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엘라엔의 단호한 어조에 에드먼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조건이라니.” “하르만은 아직 어립니다. 제국 군 지휘관들의 거친 생리를 다 알지 못하죠. 그러니 제가 하르만의 조력자이자 가문의 대리인으로서 공사 현장에 동행할게요.” “…뭐?” “공사 현장의 물자 보급과 행정 절차를 제가 옆에서 챙긴다면 하르만도 더 빨리 실무를 익힐 수 있을 것이고, 전하께서도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거예요.” 엘라엔의 말에 이사벨라는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어머, 엘라엔. 정무는 하르만이 배울 일이지.” “어머니. 전하께서는 효율을 중시하는 분이에요. 제가 현장에서 보급의 오차를 줄여 기간을 단축시키겠다면 전하께서도 마다하지 않으실 거예요. 무엇보다 하르만이 전하 곁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라안느 가문의 위엄을 보이려면 제가 옆에 있어야만 해요.” 에드먼은 딸의 말에서 타당성을 읽었다. 엘라엔의 영리함은 가문의 이득을 극대화하는데 탁월했으니까. “좋다. 전하께 그리 전하도록 하지. 엘라엔, 하르만을 잘 보살펴야 한다.” “물론이죠, 아버지.” “아니, 이건…!” 이사벨라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날이 선 얼굴로 엘라엔을 보았다. 엘라엔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하르만과 루시안은 너무나 소중한….” “…….” “제 동생들이거든요.” 이사벨라는 엘라엔의 거짓 없는 강고한 눈빛을 보며 그간 엘라엔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렸다. 엘라엔이 하르만과 루시안을 끔찍이 아낀다는 건 마레즈나를 넘어 사교계 전부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사벨라는 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다시 고아하게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을 나온 엘라엔은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노을은 어느새 저물고 있었다. 르세인. 엘라엔은 그의 질서를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가 숲을 밀어버리고 요새를 세우겠다면 자신은 그 요새의 성벽 위에 올라 그와 대등하게 눈을 맞추며 하르만의 뒤를 지키리라. 르세인에게 엘라엔은 라안느 가문과 연결된 효율적인 관리 대상이었고, 엘라엔에게 르세인은 동생의 미래를 위협하는 불쾌한 포식자일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엘라엔은 깃펜을 들어 서류 한 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사 현장에 가져갈 보급 리스트였다. ***에르디엔 황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은 한낮의 열기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차가운 정적에 잠겼다. 르세인은 창가에 선 채 조금 전 라안느 공작저에서 도착한 서신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서신에는 공작 에드먼이 정중한 수락 의사와 함께 예상치 못한 추가 제안이 적혀 있었다. 하르만 폰 라안느의 참관에 엘라엔 폰 라안느가 가문의 대리인이자 조력자로서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동행이라….’ 르세인은 기억을 되짚었다. 연회장의 금빛 샹들리에 아래에서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자신을 보던 엘라엔의 루비빛 눈동자. 그리고 황궁 외곽 숲의 그 눅진한 습기 속에서 비천한 황자에게 무질서함을 내보이는 그 이질적인 감정. 그는 엘라엔의 이 결정을 남매간의 우애나 후계 교육에 대한 열의 따위로 해석하지 않았다. 르세인의 사고 체계 안에서 인간의 행동은 오직 목적과 효율,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만 분류될 뿐이었으니까. 엘라엔 폰 라안느는 우습게도 영리했다. 그녀는 서문 숲을 밀어버리려 하는 것이 제 오차를 겨냥한 것임을 간파했고, 그에 대한 반격으로 하르만이라는 방패를 세워 자신의 진영 안으로 직접 발을 들이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비효율적인 발악이군.” 르세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에게 엘라엔은 연모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국의 가장 강력한 가문인 라안느 공작가를 황실의 통제 아래 묶어두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자산에 결함이 생기면 수정해야 하고, 자산이 궤도를 이탈하려 하면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관리자의 임무일 터. 그는 서신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집무실 한편에 걸린 제국 북부 전선의 지도를 응시했다. 엘라엔이 요새 공사 현장에 동행한다는 것은 르세인에게 있어 관리해야 할 변수가 하나 더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자신의 가시거리 안에 두고 그 결함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효율적인 기회이기도 했다. ‘라안느 공작이 딸을 보낸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판단력을 신뢰한다는 뜻이겠지.’ 