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녀가 뒤로 쓰러지며, 뒤에 있던 원목 수납장에 뒤통수를 부딪친 탓이었다.
“으윽-.”에스더는 밀려오는 두통에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벌레 보듯이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인협은 당황한 얼굴로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마당에 소쿠리를 들고 있는 갑순과 그 옆에 선 복란이 보였다.
함께 살며 유독 친하게 지내는 두 사람을 에스더는 소원리 듀오 할머니라고 부르고는 했다.
“너, 너-.” “인협이, 이 몹쓸 놈아!”복란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던 사이, 오이와 애호박,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집어던진 갑순은 굽어진 허리에도 꽤 빠른 걸음으로 인협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녀의 입술은 노환으로 떨리는 편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격렬한 분노로 인해 더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언니, 위험해!”그러자 복란이 그런 갑순을 가로막았다.
“어디 이 좋아진 세상에 남자가 여자한테 주먹질이야!” “주먹질 안 했어요. 이 사람이 제 팔을 붙들고 놓질 않아서-.” 옛 할머니들이 종종 그랬듯, 갑순의 남편은 술을 마시면 돌변해 그녀를 괴롭게 하고는 했었다.노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기 직전에는 비교적 순순하게 굴었던 그였으나, 그 아픔이 아직도 생생할 걸 알기에 인협조차도 그런 갑순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그게 뭐! 그렇다고 여자를 때려! 이거 놔, 저 금수보다 못한 놈은 한대라도 때려줘야 쓰겠어-.”
한번 자극당한 갑순의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언니, 진정해. 이 나이에 이 난리 피우면 쓰러져.”복란은 갑순 옆에서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곧 아흔을 바라보는 갑순이 아프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 에스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 제가 먼저 귀찮게 매달리다가 이 사람이 뿌리쳐서 쓰러지게 된 거예요.” “그래?”에스더의 설명에 일순간 갑순의 몸부림이 멈췄다. 그러자 마당에는 급작스러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휴-.”복란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흙바닥에 나뒹구는 채소들을 주워서 인협에게 주기 위해 소쿠리에 다시 담았다.
“자, 갑순 할머니가 너 먹을 거 없을 것 같다고 걱정하면서 밭에서 방금 따온 거야. 그러다가 큰 소리가 나서 우리가 다 와본 거야. 채소는 씻어서 먹으면 되겠다.”복란이 분노가 가시자 멋쩍어하는 갑순 대신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흠흠, 인협아. 내가 오해했네, 미안해-.” “할머니, 아무리 그래도-.”인협은 마치 어렸을 적에 무지막지한 오해를 받고 혼이 난 어린아이처럼 억울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그는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에스더를 의식하고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열다섯의 나인협이 아니라, 스물다섯 나인협이었으니까.
“저도 여자 때리는 남자들 혐오해요, 할머니.” “그래, 크흠. 미안하다, 인협아.” “그나저나, 황 선생님 뒤통수는 괜찮아요? 저 나무 장에 세게 부딪친 거면 꽤나 아팠을 텐데.”어색한 정적이 잠시 흐른 후 복란이 엉망이 된 분위기를 정리했다.
“하하, 저는 괜찮아요.”
약간 부어올라 혹이 생긴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에스더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소쿠리는 내일 돌려줘.” “우린 먼저 가볼게, 인협아.” “네, 들어가세요.” “들어가세요, 할머니-.”갑순이 옆에 세워두었던 보행기를 밀며 앞장서자, 복란이 그 뒤를 따랐다.
에스더와 인협은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폭풍이 지나간 거지?
에스더는 조용히 눈만 끔뻑거리며 생각했다.
아까 실랑이를 벌일 때까지는 전혀 몰랐으나,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오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다 내가 사왔던 컵 물회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니.
“다시는-.” “…….”굳은 표정을 한 인협이 운을 띄우자마자 에스더가 잔뜩 긴장한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혼나지 않으려는 한 마리의 강아지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는 우리 집에 이딴 식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예의 지키라고요.” “그럼, 그쪽도 빈속에 안주도 없이 술 퍼먹는 거 그만하시던지요.”어어라, 이게 아닌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잘못한 걸 너무나도 잘 알아서 모든 걸 인협에게 순순히 맞추리라 다짐했던 에스더였다.
