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하야, 아마 네가 기억주입을 받게 되면 알게 되겠지만’하지만 지금은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주하는 무심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그래도 다행이지. 이런 유전병에 거액을 투자해주는 설화재단이 있어서. ”그 말에 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자신이 바로 그 투자자인데, 주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가볍게 웃고 있었다.시우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주하가 세포실험을 하면서 태연하게 물었다.“그리고 다음 주부터 출근이니까 이번 주는 안 와도 돼.” “그래도 미리 와서?” “미리 와서 고생하면 좋지. 그런데 대학원의 선배로서 추천하지 않습니다. ”주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묘하게 뼈가 있는 말투였다.“쉬라고 할 때 쉬는 게 좋아. 나중에 쉬고 싶어서 울고불고하지 말고.”주하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시우는 괜히 등골이 조금 서늘해지는 듯했다.클린벤치의 환기용 바람이 꺼지자, 세포배양실을 가득 채우던 소음도 잦아들었다.세포 실험을 마무리한 주하는 주변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실험실은 미국이랑 거의 비슷할 거야. 여기 연구동을 신축할 때, 새로운 이사장님이 엄청 신경 쓰셨다고 했거든”주하가 살며시 웃었다. 시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아…그래? 다행이네. ”“그렇지? 그래서 다른 곳보다 최신 시설이야.”어느새 시우의 시선은 주하에게로 떨어질 줄 몰랐다.처음에는 희미한 추억에 의지했다.만약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몰라 늘 상상만 했다.단발일까, 긴 머리일까.아직도 웃을 때는 여전히 눈 아래 애교살이 도톰하게 올라오는지.한쪽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 채 입꼬리만 올리는 버릇도 그대로인지 늘 궁금했다.연구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주하의 말수도 조금씩 늘어났다. 맑게 웃으며 재잘거리는 모습이 눈앞에서 움직였다.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주하의 목소리, 표정, 사소한 버릇까지 하나씩 실제의 모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어때? 연구실 좋지? ”들뜬 목소리에 시우의 심장도 덩달아 더
주하는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어. 현진 언니 동생이래.” “아하!” 진아는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주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어제 병원에서도 만났거든.”“그럼, 주하가 랩에 데려가면 되겠네. 난…잠시 홀리브에 다녀오게. 화장품이 떨어진 게 있어서.”진아는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듯 손을 흔들고 황급히 떠났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윤진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시우의 눈웃음이 한층 더 깊어졌다. 경계심을 살살 녹이는 듯한 시선이 주하에게 닿았다.“왜? 놀랐어?” “어. 하필 우리 교수님일 줄 몰랐거든.”주하는 최대한 담백하게 답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해하게 왜 저렇게 웃는 건데.’심장이 제멋대로 뛰게!’주하가 건물 안으로 성큼 들어서자, 시우가 바짝 붙어 따라왔다. 거리를 조금 벌려도, 그는 금세 그 간격을 좁혔다.“나도 그때는 확실치 않았거든.”“그럼, 랩 생활은?”“아, 미국에서 해봤어.”“…그럼 내가 알려줄 건 없겠네.”“아니, 다르지. 여기선 여기 규칙을 따라야 하니까.” 시우가 환하게 웃었다. 가까워질수록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게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주하를 스쳤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연구동 옆 작은 오솔길.윤진아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낮고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블랙이 붙었습니다.”“오전엔 레드였는데, 이젠 블랙까지.”“당분간 지켜만 봐. 아직은 시기가 아냐.”“예.”진아는 곧장 홀리브에 들려 아무 물건이나 하나 집어 들고나왔다.연구실의 오피스에 들어가자,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주하의 빈자리를 힐끗 본 진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부디 무사히 지나가야 할 텐데.’. ***주하는 세포 배양실에서 클린벤치 앞에 앉아 있었다. 보라색 니트릴 장갑을 낀 손에는 피펫 에이드가 들려 있었다.HEK293 세포를 다루는 손길이 익숙했다.조용한
현시우의 시선이 순간 주하에게 머물렀다. 다 먹고 자리에 일어서자, 그는 자연스럽게 주하의 옆에 다가와 가방을 집어 들었다.“어. 그거 무거워. 노트북이 있어서.” “그래 보여서. ”현시우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왜 들고 다녀?” “몇 주 전부터 연구소에 도둑이 든다고 해서 소지품 챙기라고 했거든. 어차피 연구 결과밖에 없지만 그게 중요한 거라.”현시우의 눈빛이 잠시 가라앉았다.‘도둑이라….’“다른 일은 없었어?”“음… 몇 번. 누가 내 노트북에 로그인하려는 정도? 찝찝해서 비밀번호도 자주 바꾸거든.”현시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누구지?’주라헬이 주하의 존재를 확인한 건 오늘일텐데. 아무리 빨라도 어제.그전부터 누군가 주하의 연구실과 노트북을 노리고 있었다.‘주하가 단순히 주라헬의 레플리카 겨울이 아니라, 뭔가 더 있는 건가.’눈빛에 미묘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주하는 그런 현시우의 생각을 알지 못한 채 옆에서 걸음을 맞췄다.현시우와 헤어진 뒤.주하가 연구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 얼굴이 환해졌다.보고 싶은 아빠였다. “어, 아빠!!”밝은 목소리가 절로 터졌다.“잘 있지. 아빠는 이제 한국에 온 거야?” 주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걸음을 늦췄다.“밤늦게 조심하거든요. 당연하지. 아빠는 거기서 햄버거만 드시지 말고.”평온한 일상 대화가 이어졌다. 이 순간만큼은 무엇보다 평화로웠다.***“주하야, 점심 어디갈래?”오전 실험을 마무리하는 중에 같은 랩에 있는 동기인 윤진아가 물었다.“학식아냐?”“오늘 메뉴는 봤어?”“아니? 오늘도 고기?”“어, 소고기랑 치킨.”“요즘 잘 나오는데.”“그러게.”두 사람은 점심을 먹으러 연구동 건물을 나왔다.연구동 건물 앞의 주차장.여름 햇살이 눈부신 주차장 구석 세워진 검은 차 안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신 터졌다. 운전석에 앉은 주승현은 차창 너머로 유주하의 움직임을 카메라로 담아내고
어젯밤 늦게, 현겸에게서 주하의 동선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중 하나가 학교 체육관 수영장.주하가주로 나타나는 시간에 맞춰 바로 이곳에 왔다.‘물놀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던 애가 물을 무서워했다고?’마음 한편에 무거운 추가 매달린 듯했다.그날 이후 바뀐 걸까.
살아 있는 듯, 진한 붉은 색의 피가 넘실거리는 연보라색 튜브.주라헬이 연보라색 튜브를 들어 올려 형광등에 비춰보며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봤다.“이거란 말이지.”“네.”“그럼 진행해. 정말 겨울이 맞는지 확인해 봐.”“네. 결과는 나오
가슴에 맺힌 말들이 차오르다가 사라졌다. 시우는 숨을 천천히 고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현진과 아는 사이면… 같은 랩이야?”“어.”주하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시우의 가슴은 그 짧은 대답에도 반응하며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