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오전 8시 30분.
H건설 신사업팀.
진세이는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어젯밤 병원에서 늦게 돌아온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오전 중으로 끝내야 할 공사비 검토 자료가 남아 있었다.
진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도면을 확대하던 순간, 내선전화가 울렸다.
“신사업팀 진세이 대리입니다.”
“이사실 구본입니다.”
세이의 손이 멈췄다.
“아, 네. 실장님.”
“오늘 오전 H-스테이 코어 후속 사업지 현장 실사에 동행하시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9시까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십시오.”
“네? 제가요?”
“서 이사님께서 직접 지명하셨습니다.”
세이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시계를 확인했다.
8시 32분.
“실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오전까지 마무리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요. 현장 실사는 사업개발파트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사님께서 진 대리의 실무 의견을 직접 듣고 싶어 하십니다.”
“아…….”
“일정 조정이 어려우십니까?”
어젯밤 검은 세단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세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업무 지시였다. 명분도 충분했다. 다만 왜 하필 자신이어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
“뭐? 이사님이 너를 직접 불렀다고?”
오현수 팀장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네에. 후속 사업지 현장 실사라고 하십니다.”
“이상하네. 그거 사업개발 쪽에서 담당자 정해졌을 텐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뭐, 황태자님이 친히 찾으시는데 어쩌겠냐. 다녀와.”
“팀장님, 오전에 공사비 검토 자료 넘겨야 하는데요. 오후엔 인허가 일정도 있고요.”
“그럼 내가 일단 일정 좀 조정해 볼게.”
세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정을 조정한다는 말은 대개 일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었다. 마감 시간만 뒤로 밀린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세이는 노트북과 도면 파일을 챙겼다.
*
오전 9시.
지하 주차장에는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뒷문이 열리자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반듯하게 넘긴 머리, 얇은 은색테 안경, 커다란 체구에 빈틈없이 맞춘 네이비 수트.
서하강이었다.
어젯밤의 낯선 분위기는 흔적조차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타세요.”
하강은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세이가 옆자리에 앉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창밖의 빌딩들이 뒤로 밀려나는 동안, 실내에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오늘 현장에서는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확인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현장 진입 동선과 공사비.”
“그 부분은 지난주 검토보고서에 정리해서 올렸는데, 확인하셨을까요?”
“봤습니다.”
“혹시 추가로 검토할 내용이 있으십니까?”
하강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현장에서 직접 설명을 듣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네, 가능합니다.”
세이는 다시 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강은 태블릿을 들었지만 화면에 집중하지 못했다. 옆자리에서 세이가 도면을 펼칠 때마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 술기운에 붉어졌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자료를 확인하는 평범한 직원이었다.
그런데도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하강은 화면을 한 번 더 넘겼다.
읽지도 않은 페이지만 계속 넘어갔다.
*
현장은 대로변에서 골목 하나를 더 들어가야 하는 부지였다. 외부 설계사무소가 작성한 계획안에는 공사 차량 진입 동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세이는 골목 어귀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사님, 잠시만요.”
“진 대리,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무래도 진입 동선은 다시 확인해야겠습니다.”
세이가 도면을 펼쳤다.
“계획안에는 차량 진입이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코너 회전 반경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장비 반입 방법을 바꾸거나 별도 조치가 필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공사비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얼마나요?”
“지금은 정확한 금액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반입 장비와 임시 시설물 배치 계획을 먼저 확인해야 해서요.”
하강이 도면을 내려다봤다.
“진 대리, 지난주 보고서에는 이 내용이 없던데요.”
“있습니다. 공정 리스크 항목에 추가 검토 의견으로 기재했습니다.”
“그런가요?”
“네. 14페이지입니다.”
구본 실장이 급히 태블릿에서 자료를 찾았다.
정확히 14페이지였다.
하강은 안경 너머로 세이를 바라봤다.
“보고서를 꽤 정확하게 기억하는군요.”
“제가 작성한 부분이라서요.”
“그럼 현장 확인 결과까지 반영해서 다시 보고하세요. 오늘 중으로.”
“네? 오늘 중이요?”
세이의 펜 끝이 멈췄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기존 업무가 있어서 내일 오전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난 오늘 받았으면 좋겠는데.”
