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짝-!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터져버린 입술 새로 비릿한 쇠 냄새가 왈칵 번졌다. 왼쪽 뺨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시뻘건 손자국 위로 차가운 종이 뭉치가 날아와 사정없이 흩어졌다.
"눈깔 똑바로 안 떠? 어디서 사람을 빤히 쳐다봐, 이 불임 덩어리가."
남편 박도진의 목소리였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아직 잉크 냄새도 가시지 않은 흑백 초음파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임신 5주 차.
검은 점 하나가 찍힌 사진 뒤로, 은은한 니치 향수 향을 풍기는 여자가 도진의 팔에 제 몸을 착 달라붙이고 있었다. 도진의 첫사랑이자 태성 갤러리의 프라이빗 아트 딜러, 신서린이었다.
"봤지? 서린이가 내 아이를 가졌어. 태성그룹의 진짜 핏줄이라고."
결혼 10주년 기념일 저녁이었다. 내가 반나절 동안 주방에 서서 도진이 좋아하는 한우 갈비찜과 복어 맑은탕을 끓여 낸 식탁 위로 초음파 사진이 짓밟히듯 내동댕이쳐졌다. 서린은 도진의 어깨 너머로 턱을 치켜들며 비릿하게 웃었다.
"언니, 10년 동안 무자식 상팔자로 시댁 밥 축냈으면 염치는 있어야죠. 오빠한테 언제까지 매달려 있을 생각이었어요?"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도진의 오만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내 이마를 툭툭 쳤다.
모욕적인 마찰음이 이마를 타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이혼 소장이야. 읽고 내일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위자료? 10년 동안 밥 먹여주고 옷 입혀줬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넌 우리 집안에 발 들인 순간부터 공짜 식모였어, 강은서."
10년 전, 내 아버지 강창수 회장의 한양건설을 집어삼키고 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던 박태식 회장의 아들. 그 원수의 핏줄 밑으로 기어들어 가 발을 닦고, 토사물을 치우고, 온갖 구타와 폭언을 견뎌 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는 눈물 한 방울 고이지 않았다.
대신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서늘한 전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지난 10년 동안 날카롭게 벼려온 칼날이 마침내 심장을 겨누는 순간처럼.
"왜 대답이 없어? 귀까지 처먹었어?"
도진이 거칠게 내 턱을 틀어쥐었다. 땀 냄새와 알코올 향이 뒤섞인 역겨운 숨결이 코끝을 찔렀다. 그의 손아귀 힘에 턱뼈가 부서질 듯 조여왔지만,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웃어? 이 미친년이 지금 웃어?"
"고마워서 그래, 박도진."
내 목소리가 낯설었는지 도진의 손아귀가 잠깐 느슨해졌다. 나는 그 틈에 턱을 빼냈다.
"뭐라고?"
"네가 먼저 내 뺨을 치고, 다른 여자를 내 앞에 세우고, 이혼 소장을 던져줘서."
나는 피로 얼룩진 입가를 손등으로 쓱 닦아냈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 사이에서 도진이 던진 이혼 소장을 집어 들었다. 첫 페이지에 선명하게 적힌 도진의 서명과 인감.
그리고 도진의 폭행과 축출 행위.
"넌 방금 네 손으로 태성그룹의 숨통을 끊었어."
"뭐? 이 미친 종년이 대가리가 어떻게 됐나……!"
도진이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나는 옷 안쪽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사모펀드 '블랙스톤 파트너스' 법무팀이 보낸 담보권 실행 보고가 떠 있었다.
내가 조용히 정리해 두었던 연체 통지와 정산 서류가 날짜순으로 이어졌다.
[특약 제7조 2항: 채무불이행 시 박도진 보유 태성그룹 보통주 65.4%에 대한 양도담보권을 실행한다. 정산 및 명의개서 절차에 따른다.]
"박도진, 네가 3년 전 사업 확장한다며 서명했던 주식 담보 계약서 기억해? 만기가 지나도록 돈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읽어봤어?"
도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서린의 얼굴에서도 득의양양하던 미소가 서서히 굳어갔다.
"연체 통지서가 몇 번이나 왔는데, 넌 내가 또 막아줄 줄 알았지. 주식 정산은 이미 끝났어. 이 집 근저당권도 같은 펀드가 쥐고 있고. 그런데 그 펀드가 누구 것인지도 모르면서 나부터 내쫓았네."
