였다. 그는 문 앞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다가 굳었다."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외투부터 벗어요."그가 휴대전화를 꺼내려다 다시 넣는 것을 봤다. 나는 거실 한쪽을 가리켰다."오늘 보고할 일은 없어요. 저도 메일 안 열었고요."곧 정애 씨가 귤을 들고 왔고, 민혁은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식탁에 그릇 네 벌을 놓자 비어 있던 자리가 채워졌다."그릇이 예쁘네요."정애 씨가 접시 가장자리를 살폈다. 나는 어디에서 샀는지 이야기하다가 생선을 뒤집을 시간을 놓쳤다. 주방으로 달려가니 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불을 끄고 창문을 더 열었다. 까맣게 붙은 껍질을 보는 순간 입에서 사과가 먼저 나왔다."죄송해요. 다시 할게요. 금방……"손이 젖은 행주를 더듬었다. 등 뒤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자 어깨가 저절로 올라갔다."은서 씨, 불은 꺼졌어요."
새집 현관문 앞에서 열쇠를 두 번이나 반대로 돌렸다.업무용 숙소에서는 카드 한 장이면 됐는데, 이 오래된 아파트는 보조 잠금장치에 열쇠가 필요했다. 중개인이 설명해 준 방향을 떠올리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넓지 않은 거실에 오전 햇빛이 들어와 있었다. 가구점에서 먼저 보낸 식탁과 의자 두 개, 아직 비닐을 벗기지 않은 소파가 전부였다. 창문 아래에는 이삿짐 상자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나는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시어머니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도진이 자고 있는지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몸은 자꾸 집 안의 소리를 먼저 찾았다.냉장고가 낮게 울었다. 그뿐이었다.첫 번째 상자에는 업무용 옷이 들어 있었다. 검은 재킷과 흰 셔츠를 옷장에 걸고, 빈 칸을 세었다. 절반 이상이 남았다.옛 저택에서는 내 옷이 도진의 계절 지난 코트 옆에 끼어 있었다. 옷걸이 하나를 더 걸 때마다 시모가 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물었다. 나는 벌어둔 돈이 있으면서도 값싼 옷의 가격표를 보여주곤 했다.옷장 문을 닫지 않고 다음 상자를 열었다.접시 네 장과 수저, 냄비 하나가 나왔다. 모두 새 물건이었다. 나는 접시를 꺼내다가 손을 멈췄다. 식탁은 두 사람용인데 왜 그릇은 네 벌을 샀을까.누가 올지도 정하지 않은 집이었다.초인종이 울렸다. 손에서 접시가 미끄러질 뻔했다."대표님, 한민혁입니다. 맡기신 서류를 가져왔습니다."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민혁은 납작한 보관함을 들고 있었다. 옛 일기장과 재판에 쓰인 자료 중 내가 직접 보관하기로 한 것들이었다."서재 안쪽에 두면 될까요?""제가 받을게요. 무겁죠?""책 몇 권 정도입니다."그는 보관함을 식탁 위에 놓았다. 나는 손잡이를 잡아 들어봤다. 10년을 담은 물건이었지만, 양손으로 옮길 만했다. 서재의 잠금장치가 있는 수납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열쇠는 현관 열쇠와 다른 고리에 끼웠다.민혁이 빈 벽을 둘러봤다."책상이 아직 안 왔군요.""주문을 취소했어요. 회사 것보다 큰 걸 골
성우환경 대표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왔다.그가 가져온 화분은 비서가 접견실 밖에 두었다. 나는 악수를 마치자마자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어젯밤 재무팀이 정리한 지급 내역과 아직 서명하지 않은 재계약서가 놓여 있었다."새 간판을 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선친께서도 얼마나 자랑스러우시겠습니까.""어제 받으신 대금부터 확인하죠."그의 시선이 재계약서에 머물렀다."그 건으로 연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돈은 들어왔습니다. 다만 그동안 저희도 급한 곳이 많아서요. 현장을 유지하려면 융통성이 필요합니다.""직원들에게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하셨더군요.""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혁이 이체 확인서의 수취 계좌를 짚었다."입금 사실은 확인하셨습니다. 밀린 임금의 지급 일정과 내역을 요청드립니다."성우 대표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변호사님까지 나오실 일이 아닙니다. 직원들하고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강 대표님도 앞으로 사업하시다 보면……""제게 사업을 가르치러 오신 건가요?"그의 웃음이 어색하게 멎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서로 편하게 일하자는 말씀입니다. 박 회장하고도 그렇게 오래 맞춰왔으니까요."그가 재킷 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두께를 보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봉투는 내 찻잔 옆으로 밀려왔다.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가져가세요.""취임 축하로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직원 월급은 못 주셨다면서요."그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계속 이런 식이면 인력 배치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당장 현장 네 군데를 누가 치웁니까?"나는 재계약서를 덮었다."지금 계약은 남아 있습니다. 이행하실 업무와 지급하실 임금을 설명해 주세요. 다음 계약을 먼저 약속하지는 않겠습니다."민혁이 준비해 온 확인 항목을 건넸다. 기존 계약의 이행 상태와 새 계약에 필요한 자료가 구분돼 있었다. 갑자기 직원을 내보내 현장과 생계를 함께 흔들지 않도록 대체 운영 계획도 관리팀이 검토하고 있
