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모든 갤러리 직원들이 퇴근하고 차가운 적막에 휩싸인 미술관 로비. 중앙 조명이 꺼진 서늘한 어둠 속에서, 은재와 태혁은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그림자처럼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1~2m 남짓.
남들이 보면 평범한 동행이었지만, 두 사람은 모퉁이를 돌 때도 서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 간격을 유지해야 10m의 한계선을 넘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보안실에는 말씀해 두셨어요? 둘이 이 시간에 내려온 걸 이상하게 보면 곤란하잖아요."
은재가 보안 엘리베이터 카드키를 태그하며 긴장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보안실에는 야간 특별 유물 보존 상태 정밀 점검이라고 사전 공문을 내려보냈어. 외부 잡음 생길 일 없으니 서둘러."
태혁의 음성은 여전히 오만하고 냉랭했지만, 칼같이 각이 잡힌 턱선에는 억누를 수 없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하 2층 특수 수장고의 육중한 삼중 방화 철문이 둔탁한 기계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두 사람은 야간 점검에 앞서 수장고 비상 프로토콜도 다시 확인했다. 말로 통신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비해, 짧고 긴 박자로 상태와 이동 방향을 알리는 비상 신호가 포함돼 있었다.
복원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은재는 특수 항온·항습 밀폐 금고 앞으로 다가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삐비빅, 치익-
금고 안쪽 깊은 곳, 어제 두 사람의 검지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켰던 반투명한 백옥 인장 '합벽인'이 서늘한 광채를 내뿜으며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낡고 바랜 붉은 비단 두루마리 하나가 고대 황실의 밀랍으로 봉인된 채 잠들어 있었다.
"이게 그 상자에 같이 들어 있던 문건인가? 통관 목록에는 없었다는."
태혁이 라텍스 장갑을 낀 긴 손가락으로 두루마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세관 정식 통관 목록에는 완전히 누락되어 있던 고대 왕실 규방 비서예요. 어제 검수하려던 찰나에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은재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두루마리를 꺼내 넓은 원목 복원 작업대 위에 길게 펼쳐놓았다. 두루마리의 길이는 2m 남짓.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빛바랜 붉은 비단 표면 위에는 빽빽한 고대 전서체 한자가 붉은 주사(朱砂) 먹물로 섬뜩하게 적혀 있었다.
"대체 뭐라고 적혀 있지?"
태혁이 두루마리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은재의 곁으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순간, 좁은 작업대 위에서 태혁의 넓고 단단한 어깨가 은재의 가녀린 어깨와 거칠게 스쳤다.
파지직-!
찰나의 옷깃 스침만으로도 두 사람의 척추를 타고 자잘한 전기 자극이 번졌다.
"흣……!"
은재의 입술 사이로 자기도 모르게 얕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태혁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미간을 사납게 구겼다.
"한 큐레이터. 호흡 조절해. 내 귓가에서 그렇게 헐떡거리면 내 허벅지 안쪽까지 불필요하게 뻐근해지잖아."
"이사님이 너무 바짝 붙으셔서 그렇잖아요! 제 심장 소리가 아니라 이사님의 거친 맥박이 제 귓전을 때리고 있다고요!" "알았어. 조금 물러날 테니 계속 읽어. 해제 방법이 있는지부터 확인하지."태혁이 한발 물러나자 은재는 자세를 고쳐 작업용 고배율 돋보기를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닿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 비문을 한 줄씩 훑어 내려갔다.
'합벽음양록(合璧陰陽錄)'.
두루마리의 서두에는 유물의 기원과 원리가 소름 돋도록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은재는 돋보기의 각도를 바꿨다. 비단의 접힌 자리에 먹이 겹쳐 보여, 획의 끝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태혁은 질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태혁은 돋보기가 다시 움직이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해독한 대목은 이랬다. 남녀의 혈맥이 인장에 닿아 봉인이 풀리는 순간, 두 숙주의 음양 기운은 하나로 묶여 신경망이 완벽히 동기화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10m를 넘으면 신호의 과부하로 감도가 폭주한다는 법칙까지 적혀 있었다.
"여기……!"
