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녀가 뒤로 쓰러지며, 뒤에 있던 원목 수납장에 뒤통수를 부딪친 탓이었다.
“으윽-.”에스더는 밀려오는 두통에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벌레 보듯이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인협은 당황한 얼굴로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마당에 소쿠리를 들고 있는 갑순과 그 옆에 선 복란이 보였다.
함께 살며 유독 친하게 지내는 두 사람을 에스더는 소원리 듀오 할머니라고 부르고는 했다.
“너, 너-.” “인협이, 이 몹쓸 놈아!”복란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던 사이, 오이와 애호박,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집어던진 갑순은 굽어진 허리에도 꽤 빠른 걸음으로 인협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녀의 입술은 노환으로 떨리는 편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격렬한 분노로 인해 더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언니, 위험해!”그러자 복란이 그런 갑순을 가로막았다.
“어디 이 좋아진 세상에 남자가 여자한테 주먹질이야!” “주먹질 안 했어요. 이 사람이 제 팔을 붙들고 놓질 않아서-.” 옛 할머니들이 종종 그랬듯, 갑순의 남편은 술을 마시면 돌변해 그녀를 괴롭게 하고는 했었다.노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기 직전에는 비교적 순순하게 굴었던 그였으나, 그 아픔이 아직도 생생할 걸 알기에 인협조차도 그런 갑순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그게 뭐! 그렇다고 여자를 때려! 이거 놔, 저 금수보다 못한 놈은 한대라도 때려줘야 쓰겠어-.”
한번 자극당한 갑순의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언니, 진정해. 이 나이에 이 난리 피우면 쓰러져.”복란은 갑순 옆에서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곧 아흔을 바라보는 갑순이 아프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 에스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 제가 먼저 귀찮게 매달리다가 이 사람이 뿌리쳐서 쓰러지게 된 거예요.” “그래?”에스더의 설명에 일순간 갑순의 몸부림이 멈췄다. 그러자 마당에는 급작스러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휴-.”복란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흙바닥에 나뒹구는 채소들을 주워서 인협에게 주기 위해 소쿠리에 다시 담았다.
“자, 갑순 할머니가 너 먹을 거 없을 것 같다고 걱정하면서 밭에서 방금 따온 거야. 그러다가 큰 소리가 나서 우리가 다 와본 거야. 채소는 씻어서 먹으면 되겠다.”복란이 분노가 가시자 멋쩍어하는 갑순 대신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흠흠, 인협아. 내가 오해했네, 미안해-.” “할머니, 아무리 그래도-.”인협은 마치 어렸을 적에 무지막지한 오해를 받고 혼이 난 어린아이처럼 억울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그는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에스더를 의식하고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열다섯의 나인협이 아니라, 스물다섯 나인협이었으니까.
“저도 여자 때리는 남자들 혐오해요, 할머니.” “그래, 크흠. 미안하다, 인협아.” “그나저나, 황 선생님 뒤통수는 괜찮아요? 저 나무 장에 세게 부딪친 거면 꽤나 아팠을 텐데.”어색한 정적이 잠시 흐른 후 복란이 엉망이 된 분위기를 정리했다.
“하하, 저는 괜찮아요.”
약간 부어올라 혹이 생긴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에스더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소쿠리는 내일 돌려줘.” “우린 먼저 가볼게, 인협아.” “네, 들어가세요.” “들어가세요, 할머니-.”갑순이 옆에 세워두었던 보행기를 밀며 앞장서자, 복란이 그 뒤를 따랐다.
에스더와 인협은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폭풍이 지나간 거지?
에스더는 조용히 눈만 끔뻑거리며 생각했다.
아까 실랑이를 벌일 때까지는 전혀 몰랐으나,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오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다 내가 사왔던 컵 물회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니.
“다시는-.” “…….”굳은 표정을 한 인협이 운을 띄우자마자 에스더가 잔뜩 긴장한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혼나지 않으려는 한 마리의 강아지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는 우리 집에 이딴 식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예의 지키라고요.” “그럼, 그쪽도 빈속에 안주도 없이 술 퍼먹는 거 그만하시던지요.”어어라, 이게 아닌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잘못한 걸 너무나도 잘 알아서 모든 걸 인협에게 순순히 맞추리라 다짐했던 에스더였다.
그러나 입이 말을 듣지 않고서 멋대로 폭주해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내뱉어버렸다.
인협의 따가운 시선이 제 관자놀이에 꽂히는 걸 느낀 에스더는 그 시선을 최선을 다해 모른 척을 했다.
“아, 날씨 좋다~.” “예의 지켜요. 다음에 이렇게 찾아오면-.” “그쪽이 제가 말한 거 지킬 생각 없으면, 저도 지킬 생각 없어요. 그렇게 술 퍼마시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 외딴 마을에서 누군가는 한 번씩이라도 살펴봐야 제때 발견되지 않겠어요?” “마치 내가 곧 죽을 사람이라는 단정이라도 지은 것처럼 말을 하네요?”인협의 비꼬는 어투에 에스더는 당당하게 굴어보기로 작정했다.