추모공원에서 돌아오니 오후 네 시였다.현판식 때 걸어둔 꽃장식이 아직 로비에 남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서류철을 비서에게 맡기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직원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앉으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탁자에는 복직자들의 배치표와 다음 달 현장 일정이 놓여 있었다. 맨 끝자리의 여자는 자료 대신 낡은 봉투를 쥐고 있었다. 가슴에 단 방문증이 뒤집혀 있었다."저분도 오늘 면담 대상인가요?"옆에 서 있던 관리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협력업체 직원입니다. 현판식에 오셨다가 대표님을 꼭 뵙겠다고 하셔서요. 저희가 따로 안내하겠습니다."그가 문 쪽으로 손을 내밀자 여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빈 의자를 당겼다."어떤 일로 오셨는지 먼저 듣죠."여자는 앉지 않고 봉투부터 내밀었다."현장 청소하는 김정애입니다. 오늘 돈을 다 주셨다고 해서요. 그런데 저희 사장님은 아직 못 받았답니다."관리팀장이 서둘러 끼어들었다."대금은 오전에 전부 지급했습니다. 업체 내부 사정까지 저희가 알 수는 없고요.""그럼 이건 어디에 물어봐야 합니까?"봉투에서 접힌 급여 명세서 두 장이 나왔다. 정애 씨는 구겨진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마지막 장에는 붉은 펜으로 날짜가 두 번 고쳐져 있었다."두 달 밀린 월급입니다. 사장님이 원청 돈 들어오면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늘까지 기다렸습니다."조금 전 광장에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한 대가를 제때 받게 하겠다는 약속. 나는 지급 완료 보고서에 서명했고,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하지만 이 여자는 그 박수 속에서도 봉투를 내려놓지 못했다."업체 이름이 어떻게 되죠?""성우환경이요."관리팀장이 노트북을 돌렸다. 오전 열 시 이전에 이체가 끝난 내역이 있었다. 받는 사람도 성우환경이었다. 나는 금액과 계좌 명의를 확인한 뒤 민혁을 봤다."오전 지급분에 어느 현장 대금이 포함됐는지 확인해 주세요.""계약서와 정산 내역을 대조하겠습니다."정애 씨의 손가락이 봉투 입구를
경기도 북부의 양지바른 추모공원.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로 서늘하고 맑은 솔바람이 불어와, 품에 안은 새하얀 국화꽃 다발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꽃집에서 뿌린 물방울이 꽃잎 사이에 남아 있었다.나는 줄기를 감싼 종이를 다시 여몄다. 10년 전, 피눈물을 삼키며 아버지의 장례를 홀로 치러야 했던 그 혹독하고 시리던 겨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생을 바쳐 일군 한양건설을 원수 박태식에게 도둑맞고, 수백억의 부도 어음과 억울한 누명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내 아버지.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나를 조롱하던 원수들의 비열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울음을 삼키고 스스로 독사를 품었다. 그날 이후 시작된 10년간의 처절했던 위장 잠입. 시어머니의 각질투성이 발을 주무르고, 남편의 손에 뺨을 맞으며, 화장실 변기를 닦으면서도 결코 칼날을 거두지 않았던 지옥 같은 세월이었다.또각. 또각.내 단단한 구두 굽 소리가 고요한 추모관 복도를 울렸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은, 따스한 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오는 故 강창수 회장의 유골함 앞이었다. 유리벽 너머, 생전의 모습 그대로 인자하고 따뜻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의 흑백 영정 사진.나는 가슴에 품고 온 가죽 서류철을 꺼내 선반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었다.[주식회사 한양건설 법인 등기사항전부증명서 (대표이사 강은서)][서울중앙지방법원 1심 판결문: 피고인 박도진 징역 12년, 피고인 신서린 징역 5년][태성그룹 상호 변경 및 한남동 대저택 인도 집행 완료 확인서]그리고 지난 10년간 내 살갗을 찢어가며 피눈물로 기록했던 낡은 검은색 복수 일기장. 가문을 공중분해시키고 원수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내 20대를 송두리째 바쳐 완성한 피 묻은 장부들이었다."아버지."마침내 내 입술 사이로 메마른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목덜미에 10년간 걸려 있던 작은 백금 열쇠 펜던트를 풀어,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약속 지켰어요. 아버지의 한양건설도, 도둑맞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