르세인은 그녀가 자신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마멸되고 재조립될지를 관찰하기로 했다. “바델.” 르세인의 부름에 전속 부관 바델이 다가왔다. “예, 전하.” “라안느 가문의 제안을 수락한다. 요새 공사 현장에 영애의 거처를 마련하라. 단 위치는 제1지휘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구역으로 한정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라안느 후계자님에 대한 교육 일정은 어떻게 조정할까요?” “그대로 진행한다. 다만 영애가 제출할 물자 보급 계획서는 내가 직접 검토하지. 그녀가 가문의 대리인으로서 제 몫을 다하는지, 아니면 그저 오차를 키우는 불순물인지 확인해야겠어.” 르세인은 자리에 앉아 펜을 들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여름의 뜨거움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의 안면은 무감정으로 되돌아왔다. 그에게 이 모든 과정은 전쟁터의 전략을 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엘라엔 폰 라안느. 그녀가 스스로 제 질서 안으로 걸어 들어오겠다면 막을 이유는 없다. 또한 그녀가 하르만 뒤에 숨어 어떤 영악한 수를 던지든 르세인은 그 수를 읽어내어 제자리에 되돌려 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보고서 한 귀퉁이에 짧게 기록했다. [변수 발생 : 엘라엔 폰 라안느 현장 동행. 감시 및 관리 강도 상향.] 서류를 넘기는 건조한 종이 소리만이 집무실을 채웠다. 르세인은 이미 다음 수순을 계산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흙먼지가 날리는 요새 현장에서 라안느의 고결한 영애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그녀가 숨기고 있는 그 갈망이 자신의 논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바스러질지를. *** 일주일 뒤, 서문 외곽 요새 건설 현장. 공사장은 먼지와 석재를 깎는 날카로운 소음으로 가득했다. 르세인은 검은 군복 차림으로 언덕 위 지휘소에 서서 지형도를 살피고 있었다.서문 외곽 숲의 울창했던 녹음은 이제 거대한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르세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공병대는 빠른 시일 만에 지면을 평탄하게 다졌다. 정오의 태양은 대지를 달구었고 공사 현장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와 땀, 그리고 갓 잘려 나간 나무들의 진한 향이 뒤섞여 공기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언덕 위, 임시 지휘소 차일 아래 서 있던 르세인은 멀리서 다가오는 라안느 가문의 마차를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마차가 멈춰 서고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내린 것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하르만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흙먼지가 날리는 거친 땅 위로 크림색 구두를 신은 엘라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라엔은 양산을 펴는 대신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얇은 망토를 어깨에 두른 채 현장을 응시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카시안과 우정을 쌓아가던 곳…. 엘라엔은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아득한 상실감을 느꼈으나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곧 그녀의 시선은 공사장의 소란스러움을 지나 언덕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르세인에게 정확히 닿았다. “하르만, 당당하게 걸어. 이곳은 황실의 땅이지만 우리 가문의 보급로가 지나는 길목이기도 하니까.” 엘라엔은 하르만의 어깨를 다독이며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가파른 흙길은 영애의 걸음걸이를 방해했으나 엘라엔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르세인은 그녀가 다가오는 내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냉정한 관찰은 엘라엔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절차 같았다. 마침내 지휘소 앞에 도달했을 때 엘라엔은 하르만과 함께 완벽한 예법을 갖추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 안보를 위한 전하의 결단에 라안느 가문이 힘을 보태고자 왔습니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턱 끝을 까닥였다. “라안느 영애. 이곳은 연회장과 다릅니다. 오차 하나가 보급을 끊고, 지형지물의 오독이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곳이지. 