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새벽, 예령이 회랑으로 나섰을 때 무겸은 이미 채비를 마치고 서 있었다.검은 관복에 허리띠를 단단히 맨 차림이었다. 곧게 편 어깨 아래로 옷자락이 흔들림 없이 떨어졌다. 늘 곁에 있던 것이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는 그의 손에 들려 있지 않고, 품에 안긴 채였다.그가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맡아 주시오.”예령은 지팡이를 받아 들었다. 보기보다 묵직했다. 오래 쥐어 온 손잡이는 반들반들 닳아 있었고, 그 위에 검은 매가 날개를 펴고 있었다.삼 년 동안 그는 이 지팡이에 기대는 척하며 세상의 눈을 속여 왔다. 오늘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돌려받으실 날이 있습니까?”“없기를 바라오.”그는 그 말만 남기고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지팡이 소리 없이. 마당을 쓸던 하인이 빗자루를 떨어뜨렸고, 물동이를 이고 가던 하녀가 그 자리에 굳었다. 예령은 그 등을 대문이 닫힐 때까지 보았다.전생의 그는 끝내 조정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리를 다쳐 밀려난 장남.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오늘, 그 기억이 처음으로 어긋나고 있었다.어젯밤 장부에 적은 한 줄이 떠올랐다.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던 걸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따라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였다. 조정은 여인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예령은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가, 곧 장호를 불렀다.“북방으로 갈 수레를 알아봐 주세요. 스무 대요. 곡식은 서씨 상단 창고에서 내고, 역참마다 말 먹일 여물까지 셈해 두세요. 진가상회에는 오늘 안으로 서신을 보내 주시고요. 열흘 뒤 황도를 떠나 보름 안에 닿겠다고요.”장호가 고개를 숙였다. 예령은 서실로 가 장부를 펼쳤다. 굶는 병사들에게 곡식을 대는 일이라면, 태성상단보다 한 걸음 먼저 움직여야 했다.그가 제 싸움을 하러 갔다면, 그녀도 제 일을 해야 했다.같은 시각, 황궁.아침 조회를 앞두고 대전 앞뜰에는 관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진북후부 장남이 정북장군의 교지를 받았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
교지는 해가 기울기 전에 진북후부에 닿았다.병부의 사자가 대청 앞에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며칠 전 관직을 권하러 왔던 바로 그 사자였다. 두루마리를 읽는 동안에도 그의 눈은 자꾸 무겸의 지팡이로 향했다. 진북후부의 장자 한무겸을 정북장군으로 삼는다. 변경의 군을 수습하고 군량의 흐름을 바로잡으라. 관직을 내리는 임명과 함께, 열흘 안에 황도를 떠나라는 기한이 붙어 있었다.병부 사자의 권유라면 몸을 핑계로 물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황명으로 내린 교지는 달랐다.무겸은 지팡이를 짚은 채 교지를 받았다. 두루마리를 쥔 손에 힘줄이 섰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자가 물러가자 진북후가 오래 그를 보았다.“가겠느냐.”“가야지요. 병사들이 굶고 있습니다.”진북후는 더 묻지 않았다. 병부의 원외랑이 이 명을 누구보다 먼저 청했다는 것을, 대청에 있던 세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진북후가 짧게 한마디를 보탰다.“원외랑이 무슨 속셈이든, 진북후부의 장자가 등을 보일 수는 없다.”그날 밤, 성 동쪽 집 서실에는 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책장 둘째 칸에는 어느새 서신이 세 통 꽂혀 있었다. 예령은 아래 칸에 아버지의 주판을 올려 두고, 북방으로 가는 길이 그려진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황도에서 진가상회까지, 진가상회에서 백운상회까지. 수레가 발견된 동쪽 고갯길에는 붉은 먹으로 점을 찍었다.문가에서 기척이 났다. 무겸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지도 위의 붉은 점에 닿았다.“이건 무엇이오.”“북방으로 갈 길입니다.”“누가.”예령은 붓을 내려놓고 그를 올려다보았다.“제가요.”무겸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서실 안으로 들어와 탁자 맞은편에 섰다.“그곳은 울란이 움직이고, 태성상단이 길목을 쥐고, 병부가 나를 보내려 안달이 난 곳이오. 그대를 노릴 자들이 황도보다 몇 배는 많을 거요.”“그래서 가야 합니다.”예령은 지도 위의 붉은 점을 짚었다.“이 고갯길에서 우리 상단 사람 셋이 사라졌습니다.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진가상회는 만나 보겠