세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우선 현장 확인 사항만 먼저 정리해서 올리고, 비용 산출 결과는 내일 별도로 보고드려도 될까요?”
하강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이사님.”
세이가 다시 도면에 표시를 남겼다.
일을 설명할 때만큼은 망설임이 없었다. 모르는 숫자를 아는 척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근거도 분명했다.
하강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 더 거슬렸다.
“진 대리.”
“네, 이사님.”
“외부 설계사무소에도 같이 가시죠.”
세이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현장 확인한 김에 설계 담당자와 바로 협의하면 좋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오전 11시 40분.
세이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도면을 접었다.
오후 업무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번에도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
외부 설계사무소 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세이가 현장 문제를 설명하면 설계 담당자가 대안을 제시했고, 하강은 그 대안이 공사비와 공정에 미칠 영향을 하나씩 물었다.
질문은 정확했다.
문제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 공정은 얼마나 지연됩니까?”
“시공 계획이 확정되어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럼 시공 쪽에도 확인해야겠군요.”
“네. 관련 부서에 협조 요청하겠습니다.”
“진 대리가 직접 설명해 주는 게 빠르지 않나?”
하강이 안경다리를 가볍게 고쳐 올렸다. 입가에는 느긋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처음부터 답을 정해 놓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제가요?”
“현장을 직접 봤으니까.”
“아, 네. 그럼 자료 정리해서 전달드리겠습니다.”
세이는 잠시 멈췄던 펜을 다시 움직였다. 입술은 단정히 다물려 있었지만, 수첩에는 해야 할 일이 한 줄 더 늘어났다.
하강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진세이는 자신을 어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업무가 시작되면 해야 할 말을 정확하게 했다.
그리고 하강이 일을 하나 더 얹을 때마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 짧은 움직임이 묘하게 재미있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회의가 끝났다.
세이는 노트북을 닫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님, 추가로 확인하실 사항 없으시면 저는 회사로 복귀해도 되겠습니까?”
“혼자 갈 겁니까? 나도 회사 들어갈 겁니다.”
“아, 네.”
세이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현장 검토 내용, 이사실에도 바로 보고해 주세요.”
“네. 정리해서 메일로 올리겠습니다.”
“메일보다 직접 설명을 듣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말씀이십니까?”
“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세이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회사 도착하는 대로 정리해서 올라가겠습니다.”
오전에는 현장 실사, 점심에는 설계사무소, 이제는 이사실 보고까지.
서하강에게는 필요한 업무의 연속이었지만, 세이에게는 기존 일정이 통째로 밀려난 하루였다.
그래도 거절할 수 없었다.
세 번 모두 틀린 지시는 아니었으니까.
*
오후 5시 10분.
H건설 본사 신사업팀.
세이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오현수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진 대리, 이제 왔어?”
“후…… 네에, 팀장님. 저 오늘 진짜 버라이어티했어요.”
“아이고, 도대체 진 대리를 갑자기 왜 소환한 건데?”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현장 보고자료 정리해서 이사실로 또 올라가야 해요.”
“에엥? 황태자님이 아주 작정하셨네.”
오 팀장이 혀를 찼다.
“그래도 보고 끝나면 바로 퇴근해. 오늘 하루 종일 고생했잖아.”
“아…… 팀장님, 저 오전에 못 끝낸 공사비 자료가 있어서요.”
“그것도 해야 돼?”
“네. 내일 다른 부서로 넘겨야 해서 오늘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에휴. 그럼 내가 뭐 좀 도와줄까?”
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거의 끝낸 거라 확인만 하면 돼요. 얼른 보고부터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너무 늦게까지 하지는 말고.”
“네, 팀장님.”
세이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오전에 열어 두었던 공사비 산출표가 화면에 떠올랐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항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단 파일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보고서를 열었다.
현장 진입 동선 검토 결과, 설계 변경 협의 사항, 추가 공사비 발생 가능성.
회의 때 작성한 메모를 토대로 항목을 정리하고, 수정이 필요한 도면을 첨부했다.
시계가 오후 5시 40분을 가리켰다.
세이는 보고서를 저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 세 번째로 서하강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
오후 5시 50분.
H건설 본사 17층 이사실.
세이는 현장 실사 결과와 설계사무소 협의 내용을 보고했다.