그러나 입이 말을 듣지 않고서 멋대로 폭주해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내뱉어버렸다.
인협의 따가운 시선이 제 관자놀이에 꽂히는 걸 느낀 에스더는 그 시선을 최선을 다해 모른 척을 했다.
“아, 날씨 좋다~.” “예의 지켜요. 다음에 이렇게 찾아오면-.” “그쪽이 제가 말한 거 지킬 생각 없으면, 저도 지킬 생각 없어요. 그렇게 술 퍼마시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 외딴 마을에서 누군가는 한 번씩이라도 살펴봐야 제때 발견되지 않겠어요?” “마치 내가 곧 죽을 사람이라는 단정이라도 지은 것처럼 말을 하네요?”인협의 비꼬는 어투에 에스더는 당당하게 굴어보기로 작정했다.
쫄지 말자. 이 사람은 그냥 불만 많은 투덜이일 뿐이라고.
갑순 할머니 앞에서 잠시나마 삐져나왔던, 그의 유순한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한번 믿어보기로 한 에스더였다.
“그쪽이 먼저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놓아서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고요?”아, 워딩이 너무 셌나.
에스더는 인협의 말에 단숨에 받아쳐 놓고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살면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정도로 강하게 군 건 처음이었지만, 그녀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강하게 군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아는 척을 잘 해대는 편인가 봐요.”끼이익, 쾅.
인협의 말을 마지막으로 에스더의 면전 앞에서 철문이 굳게 닫혔다.
황당한 표정으로 에스더는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속으로 그를 향한 욕을 한 바가지 읊조리고는 뒤로 홱 돌아섰다.
험한 말을 굳이 입 밖으로까지 내뱉지 않은 것은, 그녀가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찰나 동안 미세하게 흔들렸던 인협의 눈 때문이었다.
직감적으로 어쩌면 그녀의 말이 칼같이 날카로운 쇠붙이와 다름없는 인협의 마음을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상대를 찢어발기려는 듯한 사나운 맹수의 나약한 면을 발견한 기분은 매우 묘한 것이었다.
더 이상 그의 약점을 건드리면, 어쩌면 저 사나운 사람은 그 사실을 못 이기고서 정말로 자신을 해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걱정도 함께 찾아온 탓에 그녀는 여기서 멈추기를 택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스더는 설거지를 마치고선 부엌 옆에 나 있는 작은 창의 블라인드를 열었다.
보통 수풀이나, 폐가에 가까워 보이는 김 씨네 집이 바로 내려다보여서 평소에는 굳게 닫아놓는 블라인드였다.
스으윽.
블라인드가 열리자마자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불이 들어온 인협의 집 부엌 창문이 보였다.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아하니, 집의 거실 공간에서 주로 생활하는 그가 불을 켜둔 모양이었다.
“아직은 살아있나 보네.”낮의 실랑이를 떠올린 에스더는 그 불빛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광경을 본 에스더는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낮의 일을 겪고 나서는 인협은 그녀에게 또 다른 의미의 시한폭탄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는 인협이 언제 마음속에 쌓여있는 분노를 터뜨릴지 모를 시한폭탄이었다면, 이제는 언제 자신을 놓아버릴지 모를 그런 또 다른 의미의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던, 어둡고 엉망이었던 집 내부와 그것을 등지고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태도로 일관하던 인협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난 행동에 관한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사과나 변명도 듣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 하나가 자꾸만 가슴 한구석에 남아서 마음이 먹먹해지고는 했다.
나와 또래처럼 보이는 사람이 삶에 대한 의지를 다 놓아버린 것에 대한 일종의 충격 때문이려나.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에스더는 다시 블라인드를 내려버리고 말았다.
일렁거리는 미세한 불빛만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이 절로 심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지나친 관심도, 아는 척도 금물이지. 우리가 그럴 사이도 아니고.”애써 혼잣말로 잡념의 마침표를 찍고 돌아선 에스더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인협이라는 작은 돌멩이가 박혀있었다.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