동이 트기 전, 회랑 건너편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예령은 이미 깨어 있었다. 창을 조금 열자 어스름 속에 무겸의 등이 보였다. 곽진이 끄는 말 곁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이 시각 이 집에는 그를 지켜볼 눈이 없었다. 걸음은 곧았다.무천이 황도를 떠나는 날이었다.말발굽 소리가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 예령은 한참 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어젯밤 회랑에서 제가 돌려준 대답이 떠올랐다.‘약조에 있는 일입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의 옆얼굴이 밤새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따라가도 되는 걸까. 그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예령은 창틀을 쥔 채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무천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생에 그녀를 감옥에 버려두고 다른 여인의 처소로 가던 사람. 그 사람이 황도를 떠나는 모습을, 그녀도 제 눈으로 보고 싶었다.“연화야. 가마를 준비해 다오. 조용히.”진북후부 후문 앞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짐이라고는 궤짝 두어 개뿐이었다. 하인 넷이 마차 곁을 지키고, 곽진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예령은 골목 모퉁이에 가마를 세우게 했다. 더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진북후는 끝내 후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지 않는 것이 아비가 내린 마지막 벌인 듯했다.후문이 열리고 무천이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몰라보게 수척했다. 화려하던 옷차림 대신 수수한 여행복이었다.마차 곁에 무겸이 서 있었다. 배웅하러 나온 얼굴이 아니었다. 무천이 정말로 이 문을 나서 황도 밖으로 가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러 온 얼굴이었다.무천이 걸음을 멈췄다. 비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배웅까지 나오셨습니까, 형님.”“배웅이 아니다. 네가 떠나는 걸 보러 왔다.”무겸의 목소리에는 어떤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조씨 가문 영지까지 곽진의 사람이 따라갈 것이다.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에게 서신을 보내는지 전부 내게 올라온다.”무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형님은 끝까지…….”“
후부 사랑채 회랑에서 예령은 무겸과 마주쳤다.그는 진북후의 처소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 어제의 자색 혼례복 대신 짙은 남색 겉옷 차림이었다. 밤을 새운 탓인지 눈가가 조금 꺼져 있었다. 그녀를 알아본 그가 걸음을 멈췄다.“부인.”밝은 낮에 듣는 그 호칭은 어젯밤과 또 달랐다. 예령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곽진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하녀의 일도, 무천 공자의 일도.”“내가 직접 전했어야 했는데, 곽진의 입으로 먼저 듣게 해서 미안하오.”“공자님께서는 그 자백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들으셨다지요.”무겸이 그녀를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는 얼굴이었다.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젯밤 신방에서 오간 말들이 그 침묵 속에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예령은 소매에서 작은 보자기를 꺼냈다. 약과 몇 개와 떡 한 조각이 싸여 있었다.“연화가 챙겨 준 것입니다. 아침을 거르셨다기에.”무겸이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곽진이 말했소?”“아침은 거르지 말라 하신 분이 거르셨다고요.”그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그는 보자기를 받아 소매에 넣었다.“연화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그러겠습니다.”연화가 싼 게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예령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사랑채 대청에는 진북후가 앉아 있었다. 무겸과 예령이 한쪽에 자리를 잡자, 하인 둘이 무천을 데려왔다. 포박은 하지 않았지만 양옆에서 팔을 붙들고 있었다.무천은 대청 한가운데 서서 먼저 예령을 보았다. 어제 혼례복을 입었던 여인이 오늘은 형의 곁에 앉아 있었다.진북후가 입을 열었다.“별원에서 형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고, 혼례날 사람을 들여 신부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조씨의 몸종을 부려 형의 처소를 엿보게 했고, 그 이야기를 병부에 흘렸다.”한 마디 한 마디가 대청 바닥을 치듯 떨어졌다.“칼을 든 자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하나 조씨의 몸종은 전부 털어놓았다. 그 끝에 네 이름이 있었다.”“아니라고 할
