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엘라엔의 단호한 어조에 에드먼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조건이라니.” “하르만은 아직 어립니다. 제국 군 지휘관들의 거친 생리를 다 알지 못하죠. 그러니 제가 하르만의 조력자이자 가문의 대리인으로서 공사 현장에 동행할게요.” “…뭐?” “공사 현장의 물자 보급과 행정 절차를 제가 옆에서 챙긴다면 하르만도 더 빨리 실무를 익힐 수 있을 것이고, 전하께서도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거예요.” 엘라엔의 말에 이사벨라는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어머, 엘라엔. 정무는 하르만이 배울 일이지.” “어머니. 전하께서는 효율을 중시하는 분이에요. 제가 현장에서 보급의 오차를 줄여 기간을 단축시키겠다면 전하께서도 마다하지 않으실 거예요. 무엇보다 하르만이 전하 곁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라안느 가문의 위엄을 보이려면 제가 옆에 있어야만 해요.” 에드먼은 딸의 말에서 타당성을 읽었다. 엘라엔의 영리함은 가문의 이득을 극대화하는데 탁월했으니까. “좋다. 전하께 그리 전하도록 하지. 엘라엔, 하르만을 잘 보살펴야 한다.” “물론이죠, 아버지.” “아니, 이건…!” 이사벨라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날이 선 얼굴로 엘라엔을 보았다. 엘라엔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하르만과 루시안은 너무나 소중한….” “…….” “제 동생들이거든요.” 이사벨라는 엘라엔의 거짓 없는 강고한 눈빛을 보며 그간 엘라엔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렸다. 엘라엔이 하르만과 루시안을 끔찍이 아낀다는 건 마레즈나를 넘어 사교계 전부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사벨라는 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다시 고아하게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을 나온 엘라엔은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노을은 어느새 저물고 있었다. 르세인. 엘라엔은 그의 질서를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가 숲을 밀어버리고 요새를 세우겠다면 자신은 그 요새의 성벽 위에 올라 그와 대등하게 눈을 맞추며 하르만의 뒤를 지키리라. 르세인에게 엘라엔은 라안느 가문과 연결된 효율적인 관리 대상이었고, 엘라엔에게 르세인은 동생의 미래를 위협하는 불쾌한 포식자일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엘라엔은 깃펜을 들어 서류 한 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사 현장에 가져갈 보급 리스트였다. ***에르디엔 황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은 한낮의 열기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차가운 정적에 잠겼다. 르세인은 창가에 선 채 조금 전 라안느 공작저에서 도착한 서신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서신에는 공작 에드먼이 정중한 수락 의사와 함께 예상치 못한 추가 제안이 적혀 있었다. 하르만 폰 라안느의 참관에 엘라엔 폰 라안느가 가문의 대리인이자 조력자로서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동행이라….’ 르세인은 기억을 되짚었다. 연회장의 금빛 샹들리에 아래에서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자신을 보던 엘라엔의 루비빛 눈동자. 그리고 황궁 외곽 숲의 그 눅진한 습기 속에서 비천한 황자에게 무질서함을 내보이는 그 이질적인 감정. 그는 엘라엔의 이 결정을 남매간의 우애나 후계 교육에 대한 열의 따위로 해석하지 않았다. 르세인의 사고 체계 안에서 인간의 행동은 오직 목적과 효율,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만 분류될 뿐이었으니까. 엘라엔 폰 라안느는 우습게도 영리했다. 그녀는 서문 숲을 밀어버리려 하는 것이 제 오차를 겨냥한 것임을 간파했고, 그에 대한 반격으로 하르만이라는 방패를 세워 자신의 진영 안으로 직접 발을 들이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비효율적인 발악이군.” 르세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에게 엘라엔은 연모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국의 가장 강력한 가문인 라안느 공작가를 황실의 통제 아래 묶어두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자산에 결함이 생기면 수정해야 하고, 자산이 궤도를 이탈하려 하면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관리자의 임무일 터. 그는 서신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집무실 한편에 걸린 제국 북부 전선의 지도를 응시했다. 엘라엔이 요새 공사 현장에 동행한다는 것은 르세인에게 있어 관리해야 할 변수가 하나 더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자신의 가시거리 안에 두고 그 결함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효율적인 기회이기도 했다. ‘라안느 공작이 딸을 보낸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판단력을 신뢰한다는 뜻이겠지.’ 르세인은 그녀가 자신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마멸되고 재조립될지를 관찰하기로 했다. “바델.” 르세인의 부름에 전속 부관 바델이 다가왔다. “예, 전하.” “라안느 가문의 제안을 수락한다. 요새 공사 현장에 영애의 거처를 마련하라. 단 위치는 제1지휘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구역으로 한정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라안느 후계자님에 대한 교육 일정은 어떻게 조정할까요?” “그대로 진행한다. 다만 영애가 제출할 물자 보급 계획서는 내가 직접 검토하지. 그녀가 가문의 대리인으로서 제 몫을 다하는지, 아니면 그저 오차를 키우는 불순물인지 확인해야겠어.” 르세인은 자리에 앉아 펜을 들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여름의 뜨거움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의 안면은 무감정으로 되돌아왔다. 그에게 이 모든 과정은 전쟁터의 전략을 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엘라엔 폰 라안느. 그녀가 스스로 제 질서 안으로 걸어 들어오겠다면 막을 이유는 없다. 또한 그녀가 하르만 뒤에 숨어 어떤 영악한 수를 던지든 르세인은 그 수를 읽어내어 제자리에 되돌려 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보고서 한 귀퉁이에 짧게 기록했다. [변수 발생 : 엘라엔 폰 라안느 현장 동행. 감시 및 관리 강도 상향.] 