영애의 그 화려한 드레스가 이 척박한 논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르세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무례하기보다 지독히 사실적이었다. 엘라엔은 그의 말에 가죽으로 장정된 두툼한 서류철을 내밀었다. “결함이 있는 차림은 분명하나, 제가 가져온 것은 완벽함입니다.”“…할아버지께서는 내게 더 단단한 갑옷을 입으라고 하셨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주지 말라고….”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카시안에게로 걸어간 엘라엔은 분수대 난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전해졌다.“그런데 이상하지, 카시안.”“…….” “네 앞에만 서면 자꾸만 갑옷의 이음새가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어.”카시안은 대답 대신 엘라엔과의 사이를 좁혔다.가죽 재킷에서 나는 가죽의 냄새와 그 특유의 햇살 같은 향이 함께 몰려왔다. 그건 르세인의 서늘한 수목 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따스한 냄새였다.카시안은 장갑을 벗은 맨손으로 엘라엔의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뭐가 묻었네. 이대로 마레즈나로 돌아가면 공작 부인이 또 트집을 잡을 거야.”그의 손가락 마디는 검술 훈련으로 인해 거칠었지만 뺨을 만지는 손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했다. 카시안은 아주 세밀하게 엘라엔의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아…….’엘라엔은 숨을 멈췄다. 대공은 누구에게도 마음의 열쇠를 내어주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의 빗장이 소리 없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카시안의 담백한 배려는 그녀의 가장 깊은 결핍을 건드렸다.“……카시안.”“…….”“넌 내가 전하의 곁에서 괴물이 되어도 나를 이렇게 봐줄 거야…?”엘라엔의 목소리가 티가 날 정도로 떨렸다. 카시안은 손을 멈추고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네가 괴물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괴물의 숲을 지킬 거야. 네가 마음껏 울부짖을 수 있도록.”그의 푸른 동공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건 충성 맹세보다 더 무겁고, 사랑 고백보다 더 처절한 약속이었다.엘라엔은 대공이 가르쳐 준 비정한 이성의 벽돌 사이로 카시안이라는 이름의 푸른 이끼가 속절없이 번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카시안의 손이 엘라엔의 뺨에서 천천히 멀어졌다.그가 남긴 미세한 체온은 여전히 아릿하게 스며들었다.“……괴물의 숲을 지키는 사냥개….”엘라엔은 카시안이 내뱉은 그 투
모임이 끝나고 부인들이 돌아간 뒤 이사벨라는 엘라엔을 불러 세웠다. “엘라엔. 앞으로는 대공 각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그런 험악한 단어들은 밖으로 꺼내지 말렴. 전하께서 들으시면 네가 정무에 끼어든다고 불쾌해하실지도 모르니.”“네, 어머니. 조심할게요. 저는 그저 어머니께 칭찬받고 싶어서 아는 척을 해본 것뿐이에요.”엘라엔은 수줍게 웃으며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연약하고 우아했다. 하지만 문을 닫고 홀로 남겨진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단번에 사라졌다.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에 오늘 들었던 이름들과 숫자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라안느 공작저의 창밖에는 새벽 내 내린 서리가 정원의 조각상 위로 맺혀 창백하게 빛났다.엘라엔은 겹겹이 레이스를 덧댄, 상아색의 모닝 드레스를 입고 식당을 찾았다.그녀의 목에는 르세인이 하사한 루비 목걸이 대신 라안느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페리도트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연둣빛에서 짙은 올리브색으로 변하는, 섬세하게 세공된 그 보석은 마치 엘라엔을 감시하는 르세인의 눈동자를 닮아있었다.식탁 위에는 식기들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놓였고, 송로버섯을 곁들인 수란과 갓 구워낸 브리오슈, 그리고 백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냈으나 식당에 퍼져든 냉기를 녹이지는 못했다.“엘라엔. 오늘따라 유독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말이야.”이사벨라는 은제 나이프로 훈제 연어를 얇게 저미며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에메랄드 반지가 햇살을 받아 서늘한 초록빛을 뿜어냈다. 그녀는 엘라엔의 안색을 살피는 척하면서도 얼굴 뒤에 숨은 기색을 집요하게 탐색했다.“할아버지를 뵈러 갈 생각에 잠을 조금 설쳤을 뿐이에요, 어머니.”엘라엔은 브리오슈를 작게 조각내어 입속에 넣었다. 버터의 풍미가 혀끝에 닿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맛으로 느끼기보다 우아하게 씹는 동작에 집중했다. 귀족의 식사는 허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교양을 증명하는 고도의 연극이었으