하강은 끝까지 자료를 확인했다.
“진 대리, 오늘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내일 비용 검토 결과도 직접 설명해 주세요. 오전 중이면 좋겠습니다.”
“네? ……네. 자료 준비되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세이가 허리를 숙이고 이사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하강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더 물어볼 것은 없었다. 사실 한참 전부터 그랬다.
그런데도 한 가지를 더 확인하고 싶었고, 조금만 더 설명하라고 하고 싶었다.
서하강은 자신이 우스웠다.
여자 하나를 곁에 두기 위해 보고서 한 장을 몇 번이나 펼쳐 보고 있었다.
*
오후 6시 20분.
12층 신사업팀.
세이가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모두 퇴근한 뒤였다.
불이 켜진 사무실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책상마다 꺼진 모니터만 줄지어 있었다.
세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오전에 열어 두었던 공사비 산출표를 다시 띄웠다.
설계 변경에 따른 증감액을 확인하고, 누락된 자재비를 계산해야 했다.
낮 동안 수백억 원짜리 사업을 검토했지만, 정작 자신의 담당 업무는 손도 대지 못했다.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우, 진짜…….”
세이는 작게 투덜거리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서하강에게는 이미 끝난 하루였다.
하지만 세이의 하루는 이제야 다시 시작됐다.
*
오후 8시 15분.
텅 빈 사무실에는 키보드 소리만 이어졌다.
세이는 원본 파일을 몇 번이나 대조한 끝에 누락된 계산 항목을 찾아냈다.
“아, 여기 있었네…….”
수식을 수정하고 저장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아직 안 갔습니까?”
세이가 고개를 들었다.
서하강이 서 있었다.
오후 8시 15분.H건설 신사업팀.세이 앞에 나타난 서하강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퇴근하려던 길인지 재킷 단추는 풀려 있었고, 넥타이도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세이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이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이제 가려고요.”“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세이는 허리를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그러나 하강은 돌아가지 않았다.모니터를 내려다봤다.“오늘 현장 검토자료 아닙니까?”“아닙니다. 기존에 담당하던 공사비 산출 자료입니다.”“아직 안 끝났어요?”“네.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하강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여덟 시 넘었는데.”“네.”“내일 하셔도 되잖습니까.”세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가 너무도 쉽게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내일 오전에 관련 부서로 넘겨야 해서요.”“그럼 오 팀장에게 일정 조정하라고 하죠.”“아닙니다, 이사님. 제가 마무리하면 됩니다.”“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습니까?”세이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오늘 하루 종일 눌러 두었던 피로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이사님.”“네.”“제가 오늘 오전에 이 업무를 끝냈어야 했습니다.”하강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런데 하루 종일 이사님 일정에 동행하느라 제 업무를 하나도 못 했습니다.”세이는 말을 멈췄다.너무 많이 말했나 싶었다.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죄송합니다. 이사님 지시가 불필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그녀가 자세를 바로 했다.“다만 제게는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사님께서는 하루 일정을 마치셨지만, 저는 이제 제 업무를 시작한 셈이라서요.”하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이는 그의 침묵에 뒤늦게 긴장했다.“앞으로도 외근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동행하겠습니다. 대신 가능하면 일정만 조금 미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마지막 말은 다시 공손해졌다.하강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화를 낼 줄 알았다.자신에게 감히 업무 지시를 따지느냐고.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다음 날 오전 8시 30분.H건설 신사업팀.진세이는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어젯밤 병원에서 늦게 돌아온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오전 중으로 끝내야 할 공사비 검토 자료가 남아 있었다.진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도면을 확대하던 순간, 내선전화가 울렸다.“신사업팀 진세이 대리입니다.”“이사실 구본입니다.”세이의 손이 멈췄다.“아, 네. 실장님.”“오늘 오전 H-스테이 코어 후속 사업지 현장 실사에 동행하시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9시까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십시오.”“네? 제가요?”“서 이사님께서 직접 지명하셨습니다.”세이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시계를 확인했다.8시 32분.“실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오전까지 마무리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요. 현장 실사는 사업개발파트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이사님께서 진 대리의 실무 의견을 직접 듣고 싶어 하십니다.”“아…….”“일정 조정이 어려우십니까?”