은재의 떨리는 손가락이 두루마리 하단의 특정 문단을 짚었다. 붉은 먹물로 유독 굵게 쓰인 단어, '해제(解除)'. 은재의 시선이 비문의 날카로운 문장들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태혁은 숨을 멈춘 채 은재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콧망울에 맺힌 작은 땀방울, 안경 너머로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긴장으로 파들거리는 붉은 입술.
평소 결벽증 환자처럼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혐오하던 태혁이었지만, 은재에게서 풍겨오는 은은한 라벤더 향과 체온이 이상하리만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끈적하게 달아오르며, 단순한 긴장을 넘어선 원초적인 텐션이 좁은 수장고를 가득 메웠다.
"이사님……."
은재가 돋보기를 든 채 얼어붙은 목소리로 태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충격과 수치심이 뒤섞여 있었다.
"해제 방법이…… 정말로 적혀 있어요."
"내용이 뭐야."태혁이 서늘하게 물었지만, 그의 낮게 깔린 음성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벌한 저주의 족쇄를 끊어낼 유일한 단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후 7시, 해강재단 미술관 그랜드 볼룸.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눈부신 황금빛 조명이 대리석 홀 전체를 찬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재단 창립 30주년 기념 VIP 갈라쇼.대한민국 정재계 최고위층 인사들과 해외 명품 브랜드 앰버서더, 유력 문화계 인사 300여 명이 집결한 사교계 최대의 밤이었다. 현악 4중주의 우아한 선율이 흐르는 홀 한가운데로, 두 사람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좌중의 시선이 일순간 그들에게 쏠리자 나직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재단 총괄이사 강태혁. 완벽한 체형에 맞춰 재단한 클래식 블랙 턱시도와 나비넥타이, 이마를 훤칠하게 드러낸 흑발이 오만한 귀공자의 위엄을 완성하고 있었다.그리고 그의 곁에 선 수석 큐레이터 한은재. 평소의 뿔테 안경과 투박한 오피스 정장 대신, 등을 시원하게 드러낸 딥 네이비 실크 백리스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숨 막히는 비주얼은 그 자체로 한 폭의 명화 같았다.태혁의 짙은 시선이 은재의 드러난 등과 우아한 쇄골 라인을 따라 느리게 훑고 내려갔다. 짙은 남색 실크가 몸의 굴곡을 따라 관능적으로 흘러내리며, 걸을 때마다 은재의 늘씬한 각선미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태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른침을 삼켰다.이상하게도, 단순한 시각적 감탄을 넘어선 은밀하고 끈적한 갈증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은재 역시 태혁의 완벽한 턱시도 핏을 곁눈질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오만하고 결벽적인 폭군이었지만, 넓은 어깨와 훤칠한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남성미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쇼윈도의 이면에서, 두 사람은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었다.인사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의 간격은 7m까지 벌어져 있었다.'더 멀어지면 안 돼. 이 정도에서 맞춰야 해.'은재는 샴페인 잔을 든 채 태혁과 미세하게 보폭을 맞추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파티장 안의 사람들과
쾅, 쾅-!게스트룸 욕실 문을 부술 듯 두드리던 태혁의 손이 멈칫한 순간, 잠금장치가 철컥 풀리며 문이 홱 열렸다. 자욱한 흰색 수증기 너머로, 하얀색 테리 타월 샤워 가운을 가슴까지 바짝 여며 쥔 은재가 나타났다. 물방울이 맺힌 쇄골과 붉게 상기된 뺨.헝클어진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은재는 독기 어린 눈으로 태혁을 쏘아보았다."문 부술 일 있습니까?! 다 씻고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하지만 태혁은 그녀의 앙칼진 항변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은재의 젖은 목덜미를 보다가 제 바지 앞섶으로 시선을 내렸다. 장미향 수증기가 코끝을 스쳤지만, 신경은 온통 가라앉지 않는 열기에 쏠려 있었다."……공조 각서 제2조."태혁의 쉰 목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샤워 사전 승인 룰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네 눈으로 똑똑히 봐."태혁이 턱짓으로 제 바지 앞섶을 가리켰다. 