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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불능을 깨운 여자 진세이

Author: 미미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3 15:46:18

한 달 전. ‘살살 녹는 투뿔한우’ 식당

H건설 신사업팀 회식 자리였다.

대형 룸 한가운데서 오현수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소주병과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

댕, 댕, 댕, 댕.

술기운 오른 박자가 룸 안을 울렸다.

“자, 이번 H-스테이 코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주신 서하강 이사님. 한 말씀 해주시죠!”

박수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서하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H그룹이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후계자이자, 회장의 양아들인 H건설 이사.

그 이름 앞에 붙은 직함들은 모두 비쌌다.

190센티미터의 거대한 체구에 박제하듯 맞춘 네이비 수트, 반듯하게 넘긴 머리와 얇은 은색테 안경. 손목 위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까지. 서하강이라는 존재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교하게 가공된 최고급 권력의 결정판이었다.

서울대와 하버드를 거쳐 뉴욕에서 건물을 짓는 법보다 도시의 가격을 정하는 법을 먼저 배운 남자. 사람들은 그를 완벽하다고 불렀고, 하강은 그 단어가 얼마나 얇은 포장지인지 알고 있었다.

국내 재계 서열 8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집을 지은 회사를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남자가 지금, 이 룸 안에 서 있었다.

그가 잔을 들었다.

차가운 인상과 달리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필요한 만큼만 친절한 얼굴이었다.

“H-스테이 코어 프로젝트는 이번 그룹에서 중요한 사업입니다. 핵심 인재인 여러분과 좋은 결과를 내게 되어 기쁩니다.”

말은 반듯했고, 온도는 낮았다.

하강은 안주머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들었다.

검은 카드 한 장이 룸 안의 공기를 바꿨다.

“오늘 결제는 이 카드가 합니다. 한도 걱정은 하지 마시고 즐기십시오.”

말이 끝나자 박수소리가 도미노처럼 번졌다. 오현수 팀장이 가장 먼저 박수를 쳤고, 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돈은 늘 가장 빠르게 사람의 호감을 샀고, 서하강은 그 권력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불판의 열기 사이로 매달렸다.

“어머, 이사님 진짜 멋지시다.”

“그러게. 통도 크시고…… 안 그래, 진 대리?”

“아아…… 그쵸. 다 가지신 분이시죠.”

진세이는 영혼 없는 웃음을 붙였다.

그녀의 시선은 서하강이 아니라 불판 위에 있었다.

투뿔 소고기가 붉은 결을 드러낸 채 익어가고 있었다. 지방이 녹으며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집세, 병원비, 카드값, 대출 이자 같은 것들이 잠깐 멀어지는 냄새였다.

얼마 만의 한우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 사기캐다 진짜. 사기캐.”

동료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세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게를 들었다. 고기 한 점을 뒤집는 손길이 누구보다 신중했다. 회장의 양아들이자 그룹 후계자인 남자는 저쪽에 있었고, 오늘 세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쪽이었다.

배부르게 먹고, 내일 다시 출근할 수 있을 만큼만 취하는 것.

직장인의 생존은 늘 그 적당한 경계선에 있었다.

“자~ 다들 한잔씩 잔 채우고!”

건설사 회식답게 폭탄주는 빠르게 돌았다. 잔은 비워지기 전에 다시 채워졌고, 거절은 분위기를 깨는 일처럼 취급됐다.

세이는 4년 차 대리답게 웃을 타이밍을 알았고, 잔을 부딪힐 각도도 알았다.

너무 빠지지 않고, 너무 튀지도 않게.

직장인의 생존은 늘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진 대리, 이번 프로젝트 때문에 고생 많았어. 자 한잔 받아.”

“팀장님, 저 오늘은 진짜 천천히 마시겠습니다.”

“에이, 소주 3병은 거뜬한 우리 진대리가 왜 이래”

“아잇, 그럼 팀장님이 주시는데 먹고 죽겠습니다!”

웃음이 터졌다.

술은 몇 순배 더 돌았고, 불판 위의 고기는 계속 사라졌다. 세이는 오래간만에 배 속이 든든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뜨거운 고기와 소금, 술기운이 뒤섞여 얼굴에 열이 올랐다.

뺨이 붉어졌다.

구석진 자리에서 물컵을 든 세이는 더 마시면 안 되겠다는 계산을 했다. 자기 한계는 알고 있었다. 한계 밖으로 밀려나면, 다음 날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출근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미 술기운은 얇게 눈가를 덮고 있었다.

세이는 잠깐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해 테이블을 짚고 일어섰다. 불판의 열기와 비린 술 냄새가 한꺼번에 훅 끼쳤다. 의자 사이를 빠져나가려던 순간, 발끝이 무거운 원목 의자 다리에 걸렸다.

몸이 사정없이 기울었다.

세이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닿은 것은 딱딱한 테이블이 아니었다.

맞춤 수트의 팽팽한 원단.

그 아래 선명하게 버티고 있던 사람의 체온.