엘라엔은 블러드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찻잔을 내려놓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노라 남작 부인의 떨리는 부채 끝에 머물렀다. “남작 부인. 반디아의 지지는 전하께 큰 힘이 되겠지요. 하지만….”엘라엔이 말끝을 흐리자 테라스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순식간에 이사벨라의 표정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하지만?”“최근 카르노스 왕궁의 함대가 제국 남부 해역을 봉쇄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반디아의 상선들이 그곳에 발이 묶여 청동 수입에 차질을 빚고 있다던데….”“……!” “전하께 무역로를 청탁하시기 전에 그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노라 남작 부인의 부채가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반디아 상업 연맹이 철저히 함구하고 있던, 연맹의 사활이 걸린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사벨라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엘라엔이 그저 예법 수업이나 받는 줄 알았지 제국 밖의 정세… 그것도 상인들의 은밀한 자금줄 문제까지 꿰뚫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엘라엔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대신 아주 기품 있는 손짓으로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노라 남작 부인은 이제 엘라엔을 어린 영애가 아닌,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거대한 피사체로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이사벨라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사벨라 또한 엘라엔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엘라엔, 그런 낭설은 어디서…!”“낭설일까요, 어머니? 아니면 제가 전하의 곁으로 가기 전 마레즈나가 정리해야 할 오물일까요?”엘라엔은 이사벨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목소리에는 상대를 서서히 갉아먹는 독이 있었다. 이사벨라는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라안느 공작과 함께 만들려 했던 이 인형이 자신들은 보지 못한 제국 전체의 판을 읽고 있다는 공포….엘라엔은 이사벨라가 공들여 쌓아온 사교의 장을 단 한 문장으로 무너뜨린 채 다시 침묵의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테라스에 내려앉은 정적
엘라엔은 서신 하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서신에는 제국의 공식 외교 문서에는 결코 기록되지 않을 은밀한 거래와 치명적인 약점들이 적혀 있었다. “남쪽 카르노스의 왕은 제국의 비단을 탐내고, 동쪽 반디아의 거상들은 제국의 소금 통행권을 원하지. 황자가 그들을 굴복시키려 할 때 너는 그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을 건네주며 그들의 영혼을 사거라.”블러드는 엘라엔의 하얀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엘라엔은 눈을 감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단순히 복수심이나 야망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제국이라는 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리하겠다는 다짐이었다.“할아버지.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제가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허허, 걱정 마라. 나는 네가 그를 완벽하게 집어삼킬 수 있을 때까지 이 질긴 목숨을 놓지 않을 테니까. 너는 나의 혈육이고 진정한 제국의 안주인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니.”밤은 깊어갔고 대공의 가르침은 엘라엔의 내면에 스며들었다.르세인이 전장에서 승전보를 쌓아갈 때 엘라엔은 이곳 정적인 대공저에서 보이지 않는 제국의 설계도를 한 장씩 그려 나갔다.***마레즈나로 돌아오는 길. 엘라엔은 마차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베르제 대공이 건네준 낡은 서신들의 내용을 곱씹었다.르세인이 전장에서 칼로 지도를 다시 그리는 동안 그녀는 머릿속으로 욕망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마레즈나에 도착하자 평소와 다른 향이 복도를 채웠다. 장미 향이 아닌, 조금 더 자극적이고 이국적인 향….이사벨라가 반디아 상업 연맹에서 들여왔다던 바로 그 향료였다.“어머, 엘라엔. 마침 잘 왔구나.”이사벨라는 평소보다 훨씬 화사한 차림으로 엘라엔을 맞이했다. 그녀의 뒤로는 낯선 부인 몇몇이 화려한 부채를 흔들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엘라엔을 보고 있었다.르세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사벨라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사교 모임을 마레즈나 안에서 열고 있던 것이다.“인사하렴. 이쪽은 반디아 상업 연맹의 안주인들이란다.