수트 바지 지퍼가 터져 나갈 듯 거대하게 솟아오른 앞섶이 은재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은재의 귓불이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이사님이 낮에 스쿼트로 제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잖아요!""한은재, 핑계 대지 마. 네가 수건으로 몸을 닦을 때마다 내 살갗이 벗겨지는 것 같았어."태혁은 문틀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턱을 바들바들 떨었다. 은재의 손길이 가운 안쪽을 정리할 때마다, 자신의 귀두 끝을 깃털로 간질이는 듯한 지독한 미열이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문턱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실랑이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겨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출근길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은재의 뺨은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태혁의 미간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오후 8시, 청담동 펜트하우스. 살벌한 오피스 배틀을 치르고 돌아온 실내에는 숨이 막힐 듯한 살얼음판 긴장감이 맴돌았다. 태혁의 지독한 스쿼트 보복 탓에, 은재는 오후 내내 허벅지가 뻐근하게 조여오는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다.태혁 역시 은재가 퇴근 직전 서류를 스테이플러로 철할 때마다 손끝을 꼬집는 소소한 반격 탓에, 집에 돌아와서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저 먼저 씻겠습니다."은재가 게스트룸 문을 열며 쌀쌀맞게 뱉었다. 소파에 걸터앉아 태블릿으로 해외 지사 보고서를 넘기던 태혁이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각서 제2조 잊었나? 시작 전에 서로 괜찮은지 확인부터 하기로 했잖아. 지금 당장이라는 말만 던지고 들어가려고?""하루 종일 땀 흘리고 먼지 뒤집어썼는데 샤워도 결재를 받아야 합니까? 15분 안에 끝낼 테니 신경 끄세요."은재는 태혁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욕실 문을 쾅 닫아걸었다. 낮에 당한 스쿼트의 굴욕을 생각하면 그 어떤 배려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은재는 땀에 젖은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어 던지고 샤워 부스로 들어섰다.따뜻한 온수가 쏟아져 내리며 뻐근했던 어깨와 허벅지 근육을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은재는 바디 스펀지에 장미 향 바디워시를 듬뿍 짜내 풍성한 거품을 냈다.그리고 하얗고 부드러운 거품을 제 목덜미와 쇄골, 가슴, 그리고 허벅지 안쪽 은밀한 살결에 미끄러지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태혁은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 야경을 등지고 앉아 태블릿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하지만 낮의 스쿼트 후폭풍으로 인해 하체는 여전히 묵직한 피로감에 젖어 있었고, 은재와의 기 싸움으로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다.'15분 안에 끝낸다고?'태혁은 시계를 확인했다. 15분이라는 말을 기억해 두고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샤워 부스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거실까지 아련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그
점심시간이 막 지난 오후 1시, 미술관 지하 1층 특별 기획전시실. 은재는 작업 가운을 입고 대형 유화 작품의 설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곁의 도슨트들도 전시 동선을 살피며 작업을 지켜봤다."3번 벽면 르네상스 명화, 왼쪽으로 2cm만 더 옮겨주세요. 수평도 함께 확인해 주시고요. 제가 직접 올라가서 와이어 장력 확인할게요."은재는 2m 높이의 알루미늄 사다리를 타고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오전의 얼음 캔 테러 이후, 태혁이 접견실을 뛰쳐나와 탕비실을 덮쳤을 때는 이미 은재가 자리를 비운 뒤였다. 태혁의 헛기침과 함께 전해져 오던 서늘한 살기를 떠올리며 은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지가 오만한 재벌 3세면 다야? 감히 날 하녀 취급해?'은재가 사다리 꼭대기에 서서 양손을 뻗어 무거운 액자를 지탱하던 바로 그 순간.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지하 1층 VIP 전용 피트니스 센터. 전시실과의 거리는 7m 남짓.땀복 차림의 강태혁이 거대한 스쿼트 랙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어깨 위에는 쇠로 된 올림픽 바벨이 얹혀 있었고, 양옆에는 거대한 원판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총중량 140kg."