나는 바닥에서 우아하게 일어났다. 무릎을 펴고 그들과 눈높이를 맞춘 순간, 식탁 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내일 아침 9시를 기대해. 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파멸을 선물해 줄 테니까."
다음 해 봄, 첫 현장 점검은 아침 아홉 시였다.나는 알람이 울리기 십 분 전에 눈을 떴다. 창밖에서 쓰레기 수거 차량이 지나갔다. 예전 같으면 누가 돌아온 줄 알고 일어났을 소리였다. 이제는 이 동네의 수거 요일을 알고 있었다.주방에서 밥을 데우고 전날 사 둔 달걀을 부쳤다. 노란 컵은 새로 산 것이었다. 물을 따르다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날짜를 봤다.3월 14일.한동안 달걀이 익는 소리만 들었다. 작년 이날, 나는 피 묻은 입술로 도진에게 이혼 소장을 받았다. 현관 밖으로 내 옷이 날아갔고 밤새 비가 왔다.오늘 일기예보에는 비가 없었다.뒤집개를 들었다. 가장자리가 조금 탔지만 달걀은 잘 뒤집혔다. 밥 위에 얹어 앉아서 먹었다. 다 먹은 그릇을 물에 담근 뒤 가방을 챙겼다.현관 거울 앞에서 옷깃을 폈다.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백금 열쇠를 만지던 손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대신 재킷 주머니에 작은 수첩을 넣었다.첫 장에는 오늘 확인할 현장 문제가 적혀 있었다.출입로 물 고임. 휴게 공간. 지난달 지급 확인.차에 오르자 민혁이 태블릿을 건넸다."점검 후 회의는 열한 시입니다. 법무 보고는 내일 정기 회의 자료에 넣었습니다. 오늘 따로 결정하실 내용은 없습니다.""그럼 내일 볼게요."도진과 서린에 관한 소식도 한동안은 보고서에서 이름부터 찾았다. 어느 날부터는 민혁이 표시한 확인 사항을 먼저 읽게 됐다. 아직 남은 절차가 있었고, 내가 직접 살피지 않아도 정해진 날에 보고가 올라왔다.차는 추모공원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현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께는 지난 주말에 다녀왔다. 그날 나는 회사 이야기를 조금 하고, 태운 생선 이야기를 더 오래 했다.현장 입구에서 안전모를 받아 썼다. 정애 씨가 작업 조끼 차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성우환경의 계약이 끝난 뒤 새로 선정된 업체로 옮겼고,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대표님, 저쪽으로 오세요. 어제 청소하다 보니까 물이 아직 남더라고요."그가 가리킨 출입로 모서리에
이사한 지 삼 주가 지나서야 식탁 의자를 두 개 더 샀다.민혁과 비서실의 윤 대리, 정애 씨를 저녁에 초대했다. 정애 씨는 밀린 임금을 받은 뒤에도 현장 근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사진으로만 본 생선구이를 이번에는 내가 대접하고 싶었다."제가 대표님 댁에 가도 됩니까?"전화 속 목소리가 높아졌다."불편하시면 밖에서 먹어도 돼요.""아니요. 아들이 자꾸 잘 다녀오라네요.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요."과일 한 봉지만 가져오시라는 말에 정애 씨가 웃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메모지에 세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손님 명단을 쓰면서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아직 낯설었다.토요일 오후, 시장에서 고등어를 샀다. 된장을 풀고 채소를 썰었다. 칼끝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익숙했다.도진의 결혼기념일 상도 이런 순서로 준비했었다. 국을 먼저 끓이고, 고기를 재우고, 늦게 오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불을 줄였다. 나는 칼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손등을 식혔다.오늘은 여섯 시에 먹기로 했다. 늦는 사람이 있어도 그 시간에 먹으면 됐다.첫 손님은 윤 대리였다. 그는 문 앞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다가 굳었다."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외투부터 벗어요."그가 휴대전화를 꺼내려다 다시 넣는 것을 봤다. 나는 거실 한쪽을 가리켰다."오늘 보고할 일은 없어요. 저도 메일 안 열었고요."곧 정애 씨가 귤을 들고 왔고, 민혁은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식탁에 그릇 네 벌을 놓자 비어 있던 자리가 채워졌다."그릇이 예쁘네요."정애 씨가 접시 가장자리를 살폈다. 나는 어디에서 샀는지 이야기하다가 생선을 뒤집을 시간을 놓쳤다. 주방으로 달려가니 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불을 끄고 창문을 더 열었다. 까맣게 붙은 껍질을 보는 순간 입에서 사과가 먼저 나왔다."죄송해요. 다시 할게요. 금방……"손이 젖은 행주를 더듬었다. 등 뒤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자 어깨가 저절로 올라갔다."은서 씨, 불은 꺼졌어요."