서류를 넘기는 건조한 종이 소리만이 집무실을 채웠다. 르세인은 이미 다음 수순을 계산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흙먼지가 날리는 요새 현장에서 라안느의 고결한 영애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그녀가 숨기고 있는 그 갈망이 자신의 논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바스러질지를. *** 일주일 뒤, 서문 외곽 요새 건설 현장. 공사장은 먼지와 석재를 깎는 날카로운 소음으로 가득했다. 르세인은 검은 군복 차림으로 언덕 위 지휘소에 서서 지형도를 살피고 있었다.서문 외곽 숲의 울창했던 녹음은 이제 거대한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르세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공병대는 빠른 시일 만에 지면을 평탄하게 다졌다. 정오의 태양은 대지를 달구었고 공사 현장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와 땀, 그리고 갓 잘려 나간 나무들의 진한 향이 뒤섞여 공기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언덕 위, 임시 지휘소 차일 아래 서 있던 르세인은 멀리서 다가오는 라안느 가문의 마차를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마차가 멈춰 서고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내린 것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하르만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흙먼지가 날리는 거친 땅 위로 크림색 구두를 신은 엘라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라엔은 양산을 펴는 대신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얇은 망토를 어깨에 두른 채 현장을 응시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카시안과 우정을 쌓아가던 곳…. 엘라엔은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아득한 상실감을 느꼈으나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곧 그녀의 시선은 공사장의 소란스러움을 지나 언덕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르세인에게 정확히 닿았다. “하르만, 당당하게 걸어. 이곳은 황실의 땅이지만 우리 가문의 보급로가 지나는 길목이기도 하니까.” 엘라엔은 하르만의 어깨를 다독이며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가파른 흙길은 영애의 걸음걸이를 방해했으나 엘라엔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르세인은 그녀가 다가오는 내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냉정한 관찰은 엘라엔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절차 같았다. 마침내 지휘소 앞에 도달했을 때 엘라엔은 하르만과 함께 완벽한 예법을 갖추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 안보를 위한 전하의 결단에 라안느 가문이 힘을 보태고자 왔습니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턱 끝을 까닥였다. “라안느 영애. 이곳은 연회장과 다릅니다. 오차 하나가 보급을 끊고, 지형지물의 오독이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곳이지. 영애의 그 화려한 드레스가 이 척박한 논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르세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무례하기보다 지독히 사실적이었다. 엘라엔은 그의 말에 가죽으로 장정된 두툼한 서류철을 내밀었다. “결함이 있는 차림은 분명하나, 제가 가져온 것은 완벽함입니다.”엘라엔의 낮은 속삭임에 르세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더욱 껴안았다.달빛이 창틀에 머물다 녹아내리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렇게 가장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누구도 넘볼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는 위협적인 소유의 완성.제국의 태양과 달은 그렇게 서로를 집어삼킨 채, 영원히 깨지 않을 아름다운 지옥의 한복판에서 사랑의 감정보다 더 깊은 영원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함께 채웠다.그들을 서로를 구원하지 않았다.대신 서로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체계를 세웠다. ***카르네티아의 겨울은 유독 길었으나 황궁 내부는 엘라엔이 조율한 온기 덕분에 계절을 잊은 듯 평온했다.르세인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불필요한 생명력이라 치부하며 베어냈을 정원수들이 이제는 엘라엔의 취향에 따라 붉은 열매를 맺은 채 햇살을 머금었다.“폐하, 또 정무를 멀리하고 계시는군요.”부드러운 실크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엘라엔이 들어섰다.그녀의 목에는 로잘린이 직접 채워주었던,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파이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 푸른빛은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와 대비되어 기이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품을 뿜어냈다.르세인은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체향을 느꼈다.장미 향기에 섞인 잉크 냄새.그건 이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지적인 포식자의 향이었다.“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짜놓은 이 완벽한 체계가 나를 한가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황후. 남부의 조세권과 북방의 광산 채굴권까지 당신의 인장 아래 움직이니, 내가 검을 휘두를 명분이 사라졌지 않습니까.”르세인이 다가와 엘라엔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이제 그녀의 배는 제법 불러 있었고, 그 안에서 맥동하는 새로운 생명은 르세인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모호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선사했다.“무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니까요. 폐하께서는 그저 상석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 장부 안에서 처리될 테니.”엘라엔은 르세인의 셔츠 깃을 정리해 주며 고개를 들어 그를