어젯밤 검은 세단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아닙니다.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세이는 한숨을 내쉬었다.업무 지시였다. 명분도 충분했다. 다만 왜 하필 자신이어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뭐? 이사님이 너를 직접 불렀다고?”오현수 팀장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네에. 후속 사업지 현장 실사라고 하십니다.”“이상하네. 그거 사업개발 쪽에서 담당자 정해졌을 텐데.”“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뭐, 황태자님이 친히 찾으시는데 어쩌겠냐. 다녀와.”“팀장님, 오전에 공사비 검토 자료 넘겨야 하는데요. 오후엔 인허가 일정도 있고요.”“그럼 내가 일단 일정 좀 조정해 볼게.”세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회사에서 일정을 조정한다는 말은 대개 일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었다. 마감 시간만 뒤로 밀린다는 뜻이었다.“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세이는 노트북과 도면 파일을 챙겼다.*오전 9시.지하 주차장에는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뒷문이 열리자 익숙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가방을 챙겨 나온 세이가 검은 세단 쪽으로 걸어왔다. 아직 얼굴에는 술기운이 남아있었다. 수치심도 함께.하강은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타세요.”“네.”세이는 짧게 대답하고 앞좌석 문을 열려 했다.하강의 시선이 그 손끝에 멈췄다.“이쪽으로 타시죠.”그가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세이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러나 거절하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뒷좌석 안으로 발을 들였다.몸을 최대한 문 쪽에 붙인 채 움츠리는 자세가 하강의 시선에 걸렸다.차 안은 조용했다.김 기사는 룸미러 한 번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세이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쥔 채 숨소리까지 줄였다.하강은 그녀를 보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개를 숙인 옆얼굴.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 팔뚝에 남아 있을 자신의 손자국. 방금 자신이 붙잡아 세운 자리.하강은 그 모든 것을 관찰했다.감정이 아니었다.확인에 가까웠다.“집 주소 말해요.”세이가 잠시 망설였다.“아…… 북창의료원 앞으로 가주세요.”하강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집이 아니라 병원.묻고 싶은 말이 생겼지만, 그는 삼켰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의 사정이 아니었다. 원인이었다.하강은 감정을 지운 목소리로 앞쪽에 지시했다.“김 기사님, 들었죠.”“네, 이사님.”검은 세단은 조용히 도로로 빠져나갔다.늦은 밤의 도로는 한산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차 안을 스쳤다. 빛이 세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더 작아 보였다.하강이 먼저 침묵을 깼다.“진 대리.”“네.”“신사업팀 몇 년 차죠.”“4년 차입니다.”“처음부터 신사업팀이었습니까.”“네. 전공이 건축공학이라, 신규 사업지 검토 쪽 일을 맡았습니다.”“도면도 봅니까.”“기본 계획안이랑 공사비 자료는 같이 봅니다.”세이의 대답은 생각보다 또렷했다.취했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민망한 일을 겪었고, 불편한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업무 질문에는 바로
한 달 전. ‘살살 녹는 투뿔한우’ 식당H건설 신사업팀 회식 자리였다.대형 룸 한가운데서 오현수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소주병과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댕, 댕, 댕, 댕.술기운 오른 박자가 룸 안을 울렸다.“자, 이번 H-스테이 코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주신 서하강 이사님. 한 말씀 해주시죠!”박수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서하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H그룹이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후계자이자, 회장의 양아들인 H건설 이사.그 이름 앞에 붙은 직함들은 모두 비쌌다.190센티미터의 거대한 체구에 박제하듯 맞춘 네이비 수트, 반듯하게 넘긴 머리와 얇은 은색테 안경. 손목 위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까지. 서하강이라는 존재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교하게 가공된 최고급 권력의 결정판이었다.서울대와 하버드를 거쳐 뉴욕에서 건물을 짓는 법보다 도시의 가격을 정하는 법을 먼저 배운 남자. 사람들은 그를 완벽하다고 불렀고, 하강은 그 단어가 얼마나 얇은 포장지인지 알고 있었다.국내 재계 서열 8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집을 지은 회사를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남자가 지금, 이 룸 안에 서 있었다.그가 잔을 들었다.차가운 인상과 달리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필요한 만큼만 친절한 얼굴이었다.“H-스테이 코어 프로젝트는 이번 그룹에서 중요한 사업입니다. 핵심 인재인 여러분과 좋은 결과를 내게 되어 기쁩니다.”말은 반듯했고, 온도는 낮았다.하강은 안주머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들었다.검은 카드 한 장이 룸 안의 공기를 바꿨다.“오늘 결제는 이 카드가 합니다. 한도 걱정은 하지 마시고 즐기십시오.”말이 끝나자 박수소리가 도미노처럼 번졌다. 오현수 팀장이 가장 먼저 박수를 쳤고, 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돈은 늘 가장 빠르게 사람의 호감을 샀고, 서하강은 그 권력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불판의 열기 사이로 매달렸다.“어머, 이사님 진짜 멋지시다.