쫄지 말자. 이 사람은 그냥 불만 많은 투덜이일 뿐이라고.
갑순 할머니 앞에서 잠시나마 삐져나왔던, 그의 유순한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한번 믿어보기로 한 에스더였다.
“그쪽이 먼저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놓아서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고요?”아, 워딩이 너무 셌나.
에스더는 인협의 말에 단숨에 받아쳐 놓고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살면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정도로 강하게 군 건 처음이었지만, 그녀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강하게 군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아는 척을 잘 해대는 편인가 봐요.”끼이익, 쾅.
인협의 말을 마지막으로 에스더의 면전 앞에서 철문이 굳게 닫혔다.
황당한 표정으로 에스더는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속으로 그를 향한 욕을 한 바가지 읊조리고는 뒤로 홱 돌아섰다.
험한 말을 굳이 입 밖으로까지 내뱉지 않은 것은, 그녀가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찰나 동안 미세하게 흔들렸던 인협의 눈 때문이었다.
직감적으로 어쩌면 그녀의 말이 칼같이 날카로운 쇠붙이와 다름없는 인협의 마음을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상대를 찢어발기려는 듯한 사나운 맹수의 나약한 면을 발견한 기분은 매우 묘한 것이었다.
더 이상 그의 약점을 건드리면, 어쩌면 저 사나운 사람은 그 사실을 못 이기고서 정말로 자신을 해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걱정도 함께 찾아온 탓에 그녀는 여기서 멈추기를 택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스더는 설거지를 마치고선 부엌 옆에 나 있는 작은 창의 블라인드를 열었다.
보통 수풀이나, 폐가에 가까워 보이는 김 씨네 집이 바로 내려다보여서 평소에는 굳게 닫아놓는 블라인드였다.
스으윽.
블라인드가 열리자마자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불이 들어온 인협의 집 부엌 창문이 보였다.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아하니, 집의 거실 공간에서 주로 생활하는 그가 불을 켜둔 모양이었다.
“아직은 살아있나 보네.”낮의 실랑이를 떠올린 에스더는 그 불빛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광경을 본 에스더는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낮의 일을 겪고 나서는 인협은 그녀에게 또 다른 의미의 시한폭탄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는 인협이 언제 마음속에 쌓여있는 분노를 터뜨릴지 모를 시한폭탄이었다면, 이제는 언제 자신을 놓아버릴지 모를 그런 또 다른 의미의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던, 어둡고 엉망이었던 집 내부와 그것을 등지고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태도로 일관하던 인협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난 행동에 관한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사과나 변명도 듣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 하나가 자꾸만 가슴 한구석에 남아서 마음이 먹먹해지고는 했다.
나와 또래처럼 보이는 사람이 삶에 대한 의지를 다 놓아버린 것에 대한 일종의 충격 때문이려나.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에스더는 다시 블라인드를 내려버리고 말았다.
일렁거리는 미세한 불빛만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이 절로 심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지나친 관심도, 아는 척도 금물이지. 우리가 그럴 사이도 아니고.”애써 혼잣말로 잡념의 마침표를 찍고 돌아선 에스더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인협이라는 작은 돌멩이가 박혀있었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갈아입을 옷이-.”“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경이 주는 안락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
주중 어느 평범한 날 낮.“아니, 거기 김씨네 첫째 손주 만나봤나?”“아휴, 말도 마. 성질이 어찌나 고약한지. 지난번에는 지나가다 나를 맞은편에서 이렇게 딱 맞닥뜨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가더라니까-.”“하여튼, 그 버르장머리 보면 김 씨 아주머니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야.”고 이장의 부인 심 씨가 부쳐다 놓은 전 몇 장을 중간에 두고서 막걸리와 함께 어른 몇이 함께 밭일을 하던 차림으로 새참을 먹고 있었다. 6월 중순으로 치닫는 시간 속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멋보다는 기능에 더 치중한 모자나 토시 같은 걸 잔뜩 걸친 모두는 고 이장의 넓은 밭 한 귀퉁이에 그늘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고 이장, 심 씨, 소원 초등학교 교장 구본용, 그의 부인 정 씨, 그리고 정렬의 아버지 원길이었다. 여기다 종종 최 씨까지 함께 자리하고는 했는데, 최 씨의 밭은 동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가게 핑계로 밭일 품앗이에서 종종 제외되고는 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고 이장의 밭에 나 있는 물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6월 말에 찾아오는 끈질긴 장마 때문에 소원리는 6월을 기점으로 많이 바빠졌다. 이전해 장마로 인해 모양을 잃은 물꼬를 보수하고, 그곳에 있는 이물질들을 잘 치워줘야 장마철에 밭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서로의 잔에 채워주며 그들은 아침 노동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아휴, 매년 도와줘서 고마워요.”“아이, 우리 형님들 일이면 나서서 도와야죠.”심 씨는 원길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원길은 쑥스러워하며 대꾸했다. “크으-.”원길이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키자, 심 씨와 정 씨가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길이 거나하게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온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가 어떤데 그래요? 어렸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더니만.”원길의 질문에 최근에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