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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거대한 목적 아래

Author: 이클리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30 19:00:07

황실 별관의 아침은 차가운 이슬 냄새와 함께 시작되었다.

엘라엔은 테라스에 서서 연무장 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이제 막 제 몸보다 큰 훈련용 갑주를 갖춰 입은 하르만이 서 있었다.

이사벨라의 치맛자락 밑에서 나약한 후계자로 박제될 뻔했던 아이가 드디어 제국에서 가장 서늘한 지휘관의 시야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엘라엔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에게 이사벨라는 단순히 아버지를 홀린 여자가 아니었다.

하르만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가문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저급한 탐욕 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런 이사벨라로부터 하르만을 떼어놓는 유일한 방법은 하르만을 르세인이라는 거대한 태양 옆에 두어 그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뿐이었다.

“영애의 시선이 지나치게 뜨겁군. 동생을 사지로 보낸 누이의 죄책감입니까, 아니면 계획대로 흘러가는 판을 감사하는 투기꾼의 만족감입니까.”

언제 다가왔는지 르세인이 그녀의 뒤편에 서 있었다. 그는 건조한 눈빛으로 연무장의 하르만을 내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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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goodnovel comment avatar
뚠빵공주
비유가 너무 좋네요 작가님 필력에 잡혀 끌려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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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골골
아 너무 재밌습니다! 초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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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38. 슬픔보다 더 깊은 증오

    “엘, 엘라엔….”엘라엔은 자신의 몸에 묻은 카시안의 피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카시안… 카시안. 카시안!“아, 아…!”엘라엔의 입술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카시안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대신 엘라엔을 안을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르세인의 강압적인 악력과는 정반대의,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 지키려는 처절한 발악과 같은 온기였다.“괜, 찮아…. 괜찮아. 엘라엔…….”카시안은 피를 흘리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그에게서 풍기던 따스한 향은 비릿한 피 냄새와 섞여 엘라엔의 콧속까지 어지럽게 만들었다.“베르제의… 베르제 대공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그대들의… 목숨은! 모두… 모두…! 그러니 제발 그만… 그만해야 해…….”카시안의 호소는 고압적이었다. 평소 그림자 아래에서 숨죽여 살던 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엘라엔을 지켜내고 있었다.엘라엔은 제 몸 위에 엎어진 카시안의 갈색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절규했다.“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화염과도 같은 분노가 화르르 타올랐다. 르세인이 지워버린 방패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카시안이 되레 다쳤다. 르세인이 설계한 그 지독한 질서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동시에 자신을 위해 기꺼이 부서지는 카시안을 향해 엘라엔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났다. 그건 우정보다 깊은, 또 다른 감정의 시초였다.카시안이 내뱉은 베르제 대공이라는 말은 그들의 모든 행동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엘라엔은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이기 전에 베르제 대공의 혈육이었다.“이, 일단 철수하라!”카시안이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이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마차 안의 시간은 정지된 듯 느리게 흘렀다.카시안의 어깨에서 흐르는 선혈은 엘라엔의 손등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하아. 하.”숲의 서늘한 정적 속에 카시안의 가쁜 숨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엘라엔은 카시안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37. 즉각적인 숙청

    엘라엔은 르세인의 목덜미 근처에서 펜대를 느릿하게 돌렸다. 닿지는 않았느나 펜 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긴장감이 르세인의 무언가를 자극했다.“이들을 숙청하여 전하의 질서가 무결함을 증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수족이 썩어 문드러진 것을 묵인하여 전하 스스로 그 오차가 되시겠습니까?”르세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일렁였다.분노가 아니라 자신이 길들였다고 믿었던 사냥개에게 급소를 찔린, 광기가 가득한 희열이었다.그는 엘라엔의 손에 든 만년필을 뺏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가 꽉 내리눌렀다.“…나를 시험하는 겁니까, 영애.”“시험이 아니라 증명이라 해두죠. 전하의 질서가 타인에게만 가혹한 것인지, 아니면 전하 자신에게도 칼을 들이밀 만큼 고결한 것인지.”르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모르게 소름을 돋게 하는 웃음이었다.그는 엘라엔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그어놓은 장부의 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좋아. 기꺼이 내 손을 더럽히지. 내 질서에 완벽을 가하기 위해서라면 내 팔 하나쯤 잘라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르세인은 펜을 뺏어 장부 위에 거칠게 서명했다.즉각적인 숙청의 명령이었다. 기사단 절반이 날아갈 수도 있는 결정이었지만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모든 것은 숨을 쉬는 행위처럼 반사적이었고 또 그만큼 자연스러웠다.그는 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으며 엘라엔의 얼굴에 자신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하지만 영애, 잊지 마십시오. 내 팔을 자르게 만든 그 대가는 당신이 감당해야 할 테니까. 오늘부터 당신을 지킬 기사단이 사라졌으니 이를 어쩌나.”르세인은 그저 그녀의 숨결이 닿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질서에 균열을 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르세인은 그 균열을 이용해 그녀를 겁박하고 있었다.*** 마레즈나로 향하는 카르네티아 숲길은 가을 햇살이 붉게 물든 잎들 사이로 조각난 무늬를 수놓았다. 르세인의 겁박과는 달리 모든 것이 평화로웠으나 엘라엔은 마차 안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36. 똑같이 되돌려줄 기회