예령이 눈을 뜬 것은 창호지가 희게 밝아 온 뒤였다. 밤새 켜 두었던 초는 다 타서 촛농만 남아 있었다.잠깐 동안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낯선 천장, 낯선 이부자리. 그러다 어젯밤 일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부채를 내리던 순간 굳어 버리던 얼굴, 귀 끝까지 붉어지던 모습, 문고리를 쥔 채 한참을 망설이던 등. 그리고 잘 자라는 인사 끝에 붙은 부인이라는 말.예령은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묻었다. 아침부터 뺨이 뜨거웠다.“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연화가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 입가에 웃음을 잔뜩 머금은 얼굴이었다.“큰공자님께서는 동트기 전에 후부로 나가셨습니다. 후작께서 급히 사람을 보내셨답니다. 어제 그 열쇠 일 때문이라고요.”“그렇게 이른 시각에?”“예. 나가시면서 이걸 서실에 두셨습니다.”연화가 접힌 쪽지를 내밀었다. 급히 쓴 듯 먹이 번진 글씨였다.‘후부에서 급히 부르셔서 먼저 나가오. 아침은 거르지 마시오. 오후에 뵙겠소.’짧았다. 두 장짜리 서신을 쓰던 사람이 쓴 것이라기엔 너무 짧았다. 그런데 마지막 줄 앞에서, 붓이 한 번 멈췄다 간 자국이 보였다. 무언가 더 쓰려다 만 것 같았다.예령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아침은 거르지 말라니. 제가 아이도 아닌데.쪽지를 들고 서실로 가는 길에, 회랑 건너편 방 앞을 지났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방 안의 이부자리는 한 번도 펴지 않은 듯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밤새 불만 켜 두고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예령은 문틈에서 얼른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서실 창 너머로 뒤뜰의 매화나무가 보였다. 아직 꽃은커녕 잎도 없는 가지였다. 내년 봄에야 꽃이 필 거라던 나무였다. 책장 둘째 칸에는 벌써 종이가 세 장이었다. 그가 받은 그녀의 서신, 그녀가 받은 그의 두 장짜리 서신, 그리고 방금 받은 이 쪽지.예령은 쪽지를 꽂다 말고 손을 멈췄다.혼담이 오간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사이 그녀는 이 사람의 서신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의 귀가 붉어지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고, 어젯
의식이 끝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붙잡힌 두 사내는 곽진이 후부 지하로 데려갔다. 칼을 든 자는 입을 다물었고, 열쇠를 지녔던 자는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열쇠에 관해서는 진북후가 직접 하인들을 불러 캐묻겠다고 했다. 무겸은 그 자리에 남으려 했지만, 진북후가 손을 내저었다.“신랑이 신방을 비우면 그것이야말로 저들이 바라는 일이다. 가거라.”성 동쪽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부채를 쥔 예령의 손 위로, 무겸의 손이 한 번 가만히 얹혔다가 떨어졌다.“무섭지 않았소?”“부르는 쪽으로만 가면 된다 하셨으니까요.”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보는 그의 옆얼굴이 조금 풀렸다.마차가 성 동쪽 집에 닿았을 때, 회랑 끝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게 기름을 넉넉히 채워 두라 일렀다던, 서신 속 그 등이었다. 서실 창 너머 뒤뜰에는 옮겨 심은 매화나무가 달빛 속에 가지만 앙상하게 서 있었다.안채 신방에는 붉은 초 두 자루가 타고 있었다. 예령은 연화의 손을 빌려 머리에 꽂았던 장식을 하나씩 내리고, 백옥 비녀 하나만 남긴 채 단장을 가볍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연화가 물러가며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연화가 꼭 쥔 두 주먹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 보였다. 신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무겸은 초 곁에 선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부채 너머로 그의 자색 소매 끝만 보였다. 촛불이 그의 곧은 콧날과 턱선을 따라 흔들렸다. 낮에 칼을 쳐 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는 신방 한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신랑이 시를 읊어야 신부가 부채를 내리는 것이 각선의 법도였다.“……시는 한 번이면 족할 줄 알았소.”예령은 부채 뒤에서 웃음을 참았다.“대문 앞에서 읊으신 시는 온 골목이 들었습니다. 이번엔 저 하나만 들으면 됩니다.”무겸이 헛기침을 했다. 초 심지가 한 번 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낮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