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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원인불명의 불능

Author: 미미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4 16:27:11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가방을 챙겨 나온 세이가 검은 세단 쪽으로 걸어왔다. 

아직 얼굴에는 술기운이 남아있었다. 수치심도 함께.

하강은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

“타세요.”

“네.”

세이는 짧게 대답하고 앞좌석 문을 열려 했다.

하강의 시선이 그 손끝에 멈췄다.

“이쪽으로 타시죠.”

그가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세이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러나 거절하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뒷좌석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몸을 최대한 문 쪽에 붙인 채 움츠리는 자세가 하강의 시선에 걸렸다.

차 안은 조용했다.

김 기사는 룸미러 한 번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세이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쥔 채 숨소리까지 줄였다.

하강은 그녀를 보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옆얼굴.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 팔뚝에 남아 있을 자신의 손자국. 방금 자신이 붙잡아 세운 자리.

하강은 그 모든 것을 관찰했다.

감정이 아니었다.

확인에 가까웠다.

“집 주소 말해요.”

세이가 잠시 망설였다.

“아…… 북창의료원 앞으로 가주세요.”

하강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

집이 아니라 병원.

묻고 싶은 말이 생겼지만, 그는 삼켰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의 사정이 아니었다. 원인이었다.

하강은 감정을 지운 목소리로 앞쪽에 지시했다.

“김 기사님, 들었죠.”

“네, 이사님.”

검은 세단은 조용히 도로로 빠져나갔다.

늦은 밤의 도로는 한산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차 안을 스쳤다. 빛이 세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더 작아 보였다.

하강이 먼저 침묵을 깼다.

“진 대리.”

“네.”

“신사업팀 몇 년 차죠.”

“4년 차입니다.”

“처음부터 신사업팀이었습니까.”

“네. 전공이 건축공학이라, 신규 사업지 검토 쪽 일을 맡았습니다.”

“도면도 봅니까.”

“기본 계획안이랑 공사비 자료는 같이 봅니다.”

세이의 대답은 생각보다 또렷했다.

취했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민망한 일을 겪었고, 불편한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업무 질문에는 바로 반응했다.

옆자리에 앉은 거리만으로도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세이의 향이 아주 옅게 차 안에 섞였다. 술, 고기 냄새, 밤공기, 그리고 그 여자에게서만 나는 알코올섞인 비누 냄새.

하강은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 폈다.

더 묻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은 업무가 아니었다.

그러나 업무 외의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 차 안의 공기는 변질될 터였다.

그는 아직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늦은 밤 한산한 도로 위에서 권력의 속도는 확실히 대중교통보다 빨랐다. 

40여 분 후, 검은 세단은 북창의료원 정문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김 기사가 조용히 말했다.

“다 왔습니다, 이사님.”

하강은 세이를 보았다.

“진세이 씨, 여기서 내리면 됩니까.”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내리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몸을 작게 접었다. 이 차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처럼.

차 문이 닫혔다.

하강은 창밖으로 세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병원 정문 쪽으로 걸어가는 작은 등이 유리 너머에서 멀어졌다.

“진세이 대리.”

그는 입안에서 이름을 낮게 굴렸다.

확인해야 했다.

일시적인 오작동인지.

아니면 정말 진세이라는 여자가 원인인지.

하강은 휴대폰을 꺼냈다.

구본 실장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신사업팀 진세이 대리. 인사 파일 내일 아침 책상 위에 준비해둬.]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 이사님.]

하강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날 밤, 흔들린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12년 동안 닫혀 있던 인과율이, 진세이라는 이름 하나에 금이 가고 있었다.

***

북창의료원 로비 앞.

하강의 차에서 내린 세이의 기분은 영 찝찝했다.

프로젝트 기간 내내 서하강과 말을 섞은 적은 손에 꼽았다. 한낱 대리가 그룹 후계자와 사적으로 나눌 대화 따위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직접 병원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친절이라기에는 이상했고, 호의라기에는 차가웠다.

징조가 나쁜 꿈을 꾼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간만에 위장에 채워 넣은 투뿔 한우가 죄다 얹힐 것만 같았다.

세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2층 암병동으로 향했다.

보호자 출입카드를 대자 두꺼운 유리문이 낮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최소한의 조명만 남은 복도에는 병원 특유의 냄새가 더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독약, 마른 이불, 오래 참은 울음 같은 냄새.

세이는 병실 앞에서 멈춰 섰다.

[진순정]

이름표를 확인한 뒤, 조용히 문을 밀었다.

엄마는 잠들어 있었다.

얇은 모자가 머리 위에 씌워져 있었고, 얼굴은 전보다 더 작아져 있었다. 손등에는 주사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세이는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실 안에서는 말이 늘 쓸모없었다. 괜찮냐고 물어도 괜찮지 않았고, 힘내라고 말해도 힘이 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숨을 쉬고 있었다.

세이는 엄마의 마른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주었다. 손끝이 아주 조심스러웠다.

깨우고 싶지 않았다.

깨어난 엄마의 눈을 보면, 오늘 밤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들킬 것 같았다.

세이는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참았던 숨이 그제야 새어 나왔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어, 세이야. 늦었네? 회식했어?”

야간 당직을 서던 주희가 다가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이자, 이 병원의 간호사였다. 세이가 유일하게 약한 소리를 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응. 엄마는 별일 없었지?”

“오늘은 안정적이야. 그러니까 너부터 집에 가서 자. 네가 더 환자 같다, 기집애야.”

주희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세이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도 모른 척했다.

그게 주희의 배려였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줘.”

“당연하지. 여기 걱정은 붙들어 매고 가.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응. 고마워.”

세이는 억지로 웃었다.

병원을 나서자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원룸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이었다.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멀었다.

서하강의 검은 세단에서 내린 뒤라서 그런지, 병원 앞 밤길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세이는 코트 자락을 여미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이미 다음 날의 궤도가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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