새집 현관문 앞에서 열쇠를 두 번이나 반대로 돌렸다.업무용 숙소에서는 카드 한 장이면 됐는데, 이 오래된 아파트는 보조 잠금장치에 열쇠가 필요했다. 중개인이 설명해 준 방향을 떠올리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넓지 않은 거실에 오전 햇빛이 들어와 있었다. 가구점에서 먼저 보낸 식탁과 의자 두 개, 아직 비닐을 벗기지 않은 소파가 전부였다. 창문 아래에는 이삿짐 상자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나는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시어머니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도진이 자고 있는지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몸은 자꾸 집 안의 소리를 먼저 찾았다.냉장고가 낮게 울었다. 그뿐이었다.첫 번째 상자에는 업무용 옷이 들어 있었다. 검은 재킷과 흰 셔츠를 옷장에 걸고, 빈 칸을 세었다. 절반 이상이 남았다.옛 저택에서는 내 옷이 도진의 계절 지난 코트 옆에 끼어 있었다. 옷걸이 하나를 더 걸 때마다 시모가 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물었다. 나는 벌어둔 돈이 있으면서도 값싼 옷의 가격표를 보여주곤 했다.옷장 문을 닫지 않고 다음 상자를 열었다.접시 네 장과 수저, 냄비 하나가 나왔다. 모두 새 물건이었다. 나는 접시를 꺼내다가 손을 멈췄다. 식탁은 두 사람용인데 왜 그릇은 네 벌을 샀을까.누가 올지도 정하지 않은 집이었다.초인종이 울렸다. 손에서 접시가 미끄러질 뻔했다."대표님, 한민혁입니다. 맡기신 서류를 가져왔습니다."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민혁은 납작한 보관함을 들고 있었다. 옛 일기장과 재판에 쓰인 자료 중 내가 직접 보관하기로 한 것들이었다."서재 안쪽에 두면 될까요?""제가 받을게요. 무겁죠?""책 몇 권 정도입니다."그는 보관함을 식탁 위에 놓았다. 나는 손잡이를 잡아 들어봤다. 10년을 담은 물건이었지만, 양손으로 옮길 만했다. 서재의 잠금장치가 있는 수납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열쇠는 현관 열쇠와 다른 고리에 끼웠다.민혁이 빈 벽을 둘러봤다."책상이 아직 안 왔군요.""주문을 취소했어요. 회사 것보다 큰 걸 골
성우환경 대표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왔다.그가 가져온 화분은 비서가 접견실 밖에 두었다. 나는 악수를 마치자마자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어젯밤 재무팀이 정리한 지급 내역과 아직 서명하지 않은 재계약서가 놓여 있었다."새 간판을 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선친께서도 얼마나 자랑스러우시겠습니까.""어제 받으신 대금부터 확인하죠."그의 시선이 재계약서에 머물렀다."그 건으로 연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돈은 들어왔습니다. 다만 그동안 저희도 급한 곳이 많아서요. 현장을 유지하려면 융통성이 필요합니다.""직원들에게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하셨더군요.""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혁이 이체 확인서의 수취 계좌를 짚었다."입금 사실은 확인하셨습니다. 밀린 임금의 지급 일정과 내역을 요청드립니다."성우 대표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변호사님까지 나오실 일이 아닙니다. 직원들하고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강 대표님도 앞으로 사업하시다 보면……""제게 사업을 가르치러 오신 건가요?"그의 웃음이 어색하게 멎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서로 편하게 일하자는 말씀입니다. 박 회장하고도 그렇게 오래 맞춰왔으니까요."그가 재킷 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두께를 보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봉투는 내 찻잔 옆으로 밀려왔다.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가져가세요.""취임 축하로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직원 월급은 못 주셨다면서요."그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계속 이런 식이면 인력 배치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당장 현장 네 군데를 누가 치웁니까?"나는 재계약서를 덮었다."지금 계약은 남아 있습니다. 이행하실 업무와 지급하실 임금을 설명해 주세요. 다음 계약을 먼저 약속하지는 않겠습니다."민혁이 준비해 온 확인 항목을 건넸다. 기존 계약의 이행 상태와 새 계약에 필요한 자료가 구분돼 있었다. 갑자기 직원을 내보내 현장과 생계를 함께 흔들지 않도록 대체 운영 계획도 관리팀이 검토하고 있