한은재, 네가 감히 내 바지에 홍차를 쏟게 만들어?"태혁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어디 네 몸으로 그 대가를 뼈저리게 치러봐."태혁이 심호흡을 깊게 들이마시며 140kg의 쇳덩이를 짊어진 채 깊숙이 풀 스쿼트로 주저앉았다. 대퇴사두근과 둔근, 햄스트링 근육이 파열될 듯 팽팽하게 수축하며 하체 전체에 어마어마한 하중이 짓눌렸다.그리고 그 극심한 근육의 부담이 고스란히 은재의 몸으로 전해졌다.쿵-!"아, 앗……?!"사다리 꼭대기에서 액자를 잡고 있던 은재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 제 양 허벅지에 거대한 쇳덩이를 얹은 듯한 하중이 골반과
오전 11시, 해강재단 미술관 2층 VIP 접견실. 총괄이사 강태혁은 주요 후원 기업 대표 및 해외 파트너스 임원 4명과 함께 갈라쇼 스폰서십 조율 미팅을 주재하고 있었다."이번 재단 30주년 특별전은 아시아 미술계에서 유례없는 메가 이벤트가 될 것입니다. 후원사 브랜딩 역시 최고 등급의 예우로……."태혁은 유려한 화술과 서늘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스위스계 프라이빗 뱅크 한국 지사장은 태혁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과연 해강의 차기 수장답습니다. 강 이사님의 탁월한 심미안과 공격적인 기획력이라면 이번 갈라쇼는 성공을 확신해도 되겠군요." "과찬이십니다, 지사장님.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전시를 넘어 동서양 고대 예술품의 정수를 사교계에 선보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태혁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입가의 미소와 달리 어깨에는 좀처럼 힘이 빠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은재와 주고받은 말들이 회의 중에도 불쑥 떠올랐다.테이블 위에는 영국 왕실 조달 브랜드의 고급 도자기 찻잔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얼그레이 홍차가 놓여 있었다.***그 시각, 접견실 바로 아래층. 한 층 아래 학예실 탕비실. 은재는 싱크대 앞에 선 채 천장을 매섭게 올려다보고 있었다.아침부터 1분 단위로 잔소리를 퍼붓고, 마치 죄인을 감시하듯 오만하게 굴던 태혁의 태도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자기가 무슨 왕이야. 준비도 5분 안에 하래, 숨도 조심해서 쉬래. 사람을 뭘로 아는 거야."은재는 이를 바득 갈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이 냉동 칸 구석에 놓인 알루미늄 캔 커피 하나에 꽂혔다. 표면에 살얼음이 낀 차가운 캔.순간 은재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번뜩이는 악마 같은 영감이 스쳤다.'사전 승인 없는 자극 금지라고
자정을 넘긴 청담동 펜트하우스. 도심의 소음이 차단된 실내에는 오직 한강변을 때리는 서늘한 밤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복층 계단 아래, 마스터룸과 게스트룸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6m.벽 하나를 사이에 둔 안전거리 안쪽이었지만, 은재는 침대에 누운 채 좀처럼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하…… 정말 미치겠네."은재는 면 잠옷을 목 끝까지 여민 채 뒤척였다. 앞선 해제 시도의 역류 반동으로 한층 예민해진 몸은 사소한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6m 너머 벽 안쪽에서 전해져 오는 태혁의 은근한 체온과 호흡의 파동이었다.그가 침대 위에서 긴 다리를 뻗으며 시트를 스칠 때마다, 얇은 면 잠옷 바지가 은재의 허벅지 안쪽 살갗을 거칠게 긁어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스륵, 사각-"흣……."은재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 찰나였다.쿵, 쿵-!두 방을 가르는 콘크리트 벽 너머에서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한 큐레이터."벽을 타고 건너온 태혁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뒤척이지 말고 얌전히 누워 있어. 네가 다리 비틀 때마다 내 허벅지 안쪽에 불이 붙는 것 같으니까."은재는 기가 차서 벌떡 일어나 벽을 향해 쏘아붙였다."제가 잠버릇까지 이사님 허락을 받고 자야 합니까? 저 지금 숨도 조심해서 쉬고 있거든요?!""나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잠깐만 참아. 내일까지 넘겨야 할 감사 기획안이 남았어.""그놈의 결벽증 진짜……."은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서로의 신경망이 하나로 묶인 탓에, 분노와 긴장감마저 혈관을 타고 실시간으로 교환되고 있었다. 침대 매트리스의 푹신함조차 낯설고 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