세이는 그 떨림을 들었다.자신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남자에게도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균열이 있다는 것을, 세이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침대 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방 안에 남아 있던 물기는 서서히 말라 갔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소파에 앉혀졌을 때도 하강은 좀처럼 그녀를 놓지 못했다.넓은 거실의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개의 불빛이 건물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풍경은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둔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세이는 하강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이미 두 번이나 긴 밤을 견딘 뒤였다. 손끝에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어깨를 바로 세우기도 어려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흐트러졌다.“……아, 잠깐만…….”“아직 못 끝내.”낮은 대답이 돌아왔다.세이는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절박함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되찾았는지 믿을 수 없어서, 눈앞에 있는 것을 계속 붙잡으려는 사람 같았다.열두 해였다.그토록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몸이 진세이 앞에서만 깨어났다.세이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고, 고르지 못한 숨 때문에 눈앞의 불빛마저 흐릿하게 번졌다.하강의 움직임이 멎었다.그가 세이의 얼굴을 살폈다.“……괜찮아?”물음은 짧았다.세이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에 힘은 없었지만, 쉽게 놓지도 못했다.하강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이윽고 세이의 등을 받쳐 조금 더 편하게 기대게 했다. 그의 팔 안으로 몸의 무게가 옮겨지자 세이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그 배려는 오래가지 않았다.“말해. 못 버티겠으면.”세이는 숨만 삼켰다.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손끝 아래로 빠른 맥박이 느껴졌다.그렇게 차갑고 완벽해 보이던 남자의 심장이 믿기 어려울 만큼 거칠게 뛰고 있었다.세이는 그 박동을 한동안
한남동 펜트하우스 A동 501호.욕실 문이 열리며 따뜻한 수증기가 먼저 흘러나왔다. 천장에 매립된 조명 아래로 희뿌연 물안개가 번지고, 그 사이에서 서하강이 모습을 드러냈다.하반신에는 흰 수건 한 장만 걸쳐져 있었다. 젖은 머리칼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단단한 가슴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복근 사이를 타고 내려온 물줄기가 수건의 경계에서 멈췄다.그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수건 하나가 감추고 있는 것은 살이 아니라, 이 남자의 유일한 결함이었다.세이는 현관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정확히 7시.계약서에 적힌 시간이었다.아직 코트 단추도 풀지 못한 채였다. 구두는 벗었지만 슬리퍼는 신지 않았다. 맨발에 닿는 대리석의 서늘함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고급 호텔처럼 넓고 정돈된 집이었지만, 세이가 마음 놓고 발을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이 집에서 편해지는 것은 계약 조항 어디에도 없었다.하강이 다가왔다.젖은 발이 대리석을 밟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넓은 거실을 채우고 있던 적막이 그의 발걸음에 조금씩 밀려났다. 세이는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코트 자락을 움켜쥐었다.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다.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도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하강의 손등이 세이의 오른쪽 뺨에 닿았다.바깥바람에 식었던 피부 위로 따뜻한 손길이 스며들었다. 엄지가 턱선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고, 세이는 그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볼 수 있었다.이상한 남자였다.회의실에서는 수백억 원의 공사비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서만큼은 세이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지나치게 집중했다.그의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이사…….”끝까지 부르지 못한 직함이 입술 사이에서 흩어졌다.하강이 입을 맞췄다.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세이는 놀라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하강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의 숨이 뒤섞이고 젖은 머리칼이 뺨을 스칠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