추모공원에서 돌아오니 오후 네 시였다.현판식 때 걸어둔 꽃장식이 아직 로비에 남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서류철을 비서에게 맡기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직원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앉으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탁자에는 복직자들의 배치표와 다음 달 현장 일정이 놓여 있었다. 맨 끝자리의 여자는 자료 대신 낡은 봉투를 쥐고 있었다. 가슴에 단 방문증이 뒤집혀 있었다."저분도 오늘 면담 대상인가요?"옆에 서 있던 관리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협력업체 직원입니다. 현판식에 오셨다가 대표님을 꼭 뵙겠다고 하셔서요. 저희가 따로 안내하겠습니다."그가 문 쪽으로 손을 내밀자 여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빈 의자를 당겼다."어떤 일로 오셨는지 먼저 듣죠."여자는 앉지 않고 봉투부터 내밀었다."현장 청소하는 김정애입니다. 오늘 돈을 다 주셨다고 해서요. 그런데 저희 사장님은 아직 못 받았답니다."관리팀장이 서둘러 끼어들었다."대금은 오전에 전부 지급했습니다. 업체 내부 사정까지 저희가 알 수는 없고요.""그럼 이건 어디에 물어봐야 합니까?"봉투에서 접힌 급여 명세서 두 장이 나왔다. 정애 씨는 구겨진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마지막 장에는 붉은 펜으로 날짜가 두 번 고쳐져 있었다."두 달 밀린 월급입니다. 사장님이 원청 돈 들어오면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늘까지 기다렸습니다."조금 전 광장에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한 대가를 제때 받게 하겠다는 약속. 나는 지급 완료 보고서에 서명했고,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하지만 이 여자는 그 박수 속에서도 봉투를 내려놓지 못했다."업체 이름이 어떻게 되죠?""성우환경이요."관리팀장이 노트북을 돌렸다. 오전 열 시 이전에 이체가 끝난 내역이 있었다. 받는 사람도 성우환경이었다. 나는 금액과 계좌 명의를 확인한 뒤 민혁을 봤다."오전 지급분에 어느 현장 대금이 포함됐는지 확인해 주세요.""계약서와 정산 내역을 대조하겠습니다."정애 씨의 손가락이 봉투 입구를
경기도 북부의 양지바른 추모공원.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로 서늘하고 맑은 솔바람이 불어와, 품에 안은 새하얀 국화꽃 다발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꽃집에서 뿌린 물방울이 꽃잎 사이에 남아 있었다.나는 줄기를 감싼 종이를 다시 여몄다. 10년 전, 피눈물을 삼키며 아버지의 장례를 홀로 치러야 했던 그 혹독하고 시리던 겨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생을 바쳐 일군 한양건설을 원수 박태식에게 도둑맞고, 수백억의 부도 어음과 억울한 누명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내 아버지.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나를 조롱하던 원수들의 비열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울음을 삼키고 스스로 독사를 품었다. 그날 이후 시작된 10년간의 처절했던 위장 잠입. 시어머니의 각질투성이 발을 주무르고, 남편의 손에 뺨을 맞으며, 화장실 변기를 닦으면서도 결코 칼날을 거두지 않았던 지옥 같은 세월이었다.또각. 또각.내 단단한 구두 굽 소리가 고요한 추모관 복도를 울렸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은, 따스한 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오는 故 강창수 회장의 유골함 앞이었다. 유리벽 너머, 생전의 모습 그대로 인자하고 따뜻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의 흑백 영정 사진.나는 가슴에 품고 온 가죽 서류철을 꺼내 선반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었다.[주식회사 한양건설 법인 등기사항전부증명서 (대표이사 강은서)][서울중앙지방법원 1심 판결문: 피고인 박도진 징역 12년, 피고인 신서린 징역 5년][태성그룹 상호 변경 및 한남동 대저택 인도 집행 완료 확인서]그리고 지난 10년간 내 살갗을 찢어가며 피눈물로 기록했던 낡은 검은색 복수 일기장. 가문을 공중분해시키고 원수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내 20대를 송두리째 바쳐 완성한 피 묻은 장부들이었다."아버지."마침내 내 입술 사이로 메마른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목덜미에 10년간 걸려 있던 작은 백금 열쇠 펜던트를 풀어,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약속 지켰어요. 아버지의 한양건설도, 도둑맞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