황궁의 가장 높은 첨탑 위로 쏟아지는 달빛은 차갑고도 눈부셨다. 대륙의 모든 비명과 환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그 정적의 한복판에 르세인과 엘라엔이 서 있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손등 위로 보이는 흉터들은 그녀라는 안식처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온 훈장이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펼쳐진 제국의 야경을 응시했다.수만 개의 등불이 일렁이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들을 축복하는 빛 같았다.르세인에게 엘라엔은 정복해야 할 영토이자, 결코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심연이었다. 그는 그녀를 옥좌 옆에 앉혔으나 사실 자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가두었고, 엘라엔은 그 위협적인 소유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르세인이라는 괴물의 고삐를 쥐었다.엘라엔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둘은 제국 안팎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엘레니르 제국에는 완연한 평화가 찾아왔다.“고생 많았습니다, 황후.”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엘라엔은 왠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르세인을 올려다보며 하늘에 떠있는 달빛을 품은 것처럼 어둠에서도 환하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당신도… 당신도 고생 많았습니다, 폐하.”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잘 해냈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위로였다.밖으로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겨울밤.소복하게 쌓인 새하얀 눈과 달빛….그 광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눈을 뜨고 있음에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의 그 웃음 하나에 가슴께가 뻐근하게 무거워졌다.그녀가 웃으면 언제부턴가 두 감정이 교차하곤 했다.고마움과 미안함.그러나 그는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엘라엔은 엘레니르 제국의 황후로서 더 없는 황실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고 르세인은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흡족했다. 그러나 그녀의 초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의 논리 안에 가둔 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뒤늦게 깨
엘라엔의 목소리는 서늘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그녀는 르세인의 겉옷을 받아 시종에게 넘기며 그가 앉은 책상 위로 새로운 포고문을 밀어 넣었다.그건 바로 제국 무역 연합의 창설안이었다.르세인은 포고문을 읽어 내리며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무역 연합이라. 말이 좋아 연합이지, 결국 제국의 화폐를 쓰지 않는 자들은 굶겨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황후.”“폐하, 주변 소국들이 제국의 화폐 가치에 종속되는 순간, 그들은 군대를 일으킬 자금조차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겁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르세인은 그녀의 손길을 황홀하게 느끼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당신은 내 검보다 더 잔인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어. 적들은 서서히 말라죽어가겠죠.”“폐하, 제 지략이 마음에 드십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연합에 가입을 거부하는 속국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특히 동부의 무역 도시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발악하겠지.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엘라엔의 눈매가 매혹적으로 가늘어졌다.“이미 그들 내부의 상인 연합을 매수해 두었습니다. 경제적 파멸은 아주 확실한 통제 수단이죠.”르세인은 고개를 얕게 저었다가 얼굴를 돌리고 엘라엔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추었다. 점차 달아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책상 위에 흩어진 수많은 장부와 채권 증서들이 두 사람의 움직임에 눌려 바스락거렸다.*** 대륙을 뒤덮었던 전쟁의 화마가 잦아들고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는 전례 없는 고요와 풍요에 잠겼다.하지만 황궁의 가장 깊은 곳, 르세인의 집무실만큼은 여전히 지독하게 농밀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르세인은 옥좌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단 한 장의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카르노스의 인장이 찍힌, 그러나 공식적인 외교 문서가 아닌 밀약서였다.[카르노스는 엘레니르 제국의 영구적인 속국임을 자처합니다. 다만, 제국의 검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국을 향
같은 시각, 제국 황궁에서 엘라엔은 사흘 밤낮을 이어진 정무의 피로조차 잊은 듯 마지막 숙청 대상자들의 명단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녀의 책상 위에는 해카테의 문양이 박힌 금고 열쇠들과 남부 상단 연합의 지배권 양도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그때,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기사들의 제지도 뚫고 들어온 이는 태후 로잘린이었다.로잘린은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해카테 파산 보고서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황후, 정말로 한 부족의 숨통을 장부 하나로 끊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가 전장에서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동안, 그대는 그들의 가치 자체를 말소시켰군요.”