    르세인과의 숨 막히는 만찬을 끝내고 돌아온 마레즈나는 가을밤이 깊게 내려앉았다.여름의 눅눅함이 가신 공기는 건조하지만 선선했다. 정원의 장미들은 이미 생명력을 잃고 메말라 가며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그건 꼭 르세인의 질서 아래 박제되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영애님, 목욕물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요새에서 돌아오신 뒤로 밤잠을 자꾸 설치시는 듯해 진정에 좋은 라벤더 오일을 섞었어요.”방으로 들어선 엘라엔은 마리의 걱정 가득한 말에 대답 없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드레스의 코르셋을 풀자 억눌려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거울 속의 자신은 요새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고 그의 시선을 받아내는 얼굴은 유독 하얗게 질려 보였다.목욕물 속에 몸을 담갔으나 한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목욕을 마친 엘라엔이 실크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사벨라가 예고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아 카시안 경을 만나다니. 대담해, 정말. 황자 분들의 눈이 무섭지도 않니?”이사벨라는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르세인의 장부를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전하께서 네게 이런 중책을 맡기신 건 너를 믿어서가 아니란다. 네가 감당하지 못할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시는 거지. 라안느가의 가시 돋친 장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사교계 모두가 지켜보고 있어.”“염려 마세요, 어머니. 제가 무너지면 어머니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하르만과 루시안도 함께 무너지는 거예요.”엘라엔의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서늘한 대꾸에 이사벨라는 헛웃음을 치며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섰다.엘라엔은 문 너머를 한참 응시하다 책상 앞에 앉았다.“마리, 오늘은 이만 물러가 봐. 차만 부탁해.”“하지만 영애님, 안색이 너무….”“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마리 역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촛불이 타오르는 미세한 소리와 르세인이 던져준 검은 장부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35. 꽤나 다정했을 텐데

    “바델.”“예, 전하.”“호위의 거리를 좁힐 것을 전하라. 영애가 장부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기사들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도록. 또한….”르세인은 잉크로 더럽혀진 보고서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그는 엘라엔이 카시안과 함께 있는 그 순간조차 자신의 시선이 닿고 있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그녀가 느끼는 그 짧은 안식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모래성이라는 것을… 엘라엔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그것이 르세인이 설계한 가장 우아하고도 잔인한 질서였다.“영애에게는 카시안과 함께 찾아낸 그 오차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논의하겠다고 전하라.”르세인은 다시 펜을 쥐었다. 그의 눈빛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아르젠트 궁의 문턱을 넘는 순간, 하역장에서 느꼈던 그 짧은 해방감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르세인이 보낸 기사들은 돌아오는 내내 엘라엔이 탄 마차를 바짝 뒤쫓았다.말발굽 소리는 마치 르세인의 심장 박동처럼 그녀를 압박해왔다.“전하께서 만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바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화려하지만 온기라고는 없는 식당이었다.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르세인은 엘라엔이 들어서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동공은 한 점 요동도 없었다.“왔습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과, 목선을 보았다. 엘라엔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와 붉은 와인이 놓여 있었지만 식욕이 돋지는 않았다.르세인은 우아하게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어내며 입을 열었다.“그와는 즐거웠습니까. 나누는 대화가 꽤나 다정했을 텐데.”다정하다는 단어를 내뱉는 그의 입술 근육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르세인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엘라엔의 반응을 관찰했다.“…카시안은 전하께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의 흔적 말입니다.”엘라엔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34. 검은 그림자들