서하강의 허벅지였다.

손바닥 전체로 지독한 열이 밀려들었다. 세이의 숨이 짧게 멎었다.

“엇…… 죄송합니다.”

세이가 급히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하강의 몸이 거대하게 굳었다.

아니.

굳은 게 아니었다.

오래 죽어 있던 감각이 척추를 타고 수직으로 치솟았다. 하강은 그 순간 자신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터질 듯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경이로움보다 먼저 공포가 왔다.

이럴 리 없었다.

그 어떤 여자에게도, 어떤 약에도, 어떤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던 몸이었다.

그 몸이 지금, 술기운에 비틀거린 신사업팀 대리의 손바닥 하나에 명령을 어기고 있었다.

하강의 커다란 손이 세이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순간 룸 안의 소음이 진공처럼 멀어졌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도, 팀원들의 뻔한 웃음도, 고기 익는 소리도 유리막 너머의 일처럼 차단되었다.

세이는 실수로 닿았다.

하강의 몸은 실수라고 부를 수 없는 반응을 시작했다.

그는 지체 없이 세이의 몸을 일으켜 제 옆에 바로 세웠다. 너무 빠른 동작이었다. 타인들에게는 취한 직원이 중심을 잃은 가벼운 해프닝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강의 턱관절은 비정상적으로 단단하게 맞물려 있었다.

세이는 얼굴을 숙였다.

하강은 그제야 자신이 그녀의 팔을 너무 세게 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손을 놓는 데도 짧은 시간이 걸렸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하강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이성보다 먼저 몸이 대답하고 있었다.

오래 잠겨 있던 문이, 진세이의 손바닥 하나에 안쪽에서부터 열리고 있었다.

세이는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룸을 뛰쳐나갔다. 찰나의 해프닝이었기에 취기가 오른 팀원 중 누구도 두 사람 사이의 기류를 채어내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하강은 밀려드는 신체적 충격에 잠시 자리에 굳어 있었다. 죽어 있던 감각이 단 한 번의 접촉으로 복구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강은 본능적인 이끌림에 이끌려 곧바로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당 앞 넓은 주차장, 수입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틈새로 세이가 몸을 숨겼다.

“하아…….”

참았던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미쳤어, 진세이. 잡을 데가 없어서 거길 잡고 주저앉아?’

달아오른 뺨 위로 마른 세수를 몇 번이나 밀어냈다. 술기운보다 수치심이 더 뜨거웠다.

세이는 주차된 차들 틈새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사방은 가로막힌 어둠뿐이었다.

그 고립을 깨고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순식간이었다.

식당을 뒤따라 나와 주차장을 부감하듯 훑던 하강의 시선에, 웅크린 작은 형체가 걸려들었다.

진세이 대리. 확인해야 했다. 이 몸의 반응이 정말 이 여자 때문인지.

하강은 성큼성큼 다가가 세이의 팔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거칠게 잡아당기는 악력에 세이의 몸이 그의 품으로 사정없이 끌려 들어갔다.

“엇……!”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서늘한 풀잎 향이 끼어들었다. 단단한 수트 가슴팍에 세이의 얼굴이 처박혔다.

그 순간, 하강의 온몸에 흩어져 있던 세포들이 다시 한번 수직으로 곤두섰다. 아랫배를 묵직하게 누르는 통증과 함께 지독한 각성이 찾아왔다.

우연이 아니었다. 하강은 미간을 찌푸린 채, 품 안에서 놀라 동그랗게 뜬 세이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사님……?”

하강은 불덩이 같은 육체를 진정시키려 애써 숨을 고르며 세이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거리를 한 걸음 벌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합니다.”

말은 사과였지만, 시선은 확인에 가까웠다.

세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팔을 붙잡혔던 자리를 의식하듯 손끝을 움츠렸다.

하강은 그 손끝까지 보았다.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었다. 이미 눈이 거기까지 가 있었다.

“진 대리는 집이 어딥니까.”

갑작스러운 사적인 질문에 세이가 눈을 깜빡였다.

“……창북동입니다.”

“거기가 어디죠.”

하강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끊었다.

“일단 갑시다. 내가 데려다 주겠습니다.”

“네? 왜…….”

“진 대리에게 확인해야 할 얘기가 있습니다. 가면서 하죠.”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강은 곧바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수행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 대기시켜.”

명령은 짧았다.

세이는 그 자리에 서서 하강을 올려다보았다. 술기운은 아직 얼굴에 남아 있었고, 수치심은 눈가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개 대리 직급의 직원이 그룹 후계자의 호출을 거절하기에는, 주차장의 밤공기조차 너무 위계적이었다.

“저…… 가방 가져오겠습니다, 이사님.”

“가지고 나오세요.”

하강은 허락하듯 말했다.

세이는 식당 안으로 돌아갔다.

조용히 제 소지품을 챙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다시 나왔다.

주차장 한가운데, 거대한 검은색 세단이 비상등을 깜빡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권력이 내미는 거부할 수 없는 초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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