엘라엔은 펜을 내려놓고 로잘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태후 폐하, 폐하의 제국에는 가난한 속국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폐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생산 기지만이 필요할 뿐이지요. 해카테는 이제 완벽한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로잘린은 엘라엔에게서 르세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위엄 그 자체였다.“황제가 돌아오면 황후를 두려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쥔 이 장부들이 황제의 검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죠.”“폐하께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시겠지요. 태후 폐하, 이제 시작입니다.”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멀리서 승전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탓이었다.르세인의 함대가 개선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엘라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르세인에게 바칠 가장 화려한 전리품인, 파산한 해카테의 항복 문서를 손에 쥐고서.***황궁의 정문, 개선의 가도를 메운 것은 승전의 함성보다 더 무거운 경외였다.칠흑 같은 군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말 안장 곁에는 해카테 족장이 평생을 지켜온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이 볼품없는, 하찮은 물건처럼 매달려 덜렁거렸다.르세인은 고개를 들어 황궁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그곳엔 제국의 휘장을 배경으로 엘라엔이 서 있었다. 그녀는 승전의
엘라엔은 온몸을 떨며 주저앉은 공작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안색이 단번에 창백하게 굳은 공작을 보는 엘라엔은 잔인하게 번들대는 눈으로 웃음을 내보였다.“감히 나를 독살하려 하다니. 그대의 가문은 제국 법에 의해 멸문될 것이며 그대가 아끼던 그 비축 식량과 금괴 모두 전장의 군자금으로 귀속될 것이다.”“화, 황후 폐하…!”“폐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광장에 걸린 그대의 잘린 얼굴은 폐하께 바칠 나의 첫 번째 전리품이 되겠지.”엘라엔은 짙게 웃으며 공작의 떨리는 턱밑을 쓸었다.공작은 엘라엔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쉴 새 없이 같은 말을 토해냈다. 급박하고 절절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어투였다.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은 그 모습을 제대로 목도하며 숨을 편히 쉬지도 못할 만큼 굳어버렸다.무언가에 결박 당한 것처럼 그 어떤 움직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여인의 몸으로 정치를 논하는 황후의 코를 납작하게 해야 한다며 호기롭게 얘기했던 지난날의 제 입들을 마구 잡아 뜯고 싶었다. 지금 엘라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살기였다.모든 것이 음습해서 오싹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둔했었는지를 비소로 깨달았다.***베리튼 공작에서 시작된 피의 숙청은 동이 트기도 전에 제국 전역의 상권으로 번져나갔다.엘라엔은 잠을 자는 대신 집무실의 커다란 책상 위에 대륙의 경제 지도를 펼쳤다.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금권을 쥔 가문들의 몰락이 결정되었다.“황후 폐하, 해카테 부족의 주력 함대가 멈췄다는 소식입니다.”정보 상단의 수장 리논이 나타나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심과 함께 미세한 전율이 섞여 있었다.“채권 매집 소식이 그들의 함대에 닿자마자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기함을 포위했습니다. 해카테 부족이 발행한 어음은 이제 쓰레기 조각이 되었으니까요.”엘라엔은 찻잔을 들어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엘라엔은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르세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기보다 철저히 계산된 확신이었다.르세인이 해카테 부족 함대를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동안, 엘라엔은 해카테의 경제적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제국 내부의 반대파 귀족들, 특히 문제가 아주 많은 파브르 공작 일가의 사유 재산을 몰수해서 그 자금으로 해카테의 채권을 매입하세요. 그들이 돈을 갚아야 할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해카테 족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요.”엘라엔은 펜을 들어 서명을 하고 명령서에 인장을 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금사의 인장이 찍힐 때마다 해카테라는 거대한 부족의 기둥이 하나둘씩 꺾여 나갔다.*** 이틀 뒤, 집무실에 태후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은 엘라엔이 벌이고 있는 이 거대한 경제 전쟁의 규모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장부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황후, 그대는 황제보다 더 지독한 사냥꾼이 아닙니까.”로잘린은 엘라엔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태후 폐하, 오셨습니까.”“남부 귀족들이 그대를 누르기 위해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돈줄을 죄어오는 것에 미쳐버린 모양이지. 어떻게 할 셈입니까, 황후.”엘라엔은 서류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대꾸했다.“제 발로 그 연회장에 가야지요. 남부 전체의 상권 지배권을 완전히 가져올 절호의 기회인 것을요, 태후 폐하.”엘라엔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로잘린은 그런 엘라엔을 보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며칠 뒤, 남부 귀족들이 마련한 연회는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베리튼 공작의 별관에서 열렸다. 겉으로는 황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연회장 곳곳에서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엘라엔은 호위 기사를 최소화한 채, 시녀들만을 대동하고 그 독사들의 굴로 발을 들였다.별관의 연회장은 그녀가 등장함과 동시에 수군거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