    “나갈 생각이군.”“책상에 앉아 이안 전하가 흘려주는 정보나 줍고 있는 건, 전하께서 말씀하신 자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남부의 물류가 모이는 수도 외곽의 하역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그곳의 장부와 전하의 장부가 얼마나 다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르세인은 펜촉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그 규칙적인 소음은 엘라엔의 목선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을 자극했다.“좋습니다.”르세인의 허락에 옆에 있던 이안이 서둘러 끼어들었다.“영애, 혼자 보내지 않겠어요. 내 기사들을 붙여줄 테니….”“아니요, 이황자 전하.”엘라엔은 단호히 거절했다.“전하의 기사들을 배석하는 순간, 그곳의 사람들은 입을 닫고 숫자들을 더 깊이 숨길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움직이겠어요.”“하지만 영애…!”“카시안과 함께 갈 생각이에요. 걱정 마세요.”엘라엔의 폭탄선언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단번에 뒤바뀌었다.르세인은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동공은 모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질투라기엔 너무 우습고, 분노라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못하다는 점이었다.“…그림자를 데리고 나가겠다.”르세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엘라엔의 곁을 지나 창가로 향하며 무심하게 금발을 쓸어넘겼다.“당신의 그 대단한 우정이 이 비릿한 장부 속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켜보도록 하죠.”***다음 날, 수도 카르네티아 외곽의 테이즈 강 하역장.화려한 황궁의 석조 건물 대신 썩은 목재 냄새와 거친 인부들의 고함이 가득한 이곳에 엘라엔과 카시안이 섰다.카시안은 수수한 차림이었음에도 그의 맑고 다정한 눈매는 이 지저분한 하역장에서도 이질적인 기품을 내보였다.비릿한 물 비린내와 거친 인부들의 고함, 그리고 썩어가는 목재의 악취가 진동했지만 엘라엔은 그 불쾌한 공기 속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곁에 선 카시안이 자신의 보폭에 맞춰 느릿하게 걸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엘라엔, 발밑을 조심해. 이쪽은 지반이 고르지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33. 예상치 못한 반응

    “영애, 너무 겁먹지 마세요. 형님의 방식이 거칠긴 하지만 이 장부는 당신에게 독이 아니라 칼이 될 거예요. 당신이 이 숫자들을 지배하는 순간, 제국의 그 어떤 귀족도 당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이안은 다시금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엘라엔은 이안 역시 르세인과 다른 의미로 자신을 도구로서 탐내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르세인은 자신을 완벽한 부품으로 쓰려 하고, 이안은 제 권력을 빛낼 화려한 트로피로 삼으려 했다.엘라엔은 두 남자 사이의 팽배한 긴장감 속에서 마침내 검은 장부를 집어 들었다.“……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제국의 정세를 꿰뚫는 눈이라면 기꺼이 보여드리지요. 다만, 제가 찾아낸 오차가 전하의 질서에 상처를 입히더라도 원망하지 마세요.”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대었다.“원망이라니. 나는 오차를 증오하지만 당신이 내 질서에 내는 상처라면 꽤 흥미로운 흔적이 될 것 같은데.”르세인은 펜을 쥐었다. 펜대를 만지작거리며 엘라엔의 돌아선 목덜미를 집요하게 눈으로 좇았다. 이안은 그런 엘라엔의 옆에 붙어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겨주며 은밀한 도움을 자처했다.화려한 황궁의 집무실 안에서 세 사람의 뒤틀린 공생이 시작되었다. 엘라엔은 차가운 종이 위에 적힌 비릿한 금전의 흐름을 보며 자신을 옭아매는 두 형제의 올가미를 어떻게 역이용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제국 남부 영지들의 수확량과 그에 따른 세금, 그리고 황실로 귀속되어야 할 비자금의 흐름이 고대 문자와 숫자로 촘촘히 얽힌 것을 보았다.“무엇을 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여기 적힌 수치들은 공정해 보이는걸요.”엘라엔은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엔의 등 뒤로 다가왔다.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이 엘라엔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르세인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엘라엔의 어깨너머로 장부의 한 지점을 지목했다. 그가 든 만년필의 매끄러운 펜촉은 종이 위를 느릿하게 미끄러지며 특정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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