베르제 대공의 침소는 제국의 역사 그 자체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낡은 지도들과 빛바랜 훈장들 사이로 노사자의 거친 숨소리가 공명했다. 엘라엔은 블러드의 침대 곁에 앉아 그의 마른 손을 잡았다. 블러드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엘라엔의 눈빛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엘라엔. 황자가 씌워준 그 질서가 답답하느냐.”“……처음엔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뒤에 숨어 사람들의 위선을 구경하는 게 꽤 흥미로워요.”대공은 껄껄거리며 기침을 섞어 웃었다가 엘라엔을 자신의 곁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좋은 자세다. 황궁은 말이다. 빛이 가장 강한 곳이지만 그만큼 그림자가 가장 짙은 곳이지. 사람들은 왕좌를 보느라 그 발밑에 괸 피 웅덩이를 보지 못해. 너는 그 웅덩이의 깊이를 재는 자가 되어야 한다.”대공은 침대 옆에 놓인 커다란 지도를 가리켰다. 엘레니르 제국은 강대했으나 그 강대함은 주변국들의 희생과 긴장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탑이었다.“황자가 왜 그토록 바쁜지 아느냐. 단순히 북부의 반란 때문이 아니란다. 남쪽 카르노스 왕궁의 함대가 심상치 않고, 동쪽 반디아 상업 연맹은 제국의 화폐 가치를 흔들 기회만 노리고 있지. 북쪽의 해카테 부족들 역시 황자의 등극을 틈타 국경을 넘보려 하고 있어.”엘라엔은 지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제국 안의 권력 다툼에만 매몰되어 있던 시야가 단숨에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엘라엔. 제국은 거대한 배와 같다. 선장이 아무리 유능해도 배 밑바닥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뚫리면 가라앉는 법이지. 황자는 지금 밖으로 몰아치는 파도를 막느라 배의 구멍을 보지 못하고 있어. 그 구멍이 바로 네 아버지 에드먼을 포함한 탐욕스러운 귀족들이지.”“제가 그 구멍을 메워야 할까요? 아니면 더 크게 뚫어야 할까요?”“그건 너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다만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진정한 포식자는 먹잇감을 죽이는데 힘을 낭비하지 않아. 먹잇감이 스스로 네 입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환경을 조성할 뿐이지.”블러드는 엘라엔의 얼굴 위로
그녀는 엘라엔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가식적인 위로를 건넸다.“그래. 너무 마음 쓰지 말렴. 네가 한 일은 가문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앞으로는 그런 정보가 생기면 전하께 바로 보고하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말하거라.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일들이니까.”“네, 어머니…. 명심할게요.”이사벨라가 멀어지자 엘라엔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루비색 눈동자에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발톱을 완전히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르세인은 영악함을 시험하고 있고, 에드먼은 가치를 저울질하고 있으며, 이사벨라는 추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이 막힌 이 감옥에서 살아남아 르세인의 옆자리에 앉으려면 가장 무해한 꽃의 탈을 쓰고 그들의 목을 조를 독을 배양해야 했다.‘공작 부인. 당신이 내 예복의 코르셋을 더 조이라고 명령할 때마다 생각했어. 언젠가 당신의 숨통도 조여주겠다고. 이제 시작이야.’엘라엔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설계도 위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었다. 스스로 제국이라는 거대한 판의 설계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베른 성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엘레니르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다.르세인은 승전보를 즐길 틈도 없이 북부 국경의 문제와 반란군과 내통한 귀족들의 숙청 작업을 진두지휘해야 했다.곧 황태자 책봉을 앞둔, 제국의 차기 황제라는 무게는 그를 황궁의 집무실과 북부 전선에 묶어두었고 엘라엔에게는 예기치 못한 자유가 주어졌다.“전하의 말씀입니다. 당분간 정무가 긴박하여 황궁에서의 예법 수업은 잠정 중단되었습니다.”바델이 전한 소식은 마레즈나에 기묘한 적막을 가져왔다. 르세인의 서슬 퍼런 감시가 한풀 꺾이자 엘라엔을 옥죄던 공작저의 공기도 미세하게 느슨해졌다.이사벨라 역시 르세인의 눈치가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자신의 사교계 영향력을 확대하느라 바빠졌고, 에드먼은 북부 무역로 재편에 따른 이권을 챙기느라 엘라엔에게 소홀해졌다.이 모든 방임 속에서 엘라엔은 자유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